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호

‘정치 승려’가고‘부자 승려’ 떴다

조계종 총무원장 선거 막전막후

  • 김종찬 불교신문 논설위원

    입력2003-03-24 15: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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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조계종 총무원장을 뽑는 선거가 ‘조용하게’ 치러졌다. 1998년 서울 도심의 조계사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던 패싸움도, 법정 공방도 없었다. 이에 대해 “변화가 시작됐다”고도 하고 “문제가 잠복했다”고도 한다. 조계종 총무원장선거에서 과연 무슨 일이 있었나.
    ‘정치 승려’가고‘부자 승려’ 떴다

    조계종 총무원장선거가 사상 처음으로 잡음 없이 끝났다. 지난 2월24일 총무원장 선거인단의 투표 모습.

    ‘장교와 사병의 한판 승부’ ‘정치가와 행정가의 대결.’

    지난 2월24일 치러진 조계종(曹溪宗) 총무원장 선거의 속명(俗名)들이다. 선거는 상당히 치열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조용히 끝났고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총무원장에 당선된 법장(法長)스님(수덕사 주지)은 전형적인 사판승(행정승)이다. 그는 종단 ‘사병’이 주축이 된 선거운동원들의 치밀한 표심 공략에 힘입어, 중앙 정계 경력이 화려한 종하(鍾夏) 전 불교방송 이사장을 물리쳤다. 선거 직전까지도 종단 중진 승려들의 지원을 받은 종하 전 이사장의 당선이 유력해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179대 140, 39표차. 법장 후보의 ‘압승’이었다. ‘장교’들의 어이없는 패배였다.

    조계종 일각에서는 이번 총무원장선거가 지난 대통령선거를 꼭 닮았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보수적 성향의 이회창 후보가 기호 1번, 개혁 성향의 노무현 후보가 2번이었던 것처럼 종하 후보가 1번, 법장 후보가 2번이었던 것도 비슷했다. 선거 전날 종단의 두 원로가 지지후보를 바꾼 것도 대선과 똑같다는 것이다. 전임 총무원장인 정대(正大) 스님과 월주(月珠) 스님이 선거 직전 법장 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를 철회하고 종하 후보를 밀었는데 이는 대통령선거 전날 밤 정몽준 의원이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것과 비슷했다.

    두 전임 총무원장은 막강한 영향력에 재력까지 갖춘 인물들이다. 두 사람은 과거 총무원장선거에서도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대 스님의 총무원장 당선은 월주 전 총무원장의 후원에 힘입은 것이며, 그 이전 고산 총무원장 체제의 탄생도 월주 전 총무원장의 지원에 의해 가능했다.



    후임자 밀어주기 관행 깨져

    1998년에 대형 분규를 겪은 이후, 총무원장선거에는 전임 원장이 신임 총무원장을 밀어주는 전통이 생겨났다.

    그런 새 전통 탓에 ‘한정적인 간접선거’로 치러지는 총무원장선거의 판세는 선거 이전에 일찌감치 결정되곤 했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는 이 전통마저도 깨졌다. 이번 선거는 ‘사상 처음’이라는 관용어가 잘 어울리는 선거였다. 사상 처음으로 선거에 의해 평화적으로 종권이 이양됐다. 또한 사상 처음 비구니(여승) 탁연(卓然)스님이 총무원 최고위직인 문화부장에 임명됐다. 선거 결과가 파격이었던 만큼 선거 이후 종단 운영도 파격의 연속이다.

    순조롭게 치러진 총무원장선거를 두고 오히려 파격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조계종의 별난 역사 때문이다. 1962년 조계종은 정치권력에 의해 반강제로 획일화된 조직이 됐다. 자발적으로 총무원장선거를 택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 정권이 조계종법에 총무원장선거제도를 두도록 강제했던 것이다. 이 결과, 선거엔 항상 잡음이 뒤따랐다. 선거는 산통(産痛)에 가까운 고행과정이었고 선거 때만 되면 분규가 그치지 않았다.

