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호

“올림픽 통해 한국 알리라”던 이건희 가르침이 나를 이끌었다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 이건희 회장 탁구교사였던 박성인 전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의 증언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4-09-0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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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 도쿄 아시안게임 탁구 동메달리스트

    • 이건희 회장 가르쳐 보니, 민첩하고 승부욕 남달라

    • 한국 탁구 위해 1978년 제일모직 탁구단 창단

    • “중국 나오는 대회 나가라, 쫄지 말고 10년 내다보라”

    • 88 서울올림픽 탁구 금 2개, 이건희 회장 10년 지원 덕

    • “기업 경영, 정치, 스포츠의 본질은 모두 같다”

    • 어려울수록 공격적으로 변신하는 ‘기회 선점 경영’ 필요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선수단장으로 활동하며 한국 빙상의 새 역사를 쓴 박성인 전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 그는 “이건희 회장과의 만남이 운명을 바꿨다”고 말한다. [박해윤 기자]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선수단장으로 활동하며 한국 빙상의 새 역사를 쓴 박성인 전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 그는 “이건희 회장과의 만남이 운명을 바꿨다”고 말한다. [박해윤 기자]

    올림픽이 열릴 때마다 선수들이 흘리는 피와 땀방울 뒤에 한국 글로벌 기업들의 오랜 후원이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된다. 매회 올림픽 역사를 경신하고 있는 한국 양궁 뒤에는 개인 훈련용 슈팅 로봇까지 만들어준 현대차그룹의 지속적 지원이 있었다. 삼성전자는 1만7000여 선수에게 스마트폰을 지급했고, 선수들은 시상대에 올라 이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찍었다. 대한민국의 국격이 언제 이렇게 성장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 글로벌 기업들의 스포츠 지원에는 오랜 역사가 있다. 그리고 그 선두에 이건희 회장이 있다. 박성인(86) 전 대한빙상경기연맹회장을 만나고 싶었던 것은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국 스포츠 리더십의 전설

    박 전 회장은 한국 스포츠계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본래 탁구 선수 출신이지만 삼성에서 스포츠단을 이끄는 지도자로 변신했다. 이후 대한빙상경기연맹회장을 14년간 맡으며 김연아, 모태범, 이상화로 대표되는 세계적 스타들을 키워냈다. 그는 한국 올림픽의 새 역사를 만들어낸 주인공인 동시에 이건희 회장의 스포츠 철학을 가장 가까이에서 구현한 최측근이었다.

    1938년생으로 올해 86세인 그는 건강해 보였다. 기자는 그와 두 차례에 걸쳐 장시간 만났는데 청력이 다소 약한 것 빼고는 기억력도 또렷해 놀랄 정도였다. 2014년 은퇴한 그는 “하루하루가 감사하다”며 지난 10년을 회고했다.

    평소 남 앞에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성품으로 알려진 그가 기자와 만나 장시간 인터뷰한 것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그의 말이다. “이렇게 맘 편히 살아보질 못했다. 주말에도 경기가 있는 스포츠업의 특성상 50년간 제대로 쉰 날이 거의 없다. 늘 승패에 신경 써야 했고, 업적을 내야 했고, 사람들을 조율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스트레스가 없다. 가고 싶은 데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다. 현역 시절에는 머리, 허리, 어깨 등등 아픈 곳이 많았는데 몸 컨디션이 지금 더 좋다.”

    박 전 회장은 시종일관 온화하고 따뜻한 표정이었다. 그가 느끼는 마음의 평화는 젊은 시절 모든 것을 다 바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안도와 휴식처럼 느껴졌다. 마침 파리 올림픽이 한창인 때여서 올림픽 이야기부터 꺼냈더니 “그렇지 않아도 매일 TV 앞에 앉아 있다”고 했다.

    “우리 선수들 정말 대단하다. 금메달 한 개가 나오려면 선수 한 사람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라 선수 중심으로 몇 겹의 시스템이 움직이는 거다. 한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다는 건 그런 시스템에서 우리가 세계 최고라는 거다. 대한민국은 정말 희망이 있는 나라다.

    이건희 회장님은 금메달 따려면 10년 계획을 세우라고 하셨다. 제일 먼저 삼성에서 시작한 것이 탁구다. 회장님이 ‘10년을 내다봐라’ 했는데 1978년도에 창단해서 1988년에 중국을 꺾고 세계 1위가 되지 않았나.

    지금은 스무 살 남짓인 선수들이 금메달을 따는 게 너무 신기하다. 다들 10세 전후로 시작했다는 거 아닌가. 옛날에 지도자 생활할 때 많이 느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타고난 능력이나 재주가 남다르다. 머리도 좋고 승부 근성도 있고.

