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호

‘의사의 난’ 야전사령부 의쟁투

  • 하태원·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08-17 11: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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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들은 집단적인 시위나 농성, 더구나 병원 문을 닫고 거리로 나서본 예가 없던 조직이다. 한마디로 투쟁에 관한 한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단계라고 평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난 6월 1차 폐업에 이어 2차 폐업을 진행 중인 의사들에게서도 이제는 제법 ‘투사’ 냄새가 난다. 의사들 스스로는 7만 의사를 투사로 만든 원동력은 의사의 고유권한인 진료권을 빼앗으려는 약사법과 잘못된 의약분업안이라며 “6월 이전의 의사와 지금의 의사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의료계 집단폐업은 대한의사협회의 깃발 아래 이루어지고 있지만 투쟁경험이 없는 의사들을 일사불란한 조직으로 만들고 집단폐업으로 이끌고 있는 조직은 단연 의권쟁취 투쟁위원회(의쟁투)다. 의쟁투는 대한의사협회 산하 특별기구지만 의약분업 문제에 관한 한 오히려 의협의 권능을 앞지른다.

    의쟁투는 지난해 12월, 의약분업을 앞두고 의(醫) 약(藥) 정(政)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대정부 투쟁을 위해 만들어진 한시적인 기구였다. 애초에는 김재정(金在正) 당시 서울시 의사협회장이 ‘의권수호 투쟁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자기 심복을 중심인물로 삼고 ▲완전 의약분업 실현 ▲진료수가 적정화를 위한 활동을 하는 기구로 구성했다. 정부가 지난해 11월15일을 기해 ‘약값 실거래 상환제’를 전격 실시하면서 약값의 거품이 빠졌고 개원의들의 병원경영이 압박을 받게 되자 대정부 투쟁기구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던 것.

    투쟁의 전위대 의쟁투

    결국 서울의사회에 설치된 의쟁투는 의약분업에 반대하는 젊은 개원의사들을 중심으로 의협 산하의 특별기구로 자리매김 했다. 김재정 현 의협 회장이 당시 전국시도의사회 회장들의 추천을 받아 초대 의쟁투 위원장으로 추대됐었다. 김 위원장은 의료계의 격앙된 분위기를 투쟁열기로 끌어올리며 지난 2월17일 휴진에 돌입한 의사들의 여의도 집회와 4월 4∼6일의 집단휴진을 이끌어냈다.



    4월 휴진강행에 앞서 3월29일 대통령 면담을 통해 휴진철회를 약속했다가 번복하는 과정에 김 위원장은 당시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퇴서를 냈었다. 그러나 재신임을 받고, 그의 주도 아래 제2기 의쟁투가 탄생했다. 이후 지난 4월22일 열린 의사협회 정기총회에서 김 위원장은 회장선거에 당선되면서 의쟁투 위원장에서 물러났다. 지난 6월6일 결성된 현 3기 의쟁투를 이끌고 있는 신상진(申相珍·44) 위원장은 당시 의협 회장선거에 나왔다가 낙선한 인물로 의사협회 집행부의 도움으로 위원장이 됐다.

    1, 2기에 비해 훨씬 강경노선을 내세운 3기 집행부는 용산고와 서울의대를 나온 신 위원장과 한양의대 출신 사승언(史承彦·43·수배중) 총무를 주축으로 한 33명의 중앙위원으로 5월에 구성됐다. 상근자 5명과 중앙위원들은 대체로 대학 시절 운동권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다.

    의료계의 집단폐업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한 인사는 “의쟁투 위원장을 맡고 있던 상태에서 의협회장 자리에 오른 김재정씨는 의협회장이 된 직후 의쟁투를 해산해 권력의 이원화를 막으려 했지만 민주의사회 소속 젊은 의사들의 반대 때문에 좌절됐다”며 “이때 이미 의료계의 분열은 예고된 것”이라고 말했다.

