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몸을 숯검댕으로 만든 뒤 그 씻은 물 먹기, 사모관대를 한 채 연못에 뛰어들어 고기잡이 흉내내기, 얼굴에 오물을 발라 광대놀음 하기 등 조선의 과거급제자들은 신참 신고식에서 정신적·육체적 가학을 감내해야 했다. 또한 신고식 비용도 모두 신참이 부담했으니 요즘보다 더 심했다 할 것이다. 》
새내기들이 낯선 환경에 적응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신고식이란 명분으로 새내기들에게 육체적·정신적 고통이 따르는 통과의례를 강요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특히 고통이 따르는 신고식 문화는 군대는 물론이요, 대학가에서도 성행하는 실정이다. 군대 신고식은 흔히 ‘얼차려’라는 이름으로 정신·육체에 고통을 주는 것으로 산만한 정신을 다잡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학가의 신고식은 주로 강제로 술을 먹이는 등의 방법으로 선·후배 간 일체감과 소속감 혹은 상하 규율을 불어넣는 것이라 한다. 범죄조직에서 피를 나누어 마시는 의식을 통해 동료 의식을 고취하는 것도 신고식과 같은 종류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신고식 문화는 우리 사회에 깊숙이 스며 있다.
인류학 내지 민속학에서는 신고식을 통과의례(通過儀禮)로 이해한다. 프랑스 인류학자 반 주네프는 인간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새로운 장소, 지위, 신분, 연령 등을 거치면서 치르는 갖가지 의식을 통과의례라고 설명한다. 즉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시작을 위해 거치는 것이 통과의례이며, 여기에 수반하는 시련과 고통을 ‘의례적 죽임’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통과의례의 ‘가상 죽임 의식’이 죽임으로 연결돼 우리를 혼란케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커다란 바가지에 술을 가득 담아 먹이는 대학가의 사발주 혹은 육체적 가학이 담긴 통과의례 때문에 귀한 생명을 잃었다는 보도를 접할 때마다 필자는 조선시대의 가혹한 신참 신고식 ‘면신례(免新禮)’를 떠올리곤 한다.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신고식 문화에 그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뿐이다.
이러한 신고식 문화를 일제시대 군국주의의 잔재였다거나 광복 이후 군사문화의 한 단면으로 이해하려는 이가 많은데, 실제로 신고식 문화는 조선시대 관료제 사회가 발전하는 과정에 매우 성행하던 풍속으로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권세가 자제의 방자한 태도 꺾기 위한 신고식
조선시대에는 새로 과거에 급제한 자나 선비로 있다가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간 자를 신래(新來)라 불렀고, 신래가 선배 관원들 앞에서 피해갈 수 없는 신고식을 면신례라고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신입 관원에 대한 구관원의 얼차려 문화인 셈이다.
조선의 신참들은 오늘날의 새내기보다 더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오늘날은 신참의 신고식 비용을 주로 고참들이 대는 것과는 달리, 조선의 신참들은 허리가 휠 정도의 경제적 부담을 지면서 면신례를 해야 했고, 육체적·정신적 가학도 감수해야 했다. 심한 경우 죽음에 이르는 사례도 있었다.
이렇게 면신례로 인한 폐단이 많자 조선은 국가 차원에서 금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좀처럼 사라지지 않은 채 21세기를 맞이한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렇듯 면신례의 역사는 상당히 깊다. 조선이 건국된 지 몇 달이 지난 태조 1년(1392) 11월 도평의사사에서는 감찰(監察)·봉례(奉禮)·삼관(三館)·삼도감(三都監)·내시(內侍)·다방(茶房) 등의 관직에 신참(新參)이 들어갈 때 잡스럽게 희롱하는 폐단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신참 길들이기란 명목의 신고식을 말함은 물론이다.
이성계가 즉위하자마자 거론된 문제임을 보아, 이 풍속은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듯하다.
실제로 면신례의 폐해를 지적한 기록을 보면, 연산군 6년(1500) 8월 의정부에서는 면신례 폐단에 대해 고려조의 쇠망(衰亡)한 세상 풍속이 본조(本朝)에 전해 내려와서 마침내 폐풍(弊風)이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중종 36년(1541) 12월 사헌부 상소에서는 고려 말 조정이 혼탁한 시기에 처음 관직에 나간 권세가 자제들의 교만하고 방자한 기세를 꺾기 위해 시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면신례는 중국의 당·송은 물론이고 오랑캐 나라인 원나라에서도 없던 것이라 하니 우리 고유의 풍속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취임을 위한 통과의례인 면신례란 용어가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성종 6년(1475)경이다. 물론 그 이전에 신참에 대한 신고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면신례란 용어가 정착되지 않았을 뿐인데, 그 이전에는 허참(許參)이라 불리는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했다. 물론 허참, 면신의 예(禮)는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신참 통과의례에서 일정 기간을 두고 계속 이어진 두 행사였다.
