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자 양녕이 폐위되고 충녕이 그 자리를 잇는 장면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중 하나다. 양녕대군이 왕위에 올랐을 경우 폭군이 됐으리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글 창제 같은 위대한 공적을 세우지는 못했을 것이기에 사람들은 충녕의 왕위계승을 다행한 일로 생각한다. 충녕의 왕위계승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양녕이 폐위되고 충녕이 그 자리를 잇게 된 데 대해서는 양녕이 비행으로 폐위됐다는 설과 양녕이 스스로 양보했다는 설이 양립한다. 사진은 KBS 드라마 ‘대왕세종’의 한 장면.
‘정종실록’에 세종이 천명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웃에 정사파라는 자가 사는데, 이름은 가야지(加也之)다. 그가 왔기에 부인(이방원의 부인 민씨)이 “새벽녘 꿈에, 내가 신교(新敎)의 옛집에 있다 보니, 태양이 공중에 있었는데, 아기 막동(莫同)이가 해 바퀴 가운데에 앉아 있었으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라고 묻자 정사파가 판단하여, “공(公, 이방원)이 마땅히 왕이 되어 항상 이 아기를 안아줄 징조입니다”라고 말했다.(‘정종실록’ 2년 1월28일)
막동은 세종의 아이 때 이름인데, 모친 민씨의 꿈과 이웃 정사파의 해몽을 빌려 세종이 천명을 받았음을 시사하는 내용이다. ‘정종실록’은 ‘태종실록’처럼 세종 때 편찬됐으니 액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야사는 양녕대군이 일부러 세자 자리를 양보했다고 전한다. 영·정조 때에 편찬된 것으로 여겨지는 작자 미상의 ‘소대기년(昭代紀年)’도 그중 하나다. 1926년 강효석(姜斅錫)이 편찬한 ‘대동기문(大東奇聞)’도 ‘소대기년’의 내용을 따르고 있다.
양녕대군 제(?)는 태종의 첫째아들로, 처음에 세자로 봉해졌는데 타고난 바탕이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 젊어서부터 문장에 능했다. 그러나 세종에게 성인의 덕이 있는 것을 보고 거짓 미친 체하고 스스로 맘대로 행동하더니 18년 무술(戊戌, 1418)에 영상 유정현 등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제(?)가 덕을 잃었다 하며 합사(合辭)하여 세자를 폐하기를 청했다.(‘대동기문’)
‘세종이 성인의 덕이 있는 것을 보고 거짓 미친 체’해 양녕이 왕위를 양보했다는 것이다.
태종은 충녕을 세자로 삼고 드디어 제(?)를 폐해 광주(廣州)로 내보냈다. 이때부터 제는 그 행적을 숨기고 떨어진 옷을 걸친 채 발을 저는 나귀를 타고 산수(山水) 사이를 방랑하여 오랑캐 땅으로 가서 문신한 것과 같았으니 세상에서 일컫기를 태백(泰伯)의 지극한 덕(至德)이 있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대동기문’)
양녕대군의 행위를 지극한 덕이란 뜻의 지덕(至德)이라고 극찬하는 대목이다. 지덕은 공자가 ‘논어’에서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장자 태백(泰伯)을 두고 “태백은 지극한 덕을 가진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세 번 천하를 양보했으나 백성들이 칭송함이 없었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충녕이 나에게 속았다”
사마천의 ‘사기’ 주(周)본기에 따르면 주나라 태왕 고공단보(古公亶父)의 장남 태백은 부왕의 뜻이 막내아들 계력(季歷)에게 있음을 알고 둘째 우중(虞仲)과 형만(荊蠻)으로 달아나서 문신을 하고 머리털을 짧게 잘라 왕위를 양보했다 한다. 양녕의 행위 역시 공자가 극찬한 태백의 지덕과 같다는 것이다.
조선 숙종 때에는 숭례문 밖 도저동에 양녕대군을 모시는 지덕사(至德祠)를 세워 그 덕을 기리기도 했다. 숙종 27년(1711) 양녕대군의 외후손 윤봉조(尹鳳朝)가 쓴 ‘행장(行狀)’도 양녕이 세자 자리를 양보했다고 적고 있다.
