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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로 본 중국 | 대만

변화의 태풍, 중국 ‘돈맛’ 이겨낼까

수난의 ‘반쪽 국가’

  • 글 · 사진 김용한 | yonghankim789@gmail.com

변화의 태풍, 중국 ‘돈맛’ 이겨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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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만 사람들이 “나는 차이니즈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데는, 자신들은 중국인과 달리 선진 경제, 우아한 사회, 고상한 문화를 누린다는 자부심이 깔려 있다. 대만은 지난 총통선거에서 차이잉원(蔡英文)을 선택함으로써 중국 의존 일변도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를 비쳤다. 토네이도 같은 양안관계는 다시금 시험대에 올랐다.
대만 남자와 중국 여자가 만나 마음을 통하고 몸을 통하고 정을 통하게 됐다(三通). 둘이 처음 관계를 맺는 순간, 대만 남자가 감격에 겨워 외쳤다. “대만이 대륙을 통일했어!” 그러자 중국 여자가 맞받아쳤다. “천만에. 대만은 중국에 완전 포위됐고, 두 개의 작은 섬 진먼(金門)과 마쭈(馬祖)만 가까스로 포위를 면했지.”
가장 사적인 연인관계도 쉽게 정치 관계로 변하는 곳. 중국인은 ‘중화인민공화국의 23번째 성’인 대만성(臺灣省)으로 여기고, 대만인은 쑨원의 적통을 이어받은 중화민국으로 여기는 곳. 대만이다.



정치·문화사적 이름  

대만의 약칭은 ‘땅 이름 대(台, 번체자는 臺)’다. 폴리네시아인 등 다양한 원주민이 살던 대만에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찾아왔다. 시라야족 원주민은 희한하게 생긴 네덜란드인을 ‘타이오안’(외국인)이라 불렀고, 네덜란드인은 이를 땅 이름이라 여겼다.
사람은 가도 이름은 남았다. 훗날 네덜란드인을 몰아낸 중국인은 이 이름을 음차해 중국식 명칭 ‘타이완(臺灣)’을 만들었다.
대만이라는 이름엔 많은 사연이 담겼다. 원주민과 네덜란드인의 만남에서 만들어진 이 이름은, 대만이 다양한 사람과 문화가 만나는 섬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이 이름이 원주민의 말에서 네덜란드인의 로마자 표기로 옮겨졌다가, 다시 중국인의 한자로 바뀐 것은 섬의 주도권을 잡은 세력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즉 ‘타이완’은 정치사적, 문화사적 이름이다.
대만 섬은 한반도처럼 중국 대륙과 하나였다. 1만 년 전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한반도는 황해가 생겨 반도가 되고, 대만은 대만해협이 생겨 섬이 됐다. 해수면이 상승해도 가라앉지 않은 데서 보듯 전체 면적의 64%가 산이다. 100개가 넘는 산은 평균해발 3000m이고, 최고봉인 위산(玉山)은 3952m의 높이를 자랑한다. 환태평양 화산대라 지진이 잦지만 온천도 많다. 북회귀선은 대만 북부를 온대습윤 지역, 남부를 아열대 지역으로 가른다. 작은 섬이지만 식생이 풍부하고 다양한 작물을 기르기 좋다.
180km의 대만해협 덕분에 대만은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나름의 독자성을 지킬 수 있었다. 태평양권이라 일본, 동남아 등과 왕래하기도 좋다. 섬인 만큼 대만은 뱃사람들과의 인연을 떼려야 뗄 수 없다. 대만의 역사는 바다를 건너온 정복자들이 교체돼온 역사였다.  
‘태평양의 왕자’ 폴리네시아인은 바닷물에 손을 담그기만 해도 수평선 너머 섬까지의 거리와 방위를 알 정도로 항해술이 뛰어났다. 이들의 대양 항해는 오늘날의 우주여행에 맞먹는 스케일이었다. 폴리네시아인은 대만은 물론 필리핀, 말레이시아, 호주, 뉴질랜드, 하와이, 통가 등을 두루 누볐다. 이들의 흔적은 언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스트로네시아어(Austronesian Languages)족 또는 남도어(南島語)족은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 오세아니아의 뉴질랜드, 통가, 동남아의 말레이어, 타갈로그어(필리핀 원주민 언어) 등 광범위한 지역에 퍼져 있다. 특히 대만은 모든 종류의 남도어족이 다 살고 있다.