    다만 그런 걸 떠받쳐줄 수 있는 시스템이 좀 부족했는데 이제는 그런 게 다 선진국 수준이 됐다는 거다. 개인도 뛰어나지만 뛰어난 개인들을 뒷받침하는 여건이 완전히 성숙한 것 같다. 회장님께서 ‘경제가 나아지면 나아질수록 스포츠가 더 각광받을 것이니 그때를 대비해 인재를 키우라, 급하게 하지 말고 멀리 내다보고 하라’고 하셨는데 나로서는 처음 듣는 신선한 이야기들이었다. 회장님 말 그대로 따라서 하니 되더라.”

    “이건희 이사에게 탁구를 가르쳐달라”

    탁구 국가대표에서 한국 체육계의 거목으로 대한민국 스포츠의 위상을 높인 그의 인생은 이건희 회장과의 만남이 운명을 가른 결정적 사건이었다고 한다.

    평양 출신인 박 전 회장은 평양사범부속을 다니다 6.25전쟁 이듬해인 1951년 1·4후퇴 때 대구로 피란을 간다. 집 근처 탁구장에 다니면서 탁구와 인연을 맺는데 상대를 이기면 입장료가 무료라 열심히 쳤다고 한다. 마침내 대륜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58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위를 하면서 국가대표가 되고 그해 도쿄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단체전 동메달을 거머쥔다.

    이듬해 1959년 독일 도르트문트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남자 단식으로 출전해 동구권 강호들을 꺾으며 32강까지 오르기도 했다. 국격이 보잘것없던 시절, 제대로 된 지도도 받지 못하고 거의 독학하다시피 하며 얻은 성과였다.

    대학(영남대학)을 졸업하고는 지도자로 변신해 6년간 서울 계성여중 코치 생활을 한 뒤 고교를 마친 제자들을 이끌고 한일은행 탁구팀을 창단한 것이 1966년이다. 첫 출전한 대회 때부터 당시 금융단 최강팀이던 산업은행을 꺾는 기염을 토해 ‘한일은행 전성시대’를 열었다.

    이건희 회장과의 인연은 이듬해인 1972년 겨울 시작된다. 그는 첫 만남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중앙일보 체육부 기자로부터 ‘차 한잔 하자’는 연락을 받고 나갔습니다. 만나자마자 저더러 ‘이건희 이사(당시 중앙일보 이사)님이 탁구를 배우고 싶어 하시니 가르쳐주면 좋겠다. 제대로 가르쳐줄 사람을 찾고 있다가 당신을 점찍었다’는 거예요.

    친구의 부탁인 데다가 회장님이 탁구를 좋아하신다니 저로서는 반가웠죠. 마침 제가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 전해인 1971년에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자대표팀 코치를 마지막으로 은퇴하고, 호주 탁구대표팀 초청을 받아 6개월간 지도자 자격으로 머물다 돌아온 직후였거든요. 한일은행 적선동 지점으로 출근하고 있던 때였는데 선수 생활을 끝내고 은행원으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다 회장님 탁구 지도 제안을 받은 거였죠.

    제가 그 자리에서 ‘한번 해보겠다’고 했더니 ‘바로 가자’는 거예요. ‘이사님이 지금 중앙일보 3층 사무실에 계신다’면서 말이죠. 따라나섰죠.”

    첫인상은 어땠나요.

    “탁구를 배우려는 열정이 대단하셨어요. ‘집에 탁구대도 준비가 돼 있다, 1주일에 한두 번씩 와서 가르쳐달라’고 하셔서 며칠 뒤 댁으로 갔습니다. 제 유니폼에 제 운동화까지 마련해 놓으셨더라고요.”

    직접 가르쳐보니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조금 과장해 말한다면 몸이 비호같다고 할 정도로 민첩하셨어요. 체력도 얼마나 좋으셨는지…. 한창때였던 저도 감당하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평일은 일주일에 하루 두세 시간, 주말에는 오전 오후 합쳐서 7시간, 8시간도 치셨어요. 주말에는 코치 한두 명을 데리고 갔는데 모두 지칠 정도였어요.

    저는 지도 목표를 ‘재미’로 두었습니다. 선수를 하실 것도 아니니 우선 운동 효과가 있어야겠고, 무엇보다 탁구를 치는 시간만이라도 일을 잊으시고 재미있고 즐겁게 해드리자는 걸 목표로 삼았죠. 그런데 그게 참 어려웠어요.”

    왜요?

    “승부욕이 대단하셨습니다. 집념도 타고나신 건지 집중력이 대단하셨어요. 공을 여기저기로 막 보내는데 그걸 다 받아내려 애쓰면서 정말 열심히 배우셨어요. 그렇게 맹연습을 하고 6개월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경기를 시작했습니다.”

