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넘겨 2002년 2월27일 오후 10시경 김의원의 K아파트를 방문했을 때 TV에선 노무현 정동영(鄭東泳) 유종근(柳鍾根) 경선 후보의 3자 토론회가 열리고 있었다.
김의원은 당시 한국 정치사상 처음 도입된 국민 참여 경선의 사회자인 대회진행분과위원장을 맡아, 그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TV를 보며 “노무현이 참 토론을 잘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경선을 관리하는 당내 중앙선관위 위원 중 ‘친(親) 이인제’ 성향의 의원들이 많아 공정 선거가 될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당시 노후보는 ‘이인제 대세론’을 꺾기 위해 “이인제 후보는 1990년 3당 합당에 참여했고, 5년 전엔 신한국당 경선에 불복했다”며 맹공을 퍼붓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선관위의 ‘친 이인제’ 의원들은 ‘경고’를 줘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했다.
김의원은 며칠 전 선관위 회의에서 “어차피 이후보의 그런 문제들은 대선 본선에 가더라도 다뤄질 문제 아니냐. 그 정도로 ‘경고’를 주면 선관위의 권위가 오히려 약해질 수 있다. 다음에도 비판하면 또 경고 줘서 결국 후보자격 을 박탈할 작정이냐”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해찬(李海瓚) 의원 등이 이에 동조해 ‘경고’는 ‘문서상 주의’로 하향 조정됐다.
김의원은 3월9일 첫 제주 경선을 열흘 앞둔 이날 “선관위 위원 때문에 지지활동을 못하지만, 내 마음속으론 노무현을 지지한다”고 털어놓았다.
“이인제 후보 쪽에서 나에게 ‘도와달라’며 수십 차례 제의가 왔다. 노후보측 염동연(廉東淵) 전 연청 사무총장은 나를 찾아와 ‘김선배, 노후보에게 크게 배팅 한번 하십시오’하며 경선 선대본부의 중책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이날 “호남에서 ‘이인제 대세론’이 흔들리고 있다. 민주당의 법통과 정체성에 안 맞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현재 광주에선 노무현이 1등이고 전남에선 이인제 1등, 노무현 2등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3월16일 광주 경선에 벌어질 ‘노풍(盧風)’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후보는 대선 선대위 총괄본부장으로 김원길 의원을 원했다
9월14일 오후 11시경 김의원의 여의도 S아파트를 찾았다. 그는 K아파트 전셋값이 너무 올라 약 한달 전 이곳으로 이사왔다고 했다. 당시엔 선대위 간부 인선 작업이 한창이었고, 그는 선대위 홍보본부장으로 내정돼 있었다.
필자의 관심은 선대위 실무를 총지휘하는 총괄본부장(또는 선거대책본부장)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김의원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노후보와 선대위 사람들은 김원길(金元吉·대선 직전 민주당을 탈당해 한나라당 입당) 의원을 원했다. 그런데 그가 ‘다른 짓(통합신당 추진)’을 하고 다니는 바람에 물 건너갔다.”
선대위 사람들이 김의원을 원한 이유는 그의 자금 모집 능력 때문이었다. 김의원은 서울 상대와 대한전선 부사장 출신의 경제통이다. 당시 노후보측의 최대 고민은 ‘돈’이었다.
노후보의 참모들 사이에선 “당 후원금이 바닥났고 민주당의 법정 후원회 개최 횟수도 이미 다 찼다. 선거자금 모금을 위한 후원회를 열기 위해서라면 당명이라도 바꾸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당시 한화갑(韓和甲) 대표가 선대위원장직을 맡지 않아 ‘노무현-한화갑 갈등설’이 불거졌는데, 김의원은 당과 선대위의 이같은 이원체제의 원인을 다르게 해석했다.
“당의 재정 상태가 불투명하고 엉망이었다. 선대위와 당이 일원화되면, 선대위가 당의 골치 아픈 재정 문제를 모두 떠안아야 할 형편이었다. 그래서 노후보가 결단을 내린 것이다.”
한편 노후보가 김원길 의원을 선대위에 중용하려 했던 것은 ‘돈 때문’이 아니었다. 노후보는 “적당한 규모의 돈은 나도 (모아오기 위해) 노력하겠다”며 “김원길 의원은 대표적인 서울의 주류 인물 아니냐. 그런 사람이 내 주변에 있으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정치적 비주류 소수파인 노후보에 대한 주류 사회의 불안감을 덜어줄 수 있는 인물로 김원길 의원을 꼽았던 것이다.
결국 당시 김원길 의원의 ‘대타’로 정대철(鄭大哲·현 대표) 최고위원이 나섰다. 김원길 의원이 당시 ‘다른 짓’을 하지 않고 노후보를 도왔다면 지금쯤 그의 정치적 위상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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