최초의 정복자

바다에 살던 해양민족은 대만에서 정착 생활을 하며 평지에 사는 평포족과 산에 사는 고산족으로 변했다. 여기에 중국인들도 찾아와 더러는 정착해 농사를 지었고, 더러는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대만을 거점으로 밀무역과 해적질을 했다.
이때만 해도 대만에는 확고한 지배자가 없었다. 대만의 첫 공식 지배 세력은 생뚱맞게도 멀고먼 나라 네덜란드였다. 대항해시대를 연 유럽은 중국과 인도 무역을 위한 거점 마련에 열을 올린다. 선발주자 포르투갈은 중국 최대의 무역항 광저우와 가까운 마카오에 일찍 터를 잡았고, 후발주자 네덜란드는 대만을 거점으로 삼았다. 대만은 푸젠과 매우 가까울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을 잇는 중간 지점으로서 중일무역에도 적합했다.
1624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대만을 점령한 뒤부터 중국인들이 본격적으로 늘어났다. 대만 원주민은 수도 적고 생산력도 낮았기에 주둔군은 필요한 만큼의 식량을 충분히 확보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네덜란드는 중국인들에게 농토와 농기구를 지원하며 이주를 장려했다. 때마침 명말청초 흉년과 전쟁에 시달리던 중국인이 대거 대만으로 건너왔다.
타고난 일꾼인 중국인은 잠자던 대만을 깨웠다. 점령 초기 동남아, 일본에서 식량을 수입하던 대만은 곧 사탕수수, 쌀 등을 수출했다. 대만의 급속한 농업생산력 발달은 중국인의 급속한 이주와 맞물렸다. 따라서 역사가 토니오 안드레이드는 대만 사람이 ‘중국인’이 된 것은 네덜란드가 대만을 식민지로 삼은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태평양에 놓인 대만은 중계무역으로서도 최적지였다. 네덜란드는 중국, 일본, 동남아, 중동과의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당시 동인도회사  사원 중 표류하다 조선까지 흘러들어온 사람이 우리에게도 친숙한 벨테브레(박연)와 하멜이다. 네덜란드의 활발한 해상무역 활동이 엿보인다.





정성공 견강부회

그러나 네덜란드의 통치는 오래가지 않았다. 푸젠의 실력자 정성공은 반청복명(反清復明) 전쟁을 일으켰다가 청나라에 패했다. 정성공은 바다로 격리돼 청의 공세를 피할 수 있으면서 언제라도 다시 대륙으로 쉽게 갈 수 있는 대만을 거점화하기로 했다. 1661년 정성공은 ‘홍모귀’(紅毛鬼, 네덜란드인)를 물리치고 마침내 대만의 왕이 된다.
훗날 중국 공산당은 정성공을 칭송한다. 정성공은 푸젠성 출신으로서 외세를 물리치고 대만을 정복했으니, 대륙이 대만을 정복한 모범사례다. 대만 국민당도 정성공을 떠받든다. 정성공은 대만을 근거지로 대륙 본토의 야만스러운 정부에 굴하지 않고 항쟁을 펼친 만큼 대만이 대륙을 정벌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일본 식민통치자 역시 정성공을 좋아했다. 정성공은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대만을 정복한 최초의 ‘일본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1898년 일본의 대만총독은 부임하자마자 정성공의 사당을 참배했다. 중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의 아들, 해적 가문의 후예이며 해상무역상이던 정성공의 복잡한 배경은 대만의 복잡 미묘한 역사를 반영한다.
정성공은 한결같이 반청복명을 꿈꿨지만, 청과 대만의 세력차는 너무나 컸다. 정성공의 아들 정경은 청의 패권을 인정하되 대만의 독립성을 지키는 현실주의 노선을 택했다. 정경은 사신을 보내 “조선의 예를 따라 삭발하지 않고 다만 신하를 칭하며 공납을 바치는 선에서 관계 유지를 희망”했다. 그러나 청은 이를 거부하고 만주식 변발을 하고 투항하기를 원했다. 조선은 병자호란 패전 후 굴욕적인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했으되 청에 협력하자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청은 대만이 조선과 달리 중국의 영토임을 못 박았다.
다만 청은 반란자의 집합소인 대만을 토벌하고자 한 것이지, 대만 섬 그 자체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었다. 탁월한 수군제독 시랑이 대만을 정복했을 때 청은 대만인을 이주시켜 섬을 아예 비워버릴 생각을 했다. 그러나 시랑은 대만의 가치를 꿰뚫어보고 반대 상소를 올렸다. 대만은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해 경제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장쑤, 저장, 푸젠, 광둥 등 연해지역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로 긴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시랑의 말은 정확했다. 먼 훗날 이 땅에 눈독을 들여 병약한 청나라 대신 대만을 차지한 것은 신흥 열강으로 부상하던 일본이었다.