    1차 폐업 철회 직후 시작된 검찰의 의쟁투 간부에 대한 집중소환 탓에 지도부가 와해된 상태다. 신상진 위원장은 도피중이고 최덕종 의쟁투위원장 직무대리, 사승언 전 대변인, 배창환, 박현승, 김미향, 이철민씨 등이 수배되거나 구속되는 등 지도부가 공백 상태다. 경찰에 체포됐다가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나온 주수호 대변인만이 공개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의료계의 폐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의쟁투에 대해 ▲의약분업에 무조건 반대하는 의료계내 운동권 ▲폐업 또는 투쟁을 일삼는 집단 ▲의협을 접수하려는 불순 세력이란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의쟁투를 둘러싼 상반된 평가

    현 집행부가 지난해 5월 의약분업에 합의한 유성희 전 의협회장을 몰아낸 쿠데타 세력이라는 것은 의쟁투의 강경노선을 잘 설명해준다. 쿠데타 성공의 원군(援軍)이 모두 의약분업에 반대하는 강경론자들이기 때문에 지도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세를 따를 수 밖에 없는 노릇이라는 것.

    대한전공의 협의회에 속한 한 관계자도 “의쟁투가 그간의 투쟁을 이끌어온 것을 전면 부정하지는 않지만 1차 폐업을 철회로 이끄는 과정 등을 통해 리더십에 문제점을 노출한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지도부란 모름지기 중요한 결정을 내릴 부분에 대해서는 의견을 밝히고 회원들의 동참을 호소할 줄 알아야 하고, 민의를 물을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한데 자신감이 부족한 의쟁투 지도부는 시도 때도 없이 투표만 하다가 대의를 그르쳤다”고 지적했다.

    특히 파업을 철회하면서 지도부가 모두 줄행랑을 쳐서 조직의 역량을 스스로 약화시킨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것. 신상진 위원장에 대해서도 “대중적인 분위기를 파악해 적절한 시기에 그들의 입맛에 맞는 성명이나 한번씩 터뜨릴 줄 아는 대중 선동주의자”라고 폄했다.

    하지만 의쟁투 주수호(朱秀虎·42) 대변인은 “의쟁투는 중요한 결정은 중앙위원회 총회를 거쳐야 하고 회원의 투표를 통해 결정한다는 규정이 있고 투표결과는 의쟁투 중앙위에서도 거부할 수 없다”며 “이런 규정 때문에 일반 회원의 민의를 반영하지 않으면 의쟁투의 존재가치가 사라진다”고 말했다.

    주씨는 이어 “정부나 언론에서는 의쟁투가 집단폐업을 독려했다고 주장하지만 8월1일 2차 폐업에 돌입한 뒤 8월10일 의쟁투 중앙위원회가 열릴 때까지 의쟁투 집행부 명의로 지시나 지침이 내려진 적이 단 한차례도 없이 자율적인 폐업이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수구적인 성향을 보여온 의협과 차별성을 갖고 의료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독자조직이 아니라 의약분업 때문에 급조된 조직이라는 한계 때문에 의쟁투는 크고 작은 불협화음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3기 위쟁투 의원장으로 화려하게 등장해 2차에 걸친 폐업을 이끌고 있는 신상진 위원장은 의쟁투에 대한 신뢰와는 별도로 의료계 내 다수의 신임을 얻고 있다.

    하지만 의료계의 한 관계자는 “신 위원장의 평가는 그의 이미지에 의한 것”이라며 “성명서를 낼 때도 단문으로 짤막하게 내고 협상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등의 태도가 카리스마를 오히려 높인 것 같다”고 말했다.

    14일 새벽 1시. 경기도 분당에 있는 신상진 위원장의 누이동생 집을 찾았다. 늦은 시각인데도 신씨의 부인 김미숙(金美淑·40)씨, 신씨의 여동생 신현주(申賢珠·40)씨 그리고 신씨의 남편 고순언씨(치과의사)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신씨는 56년 서울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중3 때 골수염을 앓고 3개월간 병원신세를 졌다. 현주씨는 “오빠는 그때 의사가 돼 아픈 사람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학창시절 내내 1,2등을 할 정도로 우수한 성적이었지만 가난한 탓인지 그늘이 있었다.