    6개월 만에 전직 국가대표와 경기할 정도가 된 겁니까.

    “물론 점수를 잡아드렸죠(웃음). 처음 경기 때 ‘핸디캡을 몇 개 드릴까요’ 했더니 저더러 ‘정해 보라’고 하시는 거예요. 제가 볼 때는 18점, 19점(그때는 만점이 21점) 정도 잡아드려야 하는데 기분 나빠하실 거 같아서 ‘15점부터 시작하시죠’ 했더니 썩 내키는 표정이 아니셨어요(웃음).

    제가 한 번 지면 핸디캡 점수 하나가 내려가고 이기면 하나가 올라가고 하는 식으로 했어요. 어느 날은 17점, 18점까지 잡아드린 날이 있어요. 그런 날엔 제가 퇴근(?)을 못 했어요(웃음). 계속 더 하자고 하셔서 끝이 안 났으니까요. 그래서 ‘회장님을 이기면 내가 힘들어서 안 되겠다’ 생각해 살살 친 적도 많습니다.”

    살살 치는 게 더 어렵지 않나요.

    “맞습니다. ‘저 친구가 일부러 저러는구나’ 금방 아셔서 재미없어하실 테고 그렇다고 제대로 치면 회장님이 더 하자고 하셔서 시합이 끝나질 않으니 힘 조절이 쉽지 않았어요. 특히 서브를 적당히 넣는 게 어려웠어요. 너무 강하게 하면 못 받으실 거고 너무 약하게 하면 재미가 없으니. 어떻든 회장님이 참 재미있게 하셨어요.”

    손바닥이 벗겨질 정도로 골프공을 친 이유

    일주일에 서너 번씩 집으로 갔다니 일상생활도 간간이 엿보였겠네요.

    “제가 그때 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뭔가요.

    “기업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거죠. ‘그야말로 초인적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구나’ 하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됐습니다. 때로는 하루 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으셔서 제가 그냥 돌아온 날도 많았어요. 뭔가 골똘하게 생각하시는 날이었습니다. 방에서 며칠씩 나오지 않는 날도 있다고 했어요. 그렇게 회장님을 뵙지 못하고 돌아오는 날에는 제 맘도 무겁고 숙연해졌습니다.

    삼성이 좀 큰 기업입니까. 미래에 뭘로 먹고살아야 하나 평생 고민하고 궁리하신 거 아닙니까. 그 마음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일이 국내에서만 터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그렇게 애쓰시는 모습을 가까이서 살짝 엿보게 되니 저 같은 소시민처럼 ‘평범하게 사는 게 행복한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살아 계실 때 ‘미래를 생각하면 등허리가 오싹해진다’는 표현을 자주 하셨는데 당신의 마음속 깊이 드리운 걱정과 고민, 두려움과 번뇌를 생각한다면 정말 매우 수위가 낮은, 점잖은 표현이었죠.

    이건 말씀드리기 약간 조심스러운데…. 부회장 때인가 회사 안 나가시고 워커힐 골프장으로 가서 하루 종일 손바닥이 벗겨질 정도로 혼자 계속 공을 치는 날이 있었어요. 몇 번 저를 부르셔서 간 적이 있어요. 뭔가 속상한 일이 있으니까 그러신 것 같았어요. ‘속에서는 열불이 나는데 그렇다고 어딜 가서 뭘 때려 부술 순 없으니 골프공이라도 치시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요.

    겪어보면 따뜻하고 다정다감하고 그렇게 가정적인 분일 수가 없는데 회사만 나오면 전혀 달라지세요. 회장님이 출근만 하면 임원들이 전부 얼음이 되는 걸 보고 속으로 살짝 웃기도 했는데 나중엔 저도 얼게 되더라고요(웃음). 비서실 팀장들 오찬도 자주 하시고 그랬는데 팀장들이 음식 씹는 소리도 못 낼 정도였거든요. 처음엔 속으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저도 나중에 사장단 회의에 들어가니 그렇게 되더군요.”

    그렇게 탁구를 가르치다 삼성 안에 탁구팀까지 만들게 된 건가요.

    “회장님께서 얼마 전 작고하신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님과 가까우셨어요. 두 분 생일이 6개월인가밖에 차이가 안 났는데 최 회장님이 이건희 회장님께 꼬박꼬박 ‘형님’이라 부르셨죠. 최 회장님이 탁구협회 회장을 하셨잖아요. 두 분이 만나면 한국 탁구가 더 발전해야 한다고 걱정이 많으셨어요.