즉 허참례란 새로 출사(出仕)하는 관원이 구관원(舊官員)에게 음식을 차려 대접하고 인사드리는 예(禮)를 행하는 자리다. 이로부터 서로 고참과 신참의 상종을 허락한다는 뜻으로 허참이라고 하며, 다시 10여 일 뒤 면신례(免新禮)를 행해야 신래를 면해 비로소 구관원과 동석할 수 있었다.
관직에 처음 등용된 신참의 행보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이 어떻게 신고식을 치르는지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에는 과거에 급제한 자들이 하인들을 거느리고 유가(遊街)에 나서는 풍속이 있었다. 유가란 자신의 과거 급제를 세상에 알리고 이를 자축하는 행사로, 급제한 자가 어사화를 머리에 얹고 화려하게 치장한 말을 타고 나팔과 꽹과리를 동원해 마을을 도는 풍속이다. 오늘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들이 공항에서 시내까지 카 퍼레이드를 벌이는 것과 흡사한 광경이다. 급제자들이 유가할 때면 으레 수행하는 종들이 행인들에게 비키라고 소리를 질러 길을 튼다. 급제자만이 아니라 신분이 높은 자들이 길을 갈 때면 당연히 따르는 절차였다.
그러나 과거급제자는 예문관·성균관·교서관의 삼관이나 훈련원에 재직중인 고참들에게 먼저 경하(敬賀)하는 만찬을 베풀어 신고를 한 후에야 유가를 행할 수 있었다.
조선에서는 통상 문과나 무과에 급제하면 바로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기간 수습을 거친 뒤 벼슬을 받았다. 무과의 경우 훈련원에 배속되고, 문과의 경우 삼관(예문관·성균관·교서관) 혹은 사관(승문원 추가)에 나누어 배속됐다.
예문관은 역사를 담당하는 한림들이 근무하는 곳이요, 성균관은 당대 최고 교육기관이며, 교서관은 서적을 간행하는 곳이요, 승문원은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곳이다. 대개 관직에 바로 서용되는 장원급제자를 제외한 문과급제자들을 능력과 나이를 고려해 이 네 관청, 즉 사관에 배치하고는 실무를 익히게 한 것이다. 이를 분관(分館)이라 한다. 이때 실무를 익히는 자들에게 주어진 명칭은 권지(權知)니, 오늘날 시보(試補) 내지 임시 대기직인 셈이다.
이때부터 문과의 신급제자는 삼관(혹은 사관)의 선배에게 신고 절차를 밟아야 했다. 선배들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거나 예를 다하지 않을 때는 유가를 할 수가 없었다. 또한 신참의 유가는 일반적인 대감 행차와는 달리 선진자(先進者; 선배 관료)를 만나면 말에서 즉시 내려 예를 갖추어야 했다.
후배 돈 우려내는 면신례
삼관에 골고루 배치된 과거 급제자는 배속된 부서의 고참이나 선생(당해관서 관직 역임자)들에게 본격적으로 인사를 다녀야 한다. 이때 신참은 자신의 신상을 적은 자지(刺紙; 일종의 명함 종이)를 가지고 가야 한다. 한 번만 가는 것도 아니고 한 사람한테만 가는 것도 아니니 이는 고역이었다.
이때 자지가 두껍고 큰 것이 아니면 안 되는데, 대개 무명 한 필로 자지 석 장을 겨우 바꿀 수 있었으니 그 비용 부담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 새내기들의 경제적 부담이 과도했던 것에 비하면 오늘날의 신고식은 좀더 합리적으로 변했다고 할 수도 있다. 요즘은 신고식에 들어가는 비용을 새내기를 맞이하는 고참이 부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무튼 조선의 신참들이 감내해야 했던 이러한 행위를 투자(投刺) 혹은 회자(回刺)라 칭하며 이를 통하여 선배 관원을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보통 투자는 허참이나 면신의 예를 행하는 기간에 같이 했다.
