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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삼균주의, 서민, 평등…마의 지지율 5% 넘는다

‘이장에서 대통령까지’, 승부사 김두관

新삼균주의, 서민, 평등…마의 지지율 5%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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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삼균주의, 서민, 평등…마의 지지율 5% 넘는다

7월 8일 전남 해남 땅끝마을에서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는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

결국 ‘배수의 진’을 쳤다.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는 7월 8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기에 앞서 “더 큰 김두관이 되어 돌아오겠다”며 6일 도지사직을 사퇴했다. 주변에선 “경선이 끝날 때까지는 도지사직을 유지하라”고 만류하는 의견이 많았지만 그는 미련 없이 물러났다. 김 전 지사는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각오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배웠다”며 “퇴로를 열어놓는 순간 퇴로를 따라가게 된다”는 말로 대선에 임하는 각오를 드러냈다. 현직 도지사의 프리미엄을 버리고 자신의 자서전 제목인 ‘아래에서부터’처럼 바닥에서부터 대선 예비후보로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정치역정 반영, 땅끝마을 출마

이날 해남 땅끝마을은 생활정치포럼, 모다함(모두 다 함께), 경희궁포럼 등 김 전 지사의 외곽지지단체와 지지자 5000여 명이 몰리면서 북새통을 이뤘다. 공식 출마 선언을 하기 한 시간 전부터 각종 문화행사가 벌어져 축제를 방불케 했다. 김 전 지사를 지지하는 사회 각계 인사들이 단상에 올라와 김두관을 연호하며 한껏 분위기를 띄웠다. 원혜영 김재윤 문병호 안민석 등 다수의 현역의원과 천정배 전 최고위원 이부영 전 의원 등도 김 전 지사의 대선 출마에 힘을 보탰다.

단상에 오른 김 전 지사의 표정은 비장했다. 5년 전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예비경선에서 컷오프를 통과하지 못해 대선도전의 꿈을 접어야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의 말투에는 문재인 손학규 상임고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민주당 대선주자 ‘빅3’ 중 한 명으로서 자신감이 묻어났다. 목이 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변을 토해내며 좌중을 사로잡았다. 출마 선언 후 기자간담회를 열고 곧장 전남 강진으로 이동했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과 함께 다산초당을 방문하는 것으로 첫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김 전 지사 캠프 측에선 ‘이장부터 대통령까지’란 말을 즐겨 사용한다. 1959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서 경남 남해군 고현면 이어마을 이장을 시작으로 최연소 남해군수, 노무현 정부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 야권 최초의 경남도지사 당선을 거쳐 이제는 대권 도전에 나서는 입지전적 인물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대선 출마 선언 장소 선정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김 전 지사 측은 출마 장소를 두고 해남 땅끝마을 이외에도 고향인 남해, 지역균형발전을 상징하는 세종시, 국회, 서울 구로디지털단지 등을 두고 막판까지 고심했다. 하지만 아래에서부터 시작해 한 단계씩 올라간 자신의 정치적 역정을 가장 잘 반영하는 장소인 해남 땅끝마을을 최종 낙점했다. 여기에는 영남 출신인 자신이 호남에서 출마 선언을 해 지역화합을 이루겠다는 상징적 의미도 담고 있다. 그는 “아래에서부터, 풀뿌리 현장으로부터, 변방으로부터 동남풍을 일으켜 중앙까지 접수하겠다”며 의지를 다졌다.

‘리틀 노무현’이란 별명에서 보듯 그의 삶의 궤적은 여러모로 노무현 전 대통령과 겹친다. 둘 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늦깎이 사회운동가의 길에 들어선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1959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난 김 전 지사는 젊은 시절 생활이 어려워 ‘신동아’ 외판원을 하기도 했다. 남해종합고를 거쳐 국민대에 합격했지만 입학금 28만3000원이 없어 등록을 포기해야만 했다. 어머니가 합격 소식을 듣고 빚을 내면서까지 돈을 모았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대학 진학의 꿈을 포기하고 2년간 형과 함께 마늘농사를 지었다.

배움에 대한 목마름으로 영주경상전문대 행정학과와 동아대 정치외교학과를 잇달아 졸업했다. 청년 시절 재야단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서 활동하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이후 민중당 활동을 거쳐 고향인 남해로 내려와 남해신문을 창간하고 본격적인 지역 활동에 나섰다.

서민과 평등이 정책 핵심

지역주의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으며 선거에 출마해 당선한 것보다 떨어진 경험이 더 많다는 점까지 닮았다. 그는 우스갯소리로 “선거에 8번 나가서 3번 이기고 5번 졌다”며 “이제 더 이상은 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1995년 36세로 남해군수에 당선돼 전국 최연소 기초단체장이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연임에 성공했지만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았다.

2004년 총선에 열린우리당 후보로 나서 낙선한 것을 시작으로, 경남도지사 후보로 출마했던 2002년(민주당)과 2006년(열린우리당)에서 내리 고배를 마셨다. 2008년 당내 지역주의를 비판하며 대통합민주신당을 탈당한 뒤 무소속으로 총선에 출마했지만 또다시 낙선했다. 하지만 그는 2010년 지방선거에서 야권 단일후보로 마침내 도지사에 당선됐다.

대선 출정식에서 ‘평등국가 건설’을 출사표로 던진 것에서 보듯, 그의 정책 핵심은 ‘서민’과 ‘평등’으로 요약된다. 대선 슬로건도 ‘내게 힘이 되는 나라, 평등국가를 향하여’로 정했다. 그는 대선 출마 선언문에서 “국민을 화나게 하는 모든 기득권과 불평등한 제도를 개선하자는 것이 일관된 주장이었다”며 “너를 이겨야 내가 사는 ‘정글의 법칙’을 버리고 네가 살아야 나도 살 수 있는 ‘숲의 법칙’을 도입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신삼균주의’라 하는 지역균형발전, 사회균형발전, 남북균형발전 등 3대 국정운영철학을 바탕으로 5대 생활물가(유류비, 통신비, 주거비, 교육비, 의료비) 안정과 7대 분야 혁신정책을 제시했다. 7대 분야 혁신정책으로 △서민·중산층 기본적 생활 보장 △학비 걱정 없는 나라 △모든 사회적 자원 일자리 창출과 연계 △노후를 보장하는 나라 △새로운 분권의 시대 △한반도경제공동체 △생태·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국가체제를 제시했다.

지난 5년간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여야를 망라해 차기 대선 주자군에서 독주를 거듭할 때 야권은 지리멸렬을 면치 못했다. 야권 지지층은 한때 분당 재보궐선거 승리를 이끈 손학규 상임고문에게 갔다가 이내 ‘문재인 대망론’에 기울었다. 하지만 이에도 만족하지 못한 탓에 ‘안철수 신드롬’이 여전하다. 그런 가운데 ‘김두관’이란 이름 석 자가 야권 지지층 사이에서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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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일│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scud2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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