    신씨는 77년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입학 후 동아리에서 사회과학 공부를 하고 노동운동에 투신하면서 사람보다는 사회를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불교서적을 탐독하면서 사찰의식화 운동을 전개한 것. 본과 1년 시절 그는 기어코 인천의 한 공장에 위장취업해 노동운동을 시작한다.

    82년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됐고 집에 은신중이던 신씨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투옥됐다. 집에서 전격 연행되는 아들을 지켜본 신씨의 어머니는 다음날 뇌졸중으로 쓰러져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다. 봉제공장 행상 등을 하며 세 남매를 어렵게 키워낸 노인이었다.

    83년 1년을 채우고 출소한 신씨는 야학활동을 병행하면서 성남으로 내려와 노동운동을 계속한다. 이 과정에 서울교대를 중퇴하고 서울 구로공단에서 대한불교학생연합회 활동을 하던 부인 김미숙씨를 만났다. 이들은 4년후인 87년 결혼해 현재 초등학교 4학년과 2학년생 딸 둘이 있다.

    우여곡절 끝에 신씨는 89년 서울의대에 복학했다. 하지만 신씨는 ‘남들이 다하는’ 전문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일반의다. 한국의 전문의 과정이 왜곡돼 있고 지방에서 의원을 열 거라면 4년간 큰 병원에서 ‘진짜’ 의사들 심부름 하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92년 신씨는 성남 상대원 공단 주변에 병원을 열었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이나 공단 근로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지금도 하루 평균 10여명 정도는 무료환자라는 것이 부인 김씨의 말. 어쨌거나 병원을 운영하면서 8년여만에 빚을 다 갚았고 1년 전에는 집도 장만했다.

    93년 인도주의 실천 의사협의회 조직국장을 맡은 그는 95년 성남 기독교협의회에서 주는 인권상을 받았고, 그 해 성남시민모임 초대총무와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여기서 그는 쓰레기 소각장 문제, 아파트 관리비 문제 등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 해결에 힘을 썼다. IMF 직후에는 성남시민 실업극복을 위한 운동본부 일을 맡기도 했다.

    신씨 가족들은 한결같이 “신씨는 불의를 참지 못하는 직선적인 성격이면서도 이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끌어모아 한 울타리로 결집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며 “그런 성격이 이번 의약분업에서 의쟁투를 중심으로 의료계의 의견을 모으는데 큰 힘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강경파? 원칙주의자?

    올해 4월 그는 성남의사협회장에 추대되면서 ‘폭풍속’으로 들어간다. 그전까지는 의협 활동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성남 의쟁투 위원장을 겸하면서 한국의 의료현실을 파악, 강경노선을 걷게 된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 가족들은 “원칙주의자지 강경파는 아니고, 회원들의 의견을 경청해 하나의 결론을 내릴 뿐 독선적인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가족들의 표현에 의하면 민주의사회에 ‘떠밀려’ 의협회장 선거까지 나온 신씨는 당시 경선에서 승리한 김재정 회장 추천으로 결국 의쟁투 위원장이 됐다. 부인 김씨는 “남편은 자신이 의쟁투 위원장을 맡으면 의약분업에 대해 ‘선시행-후보완’을 생각하는 회장과 의견이 달라 의료계가 분열된다며 거부했었다”고 말했다.

    한사코 의쟁투 위원장을 거부하던 신씨는 결국 의약분업 시행과 관련한 정부와의 협상이나 대정부 투쟁결정 등에 대한 전권을 얻은 후에야 수락했다. 김미숙씨는 “내가 알기로 1차 폐업을 철회한 뒤 정부는 의협과 의쟁투 지도부에 대해 사법처리를 하지 않겠다는 이면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며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으며 남편은 몇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잠수’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도피를 시작하는 신씨가 “예전 처럼 구타나 고문같은 것도 없을 테니 오랜만에 한번 들어가 책도 보면서 푹 쉬는 셈 치겠다고 했다”며 “대다수 의사들이 폐업에 찬성하는 입장이니 총대를 멘 의쟁투 위원장으로서 폐업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 놓았다고 말했다.

