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호

北이광수·南 이종갑, 두 戰士의 엇갈린 운명

‘동해안 무장공비 소탕작전’ 그후 7년北

  • 글: 이형삼 hans@donga.com

    입력2003-03-24 18:24: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이광수 : 전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3기지 22전대 잠수함 조타수.
    • 1996년 동해안으로 침투했다 생포.
    • 이종갑 : 전 대한민국 육군 3군단 정보처 전투정보장교.
    • 1996년 동해안 침투 간첩 소탕작전 중 총상.
    • 이광수 : 현 대한민국 해군 군무원. 2003년 경남대 졸업, 대학원 진학.
    • 이종갑 : 현 대한민국 상이군경회 회원. 2003년 현재 일정한 직업 없음.
    北이광수·南 이종갑, 두 戰士의 엇갈린 운명

    이광수씨

    지난 2월18일 아침, 조간신문을 뒤적이던 이종갑(李鍾甲·46)씨는 한 장의 인물 사진에 시선이 멈췄다. 부인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는 남자. 어딘지 낯익은 얼굴이다. 기사의 제목은 이랬다. ‘잠수함 간첩 이광수씨, 전향 7년 만에 학사모’.

    “1996년 9월 북한 잠수함의 동해안 침투사건 당시 무장간첩 26명 중 유일하게 생포됐다 전향한 이광수(李光洙·38)씨가 경남대에서 학사과정 졸업장을 받는다. 경남대는 ‘1999년 법행정학부(야간)에 입학한 이씨가 행정학 전공 과정을 모두 이수했다’고 밝혔다. 이씨는 3월부터 이 대학 행정대학원 안보정치과에 진학, 학업을 계속한다. 그는 ‘공부를 시작한 만큼 북한학 박사학위에도 도전해 대학 강단에 서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종갑씨는 왼팔에 갑작스런 통증을 느꼈다. 잊을 만하면 이렇게 한번씩 쑤시거나 저려온다. 오른손으로 왼팔을 살짝 주물러본다. 팔은 한 손으로 감싸질 만큼 가늘어져 있다.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되살아났다.

    숲 속의 조준사격

    1996년 11월5일 새벽 4시30분경,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3리 연화교 계곡 자연휴양림 매표소. 무장공비 소탕작전에 투입돼 밤새 매복 근무중이던 육군 불사조 부대 병사가 산에서 차도로 내려오는 두 명의 괴한을 발견했다. “누구냐”며 수화를 건네자 암구호 대신 “3중대 중사다”라는 대답이 들렸다.



    그러나 병사는 ‘찰칵’ 하는 소총 장전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순간 그는 “적이다”고 외치면서 함께 매복하고 있던 동료와 방아쇠를 당겼다. 두 괴한은 수류탄을 던지며 대응사격을 하다 한 명이 총에 맞자 다른 한 명이 부축해 숲 속으로 달아났다. 병사들은 사격을 계속했지만, 짙은 어둠 때문에 괴한들의 행방은 이내 묘연해졌다. 아군은 경계를 강화하면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北이광수·南 이종갑, 두 戰士의 엇갈린 운명

    이종갑씨

    그 무렵 3군단 정보처 전투정보장교인 이종갑 소령은 군단 작전사령부에서 군단장에게 작전상황을 브리핑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때 “용대리에 공비 잔당이 나타났다”는 다급한 전갈이 왔다. 이소령은 군단 기무부대장 오영안 대령, 특공연대 중대장 서형원 대위 등과 함께 합동신문조를 구성, 현장으로 급파됐다.

    9월18일 무장간첩 26명을 태운 북한 잠수함이 강원도 강릉 앞바다에서 좌초한 채 발견된 지 49일째 되는 날이었다. 26명 가운데 한 명인 이광수씨는 잠수정 발견 당일 민가에 숨어 있다 생포됐고, 그후 11명은 자살했으며 11명은 사살됐다. 남은 3명 중 2명이 용대리에 나타난 것이다.

    합동신문조는 현장 주변을 살피며 예상 도주로와 탄피 흔적, 대공 용의점(괴한들이 탈영병일 가능성도 있었다) 등을 조사했다. 아침 7시20분경, 오대령 등이 연화교 위를 수색하고 있을 때였다. “뻥!” 하는 총성과 함께 오대령이 힘없이 쓰러졌다. 가슴에 총을 맞은 오대령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황급히 자세를 낮추고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찾는 순간 또 한 발의 총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이소령이 쓰러졌다. 왼팔이 마비되기라도 한 듯 아무 감각이 없었다. 지프 뒤로 몸을 피했다. 서대위가 피를 흘리는 이소령에게 달려와서는 자신의 야전상의를 벗어 팔을 동여맸다.

