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호

정국이 혼란해지면 북한은 달라질 수 있다

노태우 전대통령 2차 서면 인터뷰

  • 입력2006-08-08 12: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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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아’는 9월 초 노태우 전대통령측에 2차 인터뷰를 요청했다. 1차 인터뷰의 내용을 보강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노전대통령측은 “전직 대통령이 현 정부의 정책을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로 ‘불가’를 통보해 왔다.

    ‘신동아’는 한가위 직전 노전대통령측에 “남북관계와 북방정책에 관한 부분만이라도 답변해 달라”는 서면 질의서를 다시 보냈다. 그러자 노전대통령측은 ‘신동아’가 보낸 10개의 질문 가운데 6개 문항에 답하겠다는 의견을 전해왔다.

    ―제6공화국 시절의 북한과 오늘의 북한을 비교해 주십시오.

    “내가 대통령으로 있던 제6공화국 시절, 북한은 한마디로 진퇴양난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은 과거와 변함없이‘남한은 없다. 한반도의 유일한 정부는 북한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미국, 일본과 접촉을 시도했다. 하지만 미국은 우리와 변함없이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일본은 좀처럼 북한과 관계 개선을 원하지 않는 눈치였다.

    게다가 자신들을 지지하던 소련, 중국마저 북한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한국과 가까워지는 상황에 이르자 북한으로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다. 북한이 만일 미·일과 접촉할 수 있고,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면 우리와 대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은 우리와 중국, 소련이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사실상 중·소와 북한의 군사 협력이 차단된 것이다. 내가 취임할 당시 북한에는 미그기가 740대, 폭격기가 80대나 있었다. 그런데 북방 정책이 성공한 이후 북한에는 미그기가 단 1대도 들어가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때 우리가‘가슴을 활짝 열고 대화하겠다’고 하니까 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DJ 구상에 동의한다”

    우리는 북한이 직접 대화에 응하고 난 뒤에는 미국과 접촉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주었다. 북한이 중단을 요구해온 팀 스피리트 훈련도 한 차례 건너뛰고 ‘북한측이 침략 훈련인지, 방어 훈련인지 직접 와서 보라’고 초청했다.

    하지만 북한측은 내 임기가 끝나가면서 태도가 달라졌다. 팀 스피리트 훈련의 완전 철폐를 주장하며, 이를 남북 대화의 절대 조건으로 내세웠다. 또 남북기본합의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려는 등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북한의 이와 같은 변화에 “팀 스피리트 훈련은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으며, 그것은 결코 협상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뜻을 일깨워주기 위해 1992년 훈련을 재개했다. 북한이 상응하는 협조를 하지 않으면 다시 강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북한은 또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발생한 ‘이선실 간첩 사건’을 남한측의 ‘조작’이라고 주장하며 남북 대화를 거부했다. 그리고 팀 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하자 비난 공세를 퍼부었다.

    나는 과거 경험으로 보아 북한을 상대하는 데 있어서는 우리 국력이 우위에 있어야 하며 언제나 정부가 주 창구가 돼야 한다고 믿고 있다.

    최근 북한이 변화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고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는 등 남북한 관계가 크게 호전되고 있어 기쁘게 생각한다. 김 대통령은 우리가 일부 양보하더라도 통일을 위한 대의적 차원에서 북한을 대하자는 구상인 것 같다. 나도 김 대통령의 구상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북한은 철저히 전략·전술적 차원에서 우리를 대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달라고 당부하고 싶다. 우리가 힘이 약해지거나, 틈을 보이거나, 또 김대통령 집권 말기가 되어 정국 혼란이라도 발생하면 북한의 태도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북한이 공산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한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6공화국 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김영삼 정부 시절, 북한은 바로 그런 점을 잘 확인시켜 주지 않았던가. 김영삼 정부는 이산가족 면담, 면회소 설치, 서신 왕래 등을 기대하고 이인모 노인을 풀어주었지만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 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정책의 연속성이 단절된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핵 문제 협상 때는 완전히 우리를 제쳐 놓지 않았는가.

