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호

조국 사면? 尹 정권의 김태우 사면과 무엇이 다른가

대통령 사면권 핵심 정신은 적에게 베푸는 ‘대승적 용서’

  •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jeongtaeroh@ries.or.kr

    입력2025-08-02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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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 마그나카르타, 왕의 고유 권한이었던 사면

    • 미국 헌법에서 대통령의 권리로 재탄생

    • 미국 세우며 영국 사면권 가져온 진짜 이유

    • 반역자마저 용서해 ‘사회 통합’ 이루려는 시도

    •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내 편 감싸기’에 악용돼

    • 내 편보다는 적을 먼저 용서하는 사면 돼야

    “사면 제도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 측면을 더 유연하게 바라보고 사회·국민 통합을 위해 넓게 판단할 때가 됐다.”

    친이재명계 핵심으로 꼽히는 김영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7월 31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한 말이다. “조국 부부에 관한 수사가 윤석열 검찰의 정치적인 판단과 정치 수사에 의해서 진행됐던 것이기 때문에 정상화가 필요하다고 본다”라며,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를 8·15 특사로 사면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낸 것이다.

    2024년 11월 국회 본회의장에서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왼쪽)와 이재명 대통령(당시 의원)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동아DB

    2024년 11월 국회 본회의장에서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왼쪽)와 이재명 대통령(당시 의원)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동아DB

    이 같은 주장은 점점 더 여권 내에서 힘을 받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고민정 의원 역시 7월 29일 페이스북을 통해 “조국의 사면을 많은 이들이 바라는 이유는 검찰 개혁을 요구했던 우리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썼다. 민주당 소속인 김동연 경기지사, 박지원 의원 등이 공개적으로 조국 사면을 언급했고, 원칙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할 우원식 국회의장 역시 조 전 대표를 면회하며 사실상 조국 사면을 요청하고 나섰다.

    범여권에서 계파를 막론하여 이러한 요구가 등장한 데에는 나름의 정치적 셈법이 작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 각각을 따지고 판단하는 것은 다른 이의 몫으로 남겨두고, 이 지면에서는 조금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대체 사면권이란 무엇이며, 왜 존재하고, 어떻게 써야 하는 것일까.

    마그나카르타에서 시작된 지도자의 권리 사면

    김 의원을 비롯해 조국 사면을 요구하는 이들 모두가 인정하고 있는 사실부터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사면권은 대통령의 결단으로 행사되어야 하는 초법적 권리다. 이미 내려진 판결을 뒤엎는 것이기 때문이다. 입법부가 만든 법에 따라 사법부가 내린 판결로 처벌받는 범죄자를 갑자기 무죄로 만들어 석방하는 것이 사면권이다. 요컨대 민주 법치국가의 상식을 깨뜨리는 제도다.



    이러한 제도가 존재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국왕의 말이 곧 법이던 시절의 제도적 관성이 남아 있는 것이다. 영국에서 마그나 카르타(대헌장)가 선언되고 왕의 권리가 점점 줄어들던 시절로 돌아가 보자. 왕은 자의적으로 누군가를 체포 구금 처벌할 수 없게 됐다. 그러자 헨리 8세는 1535년 의회에 사면권을 요구했다. 의회는 그들이 만든 법에 따라 사람을 처벌할 권리를 갖게 됐으니, 왕은 왕의 뜻으로 그 벌을 면하게 해줄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논리였다.

    영국에서 1215년 채택돼 근대 민주주의 헌법의 토대가 된 마그나카르타(대헌장)의  사본. 대영박물관

    영국에서 1215년 채택돼 근대 민주주의 헌법의 토대가 된 마그나카르타(대헌장)의 사본. 대영박물관

    문제는 왕이 사면할 수 있는 대상의 범위가 어디까지냐 하는 부분이었다. 헨리 8세는 의회가 탄핵한 관리나 공직자에 대해서도 사면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말하자면, 의회는 그들이 구성한 내각에 왕이 심어놓은 ‘하수인’을 잘라낼 수 없게 됐다는 뜻이다. 의회는 지속적으로 반발해 사면권 대상에서 탄핵당한 사람은 제외했다.

    세월이 흘렀다. 영국의 신교도들이 종교 탄압을 피해 아메리카 식민지에 정착하더니 결국 독립을 선언했다. 아메리카의 13개 주는 연방 정부를 구성하고 그 대표자로 4년 임기의 대통령을 선출하기로 했다. 말하자면 세습이 아니라 투표로 결정되는 ‘상징적 왕’을 뽑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연방 대통령에게는 사면권이 주어졌다. 미국 연방헌법 제2조 2항에 “대통령은 탄핵의 경우를 제외하고 연방 법을 어기고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에게 형의 집행 정지 및 사면을 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고 명시했다.

