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역세권인데도 번잡하지 않은 젊은 ‘여초’ 동네”
“홍대와 다른 색을 원한 사람들의 장소”
“삼거리포차와는 분리된 정제된 카페와 식당”
“인정하기 싫은 상징적 건축물 메세나폴리스”
“당장의 편리함과 미래의 궁핍함을 맞바꾸다”
[네이버지도 캡처]
‘합정’은 서울시 마포구 양화로에 위치한 행정동 ‘합정동’과 미묘하게 다르다. 주요 기점은 합정역 2번 출구와 8번 출구다. 합정역 2번 출구 인근은 서교동에 속하나 통상 합정으로 불린다. 합정역 8번 출구에서 망원역 쪽으로 쭉 걸어가다 보면 이내 망원동에 다다르지만 이곳도 흔히 합정으로 분류된다. 그렇다면 신씨는 왜 합정에 살아야 했을까.
“전·월세 값 높다는 얘기에 깊이 공감하지만, 그만큼 누릴 수 있는 혜택이 많아요. 그러니 다들 그 가격 감당하면서 이곳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요. 집 5분 거리에 영화관, 마트, 은행, 맥도날드, 서점이 다 있는 곳은 흔치 않을 겁니다.”
3년차 경제지 기자 박혜인(가명·여·27) 씨는 “주말을 풍요롭게 보낼 수 있는 곳”을 찾아 서울시 중구 신당동에서 마포구 합정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지금 합정역 7번 출구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빌라에 보증금 5000만 원·월세 50만 원을 내고 산다. 박씨는 “15평인 걸 고려하면 비교적 저렴한 축”이라면서 “월세 부담이 없지 않았지만, 외식비 등 다른 데서 소비를 줄이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갓 불혹을 넘긴 동네
잘 갖춰진 편의, 문화시설은 젊은 직장인들을 블랙홀처럼 합정으로 끌어들인다.“합정역 2번 출구 기준 도보 30초 거리에 있는 건물에서 전세 1억4000만원에 산다”고 밝힌 홈쇼핑업체 사무직 최정윤(가명·여·29) 씨는 과거 연남동에 살았다. 최씨는 “연남동과 달리 합정은 초역세권이고, 마트와 영화관 등 문화시설까지 두루 갖췄다. 예상외로 연남동과 비슷한 시세에 번화가임에도 조용한 분위기라는 점에도 끌렸다”고 말했다. ‘조용한 역세권’은 합정의 가치를 키운다.
합정역 2번 출구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사는 김태기(가명·남·36) 씨는 광고프로덕션 대표다. 김씨는 30년간 송파구에 살았다. 8개월 전 삶의 터전을 옮겼다. “서울 동남쪽 라이프스타일은 교육, 육아에 집중돼 있어 더 젊은 문화가 있는 지역을 찾다가” 전세 2억6000만 원짜리 합정 빌라에 안착했다. 그는 “생활 만족도가 굉장히 높아 자가 매수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홍대와는 다른 색을 원한 사람들이 찾은 장소입니다. 합정에는 오랫동안 출판사와 작은 디자인 회사가 많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홍대 앞보다는 (거주자의) 나이대가 높고, 여초 지역입니다. 술집보다는 카페나 식당이 더 많죠.”
실제로도 합정은 도드라진 ‘여초’ 지역이다. 합정동 주민센터에 따르면 2월 28일 기준 남성 인구는 8883명, 여성 인구는 1만143명이다. 같은 생활권으로 꼽히는 인근 망원1동 역시 남성 인구 1만111명, 여성 인구 1만1087명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1000명 가까이 많다. 반면 합정에서 양화대교 건너면 나오는 강서구 염창동의 경우 남성 인구 2만54명, 여성 인구 2만841명으로 격차가 상대적으로 작다.
김씨가 ‘홍대보다 거주자 나이대가 높다’고 말했을 때 방점은 ‘홍대보다’에 찍혀 있다. 김씨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자신의 나이만큼 젊은 문화를 가진 도시로 흘러들어왔다. 합정은 이제 갓 불혹을 넘긴 동네다. 1970년, 서교동에서 합정이 갈라져 나왔다. 그로부터 7년 후 합정 일부 지역이 망원동에 편입됐다. 이때 비로소 지금의 합정이 외양을 갖췄다. 합정은 1977년생이다.