    정권 인계 과정에 나는 다음 정부 사람들에게 “우리가 북방 정책의 어려운 길을 닦았으니 다음 정권은 확대하는 쪽으로 나가야 한다”고 누누이 당부했다.

    그런데 다음 정권은 남북관계를 추진하면서 어렵게 이끌어낸 남북기본합의서를 단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철두철미한 단절이었다. 한 정권이 끝나고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서 남북관계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우를 다시는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남북기본합의서 성사 비화

    ―91년 남북기본합의서 도출 과정에 가장 중점을 두었던 부분과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입니까.

    “북방정책이 결실을 맺으면서 북한은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는지 협상 테이블에 나왔다. 우리측 요구대로 고분고분 대화에 응해 남북 적십자회담, 남북 체육회담, 남북 국회회담, 남북 고위급회담 등 모든 분야에서 대화가 시작됐다. 특히 남북한 총리가 참여하는 남북 고위급회담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열리게 되었고, 그 결과 1991년 12월13일에는 남북기본합의서가 만들어졌다.

    남북 고위급회담을 추진하면서 나는 “한반도의 장기적인 평화와 안정, 나아가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철학을 담아 완벽한 계획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남북기본합의서 도출을 위해 독일의 기본합의서를 참고하라는 당부도 했다. 그래서 통일원이 주축이 돼 전문가들을 참여시켜 안을 만들고, 북한측과 협상을 통해 최종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남북기본합의서에서 가장 중요시했던 전제는 당사자간의 해결 원칙과 상호주의 철학이었다. 당시 합의서를 도출하는 과정에 우리는 전무후무한 주도권을 행사했다. 북한은 회담 초기 미·북 평화협정 체결과 미군 철수를 주장하고 합의서의 명칭도 ‘북·남’이 들어가는 ‘북남 불가침과 화해·협력에 관한 선언’을 제의하는 등 고집을 부렸으나 회담이 진행되면서 우리측 요구에 따라주었다.

    돈 오버도퍼 ‘워싱턴 포스트’ 기자가 쓴 ‘두 개의 코리아’는 당시 에피소드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협정을 발효시키는 조인식을 마치고 평양에서 개성까지 오는 승용차 안에서 북한의 김영철 소장은 한국의 박용옥 소장에게 문안의 90%가 남한측 주장이니만큼 ‘이것은 당신네 협정이지 우리 협정이 아니다’라고 불평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한마디로 남북관계의 성전이라 할 수 있다. 남북간에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이 합의서를 근거로 따져야 정당성도 찾을 수 있고 북한도 다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난해 6월 북한이 서해에서 도발을 일으켰을 때도 남북기본합의서를 근거로 따질 수 있었다. 군사 정전 협정서에도 명기되지 않은 서해상의 북방한계선(NLL: North Limit Line)에 대해 기본합의서는 ‘지금까지 지켜온 관행을 인정한다’고 명문화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북한과의 관계에서 골탕을 먹는 것은 이 합의서의 ‘상호주의’ 원칙이 어느새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제4차 고위급 회담에서 북한측 실무자들이 남북한 합의서 내용을 놓고 강경한 입장을 고집한다는 보고를 받고, 김일성이 다음 회담에서는 굴복하고 들어올 것임을 예감할 수 있었다. 김일성은 이란의 후세인이 국제 사회에 도전하다가 어떻게 당했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쌍방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 잠정적으로 형성된 특수 관계”라고 규정했다. 이와 같은 표현에는 이중성이 내포돼 있었다. 우선 ‘북한을 권력 실체로 인정하지만 국가로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 있었다. 또 국가가 아닌 만큼 양측간의 거래가 내부 거래로 간주돼 실리를 찾을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WTO(세계무역기구) 체제하에서 국가 대 국가로 상대하게 되면 우리가 북한을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주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쌀이나 비료를 지원하면 당장 WTO 협정에 위배되는데 그런 불이익을 사전에 피할 수 있는 묘안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국제 사회에서는 양측 모두 국가로 인정받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예컨대 유엔의 표결 과정에서는 두 표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국내법에 의하면 북한은 국가가 아니지만, 대외관계에서는 대등한 주권 국가가 되는 것이다.

