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호

울고 싶은 큰형들의 이야기 “장남정신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장남이 죄입니까

  • 정리·김현미 동아일보 신동아 차장 khmzip@donga.com

    입력2004-08-26 17: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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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9년차 장남의 고백이 여러 사람을 울고 웃겼다.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윤영무 지음)에는 “장남이 죄입니까!”라는 하소연과 “그래도 장남은 내 천직”이라는 뿌듯함이 동시에 담겨 있다.
    • 4명의 장남이 털어놓은 징글징글한 이야기.
    • 일시 : 8월11일 오후 6시
    • 참석자 : 윤영무 MBC 보도국 부장, 김성환 방송인·탤런트,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윤우진 파평 윤가 37대 대종손
    울고 싶은 큰형들의 이야기 “장남정신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윤영무(이하 무) :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호적상 나이는 마흔일곱이고 실제 나이는 마흔아홉입니다. 일부러 호적신고를 미루는 게 다반사였던 시절이었고 게다가 섣달에 태어난 맏아들이 억울하게 한 살 더 먹을까봐 부모님이 이듬해 1월로 늦춰 신고하는 바람에 실제 나이와 차이가 생긴 것이죠. 제 밑으로 연년생 남자형제만 넷입니다. 제가 장남으로 처신을 잘했다면 이런 책을 쓸 필요가 없었겠죠. 나이가 드니까 그때 우리 아버지가 정말 대단하셨구나 하는 죄송한 마음에 한번 써봤는데, 주위에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김성환(이하 환) : 저는 8남매의 장남입니다. 누나 두 분 계시고 제 밑으로 다섯이죠. 아들 넷, 딸 넷. 막내 남동생과는 20년 넘게 터울이 져요. 옛날 어르신들 입장에서는 그리 많은 숫자도 아니죠. 우리 부모님들 대단하세요. 이렇게 많이 낳아서 잘 기르셨으니. 오늘날 우리가 잘먹고 잘살게 된 게 다 그 덕분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윤우진(이하 진) : 43년차 장남이며 3형제 중 맏이고 파평 윤가 37대 대종손입니다. 아버님은 6년 전 돌아가셨고 홀로 계신 모친과 아내, 밑으로 1남4녀를 두었습니다. 고향은 전남 여수지만 현재 직장(한국수력원자력 영광원자력본부)이 영광이라 어머니를 직접 모시지 못하는 게 마음 아프죠. 윤 선생님 책을 열 권 사서 네 번 읽고 아홉 권은 주변의 장남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너무나 내 이야기 같아서요.

    한기호(이하 호) : 저는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를 보는 순간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장남이라는 한마디에 제가 살아온 인생이 쭉 스쳐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1958년 경북 경주 출생으로 5남1녀의 장남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집을 나와서 지금까지 줄곧 제힘으로 살아왔습니다만 요즘 그런 생각이 들어요. 돈 없는 장남이 무슨 힘 있나요. 의무만 있지, 안 되면 다 장남 탓이고.

    못나도 장남은 장남



    “무녀리는 무녀리야!”

    아버지는 내가 어디 가서 못난 짓을 하고 돌아오거나 동생과 싸우면 늘 한심하다며 그렇게 운을 떼셨다. 한꺼번에 10여마리를 낳는 새끼돼지들 중 가장 먼저 어미 돼지로부터 나오는 녀석을 ‘무녀리’라 불렀는데, 한 배에서 나온 다른 새끼와 달리 몸짓이 가장 보잘 것없었다. 시간이 지나서도 무녀리는 근골이나 몸짓에서 크게 열등해서 젖먹이 쟁탈에서 동생들에게 늘 뒤로 밀렸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다른 튼실한 새끼를 밀치고 무녀리에게 젖을 물게 하셨다. (윤영무의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 중에서, 이하 인용문의 출전 같음)

    환 : 둘째가 저한테 이런 불평을 합니다. ‘제가 형보다 키가 작습니까, 힘이 적습니까?’ 무녀리는 문 열고 나오느라 지쳐서 제일 못났다고 하잖아요.

    무 : 장남은 부모님의 첫 실험결과니 오죽했겠어요.

