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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진상태에서 맛보는 황홀감의 극치

탈진상태에서 맛보는 황홀감의 극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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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인터넷이 있어 매주 미국의 유명한 마라톤 잡지인 ‘러너스월드(Runner’s World)’가 보내주는 훈련지침이나 몸 관리법을 읽을 수 있다. 예컨대 이번 주에 배달된 전자우편의 훈련지침을 보면 이렇게 써놓았다. “항상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몸이 찌뿌드드할 때는 최고기록에서 상당히 멀어질 수 있다. 느리게 뛸 때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항상 같은 기록을 내려고 들지 말고 예전 기록과 비교하려고 하지 말라. 그래도 자꾸 옛날 기록이 생각나서 견딜 수 없다면 코스를 바꾸거나 시계를 풀고 달려라.” 또 이런 지침도 보내왔다. “가장 좋은 연습은 당신에게 자신감과 행복을 느끼게 해준다. 이 행복한 기분은 다시 새로운 자신감을 불러일으켜 준다. 대회에 나가 자신의 능력을 시험할 때가 되었다면, 자기 자신을 믿어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이다.”

나는 바로 이런 점이 ‘러너스월드’처럼 역사 깊은 마라톤 잡지가 가진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러너스월드’는 독자들에게 마라톤이란 운동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말해준다. 때로는 이 잡지가 마라톤 잡지가 아니라 마인드컨트롤 잡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정도다. 이런 지침과 함께 멋진 달리기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달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게 만드는 게 이 잡지의 매력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이런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다. 마라톤대회를 주관하는 신문사에서 대회 때마다 만드는 책자가 있지만, 괴로움으로 점철된(물론 환희로 끝나기는 하지만) 수기나 아킬레스건염이나 연골연화증 치료법 등 너무나 전문적인 지식, 마치 해병대전우회처럼 일반인은 감히 근접도 하지 못할 것처럼 보이는 마라톤동호회 소식 등으로 채워져 있다. 물론 쓸모없는 지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번쯤 읽어야만 하는 글들이지만, 일반인들이 달리기에 대해 가지는 두려움을 너무 과소 평가하는 것은 아닌가는 생각이 든다.

이런 내게, 달리기에 대한 두려움과 제대로 뛰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잊게 만든 책이 바로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글라서가 쓴 ‘긍정적 중독’이다. 한국심리상담연구소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기관에서 내놓은 책이라 일반인의 눈길을 끌기에는 약간 어려움이 있었지만 책을 펼쳐드는 순간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책은 술 마약 도박 등의 중독현상과 그 효과는 비슷하지만 자신과 타인에게 모두 도움이 되는 심리현상으로 ‘긍정적 중독’현상을 연구한 책이다. 글라서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해로운 중독현상만큼이나 바람직한 중독현상이 많은데, 이 중독현상들은 우리를 강하게 만들고 우리 삶을 더 만족스럽게 해준다. 그러면서 글라서는 그중 가장 대표적인 ‘긍정적 중독’현상으로 달리기와 명상을 든다. 글라서는 그 중독현상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설명하기 위해 세계적인 마라톤선수인 이언 톰슨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든다.



“E.M. 포스터는 노 젓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노 젓는 사람들이 모든 체육인의 목표인 초월상태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달리기를 할 때도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달리기 그 자체가 되는 일이 일어난다. 나는 훈련을 통해 이 사실을 깨달았다. 단지 운동화를 신었고 근육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면서부터 즐겁기 시작한다. 이 진정한 황홀감은 순환적이다. 나는 행복하기 때문에 달리고 달리기 때문에 또 행복하다. 이 과정에 나는 자신을 가장 순수하게 알 수 있었다. 달리기를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깊이 깨닫게 된다.”

글라서는 이 긍정적 중독을 분별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①자발적으로 매일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것으로 경쟁적이지 않은 것 ②누구나 쉽게 할 수 있으며 숙달되기 위해 정신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 ③혼자서도 할 수 있고 여럿이 같이 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것 ④행할 만한 신체적·정신적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 ⑤자신만이 그 일의 성과를 판단할 수 있는 것 ⑥스스로 비판하지 않고 몰입할 수 있는 것.

글라서는 1974년 ‘러너스월드’ 독자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달리기가 바로 긍정적 중독의 하나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설문에 응답한 사람 중 존 로머가 “달리기에 관심은 있으나 달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규칙적으로 달려보라고 권하고 싶습니까?”라는 설문에 응답한 내용은 입시체육이나 군대체육에만 길든 우리에게는 사뭇 충격적이다.

