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대한 재산을 두고 벌인 소송으로 장안에 화제를 일으킨 이인용 남작(왼쪽)과 부인 조중인.
조선시대에는 귀족이 없었다. ‘조선귀족’은 역설적으로 조선이 사라진 이후 생겨났다. 1910년 7월 한반도를 손에 넣은 일본은 같은 해 10월7일 소위 ‘합방 유공자’ 76명에게 작위를 수여한다. 공작은 없었고 후작이 6명, 백작이 3명, 자작이 22명, 남작이 45명이다. 작위는 재산과 함께 세습됐지만, 몇몇은 처음부터 작위 받기를 거부했고, 몇몇은 독립운동, 파산, 품위실추 등의 이유로 작위를 박탈당해 1930년대에는 60명 내외의 귀족만이 남게 되었다.
일본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조선귀족’은 대부분 조선왕실의 종친, 척족이거나 대한제국 시기 대신들이었다. 명문거족의 후예로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고 무능한 정부의 고위관료로 재직하면서 갖가지 비리를 저질러 긁어모은 재산도 엄청났다. 게다가 작위와 함께 등급에 따라 2만5000원에서 50만원까지 지급된 ‘은사공채’를 덤으로 받았다. 산술적으로만 생각하면 어지간한 사치와 방탕으로는 줄어들지 않을 재산이다. 그러나 ‘조선귀족’ 대부분은 작위를 받은 지 겨우 10여 년 만에 그 많던 재산을 탕진하고 심각한 생활난에 허덕였다.
‘제일선’ 1932년 12월호에 실린 ‘조선귀족 어디로 가나’라는 기사는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비록 작위는 얻었으나 정계의 실권에는 하등 머리를 들이밀지 못하게 되고, 귀현(貴顯)은 얻었으나 사회의 대우는 그다지 향기롭지 못하게 되니 그들은 할 수 없이 사회의 한 귀퉁이에 숨어서 한가한 나날을 보냈다. 세상과 격리되어 일신상 부족한 것이 없는 생활을 영위하기 그럭저럭 10여 년이었다. 밖으로 할 일이 없고 안으로 생활이 궁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옛날에 살아오던 풍도(風度)와 운치는 그대로 남았으니 그들의 하는 일이 묻지 아니하여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고 물질의 공급은 한이 있는 것이라 마침내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조선귀족 일체가 공황에 휩싸이게 되었으니 그것은 무엇보다도 지금껏 호화를 자랑하던 그들의 생활에 몰아닥친 재정의 파탄이었다.
‘조선귀족’의 몰락
상속 받은 유산과 긁어모은 재산을 1930년대까지 유지한 귀족은 ‘토지왕’ 민영휘 자작, 이완용의 장손 이병길 후작과 차남 이항구 남작, 박영효 후작, 고희경 백작, 윤덕영 한창수 이달용 이풍한 김사철 남작 등 열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나머지 귀족들은 재산을 송두리째 들어먹고 오늘은 이왕직, 내일은 총독부, 발바닥에 땀나도록 드나들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깡통만 안 찼을 뿐 거지나 진배없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1929년, 영락한 ‘조선귀족’을 구원해줄 은인이 나타난다. 총독부 정무총감으로 부임한 이케가미(池上)는 조선귀족의 몰락 소식을 듣고 ‘일본의 작위를 받은 귀족이 생활의 곤궁을 겪는다는 것은 국가의 체면상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판단한다. 그의 지시로 총독부는 250만원의 자금을 할애해 ‘창복회(昌福會)’라는 재단을 설립하고 몰락한 귀족의 구제에 나선다. 창복회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귀족에게 매월 100원, 200원씩 나눠줬다. 당초 총독부가 이들에게 작위를 내준 명분은 ‘민심 수습’. 결국 이 때문에 총독부는 광복 직전까지 돈 달라고 물귀신처럼 물고 늘어지는 ‘조선귀족’의 등쌀에 시달려야 했다. ‘조선귀족’에 몸서리친 것은 조선 민중이나 총독부나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영화에서 몰락의 참경(慘景)을 당하여 창복회에 등을 대고 목숨을 이어가는 귀족이 69인 중 33인으로 거의 반수라 한다. 30명 내외의 귀족이 몰락하였다 하여 일반의 사회인으로서는 하등 슬퍼할 일이 아니지만, 그들 자신으로 지나간 날을 회상하고 오늘의 영락을 생각한다면 또한 강개참회(慷慨懺悔)의 눈물을 흘릴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