    호 : 그래서 부모님은 맏이인 제게 산삼 한 뿌리 못 먹인 게 늘 마음에 걸리신 모양입니다. 5형제 중 제가 제일 작거든요(웃음. 한기호씨는 참석자 중 가장 덩치가 컸다). 어느 날 갈삼을 사다 꿀에 재워놓고 동생들 모르게 저 혼자만 먹으라는 겁니다. 그게 그렇게 먹기 싫더라고요. 부모님 안 계실 때 동생들한테 다 나눠줘버렸죠.

    진 : 저도 형제들 중 제일 작아요. 동생들은 키가 180cm 이상으로 장대만한데 저만 170대에요. 아버지 키가 190cm이셨어요. 임종하신 후 맞는 관이 없어 법석을 떨다 구례까지 가서 간신히 관을 구해올 정도였죠. 아직도 아버지에 못 미친다는 생각이 저를 짓누를 때가 많습니다.

    무 : 가장 먼저 장남의 위치를 배우는 게 밥상머리인 것 같아요. 아버지를 중심으로 장남인 제가 왼쪽, 어머니가 오른쪽, 제 옆에 둘째동생 이런 순서로 앉고 ‘큰애니까 더 먹어라’하며 손가락 길이만큼 생선살을 더 먹을 수 있는 ‘특혜’를 누립니다. 물론 이런 편애 뒤에는 몇 곱절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죠.

    진 : 아버지는 제가 공부 잘하는 착실한 아들이기를 원하셨는데 공부보다는 운동 쪽으로 기울었죠. 유도에 빠지면서 성적으로 급전직하했는데 그런데도 아버지는 저를 끝까지 믿어주셨어요. 운동이 끝나 배가 고프면 아버지한테 달려가 맛있는 것을 사달라고 졸랐죠. 자장면 곱배기에 통닭 등 당시로서는 참 대단한 음식들인데 아버지는 다 사주셨어요. 대신 “집에 가서 절대 말하지 말아라. 특히 아우들에게는”이라고 신신당부하셨죠.

    울고 싶은 큰형들의 이야기 “장남정신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b>윤영무 MBC보도국 부장 </b>“어머니는 제게 새 옷을 입히면서 ‘동생에게도 물려줘야 하니 깨끗이 입어야 한다’고 주의를 주시고, 동생에게 물려줄 때는 ‘형이 곱게 입어 새 옷이나 진배없다’고 하시죠. 그럼 동생들은 형이 옷을 주는 것으로 착각해요.”

    환 : 아버지와 겸상할 수 있는 게 장남의 특혜 아닙니까. 우리집은 반찬이 좀 다른 정도가 아니라 밥 속에 달걀이 들어 있는 사람은 장남밖에 없었어요. 달걀이 모자라면 아버지 밥에만 넣게 되는데 그날 아버지가 밖에서 식사하신다 하면 바로 장남 차지가 되죠. 동생들의 시기질투도 있었죠. 그러나 큰애가 예뻐서 그러시는 게 아니거든요. 부모님이 이렇게 인정하는 형의 말을 동생들이 안 들을 수 있겠느냐, 집안의 위계질서를 가르치시는 거죠.

    “못난 놈, 울기는 왜 우냐. 장남이 눈물 찔찔 짜고 다니면 동생들 볼 면목이 서겠느냐? 장남은 특히 매사 일처리에 공평해야 한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형제간의 우애가 깨지는 것은 분배가 화근이 되니까. 그런 것 때문에 틈이 갈라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네. 아버지.”

    장남은 태어남과 동시에 언제 어디서나 이런 훈계를 듣는다.

    “네가 잘돼야 동생들도 잘된다”

    진 : 할아버지는 집안대소사에 반드시 어린 저를 데리고 다니셨어요. 맛있는 음식을 먹을 기회도 많았지만 그때 장손의 도리며 해야 할 것, 해서는 안 될 일을 귀가 따갑게 들었죠.

    무 : 그때마다 맏이는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시죠?

    진 : ‘장남은 집안 행사에 반드시 정장차림을 해라’ ‘제삿상 차림은 반드시 장손이 해야 한다’ ‘장남은 무조건 참아야 한다’ ‘입은 하나고 귀는 두 개인 이유를 모르느냐. 장남은 말을 적게 하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등등 ‘장남은’이란 말을 수도 없이 듣죠. 특히 종손은 친인척들의 관혼상제로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더욱이 제가 객지 생활을 해서 시간 내기가 어려울 때 어쩌다 동생에게 부탁하기라도 하면 당장 “형은 안 왔냐?” “장남에 장손이 이런 날 얼굴도 안 보이면 되겠느냐”라는 질책이 쏟아집니다. 장남은요,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시제가 있는 10월을 앞두고 한 달 전부터 몸가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상가(喪家)에 갈 수도 없고 제가 그렇게 좋아하는 보신탕도 못 먹어요. 상서롭지 못한 곳에 가거나 그런 음식을 먹으면 영전에 절을 할 수 없거든요. 그러니 제 생활이 있겠습니까. 친구들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죠. ‘영양가 없는 짓 어지간히 해라’고 핀잔을 줘요.