孔廟에서 코스프레

2014년 대만 에바(EVA)항공의 타이베이행 비행기에 올랐다. 항공권에 헬로키티가 그려져 있어 깜찍했다. 그뿐 아니라 기체 전체에 헬로키티를 그려 넣었고, 기내 좌석에도 헬로키티 쿠션이 놓여 있었다. 기내식의 티슈, 아이스크림, 심지어 샐러드 안의 어묵도 헬로키티 상품이었다.
대만 지하철의 마스코트는 일본 만화풍의 귀여운 여자 캐릭터였다. 일본 걸그룹 AKB-48 상점 광고도 자주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가오슝의 공묘(孔廟) 안에 ‘코스프레’ 하는 여성이 많았다는 거다. 공묘가 뭔가? 중국의 영원한 스승 공자의 사당, 즉 중화 문명의 자존심이라 할 만한 곳이다. 그런 곳에서 대표적 일본 문화 활동인 코스프레를 하다니! 대만인들의 일본 문화 사랑은 곳곳에서 눈에 들어왔다.
같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겪었으면서도 한국과 대만의 대일(對日) 감정은 사뭇 다르다. 한국이 일본에 여전히 적개심을 품고 있다면 대만은 일본에 친근감을 갖고 있다고 할까. 일본은 대만에서 문관(文官) 위주의 문화통치를 했고, 수탈을 비교적 적게 하고 근대화의 혜택을 많이 줘서 일본의 과(過)보다 공(功)이 크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식민통치는 식민통치다. 철도와 항만을 건설한 것은 대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 군대를 대만에 신속히 전개하고 대만 물자를 일본으로 더 많이 수탈해가기 위해서였다.
일제가 대만을 할양받기는 했지만, 점령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일본군이 타이베이에서 타이난까지 진군하는 데 4개월이 걸렸을 만큼 대만의 저항은 격렬했다. 점령 후에도 소요가 빈발해 일본은 1억 원을 받고 대만을 프랑스에 팔 것을 검토하기도 했다. 일본 부역자에 대한 시선도 곱지 않았다. 대만 소설가 정칭원은 ‘흰 코 너구리’에서 그 시절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당시 대만 사람들은 일본인을 다리 넷 달린 개라고 그랬는데, 일본인을 위해 일하는 주구(走狗)는 그만도 못하다는 의미에서 다리 셋 달린 놈이라고 했지.”
대만의 대일 이미지가 좋아진 것은 일본 자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국민당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일본인이 비우고 간 고급관료, 사업가 자리를 죄다 국민당이 채웠다. 대만인은 여전히 ‘2등 국민’일 뿐이었다. 일제가 이른바 ‘대동아전쟁’ 때문에 대만의 물자를 수탈한 것처럼, 국민당은 대륙의 국공내전 때문에 대만의 물자를 착취했다.
그러나 양자의 역량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일본은 행정·경영력을 발휘해 대만 내부의 혼란을 수습해가며 수탈했다. 그러나 국민당은 수도꼭지를 아무 데나 달면 바로 수돗물이 콸콸 나온다고 생각할 만큼 근대화에 어두웠으니 행정·경영 역량은 기대할 게 없었다. 국민당은 기업 경영을 제대로 못해 자금이 모자라자 은행에서 거액을 대출해 자금을 메웠다. 대출 때문에 통화량이 부족해지자 통화 발행량을 늘렸고 이에 물가가 폭등했다. 1947년 쌀·밀·면포 가격은 전년 대비 4~5배, 설탕 가격은 21배로 폭등했다.



