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 국정원 군사담당 파트가 작성한 보고서
- GPS 교란장치 등 첨단무기의 제원·성능·단가 고스란히
- 구 소련제 53-56KE 어뢰, 역공학 방식으로 모방해 수출 나선 듯
- 예산 배정 못 받아 좌절된 해외 구매 공작
- 합조단 조사보다 북한 내부정보에 무게 두는 청와대
- “중국조차 설득할 리포트 쓸 수 있다는 자신감 생겼다”
2006년 7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러시아 볼고그라드 공항에 도착한 뒤 러시아군 관계자가 전통적인 우정의 표시로 건네는 보드카 잔을 받아 마시고 있다. 차베스 대통령은 당시 방러 기간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무기도입 협정을 체결했다.
사건 발생 이후 쏟아져 나온 관련 정보의 상당량은 북한의 어뢰 혹은 기뢰 능력에 관한 것이었다. 북한이 과연 버블제트 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는지, 구 소련과 중국에서 수입한 것 외에 자체적으로 제작한 은밀한 어뢰나 기뢰가 있는지 등에 관해서였다. 정보당국 역시 이와 관련한 정보를 추적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간 다양한 경로를 통해 수집돼온 북한의 어뢰 및 기뢰 수입내역과 해당 무기체계의 성능, 제원에 관한 정보가 핵심이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국가정보원의 군사담당 파트. 천안함 침몰과 관련된 정보가 한창 취합 중이던 4월, 이 조직이 흥미로운 보고서 하나를 작성해 보고했다고 복수의 정부 관계자는 전했다. 2006년 무렵 북한이 제3국에 무기를 수출하기 위해 의사를 타진하는 과정에서 작성한 판매가능 무기 목록에 관한 것. 특히 국정원은 북한 군 당국이 베네수엘라 정부에 제시한 ‘쇼핑 리스트’를 주목했다. GPS(위성항법장치) 교란장치와 방사포 등 북한의 군사기술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정밀 무기체계의 제원이나 단가가 고스란히 포함된 리스트였다는 후문이다.
1998년 집권한 이래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미국의 침공을 방어해야 한다’는 명분 하에 대대적인 무기도입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2005년 이후 베네수엘라가 러시아로부터 도입한 무기만 해도 수호이-30 전투기와 T-72 탱크 등 40억달러어치에 해당한다는 추산이다. 북한의 무기판매 리스트가 건너간 2006년은 미국이 베네수엘라에 대한 무기판매 금수조치를 내려 군사력 강화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시점이다.
알려진 것보다 진보한
문제의 보고서가 주목한 것은 이 리스트에 천안함 사태 이후 자주 거론돼온 항적추적 어뢰가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함정의 스크루가 바다 위에 남기는 파도를 따라가며 목표물을 타격하는 항적추적 어뢰는 그간 북한의 주력어뢰로 알려져 있던 53-56형에 비해 기술적으로 앞선 것이다. 53-56형이 가느다란 전선을 달고 나가 버튼을 눌러야 폭발하는 선유도(線誘導) 방식인 데 비해, 항적추적 어뢰는 스스로 스크루 자국을 따라가는 무선방식이다.
항적추적 어뢰가 판매 리스트에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은 북한이 이 어뢰를 자체적으로 제작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항적추적 어뢰의 경우 구 소련에서 제작한 53-65KE를 수입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해왔던 그간의 분석과는 사뭇 수준이 다른 정보가 확인된 셈. 베네수엘라에 매물로 내놓은 항적추적 어뢰는 53-65KE를 완전 분해해 설계를 확인하고 같은 방식으로 만드는 이른바 역공학(reverse engineering) 기법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1958년 건설장비 생산부터 시작해 이집트제 스커드 미사일 등 역공학 방식의 성공사례를 반세기 이상 축적해오고 있다.
53-65KE는 목표물에 직접 접촉하지 않아도 자기장을 감응해 폭발하는 근접 신관을 갖추고 있다. ‘비접촉 외부 폭발’이라는 천안함 사건 합동조사단의 4월25일 기자회견 내용과 맥이 닿는다. 천안함의 함수·함미 분리가 어뢰가 일으키는 버블제트 효과에 의한 것이라면 직접타격 방식보다는 근접신관 쪽에 무게가 실리는 까닭이다.