    선거법은 간단했다. 현직 총무원장은 중앙종회 의원 81명이 선출하는데 이 가운데에는 총무원장이 임명한 직능 종회의원 20명이 포함돼 있다. 또 교구본사 의원도 총무원장의 영향권 안에 두도록 해 선거인단을 사실상 거수기로 만들어버렸다. 이처럼 현직 총무원장이 아닌 경쟁자가 도저히 이기지 못하도록 제도적 장벽을 친 상태에서 총무원장선거가 치러지다 보니 ‘3선 금지’의 규정을 하찮게 보았고 총무원장들은 번번히 연임을 시도했다. 이는 분규로 이어져 심각한 내홍(內訌)을 겪으면서 자동적으로 관권이 개입하는 불행의 역사가 이어진 것이다.

    1994년 조계종 파동과 개혁 종단 출범을 계기로 일상적인 분규사태를 막고자 기존 81명의 종회의원 외에 240명을 선거인단에 추가하는 선거법 개정을 단행했다. 24개 교구(총 25개 교구이나 선암사가 분규 사찰이라 빠짐)에서 10명씩의 선거인단을 선출해, 기존 선거인단 포함, 총 321명이 ‘비밀투표’를 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당해연도 선거에서만 유용했을 뿐 4년 뒤 1998년 다시 ‘3선 연임(송월주 원장은 1980년대에 한 차례 총무원장을 지낸 바 있어 1994년 총무원장 당선을 재선으로 해석함)’을 둘러싸고 초유의 폭력 분규가 터지고 말았다.

    외신들이 깊은 관심을 보여 국제 뉴스가 됐던 분규 현장은 공권력이 개입하고서야 안정을 되찾았다. 이어 ‘반쪽 선거’가 치러졌지만, 이번에는 선거권자인 종회의원들이 종회에서 선거법을 바꾸고 투표한 것이 실정법 위반이라는 판결을 받아 선거 자체가 무효가 되고말았다. 결국 8개월 뒤 다시 선거를 하는 홍역을 치렀으나 이 선거(1999년 11월 서정대 총무원장 당선)는 공권력과 정부의 입김이 작용하고 반대파의 참정권이 원천 봉쇄된 상태에서 치러져 ‘반의 반쪽 선거’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병이 장교를 이긴 선거

    이처럼 과거 총무원장선거는 제대로 치러진 적이 한번도 없었다. 늘 공권력이 개입해 한쪽 세력을 눌러놓고 다른 한쪽만으로 선거를 치러 한시적 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불안정의 연속이었다.

    이는 곧 총무원장의 정부 편향으로 이어졌고 불안정한 선거를 잉태하는 악순환을 낳았다. 가령 1999년 선거도 법원의 판결에 의해 재선거가 치러졌고, 이어 벌어진 선거무효 가처분신청에서 법원이 서정대 총무원장의 손을 들어주자 서원장은 임기 내내 김대중 정부에 칭송발언을 연발했다. 결국 정치권력에 편승해 종권이 유지되는 양태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조계종 총무원장선거가 늘 불안해 보이는 데는 그럴 만한 또다른 이유가 있다. 안정적으로 선거를 치른 경험이 일천하고, 선거법의 구속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조계종 종헌·종법 중 선거관리위원회법 17조에는 소청권에 관해 ‘총무원장선거를 제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총무원장선거에서 분쟁이 생기면 자체 법으로 규명할 방법이 없다는 얘기다. 결국 상대 후보가 부정선거라고 이의를 제기할 경우, 사회법의 판결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내적인 취약점은 정부의 개입을 자초했다.