“나는 모든 사람이 달리기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달리기는 증오심과 공격심을 가라앉히고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며 자존심을 키워주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들이 모두 달리기를 한다면 혁명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자동차가 없어질 것이며 어리석은 사치와 억압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깨달아 환경이 보존되고 인종차별이 없어질 것이다.”

글라서는 매일 규칙적으로 달리는 사람들이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2년 안에 긍정적 중독에 빠지고 일단 이 상태에 빠지면 하루도 달리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게 된다고 결론 지었다. 아울러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 태도가 긍정적 중독에는 가장 중요하며 긍정적 중독에 빠지면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덧붙였다.

왜 마라톤에 빠진 사람들이 한사코 달리기의 즐거움을 남들에게 강조하는지 이제는 알 것이다. 마약, 도박, 술에 빠진 사람들처럼 그들은 마라톤에 중독된 것이다. 중독된 주제에 그들은 왜 나쁜 기록이 나와도 결승점 주변에서 웃고 다니는지 이제는 알 것이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존중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쯤이면 단순히 살을 빼기 위해서, 혹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싶어서 달리기를 한다는 생각은 저 멀리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달리기 목표를 거리보다는 시간에 둬라

달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처럼 마음가짐이다. 5년 전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 나 자신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많았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둔 거리를 달렸다. 뛰기 싫었지만 이를 악물고 달렸다. 이유는 오직 하나. 나 자신이 과연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국 내가 알게 된 것은 나 자신이 상당히 나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운동장을 10바퀴를 돌겠다고 생각하고 나서면 7바퀴쯤 가면 자꾸만 내가 왜 뛰어야만 하는지 회의가 들었다. 목표한 거리를 빨리 돌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이 강할수록 다리에선 힘이 빠졌다. 일주일마다 거리를 늘려서 한 달 뒤에는 매일 8㎞를 뛸 생각이었는데 결국 3주 만에 달리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자신감은커녕 내가 고작 이 정도 인간밖에 안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운동을 매일 계속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몇 주 뒤, 다시 용기를 내 달리기를 시작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목표를 세우고 달리면 달릴수록, 날마다 내 상태를 체크하며 문제점을 찾아내려고 하면 할수록 도무지 계속 뛸 수 없었다. 그저 그런 상태만 반복되면 다행인데, 그럴 때마다 자기 혐오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자신을 비난하게 되고 그래서 또 달릴 때마다 자신을 채찍질하게 되고 그 결과는 당연히 다시는 달리기 싫어진다.

그렇게 뛰다가 말다가를 1년 정도 반복하다가 새롭게 마음먹었다. 이건 순전히 ‘좋은 사람’이라는 일본만화를 보다가 든 생각이었다. 학창시절에 장거리달리기 선수였다가 지금은 도쿄의 스포츠회사에 다니는 주인공이 우연히 고등학교 육상팀 감독을 맡았는데, 그 육상팀이라는 게 오합지졸이다. 그 오합지졸을 데리고 하코네 역전마라톤에 참가했는데, 주인공이 선수들에게 내리는 지시라는 게 가능한 한 천천히 뛰라는 것이다. 그 주인공에게는 달리기란 자신이 즐겁기 위해 뛰는 운동이란 신념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1등을 못 할 것이라면 가능한 한 천천히 즐기면서 달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5㎞마다 페이스 조절해가며 달리던 선수들이 시계는 보지 않고 가능한 한 천천히 뛰었는데, 1위를 한 것이다. 하하하, 하고 나는 웃었다. 역시 만화는 만화다. 그런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가장 천천히 뛰는 사람이 가장 먼저 들어가는 세상이라면.

하지만 그 말은 내게도 해당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나는 전문 주자가 아니다. 소설가인 내가 소설 내용을 두고 자학할 수는 있지만, 달리기를 못한다고 해서 자신을 비난할 이유는 없는 셈이다. 한 바퀴만 도는 게 가장 즐거운 일이라면 한 바퀴만 돌기로 결심했다. 그러면서 나는 이제는 목표를 거리에 두지 않고 시간에 두기로 했다. 대개 건강한 사람이라면 처음 시작해도 30분 정도면 5㎞를 주파한다. 그래서 나는 속도가 느리든 빠르든 30분은 무조건 뛴다는 생각을 했다. 정상적으로 달린다면 5㎞ 정도는 달릴 수 있으니 그렇다고 생각하고 거리는 신경 쓰지 않고 내 편한 대로 달리기로 했다. 하지만 목표가 거리에 있지 않고 시간에 있기 때문에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나는 아무런 부담이 없이 사실은 빠르게 걷는 속도나 다름없을 정도로 천천히 달렸다.