    “평소에도 남편을 존경했지만 지금처럼 남편이 크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 김씨는 “의쟁투 위원장을 처음 맡았을 때 감옥에 갈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우리 남편이 그 일을 잘해낼 것인가에 대한 걱정 뿐이었다”며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토록 강해 보이던 김씨도 기자가 14일 저녁 신씨와 통화를 했다고 전하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잘 계시던가요?”라며 안부를 물은 김씨는 ‘가족이 보고 싶지 않다더라’는 기자의 전언에 “그분답네요…”라며 피식 웃었다.

    의료계의 주장과 정부의 방침이 현재와 같이 평행선을 그리는 상황에 의약분업을 둘러싼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쉽게 사그라들 것 같지는 않다. 설령 극적으로 의료계의 폐업이 철회된다 할지라도 충분한 준비없이 시행된 의약분업에 대한 크고 작은 잡음은 끊이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의쟁투는 완전한 의약분업 정착을 위한 특별기구로 당분간 활동을 계속할 전망이다.

    쉽게 가라앉지 않을 갈등

    한편 지난 6월 인터넷에는 한 의사가 ‘판도라의 상자’라는 글을 올려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이 글은 의약분업파동을 의료계와 약계의 갈등, 그리고 제도시행을 강행하려는 보건복지부 삼자간의 갈등 정도로만 보던 시각을 뛰어 넘어 청와대, 시민단체, 의료보험관리공단, 제약회사, 보험회사, 미국까지로 확장, 분석했다.

    의사의 경우도 ▲30∼40대 개원의 ▲전공의 ▲의대교수 ▲의협 ▲의쟁투 ▲병협 등으로 나누어 분석해 의료계 내에 존재하는 이견을 면밀히 분석했다. 이 글은 의약분업을, 판도라의 상자로 정의했고 그 판도라의 상자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의료사회주의’와 ‘의료자본주의’의 싸움이 자리잡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 글을 쓴 필자는 “의약분업 문제는 보건복지부로 대표되는 의료사회주의자와 의료자본주의자인 의사간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걸린 이데올로기 전쟁’”이라며 “의료계가 폐업을 철회한다고 해도 전쟁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휴전’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색분석]

    한 의사가 인터넷에 올린 글 의쟁투 그들은?

    의협의 핵심세력이며 참모부서다. 신상진 위원장은 의협 회장보다 지지도가 높다. 의사폐업의 논리나 전략, 전술을 주도하고 있으며 운동권의 방법론을 사용한다. 파괴력이 강하다. 의쟁투는 정부 협상안에 대해 ‘의사들 투표를 거쳐 확정짓는 방식’을 채택했다. 대단히 똑똑한 친구들이다.

    이유는 첫째, 투표를 통해 의사들을 단결시키고 통합시킬 수 있다.

    둘째, 정부의 교활한 숫자놀음이나 농간에 충분히 대처하고 검토하는 시간을 벌 수 있다.

    셋째, 의협회원이면 누구나 ‘한 표’를 행사하므로 배부른 의사의 영향력을 최소화할 수 있고, 지지기반인 30∼40대 개원의와 전공의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다.

    넷째, 필승의 전략이다(지도자가 국민투표해서 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의쟁투는 이번 사태로 운동권 문화와 가치를 의료계에 이식했으며, 의사들은 절박한 나머지 체질에 맞지 않는 이들의 방법론을 원용했다.

    그러나 만일 의쟁투가 ‘민중’이니 ‘노동자·농민’과 같은 단어를 한마디만 던진다면 의사들은 그순간 이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말 것이다. 언젠가는 의쟁투가 그 아이덴티티를 의사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들은 협상은 한다고 하지만 뒤로는 안 하는 걸로 하기도 하고, 이것만 해결되면 폐업을 푼다고 하지만, 또 다른 조건을 내세우는 등 정부처럼 이중 플레이도 하고 타이밍도 잘 포착한다.

    여하간 ‘큰판’을 벌여놓았고 이 방면에 프로급이다. 당분간 한국정부와 정치권 심지어 청와대까지 이 ‘젊은 의사들’ 농간에 놀아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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