개가 가니 돼지가 왔다

국민당이 온 후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대만에는 “개가 가니 돼지가 왔다(狗去豬來)”는 말이 돌았다. 개는 사납기는 해도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고 절도가 있다. 돼지는 더럽고 먹는 것만 밝힐 뿐 일은 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돼지는 개보다 더 사납고 흉악한 멧돼지였다.
1947년 2월 27일 전매국 직원이 밀수담배 판매 단속이라는 명분하에 담배를 팔던 노점상 할머니를 총으로 구타했다. 보다 못한 시민들이 말리는 과정에서 충돌이 벌어졌고, 급기야 시민 한 명이 사망한다. 그간 쌓여온 대만의 울분이 이를 계기로 폭발했다. 다음날 1만 시민이 경비대와 격렬하게 충돌했다. 시위는 대만 전역으로 확대됐고, 지역 자치와 개인의 자유 보장, 민생 안정, 사법제도 개혁 등 전방위적 사회개혁을 요구했다.
국민당은 협상으로 시간을 끄는 한편 대만에 추가 병력을 파견해 가혹하게 시위를 진압한다. 훗날 대만 정부 공식 발표로만 2만8000여 명이 사망했고, 1960년 호적조사 때는 실종자가 12만 명이 넘은 대참사였다. 대만의 현대사는 이처럼 피로 얼룩진 ‘2·28 사건’으로 출발했다. 정칭원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전후 초기 대만인들은 중국을 ‘조국’이라 불렀어요. 중국인은 대만인을 ‘동포’라고 했지요. 그런데 ‘조국’의 사람이 ‘동포’를 잔인하게 살해한 2·28 사건이 벌어지고 ‘백색공포’의 통치시대가 전개된 겁니다.”
1989년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허우샤오셴(侯孝賢) 감독의 ‘비정성시(悲情城市)’는 이 시대의 아픔을 다룬다. 주인공인 문청은 귀머거리에 벙어리다.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고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시대라는 은유일까. 문청은 감옥에서 만난 친구의 유언 쪽지를 유가족에게 전한다. ‘태어나며 조국을 이별했고, 죽어서 조국에 갑니다(生離祖國, 死歸祖國).’ 조국이란 뭔가. 정 붙이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닌가. 대만인들은 그런 조국을 태어나자마자 박탈당했고, 죽어서야 안식을 찾을 수 있었다.
문청의 아내는 시조카에게 편지를 쓴다. ‘우리는 도망가려 했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어.’ 그리고 곧 엔딩 자막이 뜬다. ‘1949년 12월, 대륙은 공산화하고 국민당은 대만으로 철수해 타이베이를 임시수도로 정했다.’ 외지인인 국민당은 대만으로 도망쳐왔지만, 원래의 주인인 대만인은 정작 도망갈 곳이 없었다.


