- 기자들을 공갈쟁이로 여긴 박정희
- 5·16 직후 줄초상 난 부산일보
- 박정희의 옛 애인 남동생, 군수공장에 취직
- 박정희, 미 총기회사 사장에게 “조준경만 사겠다”
- “각하, 김형욱 정보부장을 자르십시오”
- 육영수 부탁으로 박정희에게 여자 문제 얘기했다가 날벼락
- 청와대 사정비서관실 비리 보고했다가 보복당해
- “김종필이 너무 설쳐대 최규하한테 넘기려 한다”
그의 저서 ‘영시(零時)의 횃불’이 최근 재출간된 것이 인터뷰 계기였다. 청와대 출입기자와 비서관을 지내며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을 맺은 그는 ‘인간 박정희’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1966년 출간된 ‘영시의 횃불’은 국내외에서 꽤 팔려나갔다. ‘박정희 대통령 수행기자 7년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5·16쿠데타 과정과 3공화국 초기의 정계 비화를 다뤘다. 1997년엔 ‘박정희 대통령과 주변사람들’이라는 책도 냈다. 조갑제씨의 박정희 전기 집필에도 그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뷰가 끝난 후 그의 저서 두 권을 읽어봤다. 그가 인터뷰에서 책에 없는 얘기를 많이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박정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 기사를 ‘박정희 미화’로 받아들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김씨가 들려준 얘기는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는 별개라는 게 내 생각이다. 숱한 과오를 저지르고도 ‘역대 최고의 대통령’을 뽑는 여론조사에서 늘 1위를 차지하는 박정희의 인간 됨됨이를 엿볼 수 있는 비망록이라 하겠다.
군수기지사령관
기자들에 둘러싸인 박정희. 왼쪽 두 번째가 김종신 기자.
그가 박정희와 인연을 맺은 것은 부산일보 기자 시절이었다. 기자가 되기 전엔 군인이었다. 경남 사천에서 태어나 부산상고를 나온 그는 6·25전쟁 때 헌병학교에 입교했다. 헌병 7기였다. 간부 교육을 받은 그는 소위로 임관돼 전장에 투입됐다. 보직은 수도사단 기갑연대 소대장.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됐다가 헌병사령부 소속 포로수용소로 전속됐다. 1958년 제대할 때 그의 계급은 대위였다.
기자를 선택한 것은 전역할 무렵 군 후배가 건네준 ‘그대 이름은’이라는 일본 소설에 영향을 받아서였다. 일본군 대위가 신문기자가 돼 전후(戰後) 일본 사회의 어두운 면을 파헤친다는 내용이었다.
부산일보 사장인 김지태씨가 부산상고 선배였다. 그는 형식적인 구두시험을 치르고 입사했다. 사실상 특채였다. 황용주 주필이 그에게 기자 교육을 시켰다. 신문사 생활을 하며 동아대 법대를 야간으로 다녔다.
그는 군 취재를 맡았다. 육군사관학교 3기생인 형을 통해 고급 장교를 많이 알아둔 게 취재에 도움이 됐다. 전후 부산은 물자와 보급의 중심지였다. 군수품을 총괄하는 군수기지사령부가 부산에 있었는데 비리가 끊이지 않았다.
1960년 1월 자그마한 체구의 육군 소장이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했다. 6관구사령관을 지낸 박정희 소장이었다. 부임 기자회견장에서 김종신씨는 박정희를 처음 보았다. 키가 작달막하고 얼굴빛이 검은 게 영락없는 촌놈이었다. 하지만 야무지고 언행에 기품이 있어 보였다.
공교롭게도 박정희는 황 주필의 대구사범학교 동기였다. 그 덕분에 김씨는 사령관실을 자주 드나들며 박정희와 교분을 쌓을 수 있었다.
“역대 사령관에 비해 참 예의가 바르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사람이 된 거지. 항상 정자세이고 사람을 똑바로 쳐다봤다. 걸음걸이도 반듯했고. 사관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은 거지. 노무현은 걸음걸이부터 문제이지 않았나. 일국의 대통령이 어깨를 꺼뜩꺼뜩, 그게 뭔가. 박 대통령은 말수가 적어 상대방 얘기를 몇 시간이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부하한테 함부로 말을 안 놓았고 담뱃불을 붙여주기도 했어. 하여간 배울 게 많았다. 참 멋있는 사람이라 생각해 자주 찾아갔지. 만나면 주로 군대 썩은 얘기를 하고 나라 걱정을 많이 했다.”