선배들은 인사 온 신래들로부터 우려낸 돈으로 면신례와는 상관 없는 훗날의 잔치에 대비한다. 복숭아꽃이 필 때면 교서관에서 주관하는 홍도연(紅桃宴), 장미가 피는 초여름에는 예문관에서 열리는 장미연(薔薇宴), 여름에는 성균관에서 취하는 벽송연(碧松宴)이 그것이다. 이런 이름의 잔치는 원래 삼관을 중히 여긴 국왕이 가끔 내려주는 음식으로 하던 것이었으나, 점차 신래를 침학하는 것으로 변질했던 것이다.
한편 본격적인 신고식인 허참례(許參禮)나 면신례(免新禮)는 반드시 고참 선배들에게 음식물을 접대해야 했다.
음식물 장만하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다. 이를 ‘징구(徵求)’라 하는데, 셈은 3에서 시작된다. 이를 테면 청주가 세 병이면 무슨 물고기가 세 마리, 무슨 고기가 세 마리, 무슨 과일·나물이 세 반(盤) 등등 무릇 백 가지 먹을 만한 것을 이 숫자에 맞추어야 했다. 만일 하나라도 갖추지 못하면 견책이 따랐다.
이렇게 다섯 차례를 한 뒤에 다시 5의 수로 음식을 준비하여 세 차례 잔치를 더 벌여야 한다. 그 다음에는 7의 수로 시작하여 9의 수에 이른 뒤에야 그만둔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최종 절차인 허참연(許參宴)과 면신연(免新宴)을 따로 해야 하니 여기에 드는 비용이 엄청났다.
부잣집 자제가 아니면 살림을 다 기울여 없앤다 해도 그 비용을 대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남에게 빌려서라도 감당하던 것이 당시 실정이다.
허참·면신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 집단의 동료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말석에도 끼워주지 않고 왕따시키는 것은 물론이다.
또 허참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야 비로소 당해관서 관원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그 전의 근무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삼관으로 분관된 급제자들의 승진은 반드시 허참 순서에 따르는 것이 관례였다. 이 관례는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컨대 바로 위 고참이 병이 나 근무일수를 채우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가 승진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는 법전에도 명시돼 있는데, 이를 차차천전(次次遷轉)이라 한다. 관료제가 발달한 조선은 그만큼 위계질서를 존중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허참한 순서대로 천전(遷轉; 다른 관직으로 승진하여 옮겨감)되자, 급제자들이 성균관·교서관 권지로 분관돼 허참례를 행한 뒤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다음 관직을 기다리는 폐단이 야기될 정도였다.
문과 급제자가 분관되는 사관(승문원·성균관·교서관·예문관) 중에서도 예문관이 면신례 기율이 가장 셌다. ‘징구’가 승문원에 비하여 갑절일 뿐만 아니라, 면신연과 허참연도 승문원에 비해 배나 된다. 또 다른 관에는 없는 중일연(中日宴)이란 것이 있는데, 그 비용이 엄청나다. 이런 술판이 벌어지면, 마시고 취하면서 한림별곡(翰林別曲)을 목청껏 노래하는 것이 예부터 내려오는 관례였다.
성종 6년 예문관 검열(정9품)에 제수된 조위(曺偉)가 행한 면신례를 당시 실록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가관이다. 유밀과에다 소까지 잡아 잔치를 벌이는데, 예문관 참하관인 선배 검열과 봉교(7품)·대교(8품) 등 현직 한림은 물론이고 이미 다른 관직으로 승진해 간 한림 역임자가 선생(先生) 자격으로 참여한 뒤 기생까지 동원하여 풍악을 울리면서 흥건히 취하게 놀았다.