정리하자면, 베네수엘라 무기판매 리스트는 북한의 어뢰 능력과 기술이 그간 정보당국에서 파악해놓은 것보다 상당히 진일보했음을 확인해준 고급 정보였다. 일부 정부 관계자들이 “천안함 침몰이 북한 소행이라는 추정을 강하게 뒷받침하는 내용”이라고 전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4월 중순 청와대와 대통령이 북한 소행으로 중심을 이동한 것 역시 문제의 보고서가 작성된 뒤라는 이야기였다.
이명박 정부가 국방개혁 등 민감한 군사 분야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정원을 활용해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전문성이 강한 군 당국의 의견을 검증하는 수단으로 정보기관의 견해를 참고하는 식. 지난해 8월 국정원이 작성한 남북 군사력 비교 보고서가 대표적인 사례다(‘신동아’ 3월호 관련 기사 참조). 한 당국자는 “국방부가 힘주어 북한 소행에 무게를 둘 때와 달리 국정원 역시 북한의 어뢰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면 마음이 움직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천안함 침몰 직후에는 청와대와 발맞춰 유보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국정원 내부의 분위기 역시 4월 중순 이후 급속도로 ‘북한 소행’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일이 있을 줄은…”
한편 북한이 수년 전 국제 무기시장에서 어뢰를 판매하려고 시도했다는 사실은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군 정보당국의 북한제 어뢰 확보 공작 추진이 그것이다. 한 전직 군 고위관계자는 “2000년대 중반 어뢰를 포함해 북한의 핵심 무기체계 일부가 국제무기시장에 매물로 나온 적이 있다”고 말했다. 첩보를 통해 거래루트 등을 확인한 뒤 ‘적성장비(敵性裝備)’에 대한 정보 확보 차원에서 이들 무기체계를 제3국으로 위장해 구입하는 공작계획을 검토한 바 있다는 것. 북한의 군사기술 수준과 공학적 특성을 확인하기 위한 시도였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수준까지 논의됐던 계획은 끝내 실행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군 정보당국을 포함해 모든 정보기관의 예산을 총괄 담당하는 상급부서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는 것. 일각에는 군 정보기관의 활동반경 확장을 달가워하지 않는 견제심리가 작동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그때만 해도 천안함 사태 같은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느냐”는 이 무렵 정보당국 핵심에서 일했던 관계자의 말이 더 개연성 높아 보인다. 결과적으로는 항적추적 어뢰의 ‘실물’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흘려보낸 셈이다.
대신 군 당국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북한 어뢰 샘플은 수년 전 훈련 과정에서 유실돼 남측 연안에서 발견된 훈련용 어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5월6일 ‘동아일보’의 ‘천안함 연돌서 어뢰 화약성분 찾았다’ 특종보도를 계기로 천안함 선체에서 발견된 화약흔적과 군 당국이 수거한 알루미늄·마그네슘 조각에 대한 언론의 관심도 폭발한 상황.
그러나 합조단 조사결과가 발표되지 않은 5월 중순 현재 상태에서 가늠하자면, 입증 과정에서 넘어야 할 산은 여러모로 만만치 않아 보인다. 천안함 침몰이 북한의 소행이라 해도 과연 어떤 종류의 어뢰 혹은 기뢰를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보니, 수거한 파편이 군 당국이 갖고 있는 소수의 ‘비교군(比較群)’ 샘플과 딱 맞아떨어질지 장담하기 쉽지 않은 것. 북한 무기체계의 실물을 주도적으로 확보해 각각의 물리적·화학적 특성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축적해놓지 못했다는 그간의 한계가 천안함 진상규명과 관련해 던지는 고민거리인 셈이다. 중국이나 러시아, 혹은 서방국가로부터 수입한 어뢰를 사용했다면 북한 소행으로 단정 짓기가 더욱 어려운 것은 불문가지다.