그가 곁에서 지켜본 박정희는 다재다능한 군인이었다. 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다. 달리기를 잘했고 검도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음악적 재능도 있어 피아노를 치고 작곡까지 했다.
박정희가 부임한 후 군수 비리가 자취를 감췄다. 당시 박정희 사령관의 참모들은 뒷날 다 한 자리씩 차지한 쟁쟁한 장교들이었다. 윤필용(수도경비사령관)이 비서실장, 박태준(포철 회장)이 인사참모, 이낙선(상공부 장관)이 공보참모였다. 김씨에 따르면 그때만 해도 김종필씨는 존재감도 없었다고 한다. 그가 김종필 중령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박 사령관의 부관인 안모 중령을 통해서였다. 안 중령은 김종필과 같은 육사 8기생이었다. 4·19혁명 후 김씨는 김종필 중령을 주축으로 한 일부 영관장교들이 최영희 육군참모총장을 몰아내고 박정희 소장을 추대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박 사령관을 찾아가 그 소문을 전하면서 ‘나쁜 짓 하는 놈들은 군에서 몰아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내 의견을 말했어. 말없이 듣기만 하더라.”
빨갱이, 친일
박정희와 맞담배 피우는 기자들. 왼쪽에서 세 번째가 김종신 기자.
널리 알려졌다시피 박정희에게 빨갱이 꼬리표가 따라다닌 것은 여수·순천사건에 연루돼 사형당할 뻔했던 전력 때문이다. 5·16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기자실에서도 “박정희는 빨갱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이에 대해 김씨는 뒷날 청와대에서 박정희에게 진지하게 물어봤다. 청와대 비서관을 할 때였다. 다음은 박정희가 그에게 들려줬다는 얘기다.
“광복이 된 후 (곧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잠시 광복군에 들어갔다. 거기서 중대장을 맡았는데 저녁마다 회의가 열렸다. 맨날 서로 비판하느라 시끄러웠다. 그중에 빨갱이들이 있었던 거다. 나는 그들에 대해 환멸을 느꼈다. (귀국 후 군에 들어가) 육군사관학교 교관을 할 때였다. 좌익사상을 가졌던 형(박상희)의 친구가 찾아와 일요일에 향우회가 열리니 꼭 참석하라고 했다. 그래서 참석했는데 그게 화근이 됐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날 몇몇 유명한 빨갱이가 주동이 돼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모조리 좌익 조직에 가입시켰던 거다. 나는 거기에 가입된 줄도 몰랐다. 그것밖에 없다.”
그는 박정희의 친일 의혹에 대해서도 적극 해명했다.
“한번은 내가 물어봤지. 일본 군대 뭐 하러 들어갔냐고. 독립운동하러 간 거냐고. 박 대통령 말이, ‘독립운동은 무슨? 왜놈들 밑에서 하도 더러워서 긴 칼 차러 갔지’ 하더라. 나는 그게 솔직한 답변이라고 봐. 만주군에 있을 때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했다. 그 시기엔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독립군도 없었다는 거야.”
일본군에 들어간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냐는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당시 실력이 없어 그렇지, 실력만 있다면 다들 일본 육사 가고 군수 하려 했다. 사범학교가 가장 우수했고 그 다음이 상업학교, 농림학교였지. 박정희가 친일파라는 건 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야. 당시 광복이 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들 일본놈이 되는 줄 알았다고. 학생들의 꿈이 소년항공대 입대였어.”
박정희는 술자리에서 일본 군가를 즐겨 부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김씨는 부인했다.
“내가 알기로는 그런 적 없다. 박 대통령은 일본사람을 꼭 ‘왜놈’이라고 불렀다.”
부산일보의 줄초상
대통령 별장이 있는 저도 해변에서 기자들과 술 마시는 박정희. 왼쪽 첫 번째가 김종신 기자.