면신례를 주관하는 상관장(上官長)은 상석에 앉고 초청된 선생들은 정승일지라도 여러 관원 사이에 끼여 앉는다. 그리고 각각 기녀 한 사람씩 끼고 앉는데, 신래와 짝을 이루는 기생을 흑신래(黑新來)라 이름한다. 상관장은 양쪽에 기생 둘을 앉힌 채 잔을 돌리고 춤추며 신래를 희롱하는 갖가지 놀이를 벌인다. 이러한 한림들의 잔치가 동이 틀 무렵 끝나면 반드시 고려 이래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노래가 곁들여진다. 한림별곡이 그것인데, 고려시대 한림들이 부르던 노래로, ‘고려사악지’에 실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조위의 면신연에 흥을 돋우기 위해 참석한 기생이 매를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급기야 이 사건은 임금에게 보고됐는데,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를 논의하는 과정에 성종이 보인 태도도 흥미롭다.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된 것은 당연히 기생이 죽은 일이지만 또 하나는, 농우가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커 사사로운 도살은 금지하던 농경사회에서 신참인 조위가 엄청난 경제적 부담을 지면서까지 소를 잡아 음식을 장만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면신례의 폐단이 매우 컸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도 성종은 면신례가 예로부터 내려오는 관례임을 인정하고 불문에 부쳐버렸다. 단지 가뭄으로 인해 금주령이 내려진 시기에, 더구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사관들이 금주법을 어겼다는 것만 가볍게 처벌하고 넘어갔다. 또 성종은 재위 8년에 친히 성균관으로 행차하여 석전(釋奠)을 행한 뒤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게 한 적이 있는데, 사관(四館)에 명하여 신래(新來)를 불러 직접 희학(戱謔)할 정도였다. 이미 면신례가 친숙한 풍속으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정신적·육체적 가학
아무튼 면신례에는 신래를 괴롭히는 갖가지 방법의 침학(侵虐)과 희학(戱謔)이 동원된다. 침학에는 주로 과도한 경제적 부담이 따르며, 희학에는 정신적·육체적 가학이 수반된다. 앞에서 말한 징구는 침학의 대표적인 사례다. 그 밖에 초도(初度)라는 게 있는데, 신참에게 강제로 숙직을 맡기는 것으로 열흘에서 한달 가량 연속해서 근무해야 하는 고역이다.
희학은 연회 도중에 벌주와 함께 진행된다. 즉석에서 간단한 게임이나 내기를 하는데, 고참이 질 경우에는 벌주가 없지만 신참이 지면 벌주와 함께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주는 것이다. 이때 신참은 자신을 난잡한 웃음거리로 전락시키는 끔찍한 신고식을 참아야 한다.
이는 조선조 성종 당시 대학자 성현이 저술한 ‘용재총화’에 그 실상이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예를 들어 신참의 의관과 몸을 숯검댕으로 만드는 ‘거미잡이’라는 게 있다. 이는 신참에게 시커먼 부엌 벽에서 양 손으로 거미잡이 시늉을 시킨 뒤 손 씻은 물을 강제로 먹이는 것이다. 또 방 안에 긴 서까래 같은 나무를 두고 들게 하는 경홀(擎忽)에서 신참이 들지 못하면 무릎을 꿇게 해 선배들이 차례로 구타하기도 하고, 사모관대를 한 채로 연못에 집어넣어 고기잡이 흉내를 내게 하는 경우도 있다.
뿐만 아니라 별명을 붙여주고 이를 흉내내게 하는 ‘삼천삼백’, 관련 있는 벼슬 이름을 외우게 하되 바로 읽어내리는 ‘순함(順銜)’, 거꾸로 읽어 올라가야 하는 ‘역함(逆銜)’, 즐거운 표정을 짓게 하는 ‘희색(喜色)’, 괴로운 표정을 짓게 하는 ‘패색(悖色)’ 등 갖가지 방법이 동원되는데 그때마다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얼굴에는 오물을 칠하게 하는 등 신참을 광대로 만들어 희롱한다. 겨울에는 물에 집어넣고 여름에는 볕을 쬐게 하는 육체적 가학은 물론이요, 뜻에 맞지 않으면 매질까지 하는 등 군사정권하의 군대 신고식을 방불케 하는 장면도 벌어진다.
이렇게 갖은 방법으로 신래들을 침학(侵虐)하고 괴롭히는 습속이 워낙 다양하여 다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신래를 침학하는 자는 장 60에 처한다”는 규정이 조선의 법률책인 ‘경국대전’에 실릴 정도라면 저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태종이 집권한 이후에도 몇 차례 신참을 희학(戱謔)하는 행위를 금하는 조처를 내리기도 했다. 당시 신참을 침학하는 방법 또한 난침(亂侵), 간방(看訪), 허참(許參), 복지(伏地)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다 세종 5년 성균관·교서관 박사 이하 참하관들이 신래를 불러 잡희(雜戱)를 했다는 이유로 의금부에 하옥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죽음을 부른 신고식
그러나 이런 왕명이 있는데도 조선의 신고식 문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신참들이 육체적·정신적 가학으로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문종이 죽고 그의 어린 아들 단종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승문원에서 신고식을 치르다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한 정윤화(鄭允和)라는 신래가 죽자 사헌부 지평 유성원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쉬쉬하면서 풍문으로 떠돌던 소문이어서 사헌부가 쉽사리 탄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냥 덮어둘 사안도 아니었다.