덩리쥔, 장후이메이의 수난

대만에서 장제스(蔣介石)는 황제와도 같았다. 87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계엄령을 유지하며 종신 총통의 권좌를 지켰다. 1975년 4월 5일 장제스가 사망하자 대만 정부는 제왕이 승하했을 때나 쓰는 말인 ‘붕조(崩殂)’란 표현으로 서거 성명을 발표했다. 38년간 계엄령(1949~1987)이 유지됐고, 타이베이 천도(遷都) 37년 만에 비로소 야당이 생긴 대만을 당시 한국은 ‘자유중국(自由中國)’이라고 불렀다. 한데 자유중국은 전혀 자유롭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후계자인 장징궈(蔣經國, 장제스의 장남)와 리덩후이(李登輝)는 시대의 요구를 아는 지도자들이었다. 대만은 비교적 순탄하게 민주화의 길을 걸었다. ‘대만의 아들’을 자처한 민주진보당 천수이볜(陳水扁)은 2000년 대만인 스스로 뽑은 최초의 대만 지도자가 된다.
영화 ‘쉬즈더원’에서 베이징 남자 진분은 대만 여자와 맞선을 본다. 여자가 말한다. “우리 가족도 원래 베이징에 살았어요. 그런데 공산당이 베이징을 점령할 때, 할아버지가 대만으로 도망치셨죠.” 진분은 재빨리 끼어든다. “잠깐만요. 우리는 그걸 ‘점령’이 아니라 ‘해방’이라 부릅니다.”
양자의 관점이 이처럼 다르니 말썽이 안 생길 수 없다. 농담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예능을 다큐로 받는다’고들 하는데, 한없이 가벼운 예능도 양안 사이에서는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덩리쥔(鄧麗君)은 대만이 배출한 세기의 가수다. 세계 어디에서든 차이나타운이 있고 중국인이 있는 곳이라면 덩리쥔의 노래를 한 번쯤은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중국에서는 그의 노래가 오랫동안 금지됐다. 중국은 그의 노래를 ‘대중을 현혹시켜 나라를 망치는 노래(靡靡之音)’로 간주했다.
덩리쥔은 국민당 군인이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군 위문공연을 열심히 다녀 ‘군인들의 연인’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공공연히 국민당의 처지에 섰다. “제가 중국 대륙에서 노래하는 날은 (대만의 국가이념인) 우리의 삼민주의가 중국 대륙에서 실행되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배경이야 어쨌건 중국인들은 덩리쥔의 노래에 사로잡혀, 낮에는 덩샤오핑의 교시를 듣더라도 밤에는 덩리쥔의 노래를 듣는다(白天聽老鄧, 晚上聽小鄧).
장후이메이(張惠妹)는 ‘아시아의 여신(亞洲天后)’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걸출한 가수다. 그러나 그녀는 천수이볜 총통 취임식 때 대만 국가를 불렀다가 중국 활동을 금지당했고, 코카콜라와의 광고 계약도 취소됐다. 2004년에야 다시 중국 무대에 설 수 있었다. 중국은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에, 국제무대나 공식석상에서 대만 국기나 국가를 사용하는 것을 반국가활동으로 간주한다.


‘Chinese ≠ Taiwanese’

