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호

소송은 옳은 사람이 아니라 증거를 가진 사람이 이긴다

  • 장진영│변호사│

    입력2010-06-04 11: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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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필자는 1억3000만원짜리 시뮬레이션 게임기를 구입했다가 잦은 고장으로 사업을 망친 사람으로부터 게임기 판매업자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내놓은 게임기 매매계약서를 보니 표지를 빼고 달랑 두 장짜리로 되어 있었다.

    무려 1억3000만원짜리 기계의 거래 계약서가 달랑 두 장이라는 것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내용이었다. 매매대상 기계가 도대체 어떠한 스펙을 가진 것인지, 모델명은 무엇인지, 기계에 대한 A/S는 누가, 어떤 조건으로 하는지 등 가장 기본적인 내용조차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이밖에도 빌려준 돈을 받아달라는 의뢰를 하면서 송금증 한 장만 달랑 내밀거나 아니면 그마저 없다는 의뢰인을 꽤 자주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우 그 의뢰인이 법적으로 권리를 주장하지 못할 수도 있고 설령 주장할 수 있다고 해도 일반 민법규정을 적용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계약을 체결한 의의가 전혀 없다.

    이와 같은 문제들은 모두 우리나라 국민이 계약서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고 신뢰관계에만 의존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달에는 계약서를 왜 써야 하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계약서를 쓰는 이유



    가. 법보다 계약이 우선이다.

    개인 간의 법률관계 내용은 그 개인들이 자유롭게 정할 수 있다. 이것을 계약자유의 원칙이라고 한다. 민법이나 상법과 같은 법률이 있기는 하지만 개인 간의 법률관계에는 법률이 먼저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 간에 정해진 계약내용이 우선 적용된다. 계약이 법률에 우선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계약이 그토록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계약서의 중요성을 더 일찍 깨닫고 계약관계에서 더 유리한 고지에 올라서기 위해 더 애쓴 사람이 이익을 보게 되어 있다. 잘못된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후에 불평등한 계약이라고 항의해본들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 역시 계약자유의 원칙 때문이다.

    민법 제104조에 심히 불공정한 계약을 무효로 한다는 규정이 있기는 하지만 웬만한 불공정 계약에는 이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 판례에 의하면 정상적인 가격보다 2~3배 비싸거나 싸게 매매한 정도만으로는 ‘현저히 불균형’한 거래로 인정받기 힘들다.

    그러므로 계약서에 도장 찍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계약서를 살피고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을 추가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사람들이 계약 내용에 무딘 경우가 많은 상황에서는 계약서를 사수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훨씬 큰 이익을 얻는다는 점을 꼭 기억하시기 바란다.

    나. 분쟁발생시 결정적인 증거로 사용된다.

    소송에서는 누가 이길까? 옳은 사람이 이길까? 유감스럽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 소송에서 이기는 사람은 바로 증거를 가진 사람이다. 우리나라의 법원은 증거재판주의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그럴듯한 주장을 하더라도 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그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어떤 이는 이러한 제도가 정의에 반한다고 하지만 법원과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주장이 옳아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명확한 증거도 없이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아 상대방에게 주라고 명령한다면 과연 이것을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

    말로 한 계약이나 계약서를 작성한 계약이나 모두 법적인 계약임에는 틀림없지만 소송으로 갔을 경우 승패를 좌우할 결정적 증거인 계약서를 내놓을 수 있는 것은 계약서를 작성한 계약이라는 점에서 계약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 상대방을 제대로 묶어둘 수 있다.

    계약(契約)은 약속(約束)의 다른 말이다. 계(契)나 약(約), 그리고 속(束)은 모두 묶다, 구속하다의 의미를 가진 말이다. 그러니까 계약의 당사자는 그 계약내용에 구속되는 결과가 된다.

    말로만 한 계약이나 엉성하게 작성된 계약서 가지고는 상대방을 꼼짝없이 묶어두기 어렵다. 상황이 바뀌면 상대방이 계약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잘 작성된 계약서가 있는 경우에는 중요한 사정 변경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섣불리 다른 마음을 먹기 힘들다.

    계약이 지켜지면 상대방과의 관계도 지속될 수 있다. 상대방과 관계를 지속하기를 원한다면, 그럴수록 계약서를 써야 한다. 야박한 것 같은 감정은 한순간이지만 그 한순간을 잘 참아낸다면 관계의 지속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

    2. 계약서를 쓰는 방법

    가. 특약사항을 구체적으로 꼼꼼하게 적어 넣어야 한다.