박정희와의 악연도 있었다. 박정희가 군수기지사령관을 지낼 때 부산일보가 주최하는 고교 야구대회가 있었다. 김지태 사장은 주변의 건의를 받아들여 지역 실세인 박 사령관에게 시구를 부탁했다. 박정희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런데 당일 시구를 한 것은 박정희가 아니었다. 느닷없이 김 사장이 시구자로 나선 것이다. 박정희는 모욕을 느꼈다. 김종신씨는 이에 대해 “국회 국방위원을 지낸 김 사장이 평소 군을 얕잡아본 결과”라고 말했다.
“박정희가 얼마나 기분 나빴겠나. 내가 다 얼굴이 달아오르더라.”
박정희의 친구인 황용주 주필과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도 김지태 사장의 불운이었다. 결정적인 이유는 최세경 논설위원과의 불화였다. 뒷날 KBS 사장을 지낸 최 위원은 황 주필과 같은 일본 학병 출신이었다. 역시 학병 동기인 정우식 헌병대대장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에게 최세경씨를 공보고문으로 추천했다. 서울로 올라가게 된 최씨는 김 사장에게 인사하러 갔다가 크게 자존심이 상했다. 전셋집이라도 구해줄 줄 알았는데 “(부산일보 서울지사) 합숙소에 가 있으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최씨를 비롯한 10명의 최고회의 고문이 김지태씨를 성토했다.
쿠데타가 일어난 후 김종신씨는 부산일보 서울지사로 발령 났다. 최고회의 출입기자였다. 법률고문인 신직수(법무부 장관, 중앙정보부장 역임)씨가 어느 날 김씨를 불러 김지태 사장에게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김씨는 최고회의 행정관 이모씨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편지를 본 김지태 사장의 얼굴이 노래졌다. 그 직후 김 사장은 수사기관에 끌려갔다.
“모든 게 신직수 작품이었다. 박정희한테 결재받아 5·16장학회를 만든 것도 신직수였지. 김지태 사장의 죄목은 재취한 여자와 독일에 갔다 오면서 1캐럿짜리 다이아몬드를 들여온 것이었어. 부산일보와 문화방송을 다 뺏겼지. 부일장학회는 5·16장학회로 바뀌었고.”
기록에 남아 있는 김지태씨의 공식 죄목은 재산 해외도피. 흥미로운 것은 김씨에 앞서 박정희와 친한 주필 황용주씨도 5·16 직후 체포됐다는 사실이다. 부산일보에 줄초상이 난 것이다.
황씨가 체포된 이유는 사상이 불온하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그가 평소 신문 사설에서 혁신계를 두둔하고 교원노조 고문에 추대된 사실을 문제 삼았다. 황씨가 도피하자 경찰은 그를 지명수배했다. 김종신씨는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이 부산에 들렀을 때 황씨 구명(救命)을 부탁하기로 맘먹었다. 박정희는 항만사령부에서 열리는 부산 지역 장성들의 연석간담회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김씨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화장실에 가는 박정희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박정희는 반가워하면서 그를 간담회에 참석게 했다. 간담회에서 박정희는 정치권을 비난하는 한편 사이비 기자들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저도의 대통령 별장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박정희.
하지만 황씨는 끝내 구속을 피하지 못했다. 구명운동을 벌이던 황씨의 부인은 마지막 수단으로 최고회의 의장이 된 박정희 앞으로 편지를 썼다. 이 편지를 최고회의 비서실장 박태준 대령에게 전달한 사람이 김종신씨였다. 박정희의 의중을 헤아린 김재춘 합동수사본부장이 황씨를 석방했다. 구금된 지 4개월 만이었다.
이후 황씨는 김지태씨의 뒤를 이어 부산일보 사장이 됐다. 하지만 시련이 끊이지 않았다. 김씨를 잡아들였던 군사정부의 실세 신직수씨가 이번엔 황씨를 비리 혐의로 옭아맨 것이다. 당시 김종신씨는 부산일보 서울지사 정치부 차장이었다.
“신직수가 어느 날 내게 경고하는 거야. ‘너희 사장 조심하라’고. 말 잘 안 듣는다고 트집 잡은 거지. 무가지를 문제 삼더라고. 신문 무가지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거지. 황 사장이 무가지 돌리고 그 대가로 업자들한테 향응 받았다는 거야. 신직수가 황 사장을 서울로 불러들여 점심을 했어. 그 자리에서 신직수가 고압적인 말투로 위협하자 황 사장이 굴복했다. 다음날 내가 사장 사표를 받아 신직수에게 갔다줬지.”