    호 : 불가피하게 제사에 못 갈 수도 있는데….

    진 : 그럼 큰일나죠.

    호 : 어머니는 다른 형제들이 다 모여도 장남이 없으면 아무도 안 온 것 같다고 하세요.

    “이 아가 뉘집 장남이여”

    무 : 장남이 가장 자주 듣는 말이 “네가 잘 돼야 동생들도 잘 된다”는 말이 아닐까 싶어요. 또 저는 동생들에게 옷을 물려주면서 책임감을 배웠어요. 어머니는 제게 새 옷을 입히면서 “동생에게도 물려줘야 하니 깨끗이 입어야 한다”고 주의를 주시고, 동생에게 물려줄 때는 “형이 곱게 입어 새 옷이나 진배없다”고 하시죠. 그럼 동생들은 형이 옷을 주는 것으로 착각해요. 저는 아들만 둘인데 얼마 전 둘째에게 옷을 사줬더니 큰녀석이 항의를 해요. ‘아차’ 싶더라구요. 형에게 먼저 사줬어야 하는데. 요즘은 형, 아우 따지지 않고 따로따로 사주잖아요. 별로 좋은 모습이 아닌 것 같아요.

    환 : 어렸을 때 주위 어른들이 “저 아가 뉘집 장남이여” 하시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는 평생 농사만 지은 분인데 제 손을 잡고 논으로 나가시면서 전라도말로 ‘씨잘 데기 없이 미운 놈 되지 마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나이가 먹을수록 그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아요. 정말 장남은 달라야 하고, 장남은 뭐든지 잘해야 하고, 장남은 멋있어야 하고, 장남은 돈도 많이 벌어야 하고 그런 생각으로 꽉 차 있는 거죠.

    제 얘기를 좀더 하면 전 바둑이 1급이에요, 당구는 500이고요, 골프는 시작한 지 5개월20일 만에 78타를 쳤어요. 이게 장남정신이에요. 장남은 무조건 동생보다 나아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솔직히 동생들이 저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서 ‘형, 제가 낼게요” 해보세요, 집안 분위기 이상해집니다. 그게 장남의 운명이에요.

    무 : 아버지가 고향에서 교사로 계실 때 우리집은 비교적 풍족한 편이었는데 자식교육 시킨다고 서울로 올라와 사업에 실패하고 마지막에 트럭을 모셨습니다. 저희 5형제 학비는 고사하고 생활비도 없어서 쩔쩔맸죠. 그런데 제가 그만 덜컥 대학입시에 떨어진 겁니다. 아버지는 제게 “어떡해서든 대학에 가라. 너는 아무 걱정 하지 마라”고 하셨지만 재수생활은 가시방석이었죠. 그래서 아버지께 제안을 했어요. “장남만 대학에 들어가란 법 있습니까. 될 놈만 집중적으로 밀어줍시다”라고. 집안형편상 다 대학에 가기는 어려우니까 성적을 봐서 두 명만 진학시키고 나머지는 공장 같은 데 취직시키자는 건데 ‘공장’이라는 말과 함께 아버지는 제 뺨을 후려갈기셨어요.

    울고 싶은 큰형들의 이야기 “장남정신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b>김성환 방송인·탤런트 </b>“어렸을 때 주위 어른들이 ‘저 아가 뉘집 장남이여’ 하시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었어요. 정말 장남은 달라야 하고, 장남은 뭐든지 잘해야 하고, 장남은 멋있어야 하고, 장남은 돈도 많이 벌어야 하고 그런 생각으로 꽉 차 있는 거죠.”