홍합 라인
합정역에서 마을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에 자리 잡은 다세대주택 1.5층에는 식품대기업 대리 문지호(가명·남·32) 씨가 산다. 취직 전인 2012년, 보증금 2000만 원에 월세 40만 원 시세일 때 들어와 지금껏 ‘나 홀로 라이프’를 즐긴다. 시세가 ‘동네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두드러지게 저렴하다. 문씨는 “건물주가 같은 주택에 살아서인지 무리하게 월세를 올리지 않더라. 현재 인근 시세는 내가 사는 조건의 딱 두 배 이상이라고 보면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홍익대를 졸업한 문씨는 13년간 학생·직장인으로 홍대와 합정 사이를 배회했다. 홍대 문화에 대한 애착도 남다르다. 지금은 모교의 돌격이 걱정스럽다. ‘조용한 합정’ 앞으로 ‘번잡한 홍대’가 거세게 밀려들어오고 있어서다. 그가 합정에서 살면서 “공기처럼 실감하는 문화”가 있다. “골목 귀퉁이에 숨어 있는 작은 상점들” “가게를 꾸려 지역사회를 유지하고 계신 고집스러운 사장님들” “함께 살던 개가 늙어 죽자 이를 추모하기 위해 작은 공연을 여는 식당” 말이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다 합정이 홍대의 아류로 분식(粉飾)돼버릴 거라는 우려가 문씨의 말에는 짙게 배어 있다.
“홍대입구역 9번 출구에서 홍대 앞 곱창골목, KT&G상상마당 앞으로 이어지는 유흥 시설과 상업 공간들이 지금과 같은 속도로 늘다 보면 (합정이) 금방 고유의 개성을 잃지 않을까 걱정돼요. 합정에는 방문하는 손님과 가게 사장님이 서로 인사를 나누던 오랜 가게가 많았는데 최근에는 찾아보기 어려워졌어요. 그 자리를 커피 프랜차이즈나 드럭스토어가 대신하거나, 20대들이 찾을 법한 술집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때로 현실은 바람과는 아득한 거리에 있는 법이다. 좋든 싫든 합정은 홍대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어디 합정뿐일까. 홍대의 사정권은 상수동, 연남동, 망원동까지 널따랗게 퍼졌다. 수년 전에는 ‘홍합 라인’이라는 말이 회자됐다. ‘투자자의 돈이 몰린다’는 마법의 문장이 부동산 공화국의 이념을 숙주 삼아 합정을 턱밑에서 위협했다. ‘매일경제신문’은 2017년 1월 22일자 ‘돈 몰리는 ‘홍합라인’…汎홍대상권 무한팽창’ 제하 기사에서 이렇게 보도했다.
“홍대(동교동·서교동)를 중심으로 상수동-연남동-합정동-망원동 등 ‘범(汎) 홍대상권’이 무한 팽창하고 있다. 중심축은 지하철 2호선·공항철도의 홍대입구역부터 2·6호선 합정역까지 잇는 양화로다. 양화로를 타고 투자자들의 돈이 몰리고 있다. (중략) 유동 인구가 많고 상대적으로 대형 매물이 많은 홍합라인의 매력이다.”
이기웅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는 논문 ‘젠트리피케이션 효과: 홍대지역 문화유민의 흐름과 대안적 장소의 형성’(‘도시연구’, 제14호)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이미 상수동, 연남동, 성산동 등은 각각의 장소가 지닌 개성을 상실하고 홍대의 공간적 확장으로만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중략) 상수동과 연남동을 ‘홍대상권’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 지역을 홍대와 유사하게 만들려는 물질적 힘으로 전화(轉化)한다. 이전의 합정이 그랬던 것처럼 ‘홍대상권’에의 통합이 강해질수록 그 지역은 독자성을 잃고 홍대의 일부로 녹아들게 된다. 사실 이들 지역을 ‘홍대상권’이라 부르는 이면에는 최근 이들 지역의 부동산 가격 급등에서 알 수 있듯 경제적 이해관계가 작동하는 측면이 있다.”
