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TV드라마 등 한류(韓流)는 약간의 부침은 있지만 아시아에서 인기를 확산시켜가고 있다. ‘선덕여왕’ 같은 프로그램이 한국에서 인기를 끌면 시차를 두고 아시아에서도 뜬다. 그런데 우리는 미국의 문화제국주의는 비난하지만 한류의 문화제국주의 속성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미국 드라마는 미국의 이익과 이데올로기를 일방적으로 다른 나라에 주입해 미국의 하부체계에 편입하려는 ‘문화제국주의’ 수단이다. 문화제국주의(cultural imperialism)란 정치 경제적 중심 국가가 문화까지 하위 국가에 강요하는 현상이다.
세계화는 ‘초국적 자본’과 ‘초국적 문화’라는 두 바퀴에 의해 굴러간다. 세계 도처의 전통문화는 미국에서 밀려오는 경박한 상품들과 매스미디어 생산물들에 의해 소멸되고 있다.
그러나 문화 교류는 문화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다. 미국 드라마는 제3세계 국민들에게 값싸고 훌륭한 오락 수단이기도 하다. 한국의 청장년층은 ‘600만불의 사나이’ ‘맥가이버’ ‘초원의 집’과 같은 미국 드라마를 보면서 성장기를 보냈다. 1974년 배리스(Varis)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미국 TV프로그램은 전세계 수출 프로그램의 40%를 점유했다. 지금의 한국 시청자는 ‘CSI’ ‘그레이 아나토미’ ‘프리즌브레이크’ ‘24’와 같은 미국 드라마를 공중파TV나 케이블TV에서 즐긴다.
이종수씨가 2008년 미국 드라마 ‘프리즌브레이크’를 시청한 한국 시청자들을 조사한 결과 미국 드라마의 즐거움은 ‘감정적 몰입’ ‘지적 긴장감’ ‘호기심의 충족’이었다.
미국 드라마 뒤집어보기
그런데 우리는 미국 드라마에 내재된 오락적 측면뿐 아니라 교양적 측면도 함께 받아들인다. 미국 드라마는 일종의 ‘자본주의 윤리’를 담고 있다. 물질적 풍요, 세속적 성공, 개인의 자유, 기회의 균등, 애정과 로맨스, 사회규범의 준수, 품위와 예절, 전 지구적 문제에 대한 관심이라는 ‘좋은 가치’가 담겨 있다. 미국 드라마는 ‘근대화’를 ‘학습’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한국은 ‘친미적 제3세계 국가’로서 미국 드라마 수용에 인색하지 않았다. 미국 드라마 ‘전투(Combat)’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꽤 인기가 있었다. 박용규씨가 2005년 연구한 바에 따르면 다행스럽게도 한국은 이런 미국 드라마를 즐기면서 자국 방송의 질적 성장을 이뤘다. ‘문화제국주의의 상징’ 미국 드라마를 뒤집어보면, 역설적으로 미국 드라마는 한국 드라마가 성장하는 데 도움을 준 벤치마킹 대상이자 기반이었다.
1997년 ‘역사적 사건’이 터졌다. MBC TV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를 조심스럽게 아시아로 수출해봤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중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한류(韓流)’가 태동하는 순간이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2002년 2월1일 “한국은 아시아 미디어산업의 중심”이라고 보도했다.
2009년 현재 한류는 여전히 식지 않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세계적 경제위기의 영향을 받은 이후에도 한류 TV프로그램의 아시아 판매는 지속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아시아 각국에서 이제 한류 TV프로그램은 일상적 대중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아시아의 일상 대중문화
2008년 TV프로그램의 해외수출은 1억8016만8000달러로, 2007년도 1억6258만4000달러에 비해 10.82% 늘었다. 이중 드라마 수출액은 1억536만9000달러로 전체 수출액의 91.1%를 차지했다. 2008년 한류 드라마를 구매한 아시아 국가는 일본, 중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이었다. 그 외 미국, 캐나다, 프랑스, 영국, 독일, 오스트레일리아에도 한류 드라마가 팔렸다.