    호 : 저도 윤선생 책에서 그 대목이 눈에 띄더라고요. “다음번 시험에 각자 성적표를 가져와서 가장 우수한 형제가 학교에 다니는 것으로 하고 나머지는 탈락시키자”는 제안에 형제들이 너나 없이 공부에 열을 올렸다고 했죠? 그 중에서 ‘미련 곰탱이’로 불리던 넷째가 공장에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공부에 몰두해 결국 전액장학금 받고 대학에 진학했다는 이야기를 보면서 거꾸로 ‘차남정신’을 생각해봤습니다. 역사적으로 장남은 지키려 하고, 차남은 일을 저지르죠. 신화를 보아도 차남과 서자가 건국을 해요. 박정희, 전두환, 노무현 대통령 모두 차남 아닙니까. 차남은 기득권이 없기 때문에 ‘박차고’ 나가려는 개척정신이 있어요. 안정감이라고 하는 장남정신과 도전하는 차남정신이 조화를 이뤄야 이 사회가 발전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집이나 가족 모임을 꾸리면 경제적 지출의 50% 이상은 장남 몫이다. 장남의 경제적 능력과는 큰 상관이 없다. 속 좁은 형의 마음을 고백하자면 이렇다. 입에 발린 소리라도 동생들이 “형, 마음쓰는 게 대단해. 역시 형은 형인가 보다. 우리는 죽어도 그렇게 못하는데 말이야…”라는 소리를 왜 안 해주느냐는 것이다. 때때로 말 한마디 없는 동생들이 야속할 때가 있다. 그렇게 해준다면 얄팍해진 지갑을 보고 있더라도 한결 위안이 될 텐데….

    무 : 장남으로서 가장 힘들었을 때를 꼽으라면, 생활이 너무 어려워 120원짜리 라면도 못 먹고 학교를 갔을 때,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셋째동생이 버스비가 없어서 울고 갔을 때였어요. 그래서 대학이 아니라 공장에 가겠다는 말이 나온 거죠. 나는 장남이니까 가족을 건사해야 해, 나는 돈을 벌어야 해, 그런 생각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닙니다. 넷째와 막내는 제가 대학까지 가르쳤어요. 덕분에 경제담당 기자라면서도 재테크는 꿈도 못 꾸고 화곡동에서 20년째 살고 있죠.

    호 : 저는 장남 노릇 제대로 못한 경우에요. 유신시절 대학에 다니면서 유인물 만들고 뿌리고 하면서도 늘 내가 잡혀가면 우리 집안이 어떻게 될까 걱정했죠. 결국 감옥 갔다 오고, 사범대학을 졸업했지만 직장 잡기가 어려웠어요. 출판계에 뛰어들었는데 직장이 ‘창작과비평사’였어요. 월급쟁이가 아니라 운동을 한다는 사명감으로 열심히 일했는데 몇 년 안 돼 출판등록이 취소되더라고요. 장남 노릇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죠.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냥 감기인 줄 알았는데 괴사성 폐렴이라 해서 6간마다 폐가 한쪽씩 망가지는 병이었습니다. 오늘을 못 넘긴다는 의사 말에 놀라고 그러다 3일을 견디고, 이렇게 하루하루 연장하다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들이 제 눈치를 보면서 “형, 좀 봐” 하는 겁니다. 알죠. ‘이 녀석들, 병원비 걱정하는구나.’ 돈이 있든 없든 형이라면 이렇게 말해요. “알았다. 걱정마라.”

    환 : 맞아요.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형” 하고 부르면 ‘자식, 나한테 뭐 도와달랠 거 있나’ 하고 “그래, 뭐, 말해봐” 하는 게 장남이에요. 저희 집이 8남매인데 저만 살 만하고 다 어려우니 어떡합니까. 시집간 누이조차 쫄딱 망하고, 동생은 사업을 한다기에 시골에서 장남에게도 안 준 땅까지 팔아 주었는데 탈탈 털어먹고 나만 쳐다보니. 장남인 게 무슨 죄라고. 겉으로는 동생들에게 “그런 것을 형한테 이야기하면 어떡하냐” “그런 말까지 하면 이 오빠는 너무 힘들다” 하면서도 다 들어주고 다 해줬어요. 둘째 해주면 셋째, 그럼 넷째, 막내한테 ‘이게 마지막이다. 앞으로는 네가 벌어서 해라’ 약속도 받았지만, 그게 어디 끝입니까.