    그때 다리 난간에 있던 한 병사가 총을 맞고 비명을 질렀다. 서대위는 이소령에게 “엄호사격을 해달라”고 부탁하고 병사 쪽으로 기어갔다. 이소령이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총을 쏘는 동안 산에서 날아온 또 한 발의 총알이 서대위의 급소에 명중했다.

    새벽 교전 후 도주한 줄 알았던 간첩들은 숲 속에 그대로 숨어 있었다. 한 명이 총상을 입어 포위망을 못 뚫게 되자 최후의 일전을 각오했던 것. 김정일이 “1개 군단과도 못 바꾼다”고 한 정예 침투조였다. 그들은 ‘독 안에 든 쥐’ 신세임에도 자포자기해서 마구잡이로 총을 쏘지 않았다. 아군을 향해 지휘관부터 정확하게 한 발씩 조준사격을 했다.

    이소령에게도 M16 소총을 가슴에 정조준하고 쐈지만, 그가 순간적으로 몸을 조금 트는 바람에 치명상을 면했다. 총알은 왼쪽 상박의 뒤쪽으로 날아들어 관통했다. 총을 맞은 부위는 상처가 크지 않았으나, 총알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뚫고 나가는 바람에 팔 앞쪽으로는 뼈와 살이 거의 다 뜯겨나갔다. 이소령은 팔꿈치께에도 두 발을 더 맞았다. 한 발은 언제 맞았는지도 모르고 맞았고, 또 한 발은 앰뷸런스로 후송될 때 차체를 뚫고 들어온 총알이었다.

    두 번째 교전이 시작된 지 세 시간 만인 10시20분경, 무장간첩들은 뒷산으로 우회해 덮친 특전단 대원들에게 사살됐다. 49일에 걸친 대간첩 작전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간첩 잔당 3명 중 나머지 한 명의 소재가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시체를 찾지 못했거나 이미 월북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교전 현장을 빠져나온 이소령은 원통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고 원주병원으로 옮겨졌다. 뼈가 없어 흐늘거리는 팔에 두 개의 금속 지지대를 달아 나사로 고정하고, 뒤틀린 뼈를 어렵사리 끼워맞춘 뒤 서울 수도통합병원으로 후송됐다. 원주에서 기상 여건이 나빠 헬기가 뜨지 못하고 있는 동안 이소령의 머릿 속엔 지난 17년간의 군 생활이 무성 영화 돌리듯 스쳐 지나갔다.

    北이광수·南 이종갑, 두 戰士의 엇갈린 운명

    1996년 11월5일 용대리 교전 현장에서 사살된 무장간첩 잔당 2명.

    그는 ‘인간 병기(兵器)’였다. 임관한 이래 안 받아본 특수훈련이 없다. 특전사에서 낙하산 4주 기본훈련만 받아도 ‘특전요원’으로 불리지만, 이소령은 기본훈련은 물론, 강하조장(降下組長·Jump Master) 훈련, 고공(高空) 훈련, 해군정보부대 수중폭파조(UDU) 훈련 등 각종 특수훈련을 다 거쳤다. 한밤중에 강원도 외진 산골짜기에 혼자 떨어뜨려놓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부대로 복귀하는 훈련을 밥 먹듯 해서 강원도 일대의 산세는 손바닥 보듯 훤했다.

    정보부대 훈련교관으로 유사시 북한에 침투해 특수작전을 수행할 요원들을 교육시키기도 했다. 그런 자신이 남한에 ‘침투’해 ‘특수작전’을 수행하려던 북한 ‘요원’들에게 당했으니 운명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종갑 소령은 수도통합병원으로 실려와 수술을 받았다. 병원측은 이소령의 부상 정도가 그리 심각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골반뼈를 조금 잘라내 으깨진 팔뼈 부위에 이식하면 뼈에서 진이 나와 자연스레 위 아래가 연결될 것으로 봤다.

    그러나 경과는 좋지 않았다. 글자 그대로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아내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뼈는 붙지 않았다. 그 무렵엔 치료를 받는 것보다 X레이 촬영이 더 고통스러웠다. ‘이번에는 붙었겠지’ 하며 잔뜩 기대를 품고 사진을 찍어보면 결과는 늘 마찬가지였던 것.

