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선자 시절 한미연합사를 방문해 사열을 한 노무현 대통령.한미군사동맹이 50년 만에 변화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 조약의 핵심은 한미간에 군사동맹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조약 4조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미국의 육해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주변에 배치하는 권리를 허여(許與)하고 미국은 이를 수락한다’고 되어 있다. 이 합의에 근거해 미국은 전투부대를 한반도에 파견했고, 한미 양국 군은 연합작전 체제를 구축해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면서 전쟁을 방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한미 군사동맹은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의 안전과 한반도의 안정을 지켜온 기본 틀이었다.
‘통일 이후’ 위한 한미동맹 돼야
21세기가 시작되면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의 전략환경은 급속도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소련의 위협이 소멸한 후 세계질서는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을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했고, 동북아 나라들간의 관계도 냉전시대의 대결관계를 탈피하면서 화해와 협력, 개방과 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북한은 이 변화의 바람을 위협으로 인식하고 내부적으로는 통제를 강화하고, 외부적으로는 체제 유지를 위한 도전을 계속해왔다.
언젠가 남북한은 통일정부를 이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감격적인 순간은 복잡하고도 매우 어려운 전환기를 거쳐 우리 앞에 다가올 것이다. 남북한의 200만 대군이 반세기 동안 대치해온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통일을 이룩하는 전환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는 것이다. 냉전시대에 한반도에서 전쟁을 억제하고 안정을 지켜온 한미동맹은 통일을 향한 전환기에, 그리고 더 나아가 통일 이후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를 서둘러 검토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냉전시 북한의 우위를 억제
제2차 세계대전 전후(戰後) 처리과정에서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하기로 결정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중대한 실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분단된 한반도를 무력으로 통일하려 했던 발상은 무모한 것이었고 그것이 성공하리라 믿었던 것은 중대한 착각이었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3년간의 전쟁은 수많은 사상자와 폐허로 변한 국토,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남기고 다시 그 자리에 철조망을 설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휴전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어느 나라의 이익에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과, 당시 상황에서는 한반도의 현상유지(Status Quo)가 최선의 선택이라는 데 국제적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휴전 이후 남북한이 걸어온 길은 매우 대조적이었다. 휴전 직후 쌍방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방어태세를 구축했다. 기습을 했던 북한도, 기습을 당했던 남한도 똑같이 참호를 깊이 파고 철조망을 설치했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됐다고 판단했을 때 남한은 폐허가 된 산업시설을 복구하고 경제 개발에 들어섰다. 그러나 놀랍게도 북한은 병기공장부터 재건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지도자들은 거의 성공할 뻔했던 6·25 기습 남침공격과 초전(初戰)에서 거둔 성공의 환상을 잊지 못하고 무력통일의 가능성을 믿었던 듯하다.
남북한이 상이한 진로를 선택한 결과는 1960년도 초부터 표면화했다. 우리가 겨우 삼천리호 자전거를 만들어 자랑하고 있을 때 북한은 당시로서는 최신 화기였던 AK-47 자동소총을 자체 생산하여 보급했고 중화기까지 생산하기 시작했다(남한이 소총을 자체 생산해 전선에 배치한 것은 그로부터 15년 후인 1976년 가을이다). 남북한간에 군사력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고 생각된다. 1980년대 말 미·소 냉전이 종식될 때까지 북한은 줄곧 군사력에서 절대적 우위를 유지하면서 남한의 안전을 위협해왔다.
이 시기 한미동맹은 남북한간의 전력 격차를 보완하고 한반도에서 안전을 보장해준 효과적인 장치였다. 휴전협정은 한반도에서 전쟁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지만, 힘없는 ‘합의’만으로 전쟁 재발을 방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립국 감시위원단이 협정 준수 여부를 감시하는 기능을 수행하지만 강제적인 집행능력이 없는 형식적인 감독자에 불과했다. 결국 한미동맹체제와 한미연합군의 군사력이 전쟁을 억제한 현실적 수단이었고 평화를 지켜준 최후의 보루였던 셈이다.
1960년대 말까지 한국군은 미국의 군사원조에 의존하는 지상군 위주의 군대에 머물렀다. 이때 미군은 판문점에서 서울로 이어진 서부 축선 방어를 담당해줬기 때문에 한국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1970년 초 미군의 일부 지상군 부대가 철수하면서 한국군이 전(全) 전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북한의 군사력은 남한을 크게 앞섰다. 이러한 전투력의 불균형은 북한으로 하여금 무력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북한이 전쟁을 도발할 수 없었던 것은 한미동맹의 군사적 억제력 때문이었다고 평가된다.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며 초기 산업화에 성공한 한국은 비로소 군사력 증강에 나설 수 있었다. 소총과 수류탄 정도의 소화기를 생산하는 수준에 불과한 방위산업이었지만, 이는 자주국방 의지를 키워줬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