나 홍대 산다
‘합정 사람들’도 이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건 아니다. 미디어는 ‘홍대상권’과 ‘홍대문화권’이라는 단어를 동시에 설파한다. 홍대가 주변에 내뿜는 영향력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막강하다.경제지 기자 박혜인 씨는 “통일되면 파주까지도 홍대로 불릴 것이란 농담이 있는 걸 보면 합정, 상수, 연남, 망원이 ‘홍대문화권’으로 묶인다는 시각에도 타당성이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이는 “응암동 살아도 ‘나 홍대 산다’고 하는 친구들이 있을 정도로 ‘홍대문화권’이라는 단어가 강력하다”고 답한 식품대기업 대리 문지호 씨의 말과 맥이 통한다.
이렇게 되뇌면서도 ‘합정 사람들’은 두 장소를 구별 지었다. 광고프로덕션 대표 김태기 씨는 “합정은 새벽까지 인파로 넘치는 홍대와 달리 밤 되면 문 닫는 가게가 많아 조용한 편”이라고 말했다. ‘합정이 개성을 상실했다’는 지적이 번지자 ‘합정 사람들’은 거부감을 또렷하게 표시했다.
공기업 직원 유혜진(가명·여·28) 씨는 합정동, 상수동에 방을 구하려다 ‘사회 초년생인데 예산이 마땅치 않아’ 망원동에 전세 1억 원짜리 원룸을 얻었단다. 하지만 유씨는 자신이 “합정 생활”을 누린다고 말했다. ‘합정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또렷하다. 유씨의 말이다.
“‘연트럴파크’와 삼거리포차 앞이 다르고, 제비다방과 딜라이트스퀘어가 다른데 개성을 상실했다고 쉽게 말해버리는 건 합정, 망원, 상수, 연남에 잘 가지 않는 사람 아닐까 싶어요.”
경제지 기자 박혜인 씨는 긴 항변을 토로했다.
“서울 서북부 유흥가를 굳이 합정과 홍대와 상수로 분리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대충 술 마시고 사진 찍다 떠날 사람들에게는 합정이 합정으로 불리는 게 어차피 중요치 않겠죠. 이곳 사는 사람 입장에서 이 구분은 정말 중요해요. 합정은 홍대 앞 삼거리포차, 솔로포차를 가는 10~20대의 유흥 공간과는 분리된, 나와 내 친구들이 살기로 선택한, 정제된 식당과 카페가 있는 곳이니까요. 홍대라는 거대 상권의 파생 같은 곳이 합정, 상수, 망원이라는 의견에는 공감해요. 하지만 합정을 택한 사람들의 아이러니는 홍대를 피해 이곳에 왔다는 점이죠.”
애증의 메세나폴리스
서울시 마포구 메세나폴리스. [동아DB]
메세나폴리스 주거동은 애초부터 ‘상위 1%를 위한 주거단지’를 표방했다. 세대마다 호텔 스위트룸을 떠올릴법한 최고급 수입 마감재와 수입 가전제품으로 내·외부를 구성했다. 일본 롯폰기힐스를 설계한 미국의 ‘저디파트너십’이 이곳을 설계했다. 완공 후 부동산업계에서는 “타워팰리스가 강남의 부를 상징한다면, 메세나폴리스는 강북의 부를 대표한다”는 말이 돌았다.
당초 서울시는 2003년 11월 균형발전촉진지구 시범 사업지구로 합정동, 청량리, 미아동, 홍제동, 가리봉동 총 5곳을 지정했다. 낙후된 부도심을 주상복합과 오피스 밀집 지역으로 재개발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경기가 침체했고 설상가상 각 지구마다 내부 갈등이 불거졌다. 이에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꿈은 하나둘씩 좌초했다.
그 와중에도 합정은 살아남았다. 덕분에 합정균형발전촉진지구 1구역에 고급주거시설과 업무시설, 할인마트, 쇼핑몰, 멀티플렉스 등의 상업·문화시설을 갖춘 복합단지가 들어섰다.