    정부로부터 거액의 지원을 받는 것도 총무원의 자율성을 해치는 요인이었다. 총무원은 정부로부터 예산의 3배나 되는 370억원대의 지원금을 받아왔다. 지원의 명분은 ‘불교역사문화기념관’이라는 박물관 건립이지만, 신축 박물관에 총무원 사무실이 들어선다는 점에서 종단 안팎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총무원의 예산은 지방의 교구본사들이 납입하는 분담금이다. 종법에는 이 예산으로 총무원을 운영하도록 돼 있다. 총무원장은 세비인 분담금으로 총무원을 운영하고, 사찰 재산 감독권과 처분 승인권을 갖는다. 그런데 과다한 정부 지원금은 총무원과 교구본사간의 균형을 깨는 원인이 된다.

    이번 선거가 치열할 것으로 예상됐던 데는 이런 과거사의 경험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난마처럼 얽힌 채 잠복해 있던 조계종 안팎의 문제들이 선거를 통해 만천하에 드러날 것으로 예상됐다.

    안면사회(face to face)에서 한정된 간접선거를 치를 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표차가 커질 수 없다. 일단 각 교구본사는 후보자가 2사람인 경우 선거인단을 양쪽에 배분하여 ‘안전장치’를 마련한다. ‘안전판’을 확보한 상태에서 시작되므로 선거는 우열이 잘 가려지지 않고 팽팽하게 진행된다.

    이때 후보자는 선거인단을 놓고 득표수를 계산한다. 선거인단 선거는 패쇄적이라 득표 계산이 자의적일 수 있어 투표 직전까지도 각 후보들은 자신이 당연히 당선될 것이란 착시 현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따러서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폭력분규도 서슴지 않는 좋지 않은 전통이 이어져왔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는 선거인단의 자의적인 선택을 차단하는 방식을 취한다. 즉 사전에 특정 후보 지지를 표명한 선거인단을 선출하므로 선거인단 선출과정에서 이미 선거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정치 승려’가고‘부자 승려’ 떴다

    총무원장에 당선된 법장 스님

    조계종 간접선거는 일반적인 간접선거와도 다르다. 통상 간접선거에서 선거인단은 자신들을 뽑아준 투표권자의 의사를 투표에 반영하는 데 반해 조계종 간접선거에서는 선거인단이 개인 의사에 따라 투표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총무원장 후보자는 법정 선거기간인 10일 동안 이들 선거인단을 집중 공략한다. 상황이 이러니 매수에 따른 잡음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역대 선거에서 매수설이 그치지 않았던 것도 이런 구조 때문이었다.

    이런 제도하에서 치러지다 보니 이번 총무원장선거도 투표함이 열리기 전까지 양측 모두 승리를 장담했다. 전임 총무원장이 외형상 법장에서 종하로 지지후보를 바꾼 것도 자신의 지지로 종하 후보의 득표수가 당선권에 이를 것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예측을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 이른바 개미들의 밀착선거 운동이었다. 교구본사별로 득표 활동을 벌인 종하 후보는 패배하고 철저히 개별 공략에 치중한 법장 후보가 승리한 것이다.

    선거 결과는 조계종 내의 고정관념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특히 ‘문중(門中) 대결’이란 선거의 기본 틀이 깨진 점은 충격적이다. 종하 후보는 범어(梵魚) 문중을 대표했고, 법장 후보는 덕숭(德崇) 문중을 대표했다. 범어 문중은 부산 범어사를 중심으로 다수의 본사 사찰을 장악하고 있는 최대 문중이다. 반면 예산 수덕사를 중심으로 한 덕숭 문중은 전통만큼이나 세력이 크지 않아 총무원장 당선의 선을 넘기가 어려워 보였다.

    약소 문중 출신 총무원장의 출현으로 이번 선거는 문중이 선거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다는 점을 입증해줬다. 법장 후보 진영은 문중대결의 한계를 앞서 간파하고 개별 선거인단과 교구본사를 직접 공략했던 것이다. 법장 원장은 당선 기자회견에서 “특정 문중이나 교구의 지지에 그치지 않고 전국 교구의 고른 지지를 받아 당선된 것은 ‘함께하는 종단’을 표방한 종단 운영 방침이 지지를 받은 것”이라면서 “이번 선거 결과는 한국 불교의 변화와 도약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자평했다.