당시 정윤화는 승문원에 배속된 다른 9명의 신참과 함께 신고식에 참여했는데, 마침 종기가 나 고생하던 차에 면신례로 인한 피로가 겹쳐 죽음에 이른 것이다. 이리하여 결국 승문원 박사(정7품) 강폭(姜幅)·신자교(申子橋), 정자(정9품) 신의경(辛義卿)은 태(笞) 50대를 맞고 파직당하고, 저작(정8품) 윤필상(尹弼商), 부정자(종9품) 권제(權悌)는 공신의 아들이란 이유로 단지 파직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당시 신고식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선비 신분에서 관료로 초입사(初入仕)하는 과정의 통과의례에 이처럼 가혹한 방법이 동원돼 사람 목숨까지 앗아갔던 것이다.
신래를 갖가지 방법으로 골탕먹이는 풍속은 분명 성리학의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러한 면신례는 관직에 초입사(初入仕)하는 경우만이 아니라 다른 관직으로 옮겨가거나 승진해 갈 경우에도 반드시 치르는 것으로 확산되어 갔다.
그 대표적인 관직이 이조·병조 낭관(4, 5품)이나 사헌부 감찰(6품)인데, 이런 관직으로 진출할 때는 처음 관직에 들어설 때와 같이 호된 신고식을 치르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조·병조의 낭관은 각기 문·무관의 인사권을 쥐고 있고, 감찰은 백관을 규찰하는 등 당시 관료사회에서는 핵심 요직이었다. 요직이니만큼 선·후배간 규율이 엄격할 필요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삼관의 신고식에 버금가는 면신례를 치러야 했다.
예를 들어 사헌부 감찰(6품)이 되어 새로 온 자는 관직에 제수된 이후 비록 수십 일이 지났다 하더라도 면신례를 할 때까지 반드시 날마다 음식을 베풀어 선생(先生)·구주(舊住)를 기다려야 했다. 선생·구주가 된 자는 번갈아 드나드니 잔치하고 맞이하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 아예 면신연(免新宴)은 이 수(數)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또 새로 감찰이 된 자를 신귀(新鬼)라 부르며 희롱하고, 또 몽둥이로 때리는 등 육체적인 가학도 허다했다.
이러한 형식의 면신례가 다른 관직에도 파급되더니, 급기야 그들이 부리는 아전이나 종들도 신참이 들어오면 면신례를 치르게 하는 등 조선사회가 신고식 천지로 변하게 되었다.
또 아직 관직에 들어서지 못한 생원·진사들에게까지 신고식 문화가 파급돼 새로 생원·진사가 된 자에게 침학하는 풍속도 생겼다. 이를 접방례(接房禮)라 했는데, 음식을 차리고 주악(奏樂)을 동원하는 방법이 면신례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고참을 따지는 방법
조선 관료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먼저 관직에 들어선 선진자(先進者)를 만나면 반드시 뜻을 굽혀 예를 갖추고 그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이는 신·구의 구분을 엄격히 하여 위계질서를 잡는 관료주의 사회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같은 해 같은 과에 급제한 동기생들은 동방(同榜) 급제라 하여 매우 돈독한 사이가 된다. 장유유서(長幼有序)를 철저히 지키는 유교 사회에서도 동기생끼리는 나이를 불문하고 친구가 됨은 물론이다. 이 역시 동기생과 선·후배를 따져야 하는, 위계질서가 굳건한 사회에서 나타나는 당연한 일이다. 지금 고시파들이 법원이나 검찰 내부에서 위계질서를 철저히 따지는 분위기와 비슷하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사건도 있었다. 성종 8년 3월에 문과에 급제한 이세좌는 당연히 유가(遊街) 행차에 나섰다. 급제는 그때 했지만, 그는 이미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으로 있었다. 이세좌의 유가 행차에는 당연히 사간원 나장들이 따라 나섰다. 그런데 앞장서서 벽제(除; 거리에 잡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행위)하던 나장들이 길 가던 주부(主簿; 종6품) 최융(崔融) 등 몇 사람이 행차 앞을 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종자들의 머리를 휘어잡고 욕을 보이고 말았다.