김형욱 중정부장의 “Any time!”
1968년 김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요청으로 청와대 비서관이 됐다. 사회언론 담당이었다. 공보수석비서관인 신범식 대변인이 직속상관이었다.
어느 날 신 대변인이 “정보부에서 당신과 나를 오라 그런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지난해 연말 신아일보의 중앙정보부 관련 기사 때문이었다. 당시 신아일보는 신년특집으로 대통령 신년사를 1면 머리기사로 다루려 했다. 그런데 정보부 사람이 와서 그 자리에 김형욱 정보부장의 기사를 실으라고 압력을 넣었다. 김 부장이 AP통신 기자와 단독 회견한 내용이었다. 신아일보 기자로부터 이 얘기를 들은 김씨는 정보부에 전화해 “미친놈들”이라고 몇 마디 해줬다. 그걸 뒤늦게 정보부에서 문제 삼은 것이다.
김씨는 신 대변인에게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말하고는 혼자 정보부를 찾아갔다. 그의 기세가 만만치 않자 정보부 국장은 “‘사장(정보부장)’에게 ‘편지(진술서)’ 하나만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단호히 거부하면서 “간첩 이수근이나 똑바로 잡으라”고 핀잔을 줬다. ‘위장간첩’ 이수근 사건으로 시끄러울 때였다(2008년 법원은 이수근을 간첩으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길로 대통령을 찾아간 그는 신아일보 사건을 보고하고 “정보부장을 잘라야 한다”고 건의했다. 박정희는 노기 띤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씨는 이후락 비서실장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이 실장이 말렸다. 다음 날 김형욱 정보부장이 찾았다. 김형욱은 그를 보자 소리 한 번 지르더니 곧 깍듯하게 대했다. 신아일보 건에 대해선 정보부 모 국장이 쓸데없는 짓을 한 거라며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해명했다. 김형욱은 또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는 말을 잔뜩 늘어놓았다. 아울러 2인자 소리를 듣는 김종필에 대해선 험담을 늘어놓았다. “김종필이 정권 잡으면 나는 이민 간다”라는 말까지 하면서.
“김형욱은 내게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자기를 직접 찾아오라’고 말했다. 내가 ‘높은 사람 만나기가 어디 쉽겠느냐’고 하자 ‘Any time!’ 했다. 언제든 편하게 찾아오라는 뜻이었다. 속으로 얼마나 우습던지….”
익살스러운 표정의 “Any time!” 소리에 나는 그예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아까부터 웃음이 입속에서 감돌던 터였다. 그의 유쾌한 표정과 거침없는 말투가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김형욱은 헤어질 때 그에게 쿠바산 여송연 한 상자를 선물했다고 한다. 나중에 그는 김형욱에게 친구 인사를 청탁했다. 그 친구는 ‘돈 생기는 자리’인 감사실 근무를 하게 됐다.
경부고속도로
청와대 경호원들이 소년 박지만과 장난치는 모습. 맨 오른쪽이 김종신 비서관.
“고속도로 자체보다 그것이 국민에게 희망을 준다는 데 더 기뻐한 거지. 그때 내가 한 가지 지적은 했다. 상하 도로 경계선에 놓인 중앙분리대 면적이 너무 커서 차선 폭이 좁다고. 중앙분리대에는 나무를 심고 있었다. 그땐 잔디가 아니라 전부 나무였다. 차가 많이 다니면 나무가 살기 힘들 텐데 이 많은 나무를 어떻게 키울 거냐고 대통령에게 물었지. 대통령도 내 지적에 동의하더라고. 대통령은 정말 고속도로에 큰 애착을 갖고 있었다. 5·16 당시만 해도 수출이라곤 오징어밖에 없었다. (1인당) 국민소득 50달러에. 박 대통령은 어릴 때 가난하게 산 것에 한이 맺혀 있었다. 그래선지 머릿속에 잘살아보겠다는 생각밖에 없는 듯했다. 다른 건 몰라도 박정희가 경제기반을 닦은 건 높게 평가해줘야 한다.”
옛 애인의 남동생
순시 중인 박정희. 왼쪽 고개 숙인 사람이 김종신 비서관.