지덕사 부묘소 전경.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1394∼1462)의 묘와 사당으로 숙종 1년(1675) 임금의 명에 의해 세워졌다. 원래 숭례문 밖에 있던 것을 1912년 서울 동작동 지금의 자리로 옮겨놓았다.
‘행장’은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폐위되고 충녕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이후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묘사했다.
마침내 종묘에 고하고 세자를 폐하여 양녕대군으로 삼았다. 그리고 세종대왕을 책봉하여 세웠다. 임금이 눈물로 대군을 보냈다. 의논이 이미 정해지자 대군이 기뻐하며 후회하는 마음이 없이 손뼉을 치면서 웃으며 말했다. “충녕이 과연 나에게 속았다.”(‘행장’)
‘행장’은 공자의 지덕(至德) 외에 “주자가 이르기를, 만약 극치에 이름을 논한다면 태백이 문왕보다 더욱 높다”며 태백의 덕이 성인으로 불리는 문왕보다 높다고 주장했다. 양녕이 스스로 세자 자리를 양보했다는 기록도 적지 않지만, 문제는 이런 기록들이 모두 후대의 기록이란 점이다.
외숙 실언 폭로로 위기 모면
‘정종실록’ ‘태종실록’ ‘세종실록’ 등 당대의 기록은 모두 세종의 자리에서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실록은 일부 과장은 있을 수 있어도 없는 내용을 창작해서 산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관이 자신의 견해를 덧붙일 필요가 있으면 ‘사신은 말한다’라고 자신의 견해를 표시할 뿐이다. 따라서 양녕의 폐위 이유를 실록에서 찾아보는 것은 사건의 실체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다.
양녕이 세자 시절 충녕과 함께 연루된 사건이 있었다. 원경왕후 민씨의 동생들인 민무휼(閔無恤)·무회(無悔) 형제 사건이다. 태종 8년(1408) 원경왕후의 두 동생 민무구·무질은 뚜렷한 죄가 없었음에도 ‘어린 세자를 끼고 위복(威福)을 누리려 했다’는 모호한 혐의로 사형당했다. 외척 발호를 염려한 태종의 명에 따른 조치였다.
태종은 민무구·무질은 사형시켰으나 남은 무휼·무회에게는 각각 이성군(利城君)·여원군(驪原君)의 봉작을 줬다. 그러나 태종 15년(1415) 전 황주(黃州) 목사 염치용(廉致庸)이 노비소송에서 패하자 민무회를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한 것이 뜻밖의 변을 낳았다. 염치용이, 자신의 종 서철(徐哲) 등이 큰 부자인데 태종의 후궁인 혜선옹주(惠善翁主) 홍씨(洪氏)와 영의정 하륜에게 뇌물을 주어 내섬시에 속하게 됐다고 주장한 것이다. 염치용과 함께 이 사건에 관련이 있던 전 전농시사(典農寺事) 권집지(權執智)가 민무회의 처가 쪽 인물이었기에 민무회를 찾아와 하소연한 것이다.
민무회가 충녕대군에게 이 말을 전하자 충녕대군은 부왕에게 고했다. 이를 들은 태종은 “내가 부끄러운 말을 들으니 도리어 경들을 보기가 부끄럽다(‘태종실록’ 15년 4월9일)”라고 크게 화를 냈다. 태종이 엄중 조사를 지시함에 따라 염치용과 권집지는 물론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민무회도 하옥되고 말았다.
염치용은 곤장 100대에 경성(鏡城) 유배되고 재산을 몰수당했는데, 태종은 당초 민무회는 염치용에게 이용당했다면서 석방했다. 그러나 의금부, 사간원 등에서 계속 강경 처벌을 주장하자 민무회의 직첩을 회수하고 서인으로 삼았다. 그런데 태종은 갑자기 사헌부를 공격하고 나섰다.