    당시 합의서를 체결하면서 큰 어려움은 없었으나 북한의 주장 가운데 군사분계선 일대에서의 무력 증강 금지, 상대방에 대한 정찰 금지, 상대방의 영공·영해 봉쇄 금지, 그리고 남한이 주장한 내용 가운데 서울과 평양의 안전보장 문제 등에 대해서는 합의가 도출되지 않아 추후 군사공동위원회의 협의 사항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불행하게도 합의서는 체결했지만 북한 핵 문제가 대두되면서 남북 대화는 중단되고 말았다.”

    국가보안법은 손질해야

    ―최근 일고 있는 국가 보안법 개정 논쟁을 어떻게 보십니까.

    “법이란 시대 상황을 반영해 만들어지는 것이지, 절대 선이나 절대 지위를 갖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요즘의 대북한 관계 등을 고려해볼 때 과거에 비해 많은 변화가 있으므로 개정의 필요성은 있다고 본다. 최근 상황으로는 남북한 관계 발전에 따라 국가보안법을 손질해야 한다는 데 국민적 합의가 모아지고 있는 것 같다.”

    ―주한미군 철수 논쟁과 반미 감정에 대한 견해를 밝혀주십시오.

    “1989년 10월17일, 나는 백악관에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면서 주한미군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미국이 주한미군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결의는 우리에게 안도감을 주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중 94%가 미군의 한국 주둔을 원하고 있으며, 미국에서도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다. 물론 우리도 미군이 영구히 한국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주한미군은 북한의 남침 위협 저지와 동북아의 군사력 균형 유지를 위하여 필요하다는 인식이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우리나라가 통일된 이후에도 주한미군의 존재가 동북아시아의 군사력 균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고 그것이 우리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최근 일부 주한미군의 범죄로 철수 요구가 북한이 아닌 국내에서 제기되고 그것이 반미감정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발생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한·미간에 협의를 통해서 시급히 법규와 제도를 고쳐야 할 문제지, 주한미군을 철수시켜야 할 사안은 아니라고 본다.”

    ―경의선 철도를 복원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경의선 철도 복구는 이미 내 재임중에 구상했던 것이다. 아쉽게도 당시 여건이 무르익지 않아 실현하지 못했는데, 다행히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면서 추진한다고 하니 기쁘기 그지없다. 현재 공사가 진행중인 영종도 국제공항, 서울-부산 간 고속전철 계획을 마련했을 때 그 안에는 북방정책의 기본 구상이 포함돼 있었다. 고속철도의 기본 구상은 서울에서 부산까지가 아니라 부산에서 서울을 거쳐 평양-신의주-시베리아-유럽까지 연결하는 것이다.

    이제 경의선 철도가 복구되어 연결된다면 나의 이런 북방정책이 또 하나의 결실을 거둔다고 나름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남북한은 어떤 체제의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1989년 9월11일, 나는‘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을 발표했다. 자주, 평화, 민주의 3원칙을 바탕으로 남북연합의 중간 과정을 거쳐 통일 민주공화국을 실현한다는 것이 기본 개념이었다. 통일 과정은 크게 3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남북 정상회담 등 다각적인 대화를 통한 신뢰 구축 단계 → 남북한 각료회의 및 국회의원들에 의한 ‘평의회’ 구성 등 협의기구가 운영되는 남북연합 단계 → 통일 민주공화국 수립 단계 등이 그것이다.

    이 방안은 통일을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해 과도 체제의 단계로서 ‘남북연합’을 제시한 것인데 정상회담을 통해 ‘민족공동체 헌장’을 마련하고 이를 토대로 최고기관인 남북 정상회의를 구성해 남북 각료회의와 남북 평의회를 두며, 실무기관으로서 공동사무처를 두고, 서울과 평양에 상주 연락대표부를 두도록 한다는 것이다.