    그 동안 문중은 인력과 재력의 충원 구조 가운데 가장 완벽한 통로였다. 도제(徒弟)관계는 스님들 사이에 절대적 힘을 갖는 인연이다. 은사와 상좌의 관계가 설정되고, 교육 훈련 과정도 이 도제의 틀에서 이뤄지며, 차후 고등교육기관 수학도 도제관계의 경제적 지원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나아가 주지직을 비롯한 요직 인선도 철저하게 도제관계와 문중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이런 관행에 비추어, 문중의 틀을 넘어선 선거결과는 그 자체로도 파격이다.

    법장의 이색 선거공약

    문중은 단위 사찰보다 범위가 크고 권위도 높다. 문중이 전통과 권위에 바탕을 둔 반면, 총무원은 실리와 이권에 집중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연고 관계가 끊어진 것이 이번 선거의 또 다른 특징이다. 평소 문중과 관계없이 중앙 무대에서만 활동하던 이른바 정치승들이 총무원장선거 때만 문중에 귀속되던 편의 구조가 깨진 것이다. 실상 정치승들이 문중의 권위를 빌려 서울 인근이나 주요 도시 근처의 ‘알짜 사찰’을 사유화했고, 임기에 관계없이 평생 주지로 눌러앉는 경우가 허다했다. 정치승들은 이런 추세를 ‘문중의 세 확장’이라고 포장했지만 10여 년이 지나면서 허상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결국 이번 선거에서 잠재적 불만이 폭발했다는 것이다. 주지직 등 각종 소임을 순환제로 운영해오던 조계종의 전통이 정치승들에 의해 파기되면서 그에 대한 반발이 선거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 중앙 정치승들의 표밭 관리에 구멍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 내로라하는 유력 중진들이 연합 전선을 편 종하 후보의 낙선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정치승들은 순환제 보직임용 구조를 파기하고 보직을 독점하기 위해 일선 사찰을 떠나 총무원과 종회(의회)에서만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선거 때마다 문중을 적절히 이용하는 기술을 발휘해 기득권을 놓지 않았고, 문중과 총무원을 연결하는 고리역할을 맡아 권세를 누려왔다. 그러던 1998년 조계종 분규사태가 공권력에 의존해 해결되면서 총무원이 문중의 역할과 비중을 무시하는 행태가 잦아졌고, 결국 총무원은 일선 사찰과는 별개인 중앙 권력기구인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문중이 불교계 엘리트 충원구조를 독점하던 관행이 깨진 것은 총무원이 비대해졌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의 또 다른 특징은 여야가 따로 없었다는 점이다. 모두가 야당인 동시에 여당이었다. 상설 선거인단에 해당되는 종회의원 81명은 간접선거의 특성상 선거 판세를 좌우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들 사이에 구분이 불투명했다. 교구본사별 선거인단 240명은 수는 많지만 비상임 선거인단이라 세력화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이 와중에 정대 전임 원장의 권력 사유화에 대한 반감이 자연스레 선거인단 사이로 확산됐다. 종하 후보는 전통적인 ‘전임자 밀어주기 전략’을 활용한 반면, 법장 후보는 그 전략을 파괴하는 역선거 전략으로 승기를 잡았던 것이다. 법장 후보가 선거공약으로 ‘말사 주지 임명권 지방 본사로 이관’ ‘권위적 총무원을 일하는 총무원으로’ ‘중앙종무기관 축소’ 등의 구호를 내건 것도 그런 전략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법장 후보의 공약은 한마디로 ‘총무원의 권력 약화’로 요약된다. 총무원에 내는 분담금을 줄이고 총무원의 권한을 대폭 줄이겠다는 공약이 대표적 사례다. 법장 원장은 1년 내에 조계종 개혁 청사진을 내놓겠다고 약속했다. 흥미로운 것은 법장 원장의 그런 선거 전략이 사실은 서정대 원장 체제의 주역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이번 선거 결과는 ‘구 정치승의 퇴조’를 불러왔다. 아울러 신진 승려로의 세대교체도 자연스레 이뤄질 전망이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 문중의 영향력이 현저히 낮아지면서 그 힘의 공백을 신흥 ‘사찰 부호’들이 장악한 것은 두고두고 문제가 될 전망이다. 관광 사찰로 부와 지위를 누리고 있는 P사와 S사가 대표적 사찰 부호들이다. 이들 사찰은 인적 기반이 취약해 총림에 비해 지위가 낮았으나, 이번 선거에서 각각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함으로써 지위를 굳혔다.