    형제 갈라놓는 돈문제

    진 : 아버지가 58세에 폐암으로 돌아가셨어요. 2년 투병하시는데 수술 후 몸에 좋다는 것은 다 찾아다녔습니다. 참빗살나무 산초기름 삼백초 등 듣도 보도 못한 것을 구하느라 무박3일간 강원도 경남 일대를 헤매고 다니기도 했죠. 병원비만 2억원 정도 나왔어요. 동생들한테 그런 거 알아달라고 안 해요. 언젠가는 알겠죠. 알아주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할 수 없고. 집안에서 장남이란 존재는 판사였다 변호사였다 의사였다 의리의 돌쇠였다 그래야 해요.

    환 : 장남들은 다 그래요. 동생들한테 그런 얘기 해봤자 뭐하겠어요. 물론 그걸 알아주는 동생은 더 예쁘지. 그런데 집사람은 그게 아니에요. 왜 알아주지 않나 못마땅해하고 그런 생각을 할수록 속상하고. 저는 집사람한테 말하죠. 세월이 지나면 다 안다고. 그래서 방법을 바꿨어요. 내가 가진 거 당신한테 다 줄 테니 당신은 형제들한테 아낌없이 해라. 이렇게 베푸는 일은 다 아내에게 맡기니 집안이 편안해지데요.

    울고 싶은 큰형들의 이야기 “장남정신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b>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b> “몇 년 전 장남이 이런 책을 썼다면 ‘푼수 아냐?’라는 말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장남들이 인간선언을 한 거예요. 책을 보면서 ‘어, 내 이야기네. 나도 이렇게 쓸 수 있는데 누가 먼저 썼구만’ 하다가 왈칵 눈물이 나죠.”

    최근 어머니 칠순잔치를 치렀다. 오형제가 모여서 대책을 논의하고 각자 200만원씩 모아 1000만원을 만들어 드리기로 했다. 다음날, 한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족회의를 마치고 유독 눈에 밟히던 아우였다.

    “너, 이번 분담금이 부담되지?” “괜찮아. 걱정할 것 없어.” “형한테 뭔 자존심을 내세우냐. 어려우면 어렵다고 하지!” “솔직히 어려워. 형도 어려울 텐데 가능하면 빌려줘. 내가 나중에 갚을게.” “알았어. 하지만 그냥 주는 거다. 빌려주는 거 아니니까 절대 부담 갖지 마라. 이건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라.”

    무 : 형제들 우애를 상하게 하는 것은 무슨 거창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돈’이에요. 돈 문제가 얽히면 형제도 원수가 되죠. 그래서 장남은 금전에 관한 원칙이 있어야 해요. 특히 형제간에 돈거래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돈이 필요하다면 아예 줘버려요.

    환 : 20년 전 아버지가 폐 한쪽을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으셨어요. 그런데 병원비가 일주일 단위로 300만원씩 나오는 겁니다. 다 합쳐서 1억원쯤 들었어요. 형제 중 누구 한 사람 보탤 여력은 없고 저 혼자 짊어져야 하는데, 청구서를 볼 때마다 기가 막혀요. 그렇게 6개월쯤 지났을 때 동생들 앉혀놓고 한 마디 했어요. “야, 너무들 하지 않냐.” 말은 했지만 방법이 있나요, 돈이 없는데. 집사람도 무지 속상했겠죠. 지난 이야기니까 하는 건데, 한번은 300만원을 만들어서 동생에게 주면서 “눈치껏 형수한테 건네라”고 했어요. 동생이 받지를 못하더라고요. “괜찮아. 그렇게 해서 형수 마음도 풀어주고 그러는 거야.” 동생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해가지고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형수한테 돈을 건네데요.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그때는 너무 마음이 아팠죠.

    형수님, 우리 형수님

    무 : 장남은 결혼하기도 어렵지만 이혼하기는 더더욱 어렵죠. 그래서 배필을 고를 때 좋은 학벌보다 불우이웃돕기 계좌를 하나라도 갖고 있는 여자, 외모가 아름답기보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진 여자를 찾으라고 해요. 장남과 맏며느리는 하늘에서 내려준 사람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처음에는 이 말이 그렇게 듣기 싫더니 나중에 장남이나 맏며느리 역할에 노하우가 붙다 보면 저도 모르게 하늘이 내린 사람의 모양새를 갖추게 된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됐죠. 그래서 동생들이 “형수님, 우리 형수님” “언니, 우리 언니” 하고 정겹게 부르면 잘 되는 집안이고 “형수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어” 하면 끝장난 집안이에요. 맏며느리는 신이에요. 우린 신을 모시고 사는 거예요.