그녀의 동생이 한국일보 기자였다. 최고회의를 출입할 때 김종신씨와 가깝게 지냈다. 김씨가 비서관을 할 때 생활고를 못 이겨 찾아왔다. 공무원이나 국영기업체 자리를 알아봐달라는 부탁이었다. 김씨는 박 대통령을 따로 만나 슬쩍 그 얘기를 꺼냈다.
“이OO 아시죠?”
“기자 하고 있다면서?”
김씨는 이씨의 사정을 설명하고는 이런 얘기를 덧붙였다.
“각하 대전 유세 때 이OO이 미친 듯이 박수를 치더라고요.”
며칠 뒤 대통령이 인터폰으로 찾았다.
“이OO 찾아와!”
이씨는 곧바로 청와대로 달려왔다. 둘이 함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가자 육 여사가 보였다. 육 여사는 일찍이 남편의 ‘옛 애인’에 대해 알고 있었다. 대통령은 이OO에게 봉투를 건넸다. 600만원이 들어 있었다. 집 한 채 살 만한 금액이었다. 며칠 뒤 대통령의 명을 받은 이후락 비서실장이 그를 모 군수공장 총무부장에 취직시켜줬다.
골프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기 전엔 골프를 하지 않았다. 기자들이 골프 안 하냐고 물으면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 넘으면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박정희가 제주도 초도순시를 할 때였다. 신범식 대변인이 몸이 불편해 김종신씨가 대신 대통령을 수행했다. 이후락 비서실장과 박종규 경호실장도 동행했다. 순시를 마치고 다음 날 귀경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태풍으로 비행기가 뜰 수 없었다. 태풍은 며칠 동안 대통령 일행의 발목을 잡았다.
대통령이 심심해하자 비서실장이 골프를 권했다. 대통령과 제주 출신의 현오봉 의원, 구자춘 제주지사가 한 조가 됐다. 경호원들이 두 조로 나뉘어 앞뒤를 호위했다. 그때까지 골프를 안 배운 김씨는 대통령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처음으로 골프장 잔디를 밟아봤다. 대통령은 거리는 짧았지만 또박또박 잘 쳤다. 핸디18 정도였다. 구 지사가 자기보다 훨씬 잘 치자 대통령이 한마디 했다. “일은 안 하고 골프만 쳤구먼.”
대통령은 김씨에게 골프를 권했다.
“나도 전엔 골프 치는 걸 반대했는데 해보니 좋은 운동이야. 내가 골프채를 장만해줄 테니 배우라고.”
서울로 올라온 지 일주일 후 김씨는 대통령으로부터 골프채를 선물 받았다.
미국
공화당 선거 유세. 단상에 선 이가 박정희.
“우리 군대는 우리 국민만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미국의 우방으로 자유민주주의의 첨병 역할을 하는 거다. 원조를 받더라도 배짱을 튕기며 받아야지 왜들 꼴사납게 꼬리 치는지 모르겠다.”
박정희는 미국의 원조 물품에도 불만을 드러냈다.
“양담배와 성냥개비, 양초가 우리한테 무슨 큰 도움이 되나. 원조를 제대로 하려면 비누공장을 만들어줘야지. 언제까지 얻어먹고 살 건가. 빨리 자급자족해야지.”
병력을 줄여야 한다는 감군론(減軍論)도 주장했다. 양보다 질을 강조한 것이다. 국가 재정형편에 비춰 감군을 해야 경제부흥이 가능하다는 게 박정희의 지론이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후 부산을 찾았을 때다. 동래의 한 호텔에 묵었는데 박종규 경호실장이 미국인 사업가를 소개했다. 미국 총기회사인 콜트사 사장이었다. 총 팔아먹으려는 속셈이었다. 통역을 통해 그의 얘기를 듣고 나서 박정희가 짧게 말했다. “조준경만 사겠다.” 낙담한 콜트사 사장이 돌아간 후 박정희는 김종신 비서관을 비롯한 주변 참모들에게 “조준경만 있으면 우리 손으로 총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비자금
박정희의 청렴성은 비판론자들도 쉽게 부정하지 못한다. 이는 같은 군 출신 대통령으로 수천억원의 정치자금과 비자금을 주물렀던 전두환, 노태우와 비교해 돋보이는 점이기도 하다. 언젠가 박정희는 김씨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선거 때마다 돈이 엄청 들어간다. 부정부패가 다 선거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유신을 단행한 거다. 내가 개인적으로 필요한 돈은 주식이 공개되지 않은 두 회사에서 받는다.”
