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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살면허 독점한 치외법권지대 있었다

‘서울의 게토’ 반촌(泮村)

도살면허 독점한 치외법권지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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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에도 이방인의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곳이 있었다. 반촌(泮村)이라 불리는 특수집단 거주지가 바로 그곳. 그들만의 언어와 풍습, 삶의 방식을 고집했던 반촌 사람들. 과연 그들은 어디서 와서
  • 어디로 갔는가.
도살면허 독점한 치외법권지대 있었다
인간은 자신이 살고 싶은 곳에 살 권리와 자유가 있다. 그러기에 대한민국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으로 거주이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과연 그런가? 내가 아무리 북한산 아래 경치 수려한 곳에 살고 싶다 한들 나는 거기에 살지 못한다. 헌법상 거주이전의 자유는 오로지 돈과 권력을 가졌을 때 가능한 자유일 뿐이다. 돈과 권력이 없다면, 거주이전의 자유는 더욱 나쁜 거주지로 갈 자유이지 좋은 거주지로 갈 자유는 아니다. 그리하여 인간들의 거주지에는 구획이 생긴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은 돈과 권력의 보유 정도에 따른 인간의 어울림을 뜻한다.

요즘 세상이 이러할진대, 과거에는 어떠했을까? 조선시대의 서울은, 양반 거주지와 중인 거주지, 상인 거주지가 대충 구분돼 있었다. 그리고 심한 경우 서울 시내에 오로지 특정 부류 인간으로 주거가 제한된 그런 공간도 있었다. 물론 그 잘난 양반들은 아니다. 이런 특수한 공간의 존재는 거주민의 취향이나 기호에 따라 결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별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조선시대 서울 안에 존재한 특수한 주민의 특별한 거주공간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소의 도살이 가뭄을 초래한다?

엉뚱하지만 쇠고기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보자. 옛말에 육식자(肉食者)란 말이 있다. 채식주의자의 반대말이 아니라 귀족이나 고급관료를 뜻한다. 고기를 먹는 사람이 지배계급을 의미했듯, 중세사회에서 고기는 극히 귀한 음식이었다. 농업사회인 조선사회에서 고기는 당연히 귀한 음식이었고, 특히 쇠고기는 정책적으로 식용을 제한한 식품이었다.

‘태종실록’을 말머리로 삼아보자. 태종 15년 6월5일 임금은 육선(肉膳), 곧 고기반찬을 물리치고 술을 끊었다. 동양사회에서 가뭄이나 홍수, 기타 기상이변이 일어나면 임금은 근신하는 의미에서 고기가 없는 밥(素饌)을 먹고, 술을 마시지 않으며,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 태종 역시 그런 전례를 따른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육조와 승정원에서 아뢴 가뭄을 초래한 여러 원인 중에 ‘소의 도살’이 끼여 있다는 것이다.



“소를 도살하지 말라는 금령(禁令)이 있는데, 근래에 도살이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 도살자를 붙잡아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그 범인의 가산(家産)을 상(賞)으로 주고, 대소 인원은 쇠고기를 먹지 못하게 하되 이를 어기는 자는 죄를 논하소서. 그리고 저절로 죽은 쇠고기는 서울은 한성부에서 세금을 매기고, 지방은 관청의 명문(明文)을 받은 뒤에 매매를 허락하되, 어기는 자는 또한 법에 의해 죄를 논하소서.”

금령에도 불구하고 소의 밀도살이 가뭄을 초래했으므로, 밀도살을 엄금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의 도살이 왜 가뭄을 불러왔다는 것인가. ‘숙종실록’ 9년 1월28일조를 보면 송시열(宋時烈)이 가뭄을 걱정하면서 정자(程子)의 말을 인용해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정자의 말은 이렇다. “농사가 흉년이 드는 것은 소를 잡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이어지는 말에 의하면, 사람들이 소의 힘으로 농사를 지어 먹고 살면서도 소를 도살해 먹기 때문에 소의 원한이 천지의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고, 이것이 자연의 운행 질서를 깨뜨려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생 소의 육신을 부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고기마저 먹는 것은 정말 잔인하지 않은가? 이것이 정자의 생각이었다. 물론 이 이야기 이면에는 농사를 위해 요즘의 트랙터격인 농우를 보호해야 한다는 농업사회의 실용적 동기가 있겠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생명에 대한 자연스런 배려가 아니었을까? 정말 수입 쇠고기라도 고기를 먹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우리가 반성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덧붙이자면, 율곡 이이는 이런 이유로 평생 쇠고기를 먹지 않았고, 율곡 집안에서도 율곡의 제사에는 쇠고기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거나 소의 도살이 가뭄을 초래한다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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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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