천천히 뛸 때, 가장 오랫동안, 먼 거리를 달린다

이렇게 마음을 바꿔 먹으니 매일 뛸 수 있게 됐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는 얼마간 뛰다가 걷는 한이 있더라도 30분은 채웠다. 비가 오는 날이면 30분 동안은 걸어다니며 나뭇잎에 맺힌 물방울도 바라보고 빗소리도 들었다. 섣불리 시간을 늘리지 않았다. 대회를 앞두고서는 1시간까지 늘리기도 했지만, 평상시에는 30분 이상 달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차츰 내가 달리는 속도는 빨라졌고 행복감은 달리는 내내 가득했다. 더 이상 자학하지 않았다. 만화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는 비로소 달리는 일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달리기를 시작한 이후, 많은 것을 깨달았다. 소설 쓰기와 달리기는 상당히 비슷한 구석이 많다. 일정한 시간을 계속 투자해야만 하고 지속적이어야만 한다. 그러고 보면 나도 하룻밤에 80매를 쓴 적도 있다. 전혀 안 뛰다가 어느 날 저녁 집에 들어와 6㎞를 달리고 나서는 아홉시부터 뻗은 적이 있듯이. 하지만 궁극적으로 소설을 쓰는 일이나 달리는 일은 스스로 그 일을 즐기면서 지속적으로 일정한 시간을 투자해야만 한다.

영어로 천천히, 오랫동안, 먼 거리를 달리는 일을 줄여서 LSD(long, slow, diatance)타입이라고 말하는데 참 어울리는 말이다. 강력한 환각제인 LSD처럼 천천히, 오랫동안, 먼 거리를 달리는 일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함께 간다. 천천히 뛸 때, 가장 오랫동안, 먼 거리를 달릴 수 있다. LSD를 복용해 본 사람만이 그 환각을 경험할 수 있듯이 천천히, 오랫동안, 먼 거리를 달려본 사람만이 이 역설적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다.

되도록 천천히 달리는 것이 가장 오랫동안 달리는 방법이라는 역설적인 사실을 깨달은 뒤로 나는 소설을 쓰는 일도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됐다. 마라톤대회에 참가를 신청하고 한 달 동안 연습하는 동안에 가장 큰 원동력은 대회에 나가서 낙오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다. 경험상 꾸준히 연습했다면 전혀 힘들지 않다는 사실을 알지만, 연습하는 동안에는 매번 불안하기만 하다. 그래서 스스로 다짐한다. “그래, 기록이 좀 늦으면 어때. 어쨌든 결승점까지는 들어가자.”

출발선상에 선 선수들은 이미 목표 이룬 사람들

그러나 막상 대회에 참가하고 나면 달리기의 목표는 대회에서 낙오하지 않는 게 아니라 매일 꾸준히 연습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출발 신호가 울리기 직전, 사람들이 서로 앞으로 나가려고 밀치는 순간 나는 최고의 행복을 느낀다. 결승점에 들어올 때가 아니라 출발 신호가 울리기 직전에 가장 최고조의 행복을 느낀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실은 달리기의 결승점은 연습과 준비가 완전히 끝난 바로 그 시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회에서의 달리기는? 그건 부록일 뿐이다. 달려보지 않은 사람은 믿기 어려운 얘기겠지만, 이는 실제로 자기 만족감에 달리는 대부분의 주자들이 경험하는 일이다. 꾸준히 연습한 후 출발선상에 선 선수들은 이미 목표를 이룬 사람들이기 때문에 기록이 좋지 않게 나오더라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소설을 쓰는 일도 이와 비슷하다. 매일 쓰는 과정이 바로 소설 쓰기의 목표다. 보스턴 마라톤은 물론 아테네 전령이 달린 아테네와 마라톤 사이의 원조 마라톤코스도 완주한 경험이 있는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가로서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마라톤을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어렸을 때 나는 그 체력이 역기를 드는 힘과 같은 것으로 착각했다. 그저 소설을 쓰려면 감기 따위에는 걸리지 않고 매일 책상에 앉을 수 있는 정도의 체력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쯤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체력’이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오랜 시간 지치지 않고 자신의 일에 즐겁게 몰두할 수 있는 어떤 힘을 뜻한다. 그 힘이 어떤 것인지 이해한 것만으로도 나는 달리기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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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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