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의 빽빽한 아파트촌 전경. 독일 한스자이델재단이 2009년 5월 촬영한 사진이다.
이 단어들 중에서도 북한 당국이 가장 애용하는 단어는 ‘공화국’이다. 외부에 발표하는 성명만 봐도 ‘우리 공화국’이라는 표현이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북한이 지칭하는 ‘우리 공화국’은 오래전부터 ‘평양공화국’과 ‘지방공화국’으로 갈렸다.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인민’도 ‘배급제 계급’과 ‘자력갱생 계급’으로 완전히 갈라졌다. 평양과 지방의 생활수준 격차가 크게 벌어졌으며, 식량 배급을 받고 사는 특혜 계층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전혀 다르다는 뜻이다.
평양 주민들은 당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특혜를 받고 있다. 스스로도 지방 주민들에 비해 우월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식량 배급도 그 어느 지방에 비할 바 없이 잘 받고 있다. 이런 까닭에 정권에 대한 평양 주민들의 충성심은 그 어느 지방보다 높다.
“장군님께 충성을 바치라”
평양 주민 하면 늘 맨 먼저 떠오르는 한 할머니가 있다. 1990년대 중반 북한에 기근이 닥쳐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을 때 가깝게 알고 지냈던 할머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도 장마당에서 구걸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 자기 집에 데려가 밥을 먹이던 마음 푸근한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1950년대 노동당에 입당한 ‘노당원’이었다. ‘수령님’을 말할 때면 늘 눈물이 글썽였다.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장군님이 곧 해결해주실 것이니 좋은 날이 반드시 온다”고 굳게 믿었다. 자식들에게도 항상 “장군님께 충성을 다 바치라”고 얘기하곤 했다. 할머니는 내가 사회의 부조리를 말할 때마다 추상같은 표정을 지으며 “사상이 썩고 있는 것을 내 눈으로 절대 못 본다”고 화를 내셨다. 그 때문에 할머니 앞에선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남한 사람들에게 “북한 사람들은 왜 폭동을 일으키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정치범 수용소라든지, 치밀한 감시체계라든지, 세뇌 교육 같은 것을 이유로 든다.
그러나 단지 이 때문만일까. 북한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북한 주민들에게서도 찾아야 한다. 북한 정권이 저렇게 오랫동안 버티고 있는 데는 그 할머니처럼 자발적으로 충성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물론 맹목적인 충성심을 갖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오랫동안 지속된 치밀한 세뇌교육과 언론통제의 탓이기도 하지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평양 시민의 대다수는 이 할머니처럼 충성심 높은 사람들이었다.
평양은 시민 구성부터 다르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평양에는 성분이 나쁜 사람이 살 수 없다. 심지어 외국인 눈에 안 좋게 보인다고 장애인들까지 모두 지방으로 추방했다.
북한 당국은 이렇게 고르고 고른 사람들을 평양에 뽑아놓고 지방 통행도 엄격히 통제한다. 평양 사람들은 지방에 다녀오기가 어렵지 않았지만, 지방 사람들이 평양에 다녀올 수 있는 통행증을 받기란 정말 어렵다. 지방에는 평양 구경 한 번 못해본 사람이 부지기수다.
평양은 외관상 외국에 자랑해도 손색없는 ‘쇼윈도’로 꾸며졌다. 아파트가 즐비하고 극장과 영화관, 놀이공원과 같은 문화 인프라가 잘 갖춰졌다. 지하철, 버스 같은 대중교통체계도 잘 정비돼 있다.
평양 사람들에게 가장 살기 좋았던 때를 물으면 아마 1970~80년대를 꼽는 대답이 압도적일 것 같다. 이때가 평양의 전성기였으니까. 배급도 잘 줬고, 자고 나면 현대적 건축물들이 쑥쑥 들어섰다. 상점에서는 부족하나마 필요한 물품도 살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하게는 빈부격차가 심하지 않았다. 대다수 사람의 생활수준이 고만고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