이는 이세좌의 당시 관직이 대사간(정3품)이기에 발생한 문제였다. 대사간이란 간쟁을 맡은 사간원의 장관이다. 조선조 관료사회에서는 간쟁과 탄핵을 맡은 대간이 길을 갈 때면 정승도 말에서 내려 예우해주어야 한다.
이세좌가 급제하기도 전에 이런 관직을 차지한 것은 그의 가문이 번성한 덕분이었다. 올림픽공원이 있는 둔촌동 일대에서 살던 광주 이씨 집안은 당시 최고 문벌임을 자랑했는데, 둔촌동이라는 이름 역시 그의 증조할아버지 호인 둔촌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무튼 이세좌는 조상을 잘 둔 덕분에 문음으로 관직에 발을 들여놓은 뒤 누차 승진을 거듭하다가 이제사 급제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를 모시는 종들도 종6품의 주부들을 눈 아래로 보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나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초임 급제자들이 몰려 있는 사관(四館)이 상급 관청인 예조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나라 풍속에 처음 과거에 오른 자는 비록 당상관을 역임한 자라 할지라도 유가하는 날 선진자(先進者)를 만나면 반드시 허리를 굽혀 예를 행해야 하는 것이 관례인데,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문과 선배에게 오히려 행패를 부렸으니 사관에서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사관에 들어온 권지들은 근무나 승진에서 선배와 후배의 위계질서가 엄격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고 자부심도 대단했다. 이런 판국에 이세좌는 당상관이란 이유로 사관에 분관되지도 않은 채, 유가 도중 자기보다 하급 관료의 머리채를 잡아 흔드는 모욕을 주었으니, 사관 소속 관료들이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었다.
사관에서 올린 첩정(牒呈)을 접수한 예조에서도 그냥 넘길 사안이 아니어서, 성종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종도 결국 주무부처인 형조로 넘겨 이세좌를 국문(鞫問)하게 했는데, 대신들의 의견 또한 엇갈렸다.
이세좌는 우의정 이인손의 손자이자, 형조판서를 지낸 이극감의 큰아들이다. 그의 아버지 5형제가 나란히 문과에 합격하여 당대 최고 관직에 있으니, 당시 어느 가문도 무시할 수 없는 명문거족이었다. 이세좌 문제를 놓고 심의하던 대신 중에는 그의 백부와 숙부들도 있었으나, 이들 역시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이세좌의 숙부 이극증(李克增)과 이극돈(李克墩)은 “비록 신래(新來)지만, 간관이므로 벽제하는 것이 마땅한데 성내는 자가 잘못이다”고 말했다. 간쟁을 통하여 왕권을 견제하는 간관들에게 그만한 예우를 해주기 위해 비록 하급직 간관의 행차라도 마주친 정승이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는 것이 당시 관례인데, 간관의 수장인 대사간 정도의 행차라면 벽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신래가 아닌 대사간이라는 직위를 내세운 것이었다. 혈기 넘치는 젊은 신진세력이 날뛰는 상황에 염증을 느끼던 원로 대신이 많았기에 이 주장이 먹혀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백부 이극배(李克培)는 이세좌의 잘못을 지적했다. 신래라는 위치에 무게를 둔 것이다.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소신을 밝히는 사람, 조카의 허물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사람이 바로 이극배였던 것이다. 5형제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품을 바탕으로 영의정까지 지내는 동안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던 그다.
결국 형조에서 법조문을 그대로 적용하여 볼기 40대를 쳐야 한다는 안을 올리자, 성종은 이세좌의 벼슬을 낮춰 교수에 임명했다. 그러나 10여 일 이후의 실록 기사에 그가 대사간 직책을 계속 수행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보아, 그의 좌천은 얼마 안 돼 원위치로 돌아갔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을 통해 신참과 고참을 따지기 모호한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는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하였다가 나중에야 급제하는 경우가 많은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성종 때 이런 일도 있었다. 성종 25년(1494) 변방의 절도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변종인(卞宗仁)에게 도총관 자리를 제수하였다. 그는 무신으로 혁혁한 공을 많이 세워 공조참판에 올랐고, 그 이후로도 주로 변방의 절도사 임무를 맡아 다년간 한양을 떠나 있었다. 이에 내심 불만을 가진 그의 아내가 도성 안에 근무할 수 있도록 상언(上言)을 올린 것이 받아들여졌다.