“민무회와 염치용 등의 불충죄를 육조(六曹), 의금부, 승정원, 사간원이 모두 엄히 다스릴 것을 주청하는데, 나라의 헌법을 맡은 사헌부는 좌시하고만 있으니 그 충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실록은 일부 과장은 있을 수 있어도 없는 내용을 창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따라서 양녕의 폐위 이유를 실록에서 찾아보는 것은 사건의 실체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다. 사진은 태조와 태종의 조선왕조실록 겉표지. (사진출처·문화재청 문화재정보센터)
그런데 이때 아무도 예견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세자 양녕이 돌연 사건에 개입한 것이다. 태종 15년(1415) 6월6일 태종이 편전에서 세자와 효령·충녕 두 대군과 함께 있는데, 세자가 외숙들의 실언을 폭로한 것이다.
“지난 계사년(태종 13년, 1413) 4월에 중궁(中宮, 왕비)이 편찮아서 신(臣)과 효령·충녕이 궐내에 있었는데, 민무회와 민무휼도 문안을 왔었습니다. 두 아우가 약을 받들고 안으로 들어가서 신과 두 민씨만이 있게 되었습니다. 민무회의 말이 가문이 패망하고 두 형이 득죄한 연유에 대하여 미치기에, 신이 ‘민씨의 가문은 교만 방자하여 불법(不法)함이 다른 성(姓)에 비할 바가 아니니 화를 입음이 마땅하다’라고 책망했더니 민무회가 신에게 이르기를 ‘세자는 우리 가문에서 자라지 않으셨습니까?’ 하므로, 신이 잠자코 있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안으로 들어가는데 민무휼이 신을 따라와 말하기를 ‘민무회가 실언을 하였으니 이 말을 드러내지 마십시오’ 하기에, 신이 오래도록 여쭙지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개전(改悛)할 마음이 없고, 또 원망하는 말이 있으므로 감히 아룁니다.”(‘태종실록’ 15년 6월6일)
민무회·무휼이 두 형이 죽은 것이 억울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위기를 느낀 민무휼이 ‘민무회가 실언했으니 발설하지 말아달라’고 청탁했다는 것이다. 태종이 두 처남을 불러 묻자 “그런 일이 없습니다”라고 부인했으나 태종은 “이들의 일은 다만 늙은 어미가 당(堂)에 있기 때문에 차마 법에 의해 처치하지 못할 뿐이다”라고 단정지었다. 장모 송씨가 세상을 떠나면 죽이겠다는 뜻이다. 세자는 사헌부 우사간 이맹균(李孟畇)과 사헌부 집의 안망지(安望之) 등을 불러 더 자세하게 진술했다.
“내가 ‘외삼촌댁의 가문은 깨끗하지 못합니다’ 하였더니 민무회가 ‘세자는 우리 가문에서 자라나지 않으셨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언짢아 그대로 일어나자 민무휼이 나에게 ‘잡담이니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태종실록’ 15년 6월6일)
세자 폐위 언급한 태종
외척의 발호에 병적으로 집착하던 태종에게 이 정도 혐의면 사형시키기에 충분했다. 세자는 왜 외숙들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는 일을 폭로한 것일까. 그 내막이 정확히 알려지진 않았지만, 세자 자신의 불안한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자 양녕은 그간 여러 문제를 일으켜 이 무렵 지위가 불안정해졌다. 태종은 재위 13년(1413) 8월 세자의 스승인 세자시강원의 이사(貳師) 유창(劉敞)과 빈객(賓客) 변계량(卞季良) 등에게 세자 폐위에 관한 말을 꺼낸 적이 있다.
“옛날에 세자를 폐한 일은 모두 환관이나 빈첩(嬪妾)의 참소로 말미암은 것이었지만 나는 이와 다르다. 세자의 마음은 반드시 그 자리를 족히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뉘우치지 않는다면 종실(宗室)에 어찌 적당한 사람이 없겠는가?”(‘태종실록’ 13년(1413) 8월15일)
세자시강원의 관료들은 이때 “세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며칠 동안 불식(不食)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태종과 세자는 자주 부딪쳤다. 민무회 사건이 일어나는 태종 15년(1415)에도 태종은 세자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태종이 세자 빈객 이래(李來)와 변계량을 경연청(經筵廳)에서 인견하고 사람들을 물리치고 하교했다.
양녕대군은 예순넷의 나이에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귀양 간 단종을 죽여야 한다고 수창(首唱)했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세종의 자식과 손자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것을 부추기려 했던 것일까? 사진은 단종이 머물던 강월도 영월 집터.