한국 정치를 암흑에 빠뜨린 유신을 그런 이유에서 실시했다니…. 김씨는 두 회사가 대우와 현대라고 추측했다. 그는 최근 SLS 이국철 회장의 폭로사건을 염두에 둔 듯 이런 얘기도 했다.
“대통령 모시는 놈들이 업자들한테 돈 받고 카드 받아 써서야 되겠나. 청와대 있으면서 돈 받아먹는 놈들은 포를 쏴 죽여야 해. 돼먹지 않은 짓이지.”
여자 문제
선산을 둘러보는 박정희 가족. 머리 딴 여학생이 박근혜.
육 여사는 그를 늘 ‘김 선생님’으로 불렀다. 어느 날 육 여사가 찾기에 가보니 부부싸움을 했는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집안얘기부터 끄집어냈다.
“내가 어머니를 두 분 모셨잖습니까. 그래서 남자들의 여자관계에 대해 잘 알지요.”
그녀의 부친은 첩을 뒀었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요즘 보면 지나친 것 같아요. 대통령 눈이 좀 높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시는 분들도 정신 차려야 하고요.”
다시 김씨의 얘기다.
“직접적인 말씀은 안 했지만, 나보고 대통령한테 말해달라는 부탁이었던 거다. 내가 기자 출신이니 직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 대통령이 가장 싫어하는 게 여자 문제에 관한 보고였다.”
그는 대통령에게 원고를 갖다 보이는 날, ‘거사’를 감행했다. 그가 ‘혁명 주체’들과 고위층 인사들의 여자 문제를 거침없이 거론하자 박정희가 격노했다. 박정희는 평소엔 성을 잘 내지 않았지만 몹시 화가 나면 손을 부들부들 떠는 버릇이 있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무언가를 찾더라고. 당시 담배를 끊고 있었는데, 담뱃갑을 찾은 거지. 내 앞으로 다가오는데 정말 무서웠어. 등에 식은땀이 흐르더라고.”
담뱃불을 붙이는 박정희의 손과 턱이 심하게 떨렸다. 그러더니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런 얘기를 왜 대통령한테 하는 거야! 비서실장이나 경호실장한테는 얘기해봤나?”
“그런 사람들한테는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박정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줄담배를 피워댔다. 이윽고 “나가!” 하고 소리를 질렀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나오고 얼마 후 김정렴 비서실장이 찾았다. 그는 김 실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대통령에게 말한 그대로 고위층 인사들의 타락상을 지적했다. 비서실 주변에서는 ‘하극상’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김씨는 여차하면 사표를 낼 작정이었다. 어차피 원고가 완성되면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얼마 후 청와대 비서실 인사가 났다. 그는 정무비서실로 발령 났다. 사전에 어떤 언질도 없었다. 그는 사직을 결심하고 인편을 통해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다음 날 그의 사직서가 수리됐다.
“신임 김정렴 비서실장이 인사 때 자기 ‘꼬봉’들을 비서실에 심더라고. 그게 보기 싫었지. 내가 대통령실에 수시로 들어가는 것을 시기하는 놈도 많았고.”
마지막 만남
청와대에서 나온 그는 한때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어느 날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을 만나 얘기하고 있는데 김정렴 비서실장이 전화로 찾았다. 전국구 의원을 맡아달라는 제의였다. 그는 거절했다. 며칠 후 이후락 정보부장이 보자고 했다. 이번엔 부산문화방송 사장이었다. 그는 이 부장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1975년 일본 산케이신문 출판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출간했다. ‘영시의 횃불’의 일본판이었다. 포항에서 석유가 나온다고 시끄럽던 이듬해 어느 날 번역자인 재일교포 조남부씨가 김씨를 찾아와 1000만엔을 건넸다. 책 판매 수익금의 일부라고 했다. 김씨는 그 돈을 편지와 함께 박 대통령에게 보냈다.
9시간 동안 쉬지 않고 박정희 비화를 털어놓은 김종신씨.