    아파트나 상가분양 계약은 대기업인 건설회사가 아니라 시행사나 시행사와 계약을 맺은 판매회사와 체결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영업사원이 부풀려 광고를 하거나 때로는 거짓말로 사람을 현혹하여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가 많다. 프리미엄을 보장한다든지 전세입자를 책임지고 구해주겠다든지 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대개 깨알 같은 글씨로 된 복잡한 계약서의 내용 중에는 분양받은 사람이 들은 달콤한 약속이 전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 분쟁이 생긴 후에 계약서를 내밀어본들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계약서 내용에 없는 말 중 자신에게 유리한 것이 있다면 이것을 계약서의 특약사항란에 꼼꼼하게 적어놓는 것이 중요하다. 계약서에 특약사항란이 없다면 계약서의 빈 공간 중 적당한 곳에 손글씨로 쓰고 도장만 받아놓아도 완전한 계약내용이 된다.

    역발상을 한다면, 영업사원들도 계약에 대한 기본개념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특약사항란에 나에게 유리한 내용을 쓰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 두었다가 실리를 챙기든지 아니면 인심 쓰는 척하고 양보해주어도 내게는 손해 볼 것이 없는 것이다.

    나. 쉽고 명확한 의미를 가진 말로 써야 한다.

    일반인은 계약서를 상당히 거창하고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계약서의 문구는 법률용어를 사용해서 어렵게 써야만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필자도 변호사가 되기 전에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계약서의 생명은 정확성이며 정확하기만 하다면 그것이 법률용어든 일반 용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서투른 법률용어를 쓰는 것보다는 쉬운 말로 쓰는 것이 백번 낫다.

    다. 순간의 침착과 용기는 평생의 행복을 보장한다.

    서두에서 말한 게임기 구입자는 계약서 말미에 3가지의 특약사항을 적어 넣기는 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읽어보니 무슨 뜻인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일반인이 계약서상의 문구를 보면 주어, 목적어 등이 빠져 있어서 뜻을 알기 어렵거나 아니면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계약서의 문구를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보기 바란다. 계약서의 문구가 자신이 보기에도 이해할 수 없거나 그 뜻이 모호하다면 판사나 변호사와 같은 제3자가 보더라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잊지 말기 바란다. ‘판사는 속뜻을 알아주겠지’하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만일 상대방이 쓴 계약서의 내용이 불분명하다면 반드시 짚고 분명하게 고친 후 넘어가야 한다.



    3. 약관의 경우

    가. 약관의 의미

    요즘은 계약 당사자들이 합의한 내용대로 체결하는 본래 의미의 계약이 아니라 한쪽 당사자가 미리 준비해 제시한 계약서에 다른 쪽 당사자가 서명, 날인하는 형태로 진행되는 계약이 매우 흔한데, 특히 개인이 회사와 계약을 체결할 때에는 대부분 이러한 형태를 띤다.

    계약서의 명칭이나 형태 또는 범위에 상관없이 계약의 한쪽 당사자가 여러 명의 상대방과 계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일정한 형식으로 미리 마련한 계약서를 약관이라고 한다. 신용카드 전표 뒤에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 있는 신용카드 이용 약관,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할 때 동의하지 않으면 가입이 거절되는 사이트 이용 약관과 같이 타이틀이 약관으로 붙어 있는 경우뿐 아니라 아파트 분양계약서, 은행의 대출계약서, 자동차회사와 체결하는 매매계약서도 모두 약관에 해당한다.

    나. 약관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법

    약관을 보면 그 수많은 좁쌀 같은 글씨와 딱딱한 형식에 기가 죽거나 질리고 만다. 인내심을 발휘하여 약관을 찬찬히 보았다고 해서 문제점을 발견하기도 어렵거니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내용을 변경해줄 것을 요구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래서 대충 훑어본 후 별생각 없이 서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중에 고객과 회사 간 분쟁이 발생한 경우 회사의 부당함을 지적하면 회사는 약관을 들이밀면서 ‘약관에 있고 당신이 서명을 했지 않은가’라고 고객을 압박한다. 자신의 서명이 되어 있는 약관을 보면 이내 자신감을 잃게 마련이다.

    그러나 약관규제법은 약관의 중요한 내용은 계약 체결 시에 고객에게 설명할 의무를 규정하고 만일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설명해주지 않았다면 그 부분을 계약의 내용으로 주장할 수 없도록 정하고 있다. 여기서 약관의 내용을 설명했다는 사실에 대한 입증책임은 회사 측에 있다.

    따라서 약관에 부당한 내용이 있는 경우 자신이 서명했다고 무조건 포기할 필요는 없다. 계약 당시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지를 잘 살펴서 혹시 회사가 설명을 하지 않았다면 그 부분은 계약에서 없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주장하여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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