세자 빈객 이래는 양녕에게 여러 차례 간쟁했던 인물이다. 조선 초의 문신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이래가 여러 말로 지극하게 간하므로 양녕이 원수같이 여겼는데, 어느 날 옆 사람에게 말하기를 ‘계성군(이래)만 볼 것 같으면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산란하다. 비록 꿈에서라도 보이기만 하면 그날은 반드시 감기가 든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태종실록’도 이래가 세자에게 “전하의 아들이 저하(邸下)뿐일 줄 압니까. 용렬하고 어리석은 신이 서유(書·#54347;, 서연)를 모신 지 14년이 되었으나 보도(輔導)를 잘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태종의 꾸짖는) 교지(敎旨)를 받드니 땅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입니다(‘태종실록’ 15년 1월28일)”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런 상황에서 세자는 두 외숙의 발언을 폭로함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나려 한 것이다. 세자의 폭로로 무회·무휼 형제는 서인으로 강등되고 귀양에 처해졌다.
태종 15년(1415) 말 ‘왕자 비(?)의 참고(慘苦) 사건’이 발생하면서 무회·무휼은 죽음으로 내몰린다. 태종은 재위 2년(1402) 잠시 입궐했던 민씨 집안의 여종 소(素)와 관계해 아이를 갖게 했는데, 이 사실을 안 원경왕후 민씨는 아이를 떼내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썼으나 실패해서 아이가 태어났다. 그가 바로 경녕군 이비(李?)였다. 원경왕후 민씨는 갓난아이도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는데, 재위 15년 뒤늦게 이 사건을 알게 된 태종은 왕지(王旨)를 춘추관(春秋館)에 내려 이 사실을 실록에 전하게 했다.
“내가 만일 말하지 않는다면 사필(史筆)을 잡은 자가 어찌 능히 알겠는가. 참으로 마땅히 사책(史冊)에 상세히 써서 후세에 밝게 보이어 외척으로 하여금 경계할 바를 알게 하라.”(‘태종실록’ 15년 12월15일)
이 사건으로 태종 16년(1416) 1월13일 원주와 청주로 귀양 간 민무회와 민무휼은 목숨을 끊어야 했다. 두 사람은 자진했다. 민무회와 무휼을 죽인 인물은 물론 자형인 태종 이방원이지만 그 단서를 연 것은 세자의 폭로였다. 이로써 세자는 위기를 넘겼으나 이는 순간에 불과했다.
폐위 결심 굳히게 한 ‘수서(手書)’
양녕이 다시 위기에 처한 것은 여자 문제 때문이었다. 태종은 양녕이 만 13세 때인 재위 7년(1407) 김한로(金漢老)의 딸을 세자 양녕의 부인으로 삼아 숙빈(淑嬪)으로 봉하면서 김한로에게 당부했다.
“경은 멀리는 심효생(沈孝生, 태종 이방원의 동생인 방석의 장인)을 본받지 말고 가까이는 민씨를 경계하여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 … 경은 마땅히 공경하게 내 말을 받아서 오직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른에게 공손하라고 경의 사위에게 가르치라. 나 또한 이것으로 내 자식을 가르치겠다.”
김한로는 절하며 사례했으나 겉으로만 그랬을 뿐이었다. 김한로는 태종의 충고를 무시하고 사위의 여성 편력을 도왔다. 양녕이 폐위되는 결정적 전기가 된 전 중추(中樞) 곽선(郭璇)의 첩 어리(於里)를 빼앗는 사건에도 가담한 것이다.
양녕은 곽선의 첩 어리를 빼앗아 임신시켰는데, 이 사실은 태종의 딸들에 의해서 밝혀졌다. 태종은 양녕이 어리를 입궐시키자 남의 첩을 데려왔다고 화내며 쫓아냈다. 태종 18년(1418) 3월 태종의 장녀 정순공주(貞順公主)와 차녀 경정공주(慶正公主)가 모친 민씨를 만나다가 태종이 나타나자 경정공주가 고했다.
“세자전(世子殿)에서 유모를 구하여 부득이 이를 보내었습니다.”