    그렇게 7개월을 허비했다. 그 기간 내내 왼팔을 고정시켜놓고 지냈다. 목욕은 팔에 비닐을 덮어씌우고 했다. 그는 민간 병원에서 재수술을 받게 해달라고 몇 번이나 사정한 끝에 겨우 서울 이대목동병원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이소령은 군 병원보다 오히려 민간 병원에서 ‘상이용사’ 대우를 제대로 받았다. 이대병원 정형외과장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이렇게 다쳤으니 전의료진이 최선을 다해 치료하겠다”고 약속했다. “뼈뿐만 아니라 피부와 근육도 많이 상해서 성형 수술을 함께 받는 게 낫겠다”며 성형외과에도 협조를 구했다. 수술 일정이 빨리 잡히지 않자 “저런 분을 위한 일인데, 왜 이렇게 일 처리가 늦냐”며 자기 일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채근했다.

    이소령은 16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다. 오른쪽 다리뼈 일부를 잘라서 팔에 이식하고, 뼈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혈관 일부도 잘라 이식했다. 마취를 너무 오래 할 수 없어 일단 수술을 끝낸 다음, 이튿날 아침 왼쪽 허벅지 두 부위에서 살을 떼내 팔에 갖다붙이는 수술을 다시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팔은 빠른 회복세로 접어들었다. ‘좀더 일찍 이런 수술을 받았으면 결과가 훨씬 좋았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을 떨칠 수 없었지만, 일곱 달 만에 왼팔을 ‘내 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기쁨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치료비 일부 본인 부담

    그러나 이소령은 군인이 전투에 참가해 공상(公傷)을 입더라도 국가가 치료비를 다 지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처음 알았다. 그는 이대병원에서 두 달 남짓 입원했는데, 군인연금법은 공상으로 인한 요양 기간을 20일밖에 적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외부 병원에서 피부 이식 등 성형 치료를 받을 경우에는 비용을 지원받을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물론 그런 규정도 이유가 있고 필요해서 만들었겠지만, 그렇다고 ‘예외’와 ‘참작’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결국 그는 800여 만원에 이르는 병원비 가운데 일부를 자신이 부담했다. 국가가 지원하는 부분도 일시불로 지급되지 않았고, 정산 절차도 복잡했다. 그는 일단 자비로 병원비를 치른 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의료보험공단 등으로 뛰어다니며 일일이 서류를 작성하고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고 나면 은행 계좌로 몇푼씩 입금되곤 했다. 그나마 그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주위 사람들이 요로에 호소한 덕분이었다.

    사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든 것은 수도통합병원에 있을 때부터였다. 용대리 교전 이틀 후인 1996년 11월7일, 수도통합병원에서 오영안 대령 등 전사자 3인에 대한 합동영결식이 거행됐다. 그런데 행사 직전에 원주병원에서 막 수술을 받고 입원중이던 부상자 3명을 통합병원으로 급히 이송했다. 영결식에 참석할 고위 인사들이 부상자들을 한 장소에서 ‘위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 부상자 중 한 명은 영결식이 끝난 후 다시 원주병원으로 데려갔다.

    北이광수·南 이종갑, 두 戰士의 엇갈린 운명

    이종갑씨는 이들이 쏜 총에 맞았다.이종갑씨는 지금도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국방부 장관이 병원을 찾았을 때는 국방부 관계자가 부상자들에게 “러시아 방문을 마치자마자 이곳부터 찾아주신 장관님께 박수를 보내드리자”고 했다. “피흘려 싸운 장병들의 쾌유를 빌며 박수를 보내자”는 사람은 없었다.

    부상자들은 대부분 훈장도 받지 못했다. 무장공비 소탕작전과 관련, 40여 명이 훈장을 받고, 20여 명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소령은 참모총장 표창을 받았다. 그는 “훈장 수여를 위한 실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훈장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못 받고, 작전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엉뚱한 사람들이 훈장을 받기도 했다”고 말한다. 부상자들이 이에 대해 항의하자 당국은 “재조사를 하겠다”고 했지만 감감 무소식이었다.

