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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이 혼란해지면 북한은 달라질 수 있다

노태우 전대통령 2차 서면 인터뷰

정국이 혼란해지면 북한은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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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는 9월 초 노태우 전대통령측에 2차 인터뷰를 요청했다. 1차 인터뷰의 내용을 보강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노전대통령측은 “전직 대통령이 현 정부의 정책을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불가’를 통보해 왔다.

‘신동아’는 한가위 직전 노전대통령측에 “남북관계와 북방정책에 관한 부분만이라도 답변해 달라”는 서면 질의서를 다시 보냈다. 그러자 노전대통령측은 ‘신동아’가 보낸 10개의 질문 가운데 6개 문항에 답하겠다는 의견을 전해왔다.

―제6공화국 시절의 북한과 오늘의 북한을 비교해 주십시오.

“내가 대통령으로 있던 제6공화국 시절, 북한은 한마디로 진퇴양난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은 과거와 변함없이‘남한은 없다. 한반도의 유일한 정부는 북한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미국, 일본과 접촉을 시도했다. 하지만 미국은 우리와 변함없이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일본은 좀처럼 북한과 관계 개선을 원하지 않는 눈치였다.

게다가 자신들을 지지하던 소련, 중국마저 북한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한국과 가까워지는 상황에 이르자 북한으로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다. 북한이 만일 미·일과 접촉할 수 있고,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면 우리와 대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은 우리와 중국, 소련이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사실상 중·소와 북한의 군사 협력이 차단된 것이다. 내가 취임할 당시 북한에는 미그기가 740대, 폭격기가 80대나 있었다. 그런데 북방 정책이 성공한 이후 북한에는 미그기가 단 1대도 들어가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때 우리가‘가슴을 활짝 열고 대화하겠다’고 하니까 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DJ 구상에 동의한다”

우리는 북한이 직접 대화에 응하고 난 뒤에는 미국과 접촉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주었다. 북한이 중단을 요구해온 팀 스피리트 훈련도 한 차례 건너뛰고 ‘북한측이 침략 훈련인지, 방어 훈련인지 직접 와서 보라’고 초청했다.

하지만 북한측은 내 임기가 끝나가면서 태도가 달라졌다. 팀 스피리트 훈련의 완전 철폐를 주장하며, 이를 남북 대화의 절대 조건으로 내세웠다. 또 남북기본합의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려는 등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북한의 이와 같은 변화에 “팀 스피리트 훈련은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으며, 그것은 결코 협상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뜻을 일깨워주기 위해 1992년 훈련을 재개했다. 북한이 상응하는 협조를 하지 않으면 다시 강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북한은 또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발생한 ‘이선실 간첩 사건’을 남한측의 ‘조작’이라고 주장하며 남북 대화를 거부했다. 그리고 팀 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하자 비난 공세를 퍼부었다.

나는 과거 경험으로 보아 북한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는 우리 국력이 우위에 있어야 하며 언제나 정부가 주 창구가 돼야 한다고 믿고 있다.

최근 북한이 변화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고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는 등 남북한 관계가 크게 호전되고 있어 기쁘게 생각한다. 김 대통령은 우리가 일부 양보하더라도 통일을 위한 대의적 차원에서 북한을 대하자는 구상인 것 같다. 나도 김 대통령의 구상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북한은 철저히 전략·전술적 차원에서 우리를 대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달라고 당부하고 싶다. 우리가 힘이 약해지거나, 틈을 보이거나, 또 김대통령 집권 말기가 되어 정국 혼란이라도 발생하면 북한의 태도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북한이 공산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6공화국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김영삼 정부 시절, 북한은 바로 그런 점을 잘 확인시켜 주지 않았던가. 김영삼 정부는 이산가족 면담, 면회소 설치, 서신 왕래 등을 기대하고 이인모 노인을 풀어주었지만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 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정책의 연속성이 단절된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핵 문제 협상 때는 완전히 우리를 제쳐 놓지 않았는가.

정권 인계 과정에 나는 다음 정부 사람들에게 “우리가 북방 정책의 어려운 길을 닦았으니 다음 정권은 확대하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고 누누이 당부했다.

그런데 다음 정권은 남북관계를 추진하면서 어렵게 이끌어낸 남북기본합의서를 단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철두철미한 단절이었다. 한 정권이 끝나고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서 남북관계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우를 다시는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남북기본합의서 성사 비화

―91년 남북기본합의서 도출 과정에 가장 중점을 두었던 부분과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입니까.

“북방정책이 결실을 맺으면서 북한은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는지 협상 테이블에 나왔다. 우리측 요구대로 고분고분 대화에 응해 남북 적십자회담, 남북 체육회담, 남북 국회회담, 남북 고위급회담 등 모든 분야에서 대화가 시작됐다. 특히 남북한 총리가 참여하는 남북 고위급회담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열리게 되었고, 그 결과 1991년 12월13일에는 남북기본합의서가 만들어졌다.

남북 고위급회담을 추진하면서 나는 “한반도의 장기적인 평화와 안정, 나아가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철학을 담아 완벽한 계획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남북기본합의서 도출을 위해 독일의 기본합의서를 참고하라는 당부도 했다. 그래서 통일원이 주축이 돼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안을 만들고, 북한측과 협상을 통해 최종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남북기본합의서에서 가장 중요시했던 전제는 당사자간의 해결 원칙과 상호주의 철학이었다. 당시 합의서를 도출하는 과정에 우리는 전무후무한 주도권을 행사했다. 북한은 회담 초기 미·북 평화협정 체결과 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합의서의 명칭도 ‘북·남’이 들어가는 ‘북남 불가침과 화해·협력에 관한 선언’을 제의하는 등 고집을 부렸으나 회담이 진행되면서 우리측 요구에 따라주었다.

돈 오버도퍼 ‘워싱턴 포스트’ 기자가 쓴 ‘두 개의 코리아’는 당시 에피소드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협정을 발효시키는 조인식을 마치고 평양에서 개성까지 오는 승용차 안에서 북한의 김영철 소장은 한국의 박용옥 소장에게 문안의 90%가 남한측 주장이니만큼 ‘이것은 당신네 협정이지 우리 협정이 아니다’라고 불평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한마디로 남북관계의 성전이라 할 수 있다. 남북간에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이 합의서를 근거로 따져야 정당성도 찾을 수 있고 북한도 다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난해 6월 북한이 서해에서 도발을 일으켰을 때도 남북기본합의서를 근거로 따질 수 있었다. 군사 정전 협정서에도 명기되지 않은 서해상의 북방한계선(NLL: North Limit Line)에 대해 기본합의서는 ‘지금까지 지켜온 관행을 인정한다’고 명문화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북한과의 관계에서 골탕을 먹는 것은 이 합의서의 ‘상호주의’ 원칙이 어느새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제4차 고위급 회담에서 북한측 실무자들이 남북한 합의서 내용을 놓고 강경한 입장을 고집한다는 보고를 받고, 김일성이 다음 회담에서는 굴복하고 들어올 것임을 예감할 수 있었다. 김일성은 이란의 후세인이 국제 사회에 도전하다가 어떻게 당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쌍방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 관계”라고 규정했다. 이와 같은 표현에는 이중성이 내포돼 있었다. 우선 ‘북한을 권력 실체로 인정하지만 국가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 있었다. 또 국가가 아닌 만큼 양측간의 거래가 내부 거래로 간주돼 실리를 찾을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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