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함마드를 살해하기 위한 방안을 궁리하는 쿠라이시 부족 지도자들.
다른 압력도 있었다. 당시 아랍 부족 사회에서는, 높은 위상을 차지하는 시인들이 촌철살인의 비수 같은 언사로 공격하면 무함마드의 포교가 수포가 돌아갈 수 있었다.
이슬람을 부정하고 반박하던 이들의 대열에 사회 지식층인 시인이 여럿 가담하고 있었다. 많은 이가 무함마드를 알라의 사도로 인정하기보다는 특이한 문체를 구사하는 시인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함마드는 신도들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는 방안을 선택했다. 그는 614, 615년경 홍해를 건너 아비시니아(지금의 에티오피아) 지역으로 일부 신도들을 이주시켰다. 622년에는 자신도 신도들과 함께 메디나로 옮겨 갔다. 그리고 메디나에서 이슬람 공동체 기반을 세우고 메카의 쿠라이시 부족에 대한 물리적 대응책을 마련해갔다.
무함마드의 또 다른 고민은 시(詩) 또는 시인과 관련된 문제였다. 그가 시인으로 격하된다면 알라의 계시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슬람에 반대하는 시인들이 이슬람과 그를 공격하면, 많은 사람이 이슬람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것이 분명했다. 이슬람 전파의 성공 여부는 시와 시인에게 어떻게 대처하느냐로 결정될 판이었다.
무함마드가 그런 위기의식을 느낀 순간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는 예언자로서 자신의 위상을 지키려 했다.
“나는 시인이 아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시인들을 폄하하고 시도 배척함으로써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도 시인과 시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갖게 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한 대응책은 코란의 일부 구절과 하디스(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에 수록된 그의 언사에 잘 나타나 있다. 코란의 예로는 다음 구절을 들 수 있다. 무함마드가 자신이 시인이 아님을 극구 강조한 대목이다.
“실로 이것은 훌륭한 예언자의 말씀으로, 한 시인의 말이 아니라 너희 중에 믿는 자가 소수라, 또한 이것은 점쟁이의 말도 아니거늘 너희 중에 숙고하는 자 소수로다.”(코란, 69장 40~43절)
이슬람 이전 시대에 시인은 예언 능력과 신통력을 구비한 점쟁이 구실도 하고 있었다. 무함마드는 사람들이 자신을 예언자 행세나 하는 일개 시인이나 점쟁이로 보려는 것을 강하게 거부했다. 그는 개인적 영감으로 말하는 시인이 아니라, 알라로부터 받은 계시를 전하는 사명을 띤 사도임을 암시하고자 했다.
그가 지닌 예언자로서의 숭고한 지위와 시인의 위치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의미다. 코란에는 또 다른 구절이 있다.
“시인들이란, 사악에 길 잃고 헤매는 자들이며 그들(사탄)의 뒤를 따르는 이들이다. 그대는 그들(시인들)이 골짜기마다 헤매고 있는 꼴을 목도하지 않았던가.”(코란, 26장 224~225절)
시인에 대한 무함마드의 분노를 매우 강하게 드러낸 부분이다. 시인을 일컬어 사악한 자들과 사탄의 추종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시인을 이슬람을 믿지 않는 불신자와 동일시했음을 알 수 있다.
“너희들 중 한 사람의 배가 고름으로 가득 찬 것이 시로 찬 것보다 더 낫다”라는 하디스 구절도 시를 극도로 격하하는 표현이다.
이슬람 포교엔 詩 활용
그렇다면 무함마드는 시인들을 모두 불신자로 여겼고 시는 그가 건설하려는 이슬람 공동체에 불필요한 것으로만 봤을까. 그랬다면 그는 지속적으로 시인을 배척하고 시를 말살하려 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분명한 증거들이 있다.
일부 자료들은, 무함마드가 그를 밀어내려 하고 이슬람 전파를 방해하는 불신자 시인과 알라와 사도에게 해를 입히는 일부 시만 공격했음을 보여준다. 이슬람에 반(反)하지 않는 시나 이슬람을 수용하고 지지하는 시인들에 대해서는 존재를 인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