    여기서 ‘탄핵의 경우를 제외’한다는 구절이 들어가 있는 이유를 이제 이해할 수 있다. 영국에서 발전한 사면권에 대한 논리가 미국 대통령의 경우에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이후 건국된 수많은 국가의 대통령 역시 사면권을 갖게 됐다. 대한민국의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영국이 싫어서, 왕의 통치가 싫어서,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식민지까지 간 사람들이, 왜 대통령에게 전제 군주의 초법적인 권리를 다시 부여했을까.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 있다면 대통령의 사면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사회통합을 위해 적을 용서하는 도구

    이 의문을 해결하려면 미국 건국의 설계도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흔히 ‘연방주의자 논설’로 번역되는 ‘페더럴리스트(The Federalist)’다. 알렉산더 해밀턴, 제임스 매디슨, 존 제이라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익명으로 신문에 기고한 글을 모은 이 논설집은 세계 최초로 대통령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는 과업 앞에서 발생한 논란과 고민을 총 85편의 논고 속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연방주의자 논설은 당시 익명으로 발표됐다. 하지만 문체 분석을 통해 지금은 그 원저자가 모두 확인됐다. 오늘 살펴볼 것은 알렉산더 해밀턴이 작성한 74번 논설문이다. 대통령의 군 통수권과 사면권을 동시에 다룬다. 합중국의 대통령은 당연하고도 마땅히 미 연방의 모든 군대 및 현역으로 소집된 민병대의 총사령관이 되며, 되도록 제약받지 않고 사면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해밀턴의 주장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초대 재무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해밀턴이 10달러화에 그려져 있다. 동아DB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자 초대 재무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해밀턴이 10달러화에 그려져 있다. 동아DB

    왜 해밀턴은 대통령의 군 통수권과 사면권을 하나의 항목에서 다루었을까. 그 이유는 논설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사면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반역죄와 관련해서만 이견이 제시되었다.” 조국의 반역자, 이 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총부리를 우리나라에 겨눈 자는, 대통령 혼자만의 판단으로 사면할 수 없다는 반론이 등장한 것이다.

    이 반론에는 합리적인 측면이 있다. 반역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범죄다. 특정인이나 집단을 죽이거나 해치는 차원을 넘어, 국가 공동체 전체를 향해 반기를 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반역자는 온 국민을 피해자로 만든 자다. 그러니 대통령 혼자만의 판단으로 반역자를 사면할 수 있게 해서는 안 된다. 반역자에 대해서는 사면권 행사에 의회의 승인을 요하게 해야 마땅하다.

    대통령의 사면권은 그 자체가 초법적 권한이다. 일개 잡범을 풀어주기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미국을 만든 사람들, 그중에서도 건국의 아버지 알렉산더 해밀턴의 머릿속에 그런 경우는 애초에 염두에 있지도 않았다.

    대통령은 초법적 권력을 통해 누구를 용서해야 할까. 온 나라의 시민들이, 그 시민들의 대표자인 의회가, 절대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반대하는 반역자다. 바로 그런 자를 대통령은 자신의 판단하에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연방을 지킬 수 있다. 해밀턴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자.

    “반역죄의 경우에 사면권을 최고 집행관(대통령)에게 부여해야 할 가장 주된 논거는 다음과 같다. 즉 반란과 폭동의 와중에는 반란자들에 대한 시의적절한 사면 제안을 통해 국가의 평안을 회복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들이 흔히 존재한다. 그런 순간을 활용하지 않고 지나가게 방치한다면, 그 뒤에 다시 그런 순간을 불러오기란 불가능하다.”

    해밀턴의 이 말은 일견 우리의 도덕 감정을 거스른다. 나라에 반기를 든 자, 무기를 들어 이 나라를 뒤집어엎으려 한 자를, 대통령이 자신만의 결단으로 용서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단 말인가. 반란군이나 폭도에게 주어져야 할 것은 죽음의 처벌 뿐 아니던가.

    해밀턴뿐만이 아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우리의 ‘상식’을 넘어서는 현자들이었다. 비록 조금 전까지 나의 목숨을 노리고 달려든 자라 해도, 오히려 그가 반역과 폭동이라는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기에, 용서하고 포용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결국 미국 대통령은 해밀턴의 주장대로 제약받지 않는 사면권을 지니게 됐다.

    그 판단이 현명한 것이었음이 판명될 때까지는 채 100년도 걸리지 않았다. 남부의 7개 주가 연방을 탈퇴하고 아메리카 연합국을 건설하더니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항의 섬터 요새를 포격하면서 남북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남부는 몇몇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북부와의 국력 차이를 이겨낼 수 없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참혹한 전쟁은 결국 4년 3개월 6일 만에 북부의 승리로 끝났다.

    남부를 향한 북부인들의 분노와 증오는 엄청났다. 전쟁에서 진 남부인들의 가슴에 남은 앙금 역시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다시 하나가 돼야 했다. 앞으로도 같은 깃발 아래, 하나의 연방 정부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이었다. 그렇다면 선택은 하나뿐이다. 당장의 증오와 분노를 이겨내고 ‘네 이웃을 사랑’하며 ‘너의 적을 용서’하는 것이다.

    조국의 김태우 사면 비판에 담긴 조국 사면 안 되는 이유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해밀턴이 미래의 대통령에게 요구했던 바로 그 역할을 철저히 수행했다. 탈영한 북군 병사, 포로가 됐지만 더 싸울 의지를 잃은 남군 병사, 심지어 남군의 장교들까지도 사면했다.