    좀더 솔직히 말하면 책에도 썼듯이 저희 집도 고부 갈등 때문에 이혼을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오죽하면 이혼 근거를 찾으려고 ‘칠거지악(七去之惡)을 찾아봤겠어요.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내쫓는다 해서 야 이거다, 했거든요. 그런데 단서가 붙어요. 가난했다가 뒤에 부자가 돼도 안 되고, 보내서 돌아가 의지할 곳이 없으면 안 되고, 함께 부모의 3년상을 치렀으면 안 된다고. 제가 너무 힘들어서 이혼을 선언했더니 그렇게도 며느리를 미워하는 것 같던 어머니가 예상 밖의 반응을 보이는 겁니다. “이혼이 그렇게 쉬우냐. 집안 망신시키지 말고 참아라. 네 동생들이 모두 보고 있다. 네가 이혼하면 동생들이 무엇을 배우겠느냐. 정 못 살겠으면 동생들을 불러 상의를 해라.”

    진 : 맏며느리는 이해력, 포용력, 화합단결, 희생정신 등 갖춰야 할 게 너무 많아요. 부부관계뿐만 아니라 부모·형제, 시누이·동서간의 가교역할, 교통순경 역할까지 해야 하죠. 저의 경우는 대종손집 며느리니 어찌 보면 장남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지도 몰라요. 그런 장남은 결혼도 맘대로 못하잖아요. 저는 선을 마흔 번쯤 보았습니다. 다행히 장남이라고 해서 차인 적은 한번밖에 없는데요, 그것도 여자 어머니가 노골적으로 싫어하시더라고요. 그때 제가 당돌하게 한마디 했죠. “따님이 나중에 결혼하면 절대 아들은 낳지 말라고 하세요. 그럼 이 세상에 장남이 없지 않겠습니까.”

    환 : 저도 차마 8남매라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어요. 하필 제 아내가 딸 셋중 막내거든요. 아내와 사귈 때 가족 이야기가 나오면 “자세히 알 필요 없고 나를 포함해서 4형제여” 하고 얼버무립니다. 그러다가 조금 지나서 “내가 언제 나까지 포함해서 4형제라고 했냐, 나 빼놓고 4형제지” 하면서 형제수를 조금씩 늘렸어요. 그런데 장모님이 “애가 찌개도 못 끓이고 할 줄은 아는 게 없다”면서 결혼을 말리셨는데 사실은 저를 걱정해주는 게 아니고 딸을 안 보내려고 그러셨던 거죠.

    울고 싶은 큰형들의 이야기 “장남정신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b>윤우진 파평 윤가 37대 대종손</b> “동생들한테 그런 거 알아달라고 안 해요. 언젠가는 알겠죠. 알아주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할 수 없고. 집안에서 장남이란 존재는 판사였다 변호사였다 의사였다 의리의 돌쇠였다 그래야 해요.”

    호 : 저는 아들 없는 장남이 가장 처절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딸만 둘이거든요. 첫딸을 나으니까 양쪽 집안에서 서로 이름을 지어 보내세요. 그런데 둘째도 딸이라니까 아무데서도 연락이 없데요. 그래서 제가 이름을 지었어요. 저는 형제 많은 집 고통을 잘 알기에 둘째 낳고는 ‘그만’ 선언을 했습니다. 그게 영원히 부모님과의 갈등요인이 됐죠. 지금도 집사람은 압박을 느끼고 있고. 하지만 앞으로 세상은 달라질 텐데…. 얼마 전 저랑 열다섯 살 터울 지는 막내가 아들을 낳았어요. 그 소식을 듣고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가 그날로 대전까지 가시더라고요.

    진 : 저희 둘째가 태어날 때 6시간 간격으로 제 동생댁이 애를 낳았는데 그쪽은 아들이었어요. 아버지가 섭섭한 마음에 “바꿔서 낳지” 하시는데 그게 마음대로 됩니까. 아무리 종손 어쩌고 해도 저는 둘째까지만 낳기로 결심했어요. 병원으로 향하면서 아버지께 전화를 올렸죠. 그랬더니 노발대발하시면서 “내 죽는 꼴 보겠느냐”고 하시데요. 그래서 포기하고 결국 한 명 더 낳았더니 아들, 욕심을 더 냈더니 딸, 딸로 모두 다섯이 됐어요.

