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호

답답한 현실과 인간에 대한 믿음 상상 속 ‘리틀 빅 히어로’에 열광

  • 강유정 │영화평론가 noxkang@daum.net

    입력2014-01-22 15:3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영화 ‘변호인’ 열풍은 2014년 대한민국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증상이다. 영화 한 편을 놓고 지나치게 정치적 암호로 해석하는 것도 강박이다. 영화의 어디까지가 사실이냐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1000만 관객의 강렬한 반응 이면에 있는 현실에 대한 답답함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답답한 현실과 인간에 대한 믿음 상상 속 ‘리틀 빅 히어로’에 열광

    영화 ‘변호인’. 중요한 것은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장면이 허구의 영역이라는 사실이다.

    영화 ‘변호인’이 1000만 관객을 넘어섰다. 1000만이면 인구 5분의 1이다. 그만큼 많은 관객이 이 영화를 봤느냐의 문제는 또 다른 질문이다.

    프랑스의 영화평론가 프랑수아 트뤼포는 이런 말을 했다. “어떤 영화가 성공을 거둔다면 그것은 우선 사회학적 사건이다. 영화의 질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라고. ‘변호인’에 따라붙는 1000만 관객이라는 숫자는 ‘사회학적 사건’의 일부에 불과하다. ‘변호인’ 열풍은 2014년 대한민국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증상이기 때문이다.

    담론 부재 시대와 논쟁의 시대

    1970, 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 대부분에게 ‘이데올로기’나 ‘민주’는 가볍게 입에 담을 만한 명사가 아니다. ‘변호인’은 이데올로기와 민주라는 어려운 명사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지금이야 그런 명사를 아무렇게나 말해도 무방하지만 여전히 영화를 향유하는 주요 계층에게 쉽게 농담으로 건넬 명사는 아니라는 뜻이다.

    1950, 60년대 좌우 대립의 시대를 지나 1970년대 무조건적 경제 발전 시기, 1980년대의 정치적 암흑기를 지나오는 동안 ‘시민’은 스스로를 약자와 동일시해왔다. 1990년대 이후 민주화가 됐다고는 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몰아친 경제의 광풍은 그 달콤한 햇볕을 쪼일 심리적 여유마저 앗아가고 말았다. 대학만 졸업하면 취업이 보장되고 빚지고라도 집을 사면 몇 년 안에 보람된 이익을 돌려주던 황금시대가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수치적으로 보자면, 2014년 현재 우리 사회는 1970, 80년대와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살기 좋아졌다. 문제는 사람들이 체감하는 삶의 질은 더 나빠졌다는 것이다. 여기엔 절대적 이념의 증발을 대신한 상대성의 지옥도 한몫한다. 상대성이라는 지옥은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되는 심리적 압박감을 자극한다.

    어찌 보자면 영화 한 편을 두고 좌와 우를 나누고, 정의와 부정을 구분하는 세상은 지나치게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를 두고 외면하는 것도 문제라면 모든 예술을 정치적 암호로 해석하는 것 역시 강박이다. 노무현의 실화이니까 봐야 한다는 논리나 노무현의 실화이니까 보지 않겠다는 논리가 서로 다르지만 닮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변호인’ 현상 속에는 노무현의 실화이니까 이상의 어떤 사회적 무의식이 담겨 있다. 우리는 우선 이 영화가 담론 부재 시대에 논쟁적 대상이 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한 편의 영화를 두고 그 평가하는 방식에 따라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는 방식 또한 그렇다. 우리 사회에서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맴돌던 어떤 의견들이 ‘변호인’이라는 공동의제를 두고 충돌하기 시작했다. 논쟁은, 아무리 격렬하다 할지라도 의미 있다. 문제는 논쟁이 아니라 귀를 닫고 상대를 공격하는 빌미로 영화가 사용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변호인’을 통해 무언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어떤 사람은 현 정부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고, 어떤 사람은 고(故)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을 고백하고, 어떤 사람은 순수한 드라마적 감동을 이야기한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변호인’에 대해 각기 자신의 해석과 정치적 견해를 반영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논쟁하고픈 열망들이 출구를 찾아 헤매는 셈이다.

    리틀 빅 히어로에 대한 열망

    논쟁에 대한 열망만큼이나 강렬한 것은 바로 ‘리틀 빅 히어로’의 탄생이다.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을 맡았던 1992년 작 ‘리틀 빅 히어로’에서 영웅은 바로 작지만 큰 소시민이었다. 그는 사고 현장에서 우연히 누군가를 구하고 홀연히 자리를 떠난다. 영웅이 되고자 했던 의도는 없었지만 그의 소박한 선의는 작기 때문에 더욱 영웅적으로 조명된다.

    최근 한국 영화계에서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작품들은 공교롭게도 대개 리틀 빅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7번방의 선물’의 딸 바보 아빠가 그랬고, ‘광해’의 주인공인 광대 하선이 그랬다. 그들은 나라를 세우고 정적을 물리치는 큰 영웅이 아니라 딸아이를 지키고 아내를 웃게 하는 작은 영웅들이다.