    남북전쟁 종전 5일 만에 링컨은 포드 극장에서 존 윌크스 부스 일당에게 암살당했다. 하지만 링컨의 뜻은 그대로 계승됐다. 대통령직을 계승한 앤드루 존슨이 링컨의 뜻대로 1868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기해 미합중국에 대항해 반군을 결성했던 이들에 대한 포괄적이고 전면적인 사면령을 내렸다. 남부 연합의 대통령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도 그렇게 사면받았다. 말하자면 ‘내란 수괴’가 전쟁 직후 사면을 받은 셈이다.

    물론 이것은 이상적인 이야기다. 최근 미국에서도 사면권이 남발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첫 번째 임기 종료를 앞두고 자기 측근 전원을 포괄적으로 사면한 것은 물론, 트럼프를 그토록 비판하던 조 바이든 전 대통령도 역시 같은 길을 걸었다. 바이든 전 대통령은 동생 등 가족 5명을 사면했다. 트럼프 2기도 무분별한 사면 파티로 점철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대통령의 사면권 자체에 대한 찬반 논쟁이 불거지는 것은 그런 현실 때문이다.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가장 왼쪽)이 그의 아들 헌터와 함께 있다. 바이든 전 대통령은  임기 말미에 불법 총기 소지와 탈세 혐의를 받아 온 헌터에 대한 사면을 공식 발표했다.  AP뉴시스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가장 왼쪽)이 그의 아들 헌터와 함께 있다. 바이든 전 대통령은  임기 말미에 불법 총기 소지와 탈세 혐의를 받아 온 헌터에 대한 사면을 공식 발표했다.  AP뉴시스

    우리의 현실은 어떨까. 개탄을 넘어 좌절할 수밖에 없다. 사면권의 남용이 당연시되고 있다. 사면권은 ‘적’을 용서함으로써 ‘공동체’를 회복하라고 대통령에게 주어지는 초법적 권력이지만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적’을 사면해 정치적으로 유리하게 고지를 확립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상황이 더 악화했다. ‘우리 편’의 죄를 탕감해 주기 위해 대통령에게 주어진 권리로 악용되고 있다.

    하지만 사면 제도가 가진 본래의 이상을 포기할 수는 없다. 바람직한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이상을 완전히 포기한다면 정치는 그 존재 이유를 잃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이미 우리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꿈꾸었고 역사에서 실제로 구현된 바람직한 사면에 대한 정의가 있다. ‘우리 편’보다 ‘적’을 먼저 용서할 것. 설령 그 적이 ‘내란 수괴’라 해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용서할 것. 사면권을 행사할 때는 국가를, 공동체의 미래를 최우선으로 고민할 것. 적절한 시기를 놓치지 말 것.

    공정하게 하기 위해 이 말은 반드시 해야겠다. 사면권의 남용은 현 정권에서만의 문제가 아니다. 윤석열 정부에서도 사면권은 남용된 바 있다. 이미 유죄 판결을 받았던 김태우 전 서울시 강서구청장을 사면하고 보궐선거에 다시 공천한 사례가 있으니 말이다. 당시만 해도 정권 초기였으나 승승장구하던 윤석열 전 대통령의 상징 자본은 그렇게 망가지기 시작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조국 전 대표를 사면한다면 유사한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 대통령이 조국을 사면하는 것은 19세기의 링컨이 했던 것과 같은 ‘대승적 용서’와 거리가 멀다. 21세기의 트럼프가 하는 ‘내 편 감싸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김태우 전 강서구청장은  2023년 5월 18일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형에 처해졌으나 같은 해 8월 15일 윤석열 전 대통령이 그를 사면 복권했다. 동아DB

    김태우 전 강서구청장은  2023년 5월 18일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형에 처해졌으나 같은 해 8월 15일 윤석열 전 대통령이 그를 사면 복권했다. 동아DB

    사면권은 그런 식으로 행사하라고 존재하는 게 아니다. 사면권의 오남용은 반드시 그 대가를 불러온다. 2023년 8월 14일, 윤 전 대통령의 김태우 사면을 두고, 조국 전 대표는 페이스북을 통해 폭포수 같은 비판을 쏟아낸 바 있다. 조국 사면이 정치권의 뜨거운 화두로 떠오른 지금은 어떨까. 혼돈을 피하기 위해 고유명사와 몇몇 단어를 가리고 읽어보도록 하자. ‘조국 사면’에 대해 이보다 더 좋은 논평을 찾기란 어려울 듯하다.

    “□□□ 정권은 자기편에게 불리한 판결은 ‘정치 판결’ 또는 ‘□□ 판결’이라고 비난하고, 법원이 아니라고 해도 □□□를 ‘□□□□□’라고 우긴다. □ 정권에게 법원 판결에 대한 존중은 “그때그때 달라요”일 뿐이다. 대법원의 □□□ □□□□□ 판결을 간단히 무시하는 결정을 내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컨대, □ 정권은 ‘법치’를 ‘사유화’하고 있다. 그 결과 ‘법치’는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아니라 “법을 이용한 지배”(rule by law)로 전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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