대만은 면적 3만6193㎢로 벨기에(약 3만㎢)보다 크고, 2014년 기준 명목 GDP(국내총생산) 5300억 달러로 벨기에와 거의 비슷하다. 인구는 2300만 명으로 벨기에(1100만 명)보다 훨씬 많고 호주와 엇비슷하다. 웬만큼 넓은 영토, 강한 경제력, 많은 인구를 갖췄지만 국제사회에서 국가로 인정받지 못한다. 닉슨은 1972년 “7억5000만 명을 배제하고는 세계평화를 이룩하기 어렵다”며 중국을 유엔에 가입시키고 대만을 퇴출시켰다. 대만은 반공 자본주의 정권, 빠른 경제성장으로 자유 진영의 ‘모범생’으로 통했지만, 미국은 덩치 큰 중국을 선택했다.
이때부터 대만은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 국제사회에서 대만이 겪은 수난은 그야말로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다. 국제기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불이익을 가져온다. 일례로 세계기상기구(WMO)를 살펴보자. 태풍(颱風)이란 말이 ‘대만의 바람’이라는 뜻에서 나온 데서 보듯, 대만은 태풍이 빈번히 몰아닥치며 피해도 매우 크다. 주변국들과의 원활한 기상정보 교류가 절실한 대만은 WMO의 창설 회원국이지만, 유엔 축출과 함께 WMO에서도 제명됐다. 현재도 재가입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2003년 캐나다에서 어학연수를 할 때 외국 친구를 여럿 사귀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의 경제가 충분히 발전하지 않은 때라 중국인은 보기 힘들었고 대만인이 아주 많았다. 그런데 이들은 스스로를 중국인(Chinese)이 아니라 대만인(Taiwanese)으로 일컬었다. 그들이 중국인에 대해 가진 인상은 매우 좋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이기적이야(Chinese are selfish).”
당시는 중국인들을 만난 적이 없던 터라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훗날 직접 경험해보고 알았다. 중국인은 공공질서와 에티켓 관념이 희박하고,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조심하지 않아 매우 이기적으로 보인다. 당시 대만 친구들은 선진 경제, 우아한 사회, 고상한 문화를 누리고 있어 자신들이 천박하고 이기적인 중국인과는 다르다고 선을 그은 것이다.
그러나 대만의 자신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대만은 매년 ‘올해의 한 글자(台灣年度代表字)’를 선정한다. 이 글자들의 변천사를 보면 대만의 고충과 민심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2008년은 ‘어지러울 난(亂)’의 해였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세계경제가 큰 타격을 입자 수출 의존도가 높은 대만 경제도 크게 휘청거렸다. 그러나 중국은 베이징 올림픽을 열며 세계를 삼킬 듯한 대륙굴기의 기세를 보여줬다. 더욱이 중국은 대만 독립론을 주장하는 민진당을 곱게 보지 않아 경제제재를 취했고, 이에 대만 경제는 이중고를 겪었다. 양안관계의 위기와 독립 찬반론의 치열한 대립은 큰 혼란을 일으켰다. 대만 국민은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를 총통으로 뽑아 일단 양안관계를 안정시키도록 했다.
양안관계의 회복은 바로 효험을 보여 대만은 2010년 경제성장률 10.8%, 2011년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달성했다. 그러나 민생은 오히려 악화됐다.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93%가 소득불평등이 심각하다(2009년)고, 80.5%가 빈부갈등이 심각하다(2010년)고 답했다. 2009년엔 불안한 현실을 지켜봤지만(盼, 바랄 분), 2010년 사회 분위기는 냉담했다(淡, 싱거울 담). 2011년 분위기 반전을 꾀했지만(讚, 칭찬할 찬), 2012년 다시 걱정에 휩싸였다(憂, 근심할 우). 임금은 낮아지는데 물가와 부동산은 올라 양극화는 심해져만 갔다.