    용대리 교전 현장에는 장병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고, 이곳에선 가끔씩 군이 주관하는 기념행사가 열린다. 이소령은 처음 한동안은 행사에 참석했지만 이내 발길을 끊었다. ‘들러리’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념비에 부상자들의 이름은 없다. 이소령은 아들과 함께 이곳을 찾고 싶었지만 아무 흔적도 없으니 머쓱할 것만 같아 생각을 바꿨다.

    군 당국은 행사에 참석한 부상자들이 헌화할 때 낄 장갑 하나 준비하지 않아 남이 끼고 있는 장갑을 허둥지둥 빌려 껴야 했다. 통합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희생자 추모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어렵사리 현장까지 찾아갔지만, 군은 팔을 꼼짝하지 못하는 그를 위해 앰뷸런스 한 대 보내주지 않았다.

    “우리가 패잔병인가”

    당시 무장공비 소탕작전이 49일간이나 계속되면서 국민들을 불안케 했던 데다, 용대리 전투에서는 잔당 두 명과 싸우면서 아군 세 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하는 등 피해가 컸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우리 군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기도 했다. 대간첩 작전이 끝난 11월5일, 러시아를 방문중이던 김동진 국방부 장관은 “공비 침투 및 소탕 과정에서 과오가 드러난 지휘관에 대해서는 전역조치는 물론, 군법회의에 회부해 사법처리할 방침”이라며 엄포를 놓았다. 당국이 부상자들에게 냉정하리 만큼 무관심했던 것도 이런 인식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특수전 전문가인 이소령의 견해는 다르다. 그는 “대(對) 공비침투 작전에서는 아군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더 크게 마련”이라고 했다. 공비에게는 모두가 적이니 ‘카키색’만 보이면 총질을 해도 되지만, 우리 군에겐 표적이 단 둘밖에 없으므로 수동적, 수세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는 “전상자(戰傷者)들을 패잔병쯤으로 백안시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거기에 놀러 갔다 다친 게 아니다. 우리는 군단장의 명령을 받고 작전에 투입됐고, 전투가 벌어지자 물러서지 않고 싸웠다. 불가피하게 피해가 컸으나 그날 우리가 죽고 다치면서 잔당을 소탕했기에 작전이 종료됐다. 물론 작전 기간 동안 제 임무를 다하지 못한 지휘관도 있었겠지만, 몸을 던져 싸운 장병들을 다 그렇게 매도할 수는 없다.”

    이소령은 작전 이듬해인 1997년에 진급심사 대상이었다. 주변에선 “적과 싸우다 공상을 입었으니 진급은 확실하다”고들 했다. 보병학교 고등군사반 교관 시절 80여 명의 교관 중 최우수 교관으로 선발되기도 해 진급 점수도 높았다. 그러나 그는 진급심사에서 탈락했다. 반면 공비 소탕작전으로 훈장을 받은 이들은 상당수가 진급했다.

    1997년 11월30일 이소령은 전역했다. 팔이 불편해도 행정장교로 근무하는 길은 있었지만, 18년 동안 ‘전투 연습’만 해온 자신에겐 도무지 적성에 맞을 것 같지 않았다. 군단장은 그가 전역 후 군무원으로 일할 수 있게 하려고 신경을 써줬다. 그러나 이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예비역 소령이면 4, 5급 군무원으로 가는 게 보통인데, 빈 자리는 7, 8급밖에 없었다.

    아이들도 떠올렸다. 그때껏 스무 차례 가까이 이사를 다니는 통에 두 아이는 학교 생활을 정상적으로 하지 못했다. 그가 부상당했을 때 맏딸은 고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제 엄마와 함께 춘천으로 보내 고등학교를 다니게 할 요량이었지만, 아내가 그를 수발하게 되는 바람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아비로서 아이들 공부를 도와주진 못할 망정 방해하진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전역 결심을 굳히게 한 것은 더 이상 군에서 희망을 찾기 어렵다는 생각이었다. 전상으로 치료받고 있는 지금도 군이 날 이렇게 대우하는데, 시간이 더 지나면 과연 나를 어떻게 보겠는가. 성치 않은 몸으로 군량만 축낸다고 눈총을 주지나 않을까. 그는 “토끼 사냥이 끝나면 필요 없어진 개는 죽게 되고, 고기를 잡고 나면 고기잡이에 썼던 통발은 잊게 된다”는 내용의 ‘퇴역사’를 준비했지만, 끝내 꺼내 읽지는 못했다.