광고프로덕션 대표 김태기 씨에게 ‘합정에서 가장 상징적인 건축물 혹은 공간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인정하기 싫지만 메세나폴리스”라는 답이 되돌아왔다. 그는 “처음 합정에 오는 사람들은 무조건 메세나폴리스부터 이야기한다”고 덧붙였다. 공기업 직원 유혜진 씨도 같은 질문에 “메세나폴리스를 기준으로 같은 합정이어도 느낌이 다른 여러 구역으로 나뉘는 것 같다”고 답했다.
홈쇼핑 사무직 최정윤 씨는 “연남동, 망원동, 서교동 등 어디서 위를 보아도 메세나폴리스의 ‘시그니처 디자인’이 가장 먼저 보인다. 그래서 메세나폴리스로 방향을 찾기도 한다”고 전했다. 공기업 직원 신아람 씨는 “여행 갔다가 돌아올 때 저 멀리서 메세나폴리스가 보이면 ‘아 집에 다 왔구나’ 생각”한단다.
서울시 마포구 딜라이트스퀘어 지하2층에 자리 잡은 교보문고 합정점. [조영철 기자]
이주자
당연히도 이는 전·월세 값을 자극하는 기제가 돼 부메랑처럼 ‘합정 사람들’에게 되돌아온다. 식품대기업 대리 문지호 씨는 “소득 증가 속도보다 보증금 대출로 인한 이자, 월세 값 상승 속도가 더 빠르다. 10년 안에 주상복합아파트로 이사 갈 계획이 없는 나로서는 성산동이나 응암동 일대로 이사를 고려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경제지 기자 박혜인 씨는 “당장의 편리함과 미래의 궁핍함을 맞바꾸고 있는 꼴”이라고 표현했다.취재에 응한 ‘합정 사람들’은 모두 이주자다. 8년째 거주하는 문씨를 제외하면 모두 ‘핫플레이스 합정’이 얼개를 드러낸 후에야 이곳에 똬리를 틀었다. 박혜인씨는 “고향이 지방이라 정붙이고 만날 사람이 집 주변에 있다는 게 중요하다”면서 “학교가 있는 동대문 근처에 살았는데, 졸업 후 지인들이 하나둘 합정에 왔고 그래서 더더욱 이곳에 올 이유가 확실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일상을 담담히 고백한 ‘합정 사람들’은 공기업, 대기업, 언론사 등 ‘좋은 직장’으로 불리는 회사에서 정규직으로 일한다. 모두 ‘운 좋게 저렴한 시세로 산다’고 답했지만, 그 돈조차 취업난민 시대에 질 좋은 일자리를 획득한 이들이어서 감당할 수 있었을 터다. 불안감이 싹 가시는 건 아니다. ‘핫플레이스’의 다른 말은 ‘값비싼 동네’다. 공기업 직원 유혜진 씨가 그리는 미래는 이렇다.
“주거비용이 더 오르면 다른 곳으로 가지 않을까요? 살아보고 싶었던 곳에 한번 살아봤으니 미련이 없어지기도 했고요. 다음 번엔 좀 더 ‘주거지’ 같은 곳에 살고 싶어요. 저에게 합정은 계속 눌러앉을 곳이 아니라 몇 년 머물고 말 임시거처 같은 느낌이어서요.”
20~30대 청년 이주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로 박사논문을 쓴 장민지 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연구원의 설명이다.
“20~30대는 경제 상황 때문에 ‘물리적인 집’을 소유하는 게 어려워진 세대예요. 그래서 이를 ‘정서적인 집’으로 채웁니다. 단골가게를 두고 ‘단골집’이라고 표현하잖아요. 그건 주변에서 계속 커뮤니케이션하는 사람 혹은 공간이 모두 ‘정서적인 집’을 이루고 있다는 인식을 드러내는 현상이거든요. 여기에는 카페와 식당, 친구까지 다 포함되겠죠. 살고 있는 원룸, 빌라, 오피스텔만 집으로 한정 짓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집이 꼭 정박(碇泊)의 의미만을 가져야 하는 것도 아니에요. 2~3년 지나 전세금을 빼야 할 수도 있고요. 새로운 곳에 물리적 공간을 렌트해 다시 정서적 애착을 갖게 되면 굳이 한곳에 뿌리내릴 필요는 없어요. 20~30대에게는 이주가 하나의 관습이 됐다는 점도 생각해야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