換! 차이잉원 당선의 숨은 뜻

2013년은 ‘가짜 가(假)’였다. 가짜 식용유 파동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기는 대만인들을 공분케 했다. 중국요리는 기름을 많이 사용하는데 기름에 문제가 있다면 뭘 안심하고 먹을 수 있겠는가. 대만인은 중국의 경제와 국제적 위상이 아무리 막강해도, 문화 수준과 윤리의식만큼은 대만이 중국보다 더 낫다는 자부심을 지켜왔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다는 자괴감에 빠진 것이다.
가짜 식용유 이슈는 곧바로 식품안전, 환경오염 문제를 거쳐 사회 기강과 윤리 문제로까지 파급됐다. 경제발전을 내세워 재집권에 성공한 국민당은 경제를 발전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까지 병들게 만들었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백년부패정당 국민당은 대만을 1949년으로 되돌리고 있다.” “마잉주는 장징궈와 리콴유의 능력도, 쑹추위의 부지런함도, 리덩후이의 민주헌정에 대한 신념도 없다.”
2014년은 ‘검을 흑(黑)’이었다. 대만은 ‘시커먼 마음과 가짜 상품, 검은 돈 등 모든 것이 다 암담하다(黑心啊,黑心商品啊,黑錢啊。 什麼都黑啊!)’는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가장 암담한 순간에 변화의 희망이 생기는 법이다. 대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변화를 원했다.
2014년 11월 29일, 타이베이 여행의 첫날이라 수시로 숙소를 들락거리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런데 숙소 여주인은 하루 종일 TV로 지방선거 개표결과만 지켜보고 있었다. 국민당이 꽤나 강한 줄 알았는데 의외로 민진당이 압승을 거두고 있었다. 청색 대신 녹색이 대만을 덮었다. 전통적으로 국민당 강세인 북부에서도 아주 보수적인 일부 지역 빼고는 다 야당의 승리였다. 전통적으로 야당색이 강한 남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대만 사람들이 정말 화났군요.”
“아니, 우리는 정말 아주아주 화난 거지.”
“천수이볜 다음에 국민당의 마잉주가 당선돼서 국민당이 여전히 강한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렇게 된 거죠? 도대체 6년 동안 국민당은 뭘 한 건가요?”
“아주 나쁜 일들.”
다음 날 대만 친구 슈를 만났다. 그는 선거 전 페이스북에 이번 선거를 잘 치러야 한다는 글을 올린 적이 있고, 이번 결과에 흡족한 듯했다.
“놀랐어. 이번 선거 결과 보니 온통 녹색이더라.”
슈의 여자친구는 내 말을 농담으로 받았다. “그런데 넌 왜 파란색 셔츠를 입고 있니? 조심하라고.”



중국이라는 ‘돈맛’

국민당이 도대체 뭘 한 거냐는 질문에 슈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안 했어.” 여주인은 국민당이 아주 나쁜 일을 했다고 말하고, 슈는 아무것도 안 했다고 말한다. 종합해보면, 대만인들이 보기에 국민당은 좋은 일이라곤 아무것도 안하고, 나쁜 일들만 잔뜩 한 것이다. 민심의 이반이 놀라웠다. 며칠 후, 마잉주는 선거 대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국민당 대표에서 사퇴했다.
변화의 기운이 넘치는 대만답게 2015년의 대표문자는 ‘바꿀 환(換)’자였다. 2016년 1월 16일 민진당 차이잉원(蔡英文)의 총통 당선은 이때 이미 예고된 셈이다.
 이제껏 대만을 지배한 세력은 모두 외부에서 왔고, 주된 관심사 역시 대만 자체가 아닌 외부에 있었다. 대만은 언제나 무역기지나 중국 진출의 수단으로 여겨져왔다. 오랜 진통 끝에 대만은 드디어 스스로의 손으로 지도자를 뽑게 됐다.
그러나 마음대로 방향을 결정할 수 있을까. 중국과 대만의 격차는 너무도 현격하며, 중국은 대만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중국은 대만에 무역흑자를 양보한 대신, 대만의 대중 의존도를 심화시켰다. 중국이라는 ‘돈맛’을 보고나면 대만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란 계산이다.
중국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애교 있는 여자가 최고(撒嬌女人最好命)’에서는 상하이 여자와 대만 여자가 중국 남자를 놓고 사랑전쟁을 벌인다. 대만 여자는 매우 간교하고 위선적인 내숭덩어리이고 상하이 여자는 매우 진실한 사람인데, 결국 상하이 여자가 고난을 딛고 승리한다. 중국이 대만에 꼭 이런 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다.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나한테는 안 되거든.”
쯔위 사건에서 보듯 양안관계는 평상시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지만 사소한 일로 순식간에 큰 긴장을 낳기도 한다. 양안관계는 평온해 보이다가 느닷없이 불어닥치는 토네이도를 닮았다.



김 용 한
● 1976년 서울 출생
●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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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사진 김용한 | yonghankim78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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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태풍, 중국 ‘돈맛’ 이겨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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