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요청에 민주연구원장직 수락
“공직 맡지 않겠다”던 말 뒤집어 부담
총선 인재 영입, 장기 정책 연구할 듯
이해찬 대표와 이해관계 맞아떨어져
[조영철 기자]
중년 남성 두 사람의 일본 도쿄 산책 사진이 한동안 한국 정치판에 각인될 것 같다. ‘구’백수는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신’백수는 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이다. 최근 두 사람 사이에 갈등설이 나돌았는데, 활짝 웃고 있는 두 사람 사진은 그것을 뒤집으려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 이 사진을 찍어 3월 12일 페이스북에 올린 이는 스스로 “백수도 아니고 백수도 아닌 것도 아닌 ‘낀’ 백수”라고 표현한 탁현민 대통령행사기획 자문위원.
이 사진은 앞으로 이들의 활동이 본격화됨을 알리는 신호탄 같다. 최근 양 전 비서관은 더불어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 원장을 맡기로 했고, 임 전 실장은 민주당으로 복귀해 내년 총선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 핵심 관계자에 따르면 게이오대 방문교수로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양 전 비서관은 조만간 귀국해 향후 활동을 준비할 것으로 알려졌다.
문 정부에 자극제 될까
탁현민 위원은 3월 1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양정철 전 비서관과 임종석 전 비서실장 사진을 올렸다. [탁현민 페이스북 캡처]
2월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급진전될 것 같은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양국 정상회담은 결렬됐고, 비핵화는 안개속이다. 민생경제는 진보진영에서도 문제점을 지적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다. 경제가 추락하면서 소상공인들이 돌아서고, 20대 청년들 사이에서도 문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음을 여론조사는 알려주고 있다. 더욱이 문 대통령의 또 다른 핵심 측근인 김경수 경남지사가 드루킹 사건으로 법정구속되면서 여권의 위기의식은 더욱 커졌다.
여권 한 관계자는 “이런 상황에서 당·정·청에서 양 전 비서관만큼 ‘군기’를 잡을 만한 능력을 가진 이가 없어 보인다”며 그의 정계 복귀가 집권 3년차에 접어든 문재인 정부에 일종의 자극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양 전 비서관은 “공직을 맡지 않겠다”고 한 자신의 말을 뒤집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여전히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양 전 비서관과 통화한 적이 있는 여권 핵심 관계자는 “의무감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민주연구원장직을 수락한 것 같다”면서 “다만 고민이 깊었던 만큼 아직도 자신의 역할에 대해 조심스러워하는 듯하다”고 전했다.
여권의 중진 의원은 양 전 비서관이 특이한 국내 정치문화의 희생양이라고 봤다.
“양 전 비서관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을 위해 가장 가까이에서 참모 역할을 한 사람이다. 대통령의 생각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당선 뒤 핵심 포스트를 맡아야 대통령을 잘 보좌할 수 있고, 대통령도 국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다. 하지만 양 전 비서관은 권력 집중에 대한 우려와 견제 때문에 2년 가까이 스스로 낭인생활을 하고 있다. 이제라도 청와대에 들어가는 것이 1차적으로 맞다고 생각한다.”
원장직 수락 오래 고민한 이유
하지만 양 전 비서관은 이미 민주연구원장직을 수락하기로 한 마당이다. 앞서의 여권 중진 의원은 양 전 비서관에게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 역할을 맡는 것이라면 당이든 청와대든 소속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기왕 당에서 민주연구원장을 맡기로 했으니 총선을 위한 큰 그림을 그리고 장기 정책과제도 수행해달라”고 당부했다고 말했다.새해 초부터 복귀설이 나돌았던 양 전 비서관은 3월 초 민주연구원장직을 수락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2월 21일자 동아일보는 민주당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양 전 비서관이 민주연구원장 자리를 제안받고 막판 고심 중”이라고 보도했고, 다른 언론들도 그의 복귀를 기정사실화했다. 하지만 2월 25일 양 전 비서관은 귀국 시점과 민주연구원장직 수용 등에 대한 신동아 질문에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러다 2월 28일 북·미회담이 결렬된 뒤 그는 결국 ‘등판’을 결정했고, 3월 초 문 대통령과 이해찬 대표를 만나 원장직 수락을 확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양 전 비서관의 고민이 깊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풀이된다. 우선 민주연구원장 자리를 맡는 게 적절한지에 대한 문제다. 민주연구원장직은 통상 당 대표의 최측근이 맡는 자리다. 전임 추미애 대표가 임명한 김민석 현 민주연구원장은 내년 총선 준비를 위해 원장직을 그만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원장의 임기는 5월 말 완료된다.
민주연구원장 자리는 누가 맡느냐에 따라 비중이 달라질 수 있는 자리다. 김용익 전 원장은 복지국가 등 장기적 국가 플랜을 마련하면서 싱크탱크 역할에 충실했다. 김민석 현 원장은 실용적 정책 전략을 추구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양 전 비서관은 총선을 앞두고 인재를 영입하는 일이나 지역구 여론조사 등을 통해 공천에 힘을 행사할 수도 있다. 좀 더 큰 정치 전략 마련도 가능하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가 미국 사회의 장기 번영을 위한 비전과 경제 전략을 제시하기 위해 만든 해밀턴 프로젝트 같은 대형 연구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모시는 리더의 ‘세포’가 된다
둘째, 이해찬 대표와의 관계 문제다. 양 전 비서관은 지난해 민주당 대표 선거 과정에서 중립을 지키겠다고 선언해 ‘이해찬 지지설’을 부인했다. 당시 양 전 비서관은 최재성 의원 쪽으로 기울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언어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완성”이라고 주장하는 양 전 비서관에게 이 대표의 잦은 말실수는 간과하기 어려운 요소였다. 이 대표가 전당대회를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 ‘문(비서)실장’이라고 발언한 적이 있고, 올해는 장애인 비하 발언과 100년 집권론으로 역풍을 맞기도 했다.민주연구원장직 제안을 두고서도 엇갈리는 주장이 있다. 이 대표가 양 전 비서관에게 직접 민주연구원장 자리를 제안한 것으로 여러 언론이 보도했지만, 이 대표의 측근은 이를 부인했다. 그는 “양 전 비서관의 복귀설이 돌자 당 안팎에서 원장직 얘기가 나왔다”며 “이 대표는 양 전 비서관이 민주당을 위해 열심히 돕겠다고 하니 당을 위해서 일할 수 있도록 하자고 말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결과적으로 민주연구원장 자리가 이 대표와 양 전 비서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교집합이었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양 전 비서관을 곁에 둠으로써 당 장악력을 높이고 청와대와의 소통을 강화할 수 있어 좋고, 양 전 비서관으로선 ‘공직 거부’라는 자신의 말을 어느 정도 지키면서도 총선 승리에 기여할 수 있어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양 전 비서관은 자기가 모시는 리더의 ‘세포’가 된다는 평가가 있다. 절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그림자처럼 충성해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문재인 대통령이 자신의 분신으로 여길 수밖에 없도록 처신해온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이런 특성이 민주당에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당장 당에서 총선용 전략을 짜거나 인재를 영입할 때 청와대 개입설이 불거질 수 있다. 그런 비난을 잠재우려면 이래저래 양 전 비서관의 ‘개인기’가 다시 빛을 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