    이소령은 사회에 나가면 취업을 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믿었다. 젊고 건강한데다, 군에 있을 때도 자기 계발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관생도 시절부터 어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군 전략정보 과정을 통해 1년 남짓 중국어를 배운 후 방송통신대 중문학과에 편입해 학위를 땄다. 방송통신대 영문학과에도 입학해 졸업학점을 이수했다. 고된 몸을 추스려가며 토요일엔 6시간, 일요일엔 10시간씩 공부한 결과였다. 더욱이 보훈 등급을 받은 상이용사라면 취업에서 어느 정도 특혜를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순진한 생각이었다. 군문 밖의 현실은 너무도 차가웠다. 국가보훈처로 찾아가 취업을 부탁하니 이력서를 훑어본 직원은 “이 경력으로는 경비직밖에 못 구한다”고 잘라 말했다. 알음알음으로 정수기 세일즈, 다단계 판매 등에 발을 디밀었지만, 주위 친지들에게 자꾸만 부담을 주게 되어 오래 할 짓이 못됐다.

    몇 달을 문턱이 닳도록 쫓아다니자 보훈처는 화재보험협회와 주택건설협회 취업을 알선해줬다. 당시만 해도 보훈처는 이런 단체에 거의 강제로 보훈 대상자의 취업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두 협회를 찾아가니 오히려 그쪽에서 사정을 했다. “지금은 우리도 사람을 줄여야 할 판이니 좀 봐달라”며 죽는 소리를 했다.

    그 무렵은 외환위기 직후였다. 멀쩡히 직장을 다니고 있는 사람도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몰라 숨을 죽이던 시기였다. 결국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전역한 지 1년 후에야 친구의 소개로 생명보험설계사 자리를 얻어 ‘사무실’로 출퇴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은 ‘민폐’를 끼칠 수밖에 없는 일이라 넉 달 만에 그만뒀다. 몇몇 안면 있는 이들을 찾아가 보험을 팔고 나니 더는 팔 데도 없었다.

    그후 그의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이들이 다리를 놔준 덕분에 그는 상이군경회 서울시지부와 서울시립 상이군경 복지관에서 각각 1년 남짓씩 일했다. 그런데 정부가 재정을 지원하는 이들 단체에 근무하면 매월 지급되는 연금이 절반으로 깎였다. 봉급을 150만원쯤 받았는데 연금이 반밖에 안 나오니 사실상 ‘자원봉사’에 가까웠다. 더 오래 다닐 수가 없었다.

    이씨는 전역한 후 5년여 동안 10개 가까운 직업을 전전했다. 지난해 9월까지는 친척이 운영하는 전기공사 하청업체 관리 업무를 돌봐줬다. 그가 거쳐온 직장 중에 정부가 팔을 걷고 나서서 구해준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물론 밥을 굶거나 아이들을 학교에 못 보내는 것은 아니다. 그는 매달 두 가지 연금을 받는다. 올들어 연금이 꽤 많이 올라 군인연금이 150만원, 상이연금이 90만원쯤 된다. 아이들 학자금도 지원받고, 자동차세며 고속도로 통행료도 면제된다. 월 240만원 수입이면 네 식구가 먹고 살 수는 있다. 여기에다 아내가 새벽에 신문을 배달해 번 돈 30만원쯤을 생계에 보탠다(그는 “아내에게 제발 그만두라고 말렸지만,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지만 젊은 가장에겐 직장이 필요하다. 한창 나이에 사회활동을 하지 못하면 눈에 띄게 빠른 속도로 무기력해진다. 그런 남편과 아버지를 접하는 가족들도 고통스럽긴 마찬가지다. 이소령은 “상이용사들에겐 한(恨)이 많다. 일을 하는 동안은 한을 잊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더욱 커진다”고 한다.

    1996년 대간첩 작전 이후 이종갑씨가 살아온 삶은 당시 생포된 이광수씨의 삶과 여러 모로 대비된다. 9월18일 생포된 직후 “광어회가 먹고 싶다”고 했던 이광수씨는 전향 의사와 함께 대한민국 해군에서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는 이종갑씨가 전역하던 해인 1997년 5급 군무원으로 특채됐고, 이후 해군 정신교육 교관으로 근무해 왔다. 1999년에는 해군 교육사령관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해 해군의 지원으로 대학에 진학, 지난 2월 학사모를 썼다.