반면 ‘1박2일’ ‘무한도전’ ‘패밀리가 떴다’와 같은 TV오락프로그램은 국내에선 인기이지만 수출실적은 그리 좋지 않다. 왜 강호동, 유재석, 이효리를 안 보는 걸까. 한국과는 ‘재미 코드’ ‘웃음 코드’가 다르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인종이나 문화의 차이에 관계없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구조’를 바탕으로 하는 장르다. 한류 드라마는 진화를 거듭해왔다. 아시아 시청자들은 10여 년의 장기간에 걸쳐 한류 드라마의 변천을 함께 경험해왔다. 한류 드라마에 대한 친밀도, 충성도가 자연히 높아졌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최근 수출금액이나 현지 시청률에서 좋은 성과를 낸 한류 드라마는 ‘주몽’ ‘태왕사신기’ ‘내 사랑 김삼순’(이상 MBC TV), ‘소문난 칠 공주’ ‘남자 이야기’ ‘꽃보다 남자’(이상 KBS TV), ‘아내의 유혹’, ‘찬란한 유산’(이상 SBS TV) 등이었다. 소재(사극 판타지 멜로), 형식(기획극 일일극)에서 다양한 드라마가 아시아권에서 호응을 얻고 있다.
한류 드라마가 아시아에서 현재의 높은 위상을 확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킬러드라마(Killer Drama)’의 등장에 있다. 킬러 드라마란 다른 드라마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인기를 얻는 드라마를 의미한다.
한 편의 킬러드라마는 몇 년에 걸쳐 해외에서 영향을 끼친다. 수십 편의 다른 한류 드라마가 덩달아 잘 팔리게 한다. TV드라마 제작자들이 꼽는 킬러드라마는 KBS TV의 ‘겨울연가’, MBC TV의 ‘대장금’ 두 편이었다.
중동-이슬람권역은 한류 드라마의 블루오션으로 뜨고 있다. 2007년 MBC는 드라마 ‘슬픈 연가’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무상 제공했다. 이슬람권으로의 첫 진출이었다. 시청자의 반응이 괜찮았다. 그러자 두바이는 2008년 MBC TV 드라마 ‘대장금’, KBS TV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도 달라고 했다. 이번에는 유상구매였다. 두바이에서 한류 드라마의 시청률이 높아 드라마에 붙는 광고단가는 다른 시간대보다 20% 높다고 한다. 이라크 아르빌에서 방영된 MBC TV 드라마 ‘슬픈 연가’는 시청률이 60%를 넘었다.
드라마 ‘겨울연가’
아시아의 드라마 시청자는 한류 드라마를 자국 드라마와 미국 드라마에 이은 제3의 영상 콘텐츠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제 아시아 국가가 생산하는 드라마 중 한류 드라마와 경쟁상대가 되는 건 일본 드라마와 터키 드라마 정도다. 그러나 드라마의 질적 완성도만 놓고 봤을 때 한류 드라마가 가장 뛰어나다고 한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2005년 11월14일 ‘한국의 재창조’ 커버스토리에서 한국에 대해 미디어, 오락, 스포츠, 의학에서 앞서나가고 있다고 했다. 미국도 한국 미디어산업에 대해 경계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케이시(Casey 2008)에 따르면 문화제국주의는 우월한 힘을 가진 국가가 상대 국가에 자국의 언어, 이념, 가치, 습관, 소비문화를 확산시키는 행위다. 이에 따라 상대국의 토착문화는 변형된다. 최근에는 신(新)문화제국주의가 등장했다. 신문화제국주의는 문화적 지배에도 주목하지만 마케팅 등 이윤추구에 보다 적극적이다.
실제로 한류 드라마의 확산은 한국어의 파워를 강화하고 있다. 일본, 중화권을 제외한 나라에서 자국어 더빙이 아닌 자막처리로 한류 드라마를 방영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드라마 주인공인 한류 스타의 육성을 직접 듣고 싶어하는 시청자가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류 드라마는 논쟁적 요소를 함께 부각시키고 있다. 한류 드라마의 문화제국주의적 갈등은 정부 단위에서 제기되고 있다. 중국 정부가 가장 민감한 편이다.
TV드라마 수출 관계자들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한류 드라마가 문화침탈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한류 드라마의 중국 내 유입을 억제하는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모든 해외 영상물의 중국 내 방영허가권을 갖고 있는 중국 광전청은 2006년부터 한류 드라마에 대한 방영허가를 대폭 줄였다. 2005년 중국의 전국 단위 TV와 성(省)단위 TV에서 방영된 한류 드라마는 29편이었으나 2008년에는 15편으로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중국의 한류 드라마 차단
중국은 한국과 인접해 있고 문화적 유사성이 많다. 한류 드라마는 중국에 직접적이고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게 되고 중국에서 한국 문화에 대한 동화도 쉽게 일어날 수 있다. 중국 당국은 이 점을 우려하는 것이다.