    유동자산의 보고로 변질된 총무원

    과거 총무원은 교구본사의 세입비용에 의해 유지되는 조그마한 연합체에 불과했다. 영남권의 교구본사보다 더 적은 몇십 억원대 예산 규모에 사회적 영향력도 미미했다.

    그러나 총무원이 정치권을 대신해 불교계의 표밭관리를 할 수 있다는 점이 입증되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전두환 정권과 연결된 서의현(徐義玄) 총무원장 체제를 시작으로 총무원은 예산 규모의 몇 배에 이르는 유동 자산의 보고(寶庫)로 변질돼버렸다.

    1980년대 중반 중앙권력이 개별 사찰보다는 총무원을 밀거래 파트너로 택했다. 당시 밀거래는 전통적인 ‘불사(佛事)’라는 이름으로 이뤄졌다. 서의현 총무원장 시절, 총무원의 재력은 비공식 집계로는 1000억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었다. 당시 총무원 연간 예산은 60억원대였다.

    서의현 체제는 서원장의 3선에 대한 집착으로 대형 분규를 초래했고 1994년 무너졌다. 이를 계기로 ‘불교개혁’의 요구가 강해졌고 총무원장의 권한 분산과 총무원의 재정 투명성 확보가 개혁의 최대 과제로 떠올랐다. 물론 총무원장 직선제에 대한 요구도 높았으나, 보수파의 공세에 밀려 간선제로 절충됐다.

    서의현 전 원장은 조계종에서 멸빈(승적 영구박탈 중징계, 일종의 사형에 해당)을 당하고도 여전히 막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지금도 새 종권이 들어설 때마다 그의 ‘사면복권’이 거론될 정도이며 영남권에서의 요직 인선에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서의현 체제는 문중과 연관이 없이 독자 계보를 형성하고 있다.

    서의현파가 봉쇄된 상태에서 월주-월탄의 총무원장 선거전이 벌어졌다. 같은 문중 사형사제(사회적으로는 사촌 형제간)가 조계종의 개혁과 보수를 대표해 치열한 선거전을 벌였는데 결국 근소한 표차(22표)로 월주 스님이 승리해 총무원장에 당선됐다.

    이 선거는 조계종 사상 초유의 공개 선거로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다행히 두 후보 진영이 ‘결과 승복’이라는 협정을 준수해서 별 탈 없이 마무리됐다. 그렇지만 선거는 치열했다. 사활이 걸린 싸움이었다.

    치열한 선거전과 근소한 표차는 두고두고 불안의 씨앗이 된다. 월주 원장 체제 말미인 1998년 총무원장 선거과정에서 다시 폭력 분규가 발생한 것은 그런 내부의 갈등이 잠복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 갈등 요인이 월주 체제에서 시행된 인사탕평책이었다. 월주 원장 초기에 알짜 보직인 조계사 주지직 및 불교신문 사장 등을, 겸직 금지 종헌을 어겨가며 반대파인 보수파에게 넘겨준 것이 다음 선거에서 큰 화근이 된다. 월주 원장의 재선 시비 과정에서 ‘폭력 점거파’의 선두에 섰던 이가 현직 조계사 주지였던 것이다. 총무원장의 코밑에서 측근이 반란을 일으킨 격이다. 승려들의 총무원 청사 점거와 그 과정의 격렬한 전투 장면이 외신을 탔고 한국 불교는 세계적 웃음거리가 됐다.