    이종갑씨는 “이광수씨가 한때 아군에게 총을 겨눴던 사람이지만, 전향한 후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대한민국에 기여했기 때문에 정부가 그를 배려해준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다”고 말한다. 다만 형평성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게 이씨의 생각이다. 이광수씨에게 그만한 배려를 해준다면 그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국가에 기여한 우리 상이용사들에게도 공(功)에 걸맞은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나마 4급 상이용사라 연금이라도 빠듯하지 않게 받지만, 상이용사 최하 등급인 7급 중엔 월 20만원도 못받는 이들이 허다하다. 7급만 해도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 후세들의 ‘산 교육’을 위해서라도 상이용사들을 따뜻하게 챙겨야 한다. ‘임무를 수행하다 다쳐 군복을 벗더라도 국가가 나를 보호해준다’는 믿음이 있어야 군인이 전투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싸울 것 아닌가.

    미국은 50년 전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유해라도 찾아가려고 수억달러를 쓴다. 미국엔 상이용사 출신의 정치인, 주지사들이 숱하다. 그에 비해 우리 상이군인들 중엔 상이군경 등록을 하지 않은 채 과거를 숨기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이종갑씨는 이광수씨를 만난 적이 있다. 6년 전 통합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이씨가 병원으로 찾아와 부상자들을 위문했던 것. 이광수씨는 이종갑씨에게 “미안하다”며 악수를 청했고, 이종갑씨는 “미안할 것 없다. 건강은 괜찮냐”며 담담하게 안부를 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이광수씨에게 전혀 적대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두 사람 다 군인이었고, 군인들은 결코 개인 감정으로 싸우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사한 오영안 대령의 두 아들-고교생과 대학생쯤으로 보였는데-은 그가 건넨 손을 끝내 외면했다.

    이종갑씨는 여전히 왼팔이 불편하다. 왼손 손가락은 앞으로 굽힐 수는 있어도 신경이 많이 죽어 뒤로 제끼지는 못한다. 손가락도 한꺼번에 여러 개를 구부렸다 폈다 할 수 없다. 하나씩만 움직여야 하니 컴퓨터를 쓰거나 할 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군 사기 떨어뜨리지 않기를”

    팔 힘은 못 쓰고 손가락 힘만 쓰기 때문에 무거운 물건을 들지도 못한다. 어떤 부위는 살이 없어 만지면 바로 뼈에 닿는다. 오른팔이 왼팔보다 1.5배쯤 더 굵다. 누군가가 팔을 툭 치며 인사를 건네면 고통으로 표정이 일그러져 사람들을 당황케 하기도 한다. 팔꿈치에는 아직도 총알 하나가 박혀 있다.

    “수영을 참 좋아하는데 외상(外傷) 때문에 옷을 벗기가 민망해 수영장에 가본 지 오래다. 다친 팔뿐 아니라 뼈와 피부를 떼낸 허벅지와 종아리, 골반 등 곳곳이 흉터투성이라 목욕탕에만 가도 힐끗힐끗 쳐다보는 사람이 많다. 비용 때문에 성형수술은 엄두도 못낸다.”

    이씨는 “내가 너무 우울한 얘기만 한 것 같다”며 “희망을 갖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써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전공을 살려 최근 중국어 교재 전문 출판사인 (주)아이차이나21(www.ichina21. com)과 중국어 교재 총판 계약을 했다. 좋아하는 어학 공부를 계속하면서 할 수 있는 사업이고, 마침 향우회 회장이 사무실을 무료로 빌려주겠다고 해서 용기를 냈다. 고교 1학년인 아들과 함께 공부를 시작해 아들과 같이 대학 입시를 치를 계획도 갖고 있다. 이제는 작전에 투입돼 국가에 공을 세우는 아버지를 보여줄 수 없게 됐으니 자식에게 ‘공부하는 아버지’를 보여주고 싶다.

    그는 상이군경회 서울강서지구회에서 봉사직인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데, 본업인 상이군경 권익 보호는 물론, 환경 보호, 거리 질서 정리, 불우 회원 및 장애인 돕기 등 대외 봉사활동도 활발하게 벌여 상이용사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꿔놓고자 한다.

    이씨는 군 후배나 동기들에게 좀처럼 자신의 과거 얘기를 하지 않는다. 행여 그들의 사기를 떨어뜨리지나 않을까 우려해서다. 그는 “오늘 내 얘기를 털어놓은 것은, 후배들이 아무 걱정 없이 성실히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끔 상이용사들에 대한 취업지원 및 복지 제도가 개선됐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라며 “그들이 실망하거나 용기를 잃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기사를 써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