서운함을 품고 청와대에서 나온 그는 출판사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부산문화방송 서울지사에 들렀다. 지사장이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었다”고 전했다. 번호를 보니 청와대 의전비서관실이었다. 전화를 걸자 “대통령이 찾으시니 빨리 들어오라”고 했다.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갔다. 달려가면서 ‘오늘은 절대 대통령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말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 다짐은 지켜지지 않았다. 대통령이 자꾸 이것저것 물어보는 통에 옛날 버릇이 되살아나 많은 얘기를 하게 됐다. 얼마 전 단행된 개각에서 국무총리로 임명된 최규하씨가 먼저 화제에 올랐다. 김씨는 기자 시절 외무부 장관이던 최씨와의 인연을 끄집어내며 “정말 대통령께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박정희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나도 이제 피곤하다. (대통령) 넘겨줘야지. 원래는 김종필한테 넘기려 했는데 너무 설쳐대서 최규하한테 넘겨주려 한다.”
“대통령은 아무나 합니까. 시킨다고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박정희는 그의 아부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당시 부산에서 터졌던 대형 밀수사건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후환을 남긴 건 그 다음 얘기였다.
“공무원들이 청와대 암행어사 때문에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말했지. 암행어사는 사정비서관실을 말하는 거야. 이들이 함정수사로 공무원들을 옭아맨 사례를 말해주니 대통령께서 ‘이놈들이 그렇게 일하는구나’ 하면서 화를 내더라고.”
이것이 그와 대통령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런데 그는 대통령과의 마지막 대화 때문에 일생일대의 곤욕을 치렀다.
“대통령에게 한소리 들은 사정비서관실에서 ‘김종신 조져라’는 얘기가 나왔다고 들었다. 사정비서관실에서 운영하는 경찰 특수대가 부산 우리 집에 쳐들어와 온 집안을 뒤집어놓았다. 집에 물이 새서 수리했는데 건축법 위반이라는 거였다. 벌금 무는 걸로 해결됐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엔 부산문화방송의 편성국장이 외국 나갔다 온 게 문제가 됐다.
“KAL기가 LA 취항한다고 시승을 요청해왔다. 편성국장이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거야. 내가 만류하니까 점심도 안 먹고 새치름해 있더라고. 결국 보냈는데, 밍크(코트)와 카메라를 들여오다 걸렸어. 검찰 수사관이 공항으로 가서 편성국장 옷을 홀랑 벗기고 수색을 벌였다. 사온 물건 다 압수당하고 체포됐지. 나는 편성국장을 해임하고 검찰에 철저히 수사하라고 말해줬어. 그런데 나한테 밀수와 탈세 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거야. 편성국장이 사장 주려고 카메라 사왔다는 거야. 그간 탈세해서 5·16 장학금을 줬다는 혐의도 씌우면서. 당시 음반회사에서 라디오 PD들에게 뇌물을 줬어. 그런데 PD 중 한 놈이 금액이 적다고 내던지고 음반을 안 틀어준 일이 있었어. 음반회사에서 그 PD를 고소하는 바람에 잡지에 기사도 났지. 그것도 문제를 삼더라고. 경찰관 두 명이 찾아와 여관으로 가자기에 ‘영장 내 놓으라’며 버텼지.”
그는 이후락씨에게 전화해 도움을 요청했다. 잠시 뒤 경찰 간부가 와서 사과했다. 그는 사표를 던졌다.
“더러워서 그만뒀지.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사정비서관실의 보복행위를 알렸다. 다시는 대통령 밑에서 밥 안 얻어먹겠다는 말까지 했어. 그걸로 모든 게 끝났지.”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 사장을 그만둔 후 김종신씨는 더는 공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시골생활을 즐기며 독서와 집필로 세월을 보냈다. 한때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다.
“전철을 타면 박 대통령을 생각하고 자세를 반듯이 한다. 그와 그토록 오랜 세월 그런 대화를 나눴다는 게 영광스럽고 고맙다. 후손이 내게 뭐 했느냐 물으면 ‘박정희 대통령 모시고 조국 근대화를 위해 일하고 또 일했다’고 말하겠다.”
그는 박정희 관련 자료와 사진들을 신주단지 모시듯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내가 끈질기게 요청하자 방에서 사진더미를 들고 나왔다. 사진 설명을 하는 그의 표정에서 종교적 신념 같은 희열이 엿보였다. 80대의 그가 9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말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밖으로 나오니 새벽 공기가 선선했다. 택시를 타고 다시 한강다리를 건넜다. 차창 밖으로 내다 본 한강은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