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밥상을 차리고. 새로 깨소금도 볶고. 싱싱한 나물, 정성으로 심고 거둔 알곡, 오리알, 거기에 깨소금, 생고추장…. 자연에 사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밥상이 된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밥상이다.
서울내기인 내게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삶이다. 서울 살 때는 엿기름이 밀이나 보리 싹을 말린 거라는 걸 몰랐다. 밀이 늦가을에 씨 뿌려 겨울을 나고 초여름에 거두는 알곡이라는 것도 내 손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알았다.
논에 오리를 넣곤 한다. 이삭이 패면 논에서 오리를 뺀다. 해마다 시어머니 친정어머니께 오리약을 달여드리고, 남는 몇 마리는 잡아먹었다. 한데 지난해 작은애가 오리를 키우고 싶어했다. 오리알을 먹고 싶다나.
우리는 오리 키우는 일이 어떤 일인지, 아이가 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마을 사람들 말이 한겨울에 물이 얼면 물을 좋아하는 오리에게 물을 가져다주는 일이 만만치 않고, 또 닭들을 풀어놓아 먹이는데 오리까지 풀 수 없어 오리 장에 가두어 키워야 하므로 먹이를 잘 챙겨주어야 한다고 했다. 작은애는 그래도 키우겠다고 했다. 초등1학년 나이. 그 작은 녀석이 뜻을 세워 해보겠다니 밀어줘야지. 그래서 마당에는 수컷 두 마리, 암컷 세 마리가 사는 오리집이 만들어졌다.
아이는 아침에 오리에게 물 주는 일을 열심히 했다. 그러다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는 날이 이어졌다. 바깥 수도는 모두 얼어붙었다. 하루는 아이가 흠뻑 젖어서 마당에 들어섰다. 아이 말이 옆집 연못에 가 양동이에 물을 담아 들어올리는데 너무 무거워 미끄러지는 바람에 물에 빠졌단다. 덜덜 떨면서 양동이는 못 찾았다고 걱정이다.
다음날도 또 연못에 가 옷을 적시면서도 물을 떠와 오리에게 먹이곤 한다. 제딴은 잘할 때까지 해보고 싶었는지. 몇번 그러다 정말 추운 날이 찾아왔다. 밤에 자면서도 오리가 얼어죽지 않을까 걱정할 만큼 추운 날이. 다음날은 아이가 집에서 더운물을 받아다 오리한테 준다.
“뜨거운 물이었는데 가는 사이 조금 식어 따뜻한 물이 됐고 물그릇에 담아 주니 미지근한 물이 됐어요. 쩝쩝쩝 오리들이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입춘이 지나자 오리가 알을 낳기 시작했다. 손에 가득 안길 만큼 커다란 알을. 한데 작은애는 오리알을 안 먹고 모으겠단다. 오리한테 알을 품게 해 새끼를 까게 하고 싶다고. 오리가 얼마나 먹성이 좋은가. 오리나 닭을 잘 먹이려면 사람이 농사를 넉넉히 지어 그걸로 부지런히 모이를 만들어 먹여야 한다. 오리들은 푸성귀를 무척 좋아해 겨울에도 풀을 줘야 한다. 눈이 덮인 날은 저장한 배추를 주고. 조개껍데기를 부수어 주기도 하고.
열심히 모이를 준 덕분인지 오리는 하루에 세 알씩 낳아주고 있다. 알이 넉넉히 모이자 우리 식구들은 드디어 오리알을 맛볼 수 있었다. 이렇게 우리 집 밥상에 올라오는 먹을거리 하나하나는 저마다 이야깃거리를 갖고 있다.
꽃도 보고 꽃도 먹고
여기 무주는 덕유산 자락 산골이다. 강이 흐르는 평지가 해발 400m가 넘어 고랭지 배추농사를 할 수 있는데 5월초까지 서리를 조심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곳보다 농사일이 늦게 시작되고 또 서둘러 마무리된다. 봄에 서울을 다녀오다 보면 다른 곳은 모두 모내기를 했는데 우리 사는 안성재를 넘으면 논이 비어 있고 모들은 아직 못자리에 있다.
그래도 때는 어김없어 4월이 되면 봄이 하루아침에 오신다. 그것도 성큼성큼 어찌나 빠르게 오시는지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땅에는 봄맞이꽃 현호색 제비꽃 등 색색가지 봄꽃이 피고, 살구, 앵두, 복숭아, 배꽃이 이어달리기한다. 자려고 누우면 소쩍새 울음소리 가슴에 박히고, 햇살 좋은 마당에는 병아리 깨어나 어미 닭이랑 돌아다니는 계절이다. 봄꽃이 피면 아이들이 온 들을 쏘다닌다. 아이들 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어른들은 일손을 놀린다.
옛날 사람들은 4월을 봄의 끝으로 보고 5월은 입하(立夏)라 해 여름으로 보았다. 4월에는 식목일쯤에 청명(淸明), 20일쯤에 곡우(穀雨)가 있다.
청명은 입춘(2월초)에 돋아나기 시작한 봄나물에 독이 오르고 진달래꽃이 피기 시작하는 때다. 한낮엔 여름 같다가 새벽엔 서리 오니 이 흐름에 맞추지 않으면 몸에 이상이 오기 쉽다. 사람만이 아니라, 때 이르게 나온 싹들도 꼬부라진다. 여름이 거의 다가오나 찬 기운이 마지막 힘을 뻗치니 때를 알고 때에 맞춰 사는 이치를 번번이 깨닫는다. 진달래꽃 구경 갔다 한 움큼 따오면 그걸로 화전을 부쳐먹는다. 산에는 취잎이 한 장, 고사리 순이 하나둘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나 아직 먹기엔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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