    총무원 고수파들의 ‘서로 밀어주기’

    이 사태는 개혁파 자력으로 수습하지 못하고 경찰력을 동원하여 반대파를 제거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자체 선거 역시 선거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반대파의 소송 제기로 법원이 재선거를 명령하는 사태에 이른다. 법원의 판결에 따라 ‘점거파’와 ‘총무원 고수파’가 일희일비하고, 때에 따라 서로 공권력의 개입을 비난하다가도 상황이 바뀌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돌아서서 공권력의 개입을 요구하는 이중성을 보여주면서 혼돈을 거듭한다.

    자생력을 거의 잃은 듯하던 총무원이 회생의 방안으로 내세운 것이 ‘총무원 고수파’ 간의 서로 밀어주기다. 1999년 분규 해결과정에서 선보인 중앙 정치승들의 새 전략인데, ‘점거파’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소수파간의 연대가 큰 효력을 보였다. 이런 전략으로 그후 총무원장선거에서 연속적으로 총무원 고수파가 승기를 잡게 된다.

    월주-고산-정대 총무원장 체제로 이어지는 ‘전임자 지원 체제’는 새로운 조계종 선거의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고산 원장이나 정대 원장 모두가 당선 전에는 소수파에 불과했으나 전임자 지원전략에 의해 다수파를 누르고 총무원을 장악하며 새로운 다수파로 급성장했다.

    그러나 이런 연승체제는 지나친 권력 독점이라는 폐해를 낳았다. 정대 총무원장 체제의 내홍(內訌)은 이같은 권력독점에서 싹텄다. 정대 원장 체제는 법원 판결에 의한 재선거로 탄생한 권력이었다. 총무원장의 임기는 4년, 연임이 가능하지만 정대 원장의 임기는 전임자의 잔여 임기인 3년에 불과했다. 그런데 동국대 이사장이던 오녹원 스님이 지난해 12월 사임하면서 정대 원장을 후임 이사장에 지명하자 분열은 본격화됐다. 1994년 마련된 개혁 종헌에는 총무원장의 겸직을 금하고 있다. 따라서 정대 원장이 동국대 이사장이 되려면 총무원장직을 내놓아야 했다.

    올 1월 동국대 이사회에서 이사장으로 선출된 정대 총무원장에게 ‘겸직 금지 종헌’을 근거로 사퇴 압력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관심은 정대 원장의 처신에 모아졌다. 그는 1월17일 ‘전격 사퇴’로 맞섰다. 그의 사퇴로 ‘총무원장 유고’가 빚어지고 ‘30일 이내 원장 재선거’를 치러야 하는 비상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갑자기 총무원장 선거가 치러지면서 예의 ‘전임자 밀어주기 전략’이 여전히 위력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됐다. 갑작스럽게 닥친 총무원장 궐위사태인 탓에 전임자가 누구를 미느냐가 선거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30일이란 짧은 일정 안에 후보들이 과반수 선거인단을 자력으로 확보하지 못하면 자칫 총무원 체제 자체가 불안정해져 정대 원장이 재등극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 와중에 중앙종회 내부도 혼란스러웠다. ‘청림회’ ‘보림회’ ‘육화회’ ‘일여회’ ‘무당파’ 등 중앙종회의 5개 계파들은 예기치 않은 선거상황이 닥치자 방향을 잡지 못한 채 분열을 거듭했다.