    장남은 집안의 등불, 꺼질 수 없다

    제대 후 나는 외무고시에 열을 올렸다. 외교관이 되고 싶었다. 좀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일본이든 미국이든 자유롭게 숨쉴 수 있는 어딘가로 떠날 수만 있다면 어떤 직업이든 좋았다. 하지만 공부를 더 하겠다는 내 뜻을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형, 우리가 어떻게 해서든 형 등록금을 마련해볼 테니까 어서 졸업이나 해. 그리고 빨리 취직을 해.” …그날로 외교관이 되겠다는 꿈을 접었다. 혹시 운이 좋아 외무고시에 붙었다 해도 어쩔 것인가. 줄줄이 딸린 동생들과 병약하신 부모님을 두고 외국으로 나다닐 위인도 못 되지 않는가. 그렇게 스스로를 단념시켰다.

    무 : 장남만 아니었다면 저는 지금 한국에 없을 겁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죠. 그때 동생에게 슬쩍 “내가 공부를 하는 동안 일단 네가 돈을 벌면 안 될까” 했더니 “형이 군대 간 동안 내가 벌었으니 이제 나도 대학 가고 싶다”고 해서 포기했죠.

    진 : 저는 자식한테 아버지처럼 살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합니다. 만약 제가 장남이 아니었다면 운동선수가 됐거나 연예인이 되었을지도 모르죠. 종손이니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그나마 가까운 거리에서 다닐 수 있는 직장을 선택했습니다. 지금 제 근무지가 영광이고 어머니가 홀로 여수에서 농사짓고 계신 게 못내 마음에 걸려요. 제가 주말부부가 되더라도 가족들은 어머니 곁으로 보내야 하는 게 아닌가 싶고.

    환 : 부모님 모시는 문제로 장남들이 마음고생을 많이 하죠. 그런데 저희 집은 막내가 그 역할을 했어요. 부모님은 고향을 떠나시지 못하고 저는 서울을 벗어나지 못하니 어쩔 수가 없잖아요. 그때 막내에게 부탁했죠. 네가 시골로 가서 부모님을 모셔라, 그러면 내가 번 돈 너 다 줄게, 했습니다.

    저야말로 아버지의 꿈을 산산이 깬 장남이에요. 아버지는 아무리 가난해도 장남은 반드시 대학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셨거든요. 그런데 제가 서울에서 재수생활을 하다 1970년 2월 얼떨결에 동양방송 탤런트 시험을 봐서 붙은 겁니다. 제가 그때 친구에게 “탤런트가 뭐냐”고 물을 정도였으니 세상물정 몰랐죠. 그 친구 한심하다는 듯 “테레비에만 나오는 영화배우가 탤런트다, 그것도 몰랐냐” 하는 겁니다. 연기자 생활을 시작했는데, 집에서는 공부하는 줄 알고 매달 꼬박꼬박 돈을 부쳐주셔요. 그러다 서울로 시집온 뒷집 누나가 명절에 고향에 갔다가 제 이야기를 한 겁니다. “아이고 아저씨, 성환이가 탤런트 됐으니 얼마나 좋으십니까.” 그 바람에 들통이 났죠.

    장남 대학 보낸다는 아버지 꿈은 다 깨지고 저는 3년 동안 집에 못 갔습니다. 제가 올해 경기대에 들어갔어요. 아무리 바빠도 수업을 빠지지 말자 결심하고 딱 하루만 결석했습니다. 장학금을 다 받았다니까요. 돌아가신 아버지 소원 풀어드렸죠.

    듣고 싶은 말 “형, 힘들지?”

    “뭐 아시겠지만 장남으로서 정말 어디다 하소연도 못하고 울고 싶을 때가 어디 한두 번입니까? 그런데 옆에서 동생이 ‘형, 힘들지?’ 그렇게 한마디만 해줘도 모든 시름이 사라지는 게 또 장남 아닙니까.” 형들도 때론 자신의 짐을 나누어갖고 싶어진다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장남도 가끔은 울고 싶은 법이다.