한국과 중국이 역사적 사실을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는 점도 문화제국주의적 갈등을 불러왔다. 고구려-당나라 전쟁을 극화한 SBS TV 드라마 ‘연개소문’이 당나라 황제가 고구려군의 화살에 맞아 실명(失明)하는 장면을 방영하자 중국 측은 반발했다. MBC TV 드라마 ‘주몽’도 한나라에 대한 묘사가 부정적이었다는 이유로 중국 측의 불만을 샀다. SBS TV 드라마 ‘카인과 아벨’은 중국의 공안(公安)이 고문을 하는 장면을 방영했다 역시 중국 언론의 비판을 받았다.
같은 중화권인 대만 정부도 한류 드라마에 경계심을 갖고 있다. 대만 정부는 중국 정부처럼 노골적으로 한류 드라마를 억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만 정부는 대만-중국 합작 드라마 제작에 정부 지원금을 대폭 지원하는 방식으로 한류 드라마로부터 자국 드라마산업을 보호하려 한다. 한류 드라마에 대해 중국 정부는 문화 종속이라는 전통적 의미의 문화제국주의를 경계한 반면 대만 정부는 산업적 측면을 중시하는 신문화제국주의 측면에서 방어하고 있다.
반면 일본, 동남아시아에서 한류 드라마에 대한 경계는 심하지 않다. 중국은 한국과 지리적 인종적 문화적으로 근접성이 높고 대중문화자본력 불균형성이 높다. 이럴 때 한류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경계심은 가장 높아진다. 반면 일본은 한국과의 대중문화자본력 불균형성이 낮다. 동남아시아는 한국과의 지리적 인종적 문화적 근접성이 낮다.
탄탄한 스토리, 아름다운 영상, 걸출한 스타는 한류 드라마의 문화자본으로서의 지속가능성을 높여준다. 동양적 정서의 존중은 아시아 시청자에게 편안함을 주었다. 그러나 한류 드라마의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우려는 점차 커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김승수씨의 2008년 연구에 따르면 한국과 브라질은 독자적 미디어산업을 구축해 미국의 일방적인 침략에 대응하는 한편 주변국을 상대로 문화적 영향력을 확보함으로써 이른바 ‘하위 문화제국주의’를 형성했다.
한류 드라마는 한국어, 한국 체제, 한국 이데올로기, 한국 전통, 한국 소비문화를 외국 시청자의 의식 속으로 투여하고 동화되도록 한다. 한류 드라마는 본질적으로 기존 전통의식체계로의 ‘침투’와 한국 스타일로의 ‘대체’를 지향한다. 한국적인 것이 더 선진적인 것이라는 가치체계의 변형, 한국적인 것에 대한 익숙함이라는 문화체계의 변형을 시도하게 된다. 이는 한류 스타의 언행에 의해, 멋있는 영상에 의해, 잘 짜인 스토리에 의해 수행된다.
자본주의 ‘판타지’
한류 드라마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속성은 한국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판타지’를 제시하는 점이다. 세계의 중심은 상류 자산가이고 주인공은 궁극적으로는 그 체제와 화해하고 순응한다. 사회의 모순, 구조적 갈등은 인간 감성에 의해 은폐된다. 한류 드라마처럼 비현실에 리얼리티를 불어넣는 콘텐츠도 드물다. 심지어 한류 드라마의 이야기 구조는 미국 드라마의 그것보다 더 보수적이고 체제 순응적이다.
또한 대부분의 한류 드라마는 ‘애국애족’ 이념을 스토리의 근저에 두고 있다. 모든 장면, 모든 이야기는 국가체제, 전통문화, 가족, 사회적 관습에 닫혀 있다. 중화권이 이미 한류 드라마의 문화제국주의를 의심하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한국 정부는 지난 3년간 한류 드라마를 수입하는 아시아 국가들과 공동으로, 두 나라의 역사적 우호관계를 주제로 하는 TV다큐멘터리 26편을 제작해 두 나라의 공중파TV에서 동시에 방영하고 있다. 한류 콘텐츠와 관련된 이들 국가의 거부감을 상쇄하기 위한 대응이다.
드라마는 산업이자 사상이다. 한국의 TV 드라마 제작자들은 아시아의 시청자에게 제국주의를 넘어서는 더 나은 가치를 제시해야 한다. 한류 드라마는 미국 드라마가 이미 탈자본주의, 탈국가주의를 실험하고 있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