물론 건져 올린 파편과 다른 한반도 주변국가 해상무기의 특성을 비교해 일치하지 않는 국가들을 제외시켜나가는 방법도 있다. 중국과 러시아 무기체계에 일치하는 물건이 없다면 북한 소행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것. 정보 분석 과정에서 자주 사용되는 이른바 ‘소거법’이다. 이러한 방식이 적용된 대표적인 사례로 정보 관계자들 사이에서 흔히 거론되는 것이 2005년 리비아에서 확인된 핵 물질 육불화우라늄(UF6)의 출처 문제다. 당시 북한산 우라늄 샘플이 충분치 않았던 미국은 이 가공물이 기존에 알려진 다른 핵 보유국의 우라늄 특성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북한이 리비아에 핵 물질을 확산시켰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방식은 당시 미국 관료들 내부에서조차 비판적인 목소리가 있었고, 이후 북한 핵 문제 논의과정에서 별다른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등 감시망이 촘촘한 핵 물질의 경우 어뢰 파편이나 재래식 고폭약보다 훨씬 명확하게 출처가 확인되는 물건임에도 ‘소거법’의 효력이 제한적이었던 셈. 한마디로 이 같은 방식은 자국 내에서 진행되는 정보 분석 작업에나 쓸 수 있을 뿐 정치적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국가들을 납득시키는 데 사용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파편 수색작업에 대한 외부의 기대와 달리, 청와대 일각의 시선이 사뭇 냉정한 것도 이와 관계가 깊어 보인다. 5월 초순 안보라인의 한 고위관계자는 “합조단이 바다에서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을 찾게 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앞서 설명한 베네수엘라 무기판매 리스트 보고 때문에 대통령의 인식이 바뀐 것 같다는 일부 정부 관계자의 설명도 지나치게 과장됐다는 단언이다. 이 고위관계자의 설명이다.
“합조단이 4월25일 기자회견에서 밝혔듯 천안함 침몰이 공격으로 추정되는 외부폭발에 의한 것이 확실하다면, 그리고 북한 내부에서 이를 실행한 조직과 기획 과정이 신뢰할 만한 정보를 통해 확인된다면, 북한 소행 입증은 완료되는 것이라고 본다. 타살이 확실하고 모의와 실행 과정이 분명하다면 흉기의 출처가 어딘지가 굳이 필요하겠는가. 4월 중순 이후 청와대나 대통령의 무게중심이 북한 소행 쪽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비쳤다면, 이 무렵에 중국조차 납득할 만한 리포트를 제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진실의 순간
이와 관련해 최근 정보당국은 통신감청과 정찰위성 등 한국과 미국의 대북(對北) 정보자산을 동원해 천안함과 관련한 북한 공작부서의 움직임을 추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5월7일 ‘조선일보’는 관련 움직임을 전하며 “대북 정보당국은 북한 대남공작 총괄기구인 정찰총국이 천안함 침몰을 주도했음을 뒷받침하는 정황 증거를 3개가량 확보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천안함 사건을 담당한 곳이 ‘정찰총국의 ○국○처’라는 사실까지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천안함과 관련된 북한 내부 정보의 구체적인 내용과 수집경로는 합조단의 조사결과 발표 이후에도 공개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향후 대응방안 공조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중국이나 러시아를 포함해 다른 주변국 정부에는 신뢰성 확보 차원에서 제공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합조단 발표 이후 관련국 정부와의 전방위 고위급 협의를 통해 외교전에 나선다는 복안. 현재로서는 이들을 만나 담판을 지을 한국 측 관계자들의 서류가방에 합조단 조사결과 외에 ‘다른 물건’이 더 높은 비중으로 담길 공산이 큰 셈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방문 이후 천안함 문제에 관한 중국 측의 태도가 사뭇 차갑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바 있다. 5월7일 장위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천안함 북한 연루설은) 언론의 보도이자 추측일 뿐”이라며 “아직까지 한국 정부로부터 공식 조사결과를 전달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과연 청와대는 고위관계자의 자신감처럼 ‘중국조차’ 설득할 수 있을까. 진실의 순간이 점점 가까워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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