    남북 평의회에서는 통일 헌법의 초안을 마련해 민주적인 방법과 절차를 거쳐 확정, 공포하고 이 헌법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 국회와 통일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통일 민주공화국을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이 방안은 단일 국가로서의 완전한 통일을 상정하고 북한측 입장을 고려해 남북 평의회 숫자를 인구 비례가 아닌 남북 동수로 규정하는 등 북한측 주장을 적극 수용함으로써 실현 가능성을 높였다는 점에서 과거에 비해 진전된 제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나는 지금도 이 방안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한반도에서 전쟁을 억지하고 평화 정착과 대화, 협력, 교류를 통해 통일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남북관계 구도가 상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첫째, 소련과 중국의 군사 부문에 있어서 대북한 지원 차단, 북한과 중국이 맺은 상호 방위 조약의 유명무실화와 같은 여건 조성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둘째, 대북 균형을 바꾸는 것이다. 단순한 군사적 균형만이 아니라 외교 역량에서의 우위, 민주화를 통한 정치적 우위, 경제·군사 면에서의 우위를 통해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을 종합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셋째, 남북문제는 철저히 당사자 해결 원칙과 상호주의 원칙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넷째, 주도권과 신축성이다. 그 동안의 수동적 입장에서 벗어나 남북대화를 비롯, 비핵화 등의 문제를 우리가 주도권을 잡고 신축성있게 대화로 풀어야 한다.

    이제는 단순하게 통일 그 자체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한민족의 외교 및 경제 영역을 넓히고 통일 과정과 통일 후에 강대국들이 우리에게 협조하는 여건 조성까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참고로 말하면 내 임기 중 통일을 지향하면서 모든 예상 가능한 상황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두었다는 점이다.

    나는 북한 문제는 장기적 안목과 종합적 관점에서 유연하게 대응해야 할 사안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인내심이라고 생각했다.

    독일의 통일 과정을 살펴보면-내가 아는 한-서독의 정보기관이 동독에 침투해서 어떤 공작을 벌인 경우는 없었다. 독일의 전문가들 가운데 동독이 저렇게 빨리 무너지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형태는 다르지만 북한도 동독과 비슷할지 모른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북한군이 휴전선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돌발했을 때는 수백만의 피난민이 넘어오게 될 것이므로 북한 및 통일과 관련해 발생할 수도 있는 모든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우라고 전 정부 부처에 지시했었다.

    나는 통일이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나 대단히 어렵고 힘든 과정이라는 점을 인식해 통일 과정에서 야기되는 시행 착오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제6공화국의 통일 문제는 외교안보 수석실이 담당하고 주무부처로 통일원, 외무부, 국방부, 안기부 등이 관여했다. 하지만 나는 정부의 전 부처가 동시에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예를 들어 남북한 철자법, 화폐, 교통 법규 등 각 분야에 걸쳐 준비해야 할 사항은 수없이 많았다.

    이렇게 준비해 놓은 대책들을 후임 정권이 보완해 나간다면 통일 과정에 혼란과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연희동은 지금 모택동 읽으며 회고록 집필중

    노태우 전대통령은 요즘 회고록 집필에 여념이 없다. 연희동 자택에서 손님을 만나거나 운동하러 나가는 시간을 빼면 회고록을 쓰는 게 주요 일과다. 노전대통령은 두툼한 대학노트에 직접 사안별로 기록하고 있는데, 가끔씩 6공 인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 관계를 확인하기도 한다. 현재 마무리 작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출간 일정은 잡히지 않았다고. 회고록과 관련해 눈길을 끄는 대목은 노전대통령이 최근 일본에서 출간된 ‘모택동 비록’을 탐독했다는 사실.

    연희동에서는 두 달에 한 번씩 ‘육청회’라는 모임이 열린다. ‘육청회’는 ‘육공청와대회’의 준말인데 6공 시절 참모로 일했던 인사들이 부부 동반으로 참석한다. 이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인 운동 모임도 갖고 있다. 이런 자리에서 노전대통령은 시국과 관련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는 후문.

    측근에 따르면 노전대통령은 매우 건강한 상태라고 한다. 집에서는 맨손체조, 밖에서는 테니스와 골프로 꾸준히 몸관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복통으로 고생한 일도 있었다. ‘장떡’을 먹고 탈이 나는 바람에 2주쯤 몹시 고생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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