변방절도사는 종2품 무관이니, 행정계통의 관찰사와 맞먹는 자리다. 그리고 정2품 도총관은 수도를 지키는 오위도총부의 최고 자리니, 무반으로는 실질적인 총지휘관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변종인은 도총관으로 부임한 뒤 군사들의 훈련상황을 점검하려고 훈련원에 갔다가 허참례를 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휘하 관원들이 지영(祗迎; 아랫관원이 윗관원을 맞이하는 예)하지도 않고 이름을 부르면서 욕을 하는 ‘변’을 당하고 말았다. 변종인이 신고식을 생략하자, 새까만 후배가 지영은 고사하고 원로 대신인 그를 “어이! 신참” 하고 불러댄 것이다.
장관 길들이기
모욕당한 변종인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새까만 후배인 훈련원의 권지들에게 당한 수모를 생각하면, 자리를 더 이상 보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권지란 급제한 뒤 수습으로 업무를 익히는 자 아닌가. 임금께 아뢰고 스스로 피혐(避嫌 ; 일신상의 이유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 허참례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계급의 높낮이를 떠나 그 부서에서 얼마나 오래 근무했나를 따지는 풍속인 것이다. 오늘날 장관이 부임한 이후 직업관료들에게 왕따당하고 임기 내내 휘둘리다 그만두는 사례가 많듯이, 장관 길들이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하찮은 비관(卑官)들이 재상을 욕보인 일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던 성종은 훈련원 권지 이극달(李克達) 등 관련자 14명을 불러 조사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대답은 이러했다.
“무과 출신인(武科出身人)은 당상·당하를 묻지 않고 모두 주효(酒肴)를 판비(辦備)하여 본원(本院)의 남행(南行)과 서로 만나본 연후에야 선생안(先生案)에 제명(題名)하고, 선생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비록 당상이라도 지영(祇迎)하지 않고, 신래(新來)의 이름을 부르니 이것은 옛 풍습입니다.”
‘선생안’이란 역대 관직 역임자 명단을 묶은 책이다. 계급에 상관없이 신참자는 먼저 근무하던 자들에게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한턱을 써야 선생안에 이름을 올려주는 동시에 선생이라 일컫고, 지영(祗迎)의 예를 하게 된다.
계급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새로 부임하는 자가 술과 안주로 대접해야 하는 모임을 상회례(相會禮)라고 칭한다. 이 역시 면신례의 일종이다. 결국 성종은 관료의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관련자들을 추국(推鞫)하여 보고하도록 사헌부에 지시하는 선에서 끝내고 말았다.
이는 조선시대 신참의 신고식이 갓 들어온 신임관료만이 아니라 다른 부서에서 전근해 오는 기존 관직자들도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구나 한 부처의 장으로 취임하여도 신고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이었으니 무서운 풍속이 아닐 수 없다.
업무 연속성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꼭 필요한 부서에는 구임(久任)이라는 제도를 마련하여 전문성을 높인 것이 조선이었다.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업무에 익숙한 사람은 어느 사회에나 필요하다. 그러나 한 자리에 오래 있으면 부정과 폐단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렇듯 관료제도에도 장·단점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허참례 역시 관료제도를 운영하는 데 엄연한 하나의 풍속으로 존재했고, 그것이 끼치는 영향이 긍정적이었든 부정적이었든 오늘날까지 그 남아 있다.
면신례를 거부한 간 큰 신참들
그런데 조선의 엄격한 신고식 규율에 정면으로 대든 신참들도 있다. 요즘 말로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신참이었던 것이다.
태종 17년(1417) 문과에 올라 평안감사를 지낸 박이창은 기개가 있고 활달하여 얽매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또한 강직하면서도 해학이 있었다. 젊어서 학문에 힘쓰지 않았지만, 고향 상주에서 열린 향시에서 장원을 차지한 후 마음을 달리 먹고 공부를 하였다. 이후 마침내 문과에 급제하니, 예문관으로 배속받았다.
사관인 한림이 근무하는 예문관은 신고식이 세기로 이름난 곳이니, 박이창의 성격으로 선배들에게 여러 번 꾸짖음을 듣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는 50일이 지나도록 선배들이 면신해 주지 않아 관직에 임용되지 못하자 분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이 앉아야 할 좌석에 앉아버렸다. 이리하여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자허면신(自許免新)’이라 일컬었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에 배속된 이율곡도 면신례 자리에서 고참들에게 공손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관직에 바로 나가지 못하고 파직된 적이 있다. 이퇴계가 이 소식을 듣고 신래를 희롱함이 무리한 시속이나 이미 알고 그 길로 들어갔으니 홀로 모면할 일도 아니구나 하고 한탄했다는 것이다.
