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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한중수교 25년

한국-대만 단교 25주년… “한국은 배신자”

6·25 파병 혈맹에서 시기·질투의 관계로

  • 최창근|대만 전문 저술가, 한국외국어대 박사과정 caesare21@hanmail.net|

한국-대만 단교 25주년… “한국은 배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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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민족반공연맹 결성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유엔군에 불리하던 전세가 역전됐다. 미군은 38도선을 넘어 북진을 계속했다. 10월 19일, 중공군이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하면서 전세는 재역전됐다. 11월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대만군 파병을 정식 요청했다. 대만군은 중공군 포로 심문과 정보 수집을 위한 소규모 부대를 파병했다.

1953년 7월 6·25전쟁 정전(停戰) 후 이승만과 장제스는 ‘아시아판 나토(NATO)’를 구상했다. 공산주의 위협 속에서 지역 국가들이 집단방위체제를 구성하는 게 골자였으나 미국이 반대했다. 워싱턴은 한국·일본·대만·필리핀 등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안전보장을 약속했다. 이런 가운데 1953년 11월 타이베이에서 회동한 이승만과 장제스는 아시아민족반공연맹(APACL) 결성에 합의했다. 이 연맹은 이듬해 6월 15일 경남 진해에서 민간기구 형식으로 공식 출범했다. 1966년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은 세계반공연맹으로 확대·개편됐다.

‘아시아 반공전선’ 하에서 한국과 대만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다. 전쟁 중이던 1952년 3월 항공협정이 체결됐다. 1961년 3월 3일 무역협정, 1965년 문화협정 서명이 이어졌다. 한국과 대만이 전후(戰後) 복구와 경제개발에 힘쓸 무렵 경제·무역 협력 관계도 긴밀해졌다. 1962년 3월 상공부 상무관이 미국·서독·태국·홍콩과 더불어 대만에 첫 파견됐다. 1965년 11월 한국·대만 무역회담, 1968년 5월 한국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대만 중화민국국제경제합작협회(CIECA) 간 경제협력위원회가 개최됐다. 한국과 대만을 가리켜 ‘혈맹(血盟)’ ‘형제의 나라’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고위층 간 교류도 활발했다. 1966년 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대만을 공식 방문했다. 그해 4월 장제스의 장남 장징궈(蔣經國) 국방부장이 답방 형식으로 한국을 찾았다. 그는 3년 후인 1969년 2월 재차 내한(來韓)했다. 1975년 4월 장제스 총통 국장(國葬) 시 한국 정부는 대통령 명의 조문 담화를 발표했다. 김종필 국무총리, 정일권 국회의장 등이 조문사절로 타이베이를 찾았다.





돌팔매질 당한 한국대사관

대만이 내우외환(內憂外患)을 겪던 1970년대 들어서도 한국과 대만은 우호관계를 지속했다. 1971년 10월 중화민국(대만)의 유엔 퇴출, 1972년 대만·일본 단교, 1979년 대만·미국 단교 등으로 대만의 외교적 고립이 극심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자유중국’ 즉 대만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국교를 유지했다. 그 무렵 대만에 있어 한국은 사우디아라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더불어 3대 핵심 수교국이었다.

한국·대만 관계에 근본적 변화가 생긴 것은 1980년대 들어서다. 1983년 5월 5일, 중국 민항기 납치사건이 발생했다. 춘천 미군 공군기지에 불시착한 납치범들은 대만으로 정치적 망명을 요구했다. 사건 해결을 위해 공로명 외무부 차관보와 선투(沈圖) 중국 민용항공국장이 만났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양국 간 첫 공식 접촉이었다. 회담에서 한중 양국 대표단은 기체 및 인질 중국 송환, 납치범들의 한국 내 재판 후 대만 송환에 합의했다. 대만은 납치범들을 ‘반공 의사’라 칭하며 즉각 송환을 요구했다.

한국 정부의 결정에 대만은 정부 차원에서 항의했고, 타이베이 시민들은 한국대사관 앞에서 태극기를 찢으며 시위를 벌였다. 이듬해 4월 7일, 아시아 청소년 농구선수권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됐다. 대만은 이때 ‘중화 타이베이(Chinese Taipei)’ 국호로 국제 스포츠 무대에 복귀했다. 중국과 대만이 동시 참가한 대회 개막식에서 대회운영위원회는 중국대표팀의 오성홍기 사용을 허락한 반면 대만대표팀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규정을 원용해 청천백일기 사용을 불허했다. 대만대표팀은 이 같은 조치에 항의하면서 대회를 보이콧하고 철수했다. 이 사건은 대만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으며 반한(反韓) 감정이 들끓었다. 다시금 타이베이 한국대사관은 시위대의 돌팔매질을 당했다. 4년 후인 1988년 7월 노태우 정부는 종전의 ‘중공(中共)’을 중국으로, ‘중국’ ‘중화민국’ ‘자유중국’을 ‘대만’으로 바꾸어 부르기로 했다. 대만 정부는 “공식수교국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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