    ‘변호인’의 송우석 변호사도 그렇다. 송우석이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변화했다는 데 있다. 영화의 처음부터 그가 인권 변호사로서 정의를 위해 싸웠다면 오히려 마지막 항변의 카타르시스는 없었을 것이다. 그가 처음엔 가난뱅이였기에, 심지어 밥값도 내지 못하고 도망간 한심한 사람이었기에, 그리고 돈푼깨나 번 이후에도 요트나 타고 제 배 채우기 급급했던 인간이기에 그의 변화는 더욱 드라마틱하다.

    왜냐하면, 그, 송우석은 우리와 거의 똑같은,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의니 민주니 하는 거창한 말보다 내 배 따뜻하게 불려주는 국밥 한 그릇이 더 반가운 남자, 세상 돌아가는 이치보다 주판알 속 계산에 더 빠른 남자, 그 남자는 우리 장삼이사(張三李四)의 모습 그대로를 비춰주는 거울과도 같다.

    송우석이라는 속물 변호사가 인권 변호사로 거듭나는 과정도 그렇다. 그는 정치적으로 대오각성한 끝에 마치 신의 계시를 받듯 정의의 세계에 투신하는 게 아니다. 가까운 국밥집 아줌마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는 심정일 뿐이다. 송우석은 대단한 영웅이 아니라 작지만 큰 영웅, 즉 우리도 어쩌면 될지도 모를 그런 영웅의 모습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변화의 장면이 픽션의 영역이라는 사실이다. 송우석이 국밥집에서 밥값을 안 내고 도망가는 장면이나 변론을 맡게 된 과정, 심지어 군의관을 증인으로 택하는 것도 모두 픽션이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날것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잘 꾸며진 이야기야말로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잘 꾸며졌다는 것은 보는 이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재구성을 의미한다. 어디까지 사실이건 간에 관객이 감동을 느끼는 영화 ‘변호인’은 극적으로 재구성된 ‘이야기’다. 이는 최근 오히려 실화임을 강조한 작품들, ‘남영동 1985’나 ‘천안함 프로젝트’가 되레 흥행에서 고배를 마신 상황과도 유사하다.

    관객은 실화라는 것 그 자체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 탁월한 재구성에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송강호를 비롯한 배우의 연기다. 송강호의 연기는 그 어떤 사실성을 넘어선 호소력을 전달한다. 그리고 영화 ‘변호인’이 관객에게 주는 감동의 8할은 바로 이 송강호의 연기에서 비롯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복고와 향수의 시너지

    ‘변호인’에 대한 관객의 강렬한 반응 이면에는 현실에 대한 답답함이 있다. 여기엔 이 영화의 배경이 30여 년 전 과거라는 점도 관련돼 있다. 1980년대, 정치적으로는 암울했지만 적어도 먹고사는 데에서는 꽤나 희망적이었다.

    대학생들이 출석 일수의 3분의 1도 채우지 못한 채 거리에서 싸웠어도 대기업에 취직해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었던 시절이다. 적어도 20대 때 대의와 정의를 위해 싸웠다는 빛나는 훈장을 달고 서른 무렵의 비겁한 자아와 만날 수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도 이 세계가 조금 달라지는 데 한몫했다는 뜨거운 자긍심, 1980년대에 20대를 보낸 이들에겐 그런 뿌듯함이 있다.

    거리에서 1980년대를 보내지 않은,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에게도 1980년대는 호황기였다. 프로야구가 시작됐고, 경기는 흥청거렸으며 곧 열리게 될 아시아경기대회나 올림픽이 건설 경기에 불을 붙이던 시기였다. 적어도 그 시절에는 조금 더 나은 삶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있었다.

    2014년은 1980년대에 그토록 기다리던 바로 ‘그’ 미래다. 하지만 세상살이는 도무지 나아진 것 같지 않다. 더 나아졌다고들 수치가 말해주지만 많은 사람이 그 변화를 체감하지 못한다. 대한민국은 짧은 기간에 역사를 만들어왔다. 우리에게는 리틀 빅 히어로라는 개념이 없다. 그리고 사실, 히어로도 없다. 죄다 반성과 사죄를 해야 할 안티 히어로들만 가득하다. 우리에게 실존 인물의 히어로라는 건 너무나 멀리 있다.

    리틀 빅 히어로의 핵심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선근’이 있고, 따라서 아무리 타락하거나 보잘것없는 인간일지라도 세상을 위해 조금 더 나은 인간으로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기도 하다. 인간에 대한 믿음, 그게 바로 리틀 빅 히어로의 핵심이다. 어쩌면 우리는 역사의 실명 속에서 우리가 찾고 싶은 바로 그 영웅을 찾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픽션의 재구성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영웅을 소환하는지도 모른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