    정대 원장 체제에서 총무원의 여당 역할을 하던 계파는 청림회와 보림회였다. 하지만 이들 계파마저도 총무원장의 권력 사유화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고 이 때문에 선거국면에 돌입하자마자 내부분열 양상을 드러냈다. 역설적으로 이들의 분열은 선거 국면을 빠르게 정착시켜갔다. 처음에는 혼돈이었으나 권력 창출이라는 목표가 분명해지면서 계파간 재결속에 속도가 붙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그간의 ‘밀어주기 전략’ 탓에 총무원 핵심이 보수화되면서 이에 반발한 소외 계층이 늘어났고 이들을 중심으로 예기치 않은 새바람이 일어났던 것이다.

    얼마 전 법장 총무원장은 흥미로운 공약을 발표했다. 율법에 밝은 스님을 총무원 간부로 기용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종법에 의해 운용되는 총무원이 마치 조계종의 뿌리인 율법을 회피하는 치외법권(治外法權)지역으로 인식돼온 그간의 풍조를 겨냥한 것이다. 총무원장 이하 간부 승려나 특히 종회의원은 그 동안 율법에 적용되지 않는 초월적 존재로 인식돼왔다. 새 총무원장은 이를 바로잡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율법이 바로 서야 조계종이 산다”

    율법은 승려 개인과 승단 전체의 규율을 관장하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이제껏 산속 사찰에 적용될 뿐 서울의 총무원은 세속을 상대로 한 행정업무 장소라서 일시적으로 면제해주는 풍조가 있었다.

    이런 편법을 단속할 근거는 종법에도 있다. 조계종법의 모법(母法)인 승려법이 그것이다. 그러나 최근까지 승려법은 공공연히 무시돼왔다. 가령 지난해 중앙종회에서 출가 연령을 40세 미만으로 제한하는 교육법을 통과시켜 여론의 지탄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때도 당연히 승려법을 개정해야 했겠지만 그러지 않고 출가자가 기본적으로 거쳐야 될 행자교육원 입교 연령을 제한하는 교육법을 개정하는 편법을 썼다. 모법인 승려법을 개정하지 않고 출가 연령을 제한하는 편법은 중앙 정치 무대에서 승려법이 무력화됐다는 방증이다.

    앞으로 율법이 총무원 전반에 적용되면 상당한 변화가 닥칠 전망이다. 이에 앞서 승려법의 부활이 시급하다. 총무원일수록 승려법의 적용이 엄격해야 지방 사찰에 대한 감독권이 힘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승려법은 행정승(사판승)으로서 지켜야 할 율법을 최소화한 법규이다. 총무원장 감독권의 근원이 예산이나 재력이 아니라 율법이라면 조계종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율법이 강제 구속력을 갖추려면 중앙에서 승려법을 모법으로 존중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승려법은 사유재산을 엄격히 금지한다. 종단 재산을 사유화하면 승적을 박탈하고 개인재산이 있으면 공권정지를 한다. 개인 집(속가)에서 잠을 자거나 속복(일반 의복)을 입어도 중징계하며, 고의로 종법을 위배해도 징계를 한다. 징계를 받으면 총무원의 간부직을 맡을 수 없다. 주지가 친척을 사찰 직원으로 채용해도 징계를 받을 정도로 사유재산제를 엄격하게 금하는 것이 승려법의 기본골격이다. 법이 바로 서면 공유재산이 조계종의 정체성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원래 승려법이 먼저 만들어지고 나중에 조계종 종헌이 만들어졌지만, 현행 종헌·종법상에는 승려법이 뒤로 밀려 현실에서는 거의 적용되지 않는다. 총무원장선거나 중앙종회의원선거에서도 승려법이 우선 적용돼야 함에도 오히려 묵살됐다. 이 때문에 조계종의 선거는 늘 분규로 얼룩졌던 것이다.

    총무원 간부나 종회의원들이 먼저 승려법 적용 대상이 돼야 한다. 그러면 앞으로 총무원장 출마 자격에서부터 승려법이 기초 법령이 될 것이다.

    갈 길은 멀고도 험하다. 법장 체제 총무원 앞에 닥친 과제는 바로 법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법장 원장의 법명처럼 법이 바로 서는 총무원이 될까. 불자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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