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중(金大中) 김영삼(金泳三) 두 전 대통령도 개혁정권을 표방하며 정권을 출범시켰지만 노무현 정권만큼 분명하지는 않았다. 개혁과 갈등은 쌍생아다. 개혁의 수위가 높을수록 갈등도 심해진다. 그래서 본격적인 개혁정권을 표방한 노무현 정권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관측은 차라리 상식에 가깝다.
실제 노무현 정권 앞에는 사회적 갈등을 피할 수 없는 민감한 개혁과제들이 놓여 있다. 문제 해결 과정에서 사회구성원간에 이해관계 충돌이 불가피한 민감한 사안도 줄줄이 놓여 있다. 북핵문제와 경제위기, 검찰인사에 대한 현직 검사들의 반발, 곧 있을 언론개혁정책을 놓고 날카롭게 맞서고 있는 거대 언론사, 그리고 녹록치 않은 거대 야당까지, 당장 노무현호의 항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부 장애물은 벌써부터 해일처럼 덩치를 부풀려 노대통령을 향해 밀어닥치고 있다.
노무현호는 어디로 가는가. 그의 험한 항해를 안내해줄 등대는 없는가. 노무현 정권의 정책의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좌표는 없는가.
PK 향한 유별난 애정 표현
정치권에서는 “노대통령의 눈이 부산·경남 지역을 향하고 있다”는 관측이 흘러나오고 있다. 부산 민심을 잡기 위해 정책결정과 인사에 최선의 배려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 핵심인사들은 부산·경남이라는 지명을 빼고 “지방분권의 시대정신을 구현하려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굳이 부산이라는 특정 지역이 아닌, 30년 수도권 집중의 폐해를 극복하려는 것이 참여정부 정책의 핵심 목표”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설명에도, 노무현 정권의 부산에 대한 유별난 애정표현을 숨길 수는 없다. 대통령에 당선된 뒤 노 대통령은 두 차례 정치적 고향인 부산·경남을 찾았다. 한번은 김해 선영방문 목적으로, 또 한번은 부산에서 열린 ‘지방분권과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토론회 인사말을 통해 노대통령은 “고향에 대해 마음이 남다르며 여러 가지 관심가는 것도 많다. 앞으로 지역과 고향을 위해 열심히 할테니 도와달라”고 말했다. 토론회 분위기에 고무된 노대통령은 “5년간 확실하게 밀어드리겠다”는 ‘노무현다운’ 거침없는 표현도 써가며 참석자들을 즐겁게 했다.
청와대 비서관 인선에서도 노대통령은 부산 출신 측근들을 적극 기용해 요직에 앉혔다. 청와대 실세로 통하는 문재인 민정수석과 이호철 비서관은 노대통령 당선 전까지 부산을 연고로 활동해오던 토박이들이었다.
노무현 정권이 추진할 핵심 과제인 언론개혁의 핵심 기획라인도 부산 출신이 장악했다. 이해성 청와대 홍보수석과 조영동 국정홍보처장이 그 주인공. 여기에 대구 출신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까지 합세하면 영남 출신 3인방이 노무현 정권 언론개혁의 최선봉 역할을 맡은 셈이다.
부산·경남 출신은 내각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경남 남해 출신 김두관 행정자치부장관, 의령 출신 진대제 정보통신부장관, 마산 출신 허성관 해양수산부장관, 밀양 출신 박봉흠 기획예산처장관 등이 그들이다. 차관급에서도 외교부와 산자부 차관, 국정홍보처장 등 6개 자리가 PK 몫으로 돌아갔다. 김대중 정부에서 7.7%에 불과하던 PK 출신 장차관급 인사의 비율이 노무현 정부에서는 22.1%까지 올라갔다.
검사장급 이상 검찰인사에서도 부산·경남 출신의 약진은 두드러진다. 38명의 신임 검사장급 인사 가운데 PK 출신은 무려 12명. 이쯤 되자 설마 하며 말을 아끼던 사람들도 “이건 그야말로 PK 정권”이라며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정가 주위에서는 DJ 정권은 ‘홍어회 정권’, 노무현 정권은 ‘아나고 정권’이라는 농담이 나돌 정도다.
하지만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인사를 통한 PK 지역에 대한 배려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특정 지역 인사를 편애한다는 느낌이 국민적 공감대로 형성될 경우, 통치권자에게는 독(毒)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국민적 지지 속에 화려하게 출범했던 역대 문민정권이 집권 후반으로 갈수록 힘이 빠진 것도 ‘아는 사람’만 가려 쓰는 지역편중 인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