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흘 뒤인 3월4일 두산은 “3월21일 열릴 주주총회에서 자사 출신을 사외이사진에서 완전 배제하고 대신 외부 전문가 5명을 후보로 상정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참여연대가 성명서를 통해 총수 일가와 계열사 임원 출신이 대부분인 현 이사진을 유지하겠다는 두산의 주총 안건에 대해 비판하고 나선 지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SK그룹에 대해 급작스런 수사에 나선 검찰이 “이번 수사는 지난 1월 참여연대의 고발조치에 따른 것”이라고 발표한 이후 ‘참여연대의 힘’에 새삼 세간의 눈이 쏠리고 있다. 이어 2월24일 “SK수사가 끝나는 대로 참여연대가 분식회계 혐의로 고발한 바 있는 한화그룹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겠다”는 검찰 발표가 잇따르자 삼성, LG 등 참여연대가 이미 고소했거나 민사소송을 제기한 바 있는 재벌기업 정보팀의 안테나는 온통 참여연대를 향해 치솟았다. 올해로 창립 9주년을 맞는 참여연대가 ‘신(新)권력’의 자리에 올랐음을 실감케 하는 사건이었다.
1998년 소액주주운동, 2000년 총선연대활동, 2001년 부패방지법 제정운동….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성과를 거두며 성장한 참여연대. 그러나 참여연대를 움직이는 사람들과 그들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대해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과연 그들은 누구이며, 어떻게 모였으며,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참여연대의 사업과 활동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이제부터 그 궁금증을 하나씩 해결해보기로 하자.
갈 곳 모르던 풋내기 직장인들
1993년 봄, 대학을 갓 졸업한 당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었던 386세대 직장인 120여 명이 모였다. 광고회사, 증권회사, 언론사 등에 몸담고 있던 이들을 움직인 것은 ‘변화된 시대,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될 듯한 의무감’이었다. 대학 재학중에 학내 서클과 학생운동조직 등을 통해 알음알이로 연결돼 있었던 82학번에서 86학번 사이의 이 젊은 사회인들은 서울 연남동에 ‘참여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인 연합(이하 참사연)’이라는 이름으로 사무실을 열었다. 이후 이들은 문화예술, 과학기술민주화, 경제문제연구 등 다섯 개의 분과를 두고 매주 세미나를 열었다.
김기식, 이태호, 김민영 등 당시 참사연을 주도했던 멤버들 중 상당수는 서울대 문과대와 학내 운동조직에서 함께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다(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특정학교, 특정서클과 연결짓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있다”고 말했지만, 초기 참사연 멤버 중 한 사람은 “이들이 참사연 분위기를 이끌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총학생회 임원 등 학생운동으로 대학시절을 보낸 후 세상에 나온 이들에게 1990년대 초반은 혼돈의 시기였다.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이념적 혼란은 가중됐고 기존 민중운동이나 경실련으로 대표되는 시민운동 또한 한계가 분명해 보였다.
그 가운데서도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은 당시 약관 스물일곱 살이었던 김기식 사무국장. 재학중에 ‘구국학생연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그는 1987년부터 인천의 한 ‘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1991년 무렵부터 ‘대안적 시민운동’을 고민하고 있던 그가 포섭(?) 대상으로 염두에 두었던 인물은 당시 ‘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국민회의’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근태씨.
1993년 5월 김기식씨는 20페이지짜리 제안서를 들고 서너 차례 김근태 위원장을 만났지만 “이제는 정치인의 길을 가겠다”는 김위원장을 설득할 수는 없었다. 이후 김위원장은 ‘통일시대 민주주의 국민회의’ 상임지도위원을 거쳐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 자리를 잡았고, 김기식 처장은 동료·후배들과 함께 새로운 운동단체를 만들기 위한 과도기 조직으로 참사연을 결성한다. 참사연이 세미나를 위주로 하는 연구모임에 가까웠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