민씨가 어떤 유아(乳兒)냐고 묻자 ‘어리의 소산(所産)’이라고 답했다(‘태종실록’ 18년 3월 6일)
태종이 진상을 조사하자 김한로의 처가 김한로의 지시에 따라 딸 숙빈을 보러간다는 핑계로 입궐하면서 어리를 여종이라 칭하고 데리고 가 양녕에게 바친 사실이 드러났다. 어리가 임신하자 궐 밖으로 데리고 나와 해산한 후 다시 입궁시킨 사실도 드러났다.
대신들은 김한로의 죄를 추궁했고 김한로는 결국 죽산으로 귀양 갔다가 다시 나주로 유배됐다. 태종은 양녕이 어리를 다시 들인 일은 김한로가 주도한 것이라며 세자의 지위에서 쫓아낼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러나 세자가 직접 쓴 수서(手書)를 태종에게 올려 항의함으로써 사건은 확대됐다.
“전하의 시녀는 다 중하게 생각해 궁중에 들이지 않습니까. 가이(加伊, 어리)를 내보내고자 하시나, 그가 살아가기가 어려울 것을 불쌍히 여기고, 또 바깥에 내보내 사람들과 서로 통(通)하게 하면 성예(聲譽, 명예)가 아름답지 못할 것이기에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지금에 이르도록 신의 여러 첩을 내보내어 곡성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 차니, 어찌 도리어 여러 몸을 구(求)하지 아니하겠습니까?”(‘태종실록’ 18년 5월30일)
양녕의 항의는 태종은 여러 후궁을 거느리면서 왜 자신에게는 엄격하냐는 것이었다. 양녕의 수서는 계속된다.
“한(漢)나라 고조가 산동(山東)에 거할 때에 재물을 탐내고 색을 좋아하였으나 마침내 천하를 평정했고, 진왕(晉王) 광(廣)은 비록 어질다고 칭하였으나 그가 즉위한 후 몸이 위태롭고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전하는 어찌 신이 끝내 크게 효도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이 첩 하나를 금하다가 잃는 것이 많을 것이요, 얻는 것이 적을 것입니다.”(‘태종실록’ 18년 5월30일)
‘태종실록’은 이 수서를 읽은 태종이 비로소 폐위를 결심한 것으로 묘사한다. 태종은 영의정 유정현(柳廷顯), 좌의정 박은(朴·#54518;) 등에게 이 수서를 보여줬다.
“세자가 여러 날 동안 불효하였으나 집안의 부끄러움을 바깥에 드러낼 수가 없어 항상 그 잘못을 덮어두고자 하였다. 오직 그 잘못을 직접 깨달아 뉘우치기를 바랐는데, 이제 도리어 원망하며 싫어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어찌 감히 숨기겠는가?”(‘태종실록’ 18년 5월30일)
태종의 결심이 드러나자 세자 폐위는 전광석화처럼 진행됐다. 이틀 후인 6월2일 의정부·삼공신(三功臣)·육조·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각사(各司)의 신료들이 상소하여 세자를 폐하도록 청했다. 반대하는 신하는 황희(黃喜)와 이직 등 몇몇뿐이었다. 6월3일 태종은 “백관(百官)들의 소장(疏章)의 사연을 내가 읽어보니 몸이 송연(·#31462;然)하였다. 이것은 천명이 이미 떠나가버린 것이므로 이를 따르겠다”라고 말했다.
태종이 충녕을 택한 이유
문제는 세자의 자리를 누가 잇느냐는 것이었다. 당초 태종은 양녕의 아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적실(嫡室)의 장자를 세우는 것은 고금의 변함없는 법식이다. 제(·#31124;, 양녕)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장자는 나이가 다섯 살이고 차자는 나이가 세 살이니, 나는 제의 아들로서 대신 시키고자 한다.”
우의정 한상경 이하의 군신(群臣)은 모두 양녕의 아들을 세우는 것이 맞다고 했으나 영의정 유정현이 반대했다.
“일에는 권도(權道)와 상경(常經)이 있으니,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擇賢)이 마땅합니다.”