이런 악연이 있는 율곡은 선조조에 들어와 관을 부수고 옷을 찢으면서 진흙 속에 굴리는 면신례의 가혹한 폐단을 강력하게 제기했고 그 풍습을 중지하라는 명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명령은 조선 초기부터 늘 있었지만 면신례는 없어지지 않고 이어져온 것이니,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또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광좌는 젊은 시절 과거 공부를 같이하던 박태한·최창대 등과 함께 급제하면 신래의 행동에 절대로 응하지 말자고 굳게 약속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숙종 20년(1694) 별시에 세 사람은 동반 급제하였다.
그런데 같은 연배의 친구들이 박태한이 고집불통인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애당초 부르는 자가 없었다. 또 장원급제한 이광좌는 좌주(座主; 고시를 맡은 대제학을 좌주라 하고 합격생을 문생이라 하여, 좌주문생 관계가 사제간 이상으로 돈독하였음)인 정승 남구만이 불렀지만 끝내 불응하니 남구만도 웃으며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창대는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면신례란 통과의례에서 온갖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그는 박태한에게 서신으로 “귀신 같은 행동을 이미 면하지 못했고, 조롱하고 장난하는 데에 이르러서도 남을 따라 같은 행동에 휩쓸린 것이 많았으니, 형과 더불어 거취를 같이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한다”고 적어 보내기도 했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들이 엽각(사냥에서 순위를 재는 일종의 행사)을 하면 자질구레하지만 풍습이기에 공자도 따랐다는 고사가 있는데, 당시 면신례를 보는 사대부들의 눈은 공자의 엽각과 다름없었다. 퇴계의 생각도 이에 근거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관례를 무시한 간 큰 아웃사이더는 아무나 흉내낼 수는 없는 것이었고, 또 계속 아웃사이더로 살아간 것도 아니었다.
면신례의 사회사적 의미
아무튼 조선의 신래들은 호된 신고식을 치르고 나면, 한층 성숙한 조직원이 돼 일체감과 소속감을 분명하게 느낀다. 그들만이 가지는 엘리트의식 속에서도 철저하리만큼 동료애를 발휘하는 동료의식이 내재하고, 이기심을 버린 이타심을 바탕으로 국왕과 대신들에게도 굽히지 않는 기개를 키워 가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관료사회에서 면신례라는 통과의례는 경제적 침학과 정신적·육체적 가학이 도를 넘을 때 부정적 기능도 나타났지만, 이런 의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긍정적 기능도 무시할 수 없음을 동시에 알아야 한다.
조선시대 선비정신이란 것도 그들의 경제적 기반 위에서 마련되었다는 점엔 부정할 수 없다. 언제 관직을 그만두어도 양반 신분으로 향촌사회에서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기반, 이것이야말로 선비정신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무기가 아니었던가. 그러한 경제적 바탕 위에서 면신례 등을 통한 일체감을 조성하는 분위기가 그 사회를 통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개성과 창의력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다원화된 정보화사회에서 전통적인 신고식 문화가 얼마나 유효할지는 의문이다. 오늘날은 조직의 질서나 사회통합 같은 가치관보다 개성과 각자의 다양한 재능이 존중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보화사회에서 첨단을 걷는 산업일수록 신입사원과 고참은 상하로 연결되는 구성원이 아닌 경쟁관계일 수밖에 없다. 확산돼 가는 연봉제 속에서 자신의 능력만이 유일한 생존 수단이 된다. 이는 진실로 삭막한 사회다.
그런데도 우리는 개인과 개인을 연결하는 단순한 기계적인 고리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통과의례를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이 없다면 너도나도 삭막한 정보화사회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천지가 벤처와 코스닥 열풍으로 정신없이 돌아가고, 인터넷이 지구를 묶어 디지털 세대가 주인인 이 땅에서 아날로그 세대도 엄연히 공존하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디지털 세대만 사는 세상이 도래할지라도 신고식 문화의 긍정적인 기능까지 없애야 하는가.
다만 새로운 신고식 문화를 위해서는 일체감 조성을 목적으로 한 기계적인 연대가 아니라 역동적이고 살아 움직이는 연대 방법을 찾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새 천년 21세기에는 멋진 신고식 문화를 만들 수 있도록 다같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