    무 : 식구들이 야속할 때가 있죠. 어머니와 아내, 자식들이 올라탄 지게를 혼자 짊어지고 산길을 가는데 탄 사람들이 왜 빨리 가지 않느냐고 불평만 늘어놓으면 저는 어떻겠어요. 답답하죠. 제가 버리면 다 굶어죽을 사람들인데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 아닌가 하고요.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란 책이 나온 후 전화나 이메일로 비슷한 호소를 해오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중에는 의사나 목사님도 여럿 있었습니다. 의외였죠. 제가 졸지에 정신치료사가 된 것 같더군요. 사실 책이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어머니께 갖다드렸는데 눈물이 나서 다 읽지 못하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너무 솔직하게 쓴 것 아니냐, 한국 사람들은 너무 솔직하면 겉으로는 그러냐 하면서도 돌아서서는 욕한다 하셔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어요. 집사람은 아직도 읽지 않았어요. 아니 읽고 싶지 않은 것 같아요. 우리 애도 안 읽은 것 같고. 동생들은 한 마디 하더라고요. “형만 잘났냐고.”

    호 : 와인세대라는 말이 있어요. 45∼64세로 보릿고개를 겪으며 성장했고 박정희 정권 아래서 성년기를 맞았으며 한강의 기적을 이뤄내고 국가와 가족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온 세대죠. 인고(忍苦), 숙성(熟成)으로 어두운 저장고와 침묵의 시간을 지나 이제 비로소 자신의 빛깔과 향으로 다시 태어나는 포도주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장남을 여기에 대입하면 딱 맞아요. 장남은 부모와 동생들 사이에서 안정, 조화, 질서유지 이런 역할을 하기 위해 노력해왔죠.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게 미덕이었고요. 하지만 이 세대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이제는 ‘나도 힘들다’ ‘나도 아프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에서 ‘겨울연가’가 인기를 끄는 이유에 대해 한 일본인 여성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몇 번 자살을 기도했는데 ‘겨울연가’를 보면서 남자도 저렇게 눈물을 흘리는구나, 그 모습에 위안을 받아 살기로 했다”고. 몇 년 전 장남이 이런 책을 썼다면 “푼수 아냐?”라는 말을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장남들이 인간선언을 한 거예요. 책을 보면서 “어, 내 이야기네. 나도 이렇게 쓸 수 있는데 누가 먼저 썼구만” 하다가 왈칵 눈물이 나죠.

    진 : 감동이란 말을 뒤집으면 동감이 되죠.

    형만한 아우 없다

    호 : 출판계에서 베스트셀러를 이렇게 정의해요. 평소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읽는 책. 그들을 움직이면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것인데, 이 책이 처음에는 장남들로부터 공감을 얻어내고 다음엔 차남, 그리고 가족 모두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거라 생각합니다.

    환 : 지금까지 장남이 얼마나 힘든지 서로 고백했는데 반대로 장남은 그렇게 힘들게 살아왔기 때문에 경쟁력이 있다고 봐요. 앞서도 말했듯이 장남은 뭐든지 동생들보다 잘해야 해요. 장남이 번 만큼 무조건 베풀면 그 집안은 멋지게 됩니다. 그러면 둘째도 형처럼 돈 벌어서 장남 노릇 하고 싶어져요. 동생한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둘째가 사업하다가 일곱 번 망했어요. 그리고 여덟 번째에 성공했지요. 그 동생이 요즘은 제 역할을 다 해요. 제가 “이번에는 네가 알아서 해라” 하면 일사천리로 해치우죠. 저는 “수고했다”는 말만 하면 돼요. 제 역할이 점점 줄어들어 정말 행복합니다.

    무 : 제가 책에서 “장남형 리더십이 곧 한국형 리더십이다”라는 말을 했잖아요. 리더는 조직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겠다는 책임감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장남의 경우 그런 무한책임감은 바로 부모님과 집안의 기대와 사랑에서 나옵니다. 장남이 받은 그런 사랑과 기대를 아우나 가족에게 베풀듯 동료들에게 전하면 그게 바로 장남형 리더십이 됩니다. 그래서 형만한 아우 없다고 하지 않을까요.

    호 : 저는 오늘 이 자리가 장남들을 위한 일종의 ‘해원굿’이라고 생각해요. 실컷 이야기하고 울고 웃고 풀어버리자 하는. 장남정신이라는 게 어쩌면 전근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그것을 뛰어넘을 필요가 있어요. 사회 자체가 새로운 도덕을 요구하고 있으니까요. 자식도 한 명만 낳는 시대니 장남이니 차남이니 하는 구분도 없어질 겁니다. 누구나 다 장남 장녀가 되는 거죠. 어쩌면 우리가 장남정신을 말하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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