그러자 좌의정 박은도 ‘어진 사람’을 골라야 한다고 가세했다. 양녕의 아들이 아니라 동생들 중에서 세우자는 뜻이었다. 양녕의 아들이 왕이 된 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종이 내전으로 들어가 왕비 민씨에게 묻자 민씨는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것은 화란의 근본이 됩니다”라고 반대했다. ‘태종실록’은 “임금 또한 이를 옳게 여겼으나, 한참 만에 곧 깨닫고서 ‘금일의 일은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왕비 민씨도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두 동생을 죽음으로 내몬 장남에 대한 원망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태종이 신하들에게 ‘어진 이를 천거하라’고 하자 유정현 이하 여러 신하가 “아들을 알고 신하를 아는 것은 군부(君父)와 같은 이가 없습니다”라고 태종에게 모든 결정권을 넘겼다. 태종이 드디어 자신의 결심을 말했다.
“효령대군은 자질이 미약하고 또 성질이 심히 곧아서 개좌(開坐, 일을 자세히 처리함)하는 것이 없다.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中宮)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에도 밤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 두려워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나의 큰 책(冊)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태종실록’ 18년 6월3일)
태종은 충녕이 학문을 좋아하는 것을 군왕의 재질로 보았다. 양녕은 반대로 학문보다는 매사냥 등 사냥을 좋아했으니 양녕과 대비되는 인물을 고른 것이다. 또 하나는 술이었다.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無益)하나 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해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또 그 아들 가운데 장대한 놈이 있다.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불가하다. 충녕대군이 대위(大位)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을 세자로 정하겠다.”(‘태종실록’ 18년 6월3일)
조선의 운명은 이렇게 바뀐 것이다. 충녕대군 스스로 세자가 되기 위해 움직였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유정현 등이 양녕의 아들 대신 ‘어진 이’를 택할 것을 주장하게 되는 데 충녕의 작용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실록에서는 그런 내용을 찾을 수 없다. ‘태종실록’은 영의정 유정현 등이 “신 등이 이른바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것도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입니다”라 했다고 전하는데, “의논이 정하여지자, 임금이 통곡하여 흐느끼다가 목이 메었다”라고 그 광경을 묘사했다. 실록은 모든 것을 태종의 결단으로 설명했다.
단종 사형 청한 양녕대군
앞서 언급한 윤봉조의 ‘행장’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이 세자의 자리를 사양하여 어진 아우를 밀어준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몸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 더욱 어려웠다고 하였다.”(‘행장’)
양녕은 폐위된 뒤에도 여러 번 물의를 일으켰으나 그때마다 세종의 보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행장’은 또 “세조대왕은 성품이 엄하시어 여러 왕자와 대군들이 죄로 주살당해 죽었는데 유독 대군만이 지혜로서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었다”라고 전한다. 그러나 양녕대군이 스스로 보존하는 ‘지혜’는 경악스러운 것이다.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귀양 간 단종을 죽여야 한다고 수창(首唱)했기 때문이다.
양녕대군 이제 등이 아뢰었다.
“전일에 노산군 및 이유(李瑜, 금성대군) 등의 죄를 청하였으나, 지금에 이르러서도 유윤(兪允)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청컨대 속히 법대로 처치하소서.”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제가 재차 아뢰었다.
“대역과 같이 일이 종사에 관계되는 것은 상량(商量)할 바가 아닙니다. 청컨대 대의(大義)로써 결단하소서.”(‘세조실록’ 3년 10월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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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양녕대군의 나이 예순넷,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기에 조카에게 선대왕의 장남 단종을 죽이는 것이 ‘대의’라고 생각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어쩌면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세종의 자식과 손자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것을 부추기려 했던 것은 아닐까.
양녕이 일부러 왕위를 양보했다는 것은 대부분 조선 후기의 야사들에서 나타나는 이야기다. 특히 숙종이 지덕사(至德祠)를 세워 양녕대군을 제사 지낸 것이 결정적 구실을 한다. 영조는 재위 33년(1757) 2월 지덕사에 치제하고, “양녕대군은 우리 동방의 태백으로 지덕의 이름을 얻게 된 까닭이다”라고 말했다. 조선 후기 국왕들이 왕위를 양보했다고 말하면서 양녕의 행위가 ‘지덕’이란 견해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건 발생 300여 년 후에 새로 생겨난 견해다. 그래서 역사는 사건이 발생한 그 시각, 그 현장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