    그러던 어느 날 이건희 회장님이 제게 ‘삼성에 탁구팀을 한번 만들어보면 어떻겠느냐’고 하시는 거예요. 처음엔 좀 주저했습니다. 제가 한일은행에서 팀을 만들고 감독도 해보았기 때문에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었고,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은행원으로 새출발을 해야지 하던 때였어요. 게다가 기업이라는 조직문화도 잘 모르고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최고 인재들이 모인 곳에서 저 같은 사람이 무슨 할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죠.

    그러다 마음이 점점 바뀌더라고요. 한국 탁구가 중국과 실력 차가 갈수록 점점 더 벌어지는 거예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회장님께 ‘이제 팀을 한번 만들어도 좋겠습니다’ 했더니 그 자리에서 호출 버튼을 누르시는 거 아닙니까. 어디로 가보라고 하셔서 갔더니 제일모직이었어요. 이수빈 회장님이 초임 사장이셨고, 이대원 부회장님이 관리이사를 맡고 계실 때였죠. 그때가 1978년 3월이었는데 곧바로 창단 작업에 들어가 8개월 만인 11월 28일에 제일모직 소속으로 창단을 합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라

    88 서울올림픽에서 난공불락이었던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안긴 현정화(왼쪽)와 양영자 경기 모습. [동아DB]

    88 서울올림픽에서 난공불락이었던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안긴 현정화(왼쪽)와 양영자 경기 모습. [동아DB]

    당시 이건희 회장은 그에게 세 가지를 당부했다고 한다.

    “첫째,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 둘째, 세계 1등을 목표로 지금부터 10년을 내다보고 해라. 셋째, 좋은 선수를 발굴해 키우되 일일이 참견하지 말라는 거였습니다.”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는 건 뭐죠?

    “중국을 겨냥한 거였습니다. 당시 우리 선수들은 중국과 붙었다 하면 백전백패하던 때라 일단은 피하고 봐야 한다는 분위기였어요. 중국 선수들이 나오지 않는 대회만 골라 나가는 식이었죠. 그런데 회장님은 정반대였습니다. ‘중국이 나오는 대회만 나가라, 쫄지 말고 10년 내다보고 전략을 짜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결과적으로 해냈죠. 팀 창단 꼭 10년 만에 중국이라는 만리장성을 꺾었으니까요.”

    88 서울올림픽 때였죠.

    “맞습니다. 회장님이 레슬링협회장을 하실 때인데 레슬링이 16개 종목에서 금메달 두 개, 은메달 두 개, 동메달 다섯 개를 딸 정도로 대단히 큰 성과를 냈죠. 그런데 우리 탁구가 금을 두 개(남자단식 유남규, 여자복식 양영자 현정화)나 따내지 않았습니까. 회장님이 ‘탁구 금메달이 레슬링에서 금메달 딴 것보다 더 좋다’고 기뻐하셨습니다.”

    한국 탁구의 이 기념비적 사건은 10년에 걸친 이 회장의 묵묵하고 지속적인 지원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세심하게 살펴주셨습니다. 처음엔 연습장도 없었어요. 마침 TBC(삼성과 중앙일보가 갖고 있었던 방송국. 1980년 언론 통폐합으로 KBS에 합병) 사옥을 여의도에 짓고 있었는데 지하에 임시 탁구장을 만들어 연습하도록 해주셨죠. 건물이 완공 전이라 먼지가 풀풀 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회장님이 직접 차를 몰고 혼자 오셨어요. 너무 놀랐죠. 저희 연습하는 거 보고 하시는 말씀이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이렇게 추운 날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냐, 이런 날은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다든지 딴 방법을 찾아보라’는 말씀까지 해주셨어요. 그런 식으로 10년 동안 그야말로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셨습니다. 88 서울올림픽의 성과는 회장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욕심과 잡념을 조절하라

    이 대목에서 시간을 잠시 과거로 돌려보자.

    88 서울올림픽 탁구 신화의 주인공은 양영자였다. 이미 탁구 여제로 불리고 있던 그는 당시에는 떠오르는 신예이던 현정화와 조를 이뤄 대한민국 탁구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목에 건다.

    기자는 당시를 회상하던 박 전 회장으로부터 재미있는 증언을 듣게 됐다. 이건희 회장이 올림픽 결승 전날 그에게 전화를 걸어 ‘양 선수에게 전하라’며 세밀한 지침을 줬다는 거였다. 박 전 회장 말이다.

    “결승전이 다음 날 오후 2시였는데 전날 저녁에 전화를 하시더니 ‘양 선수에게 꼭 이 말을 전하라’고 하셨어요. 제가 그때 적은 메모를 몇 번이나 읽어서 외우다시피 했는데 한 말씀 한 말씀이 정말 금과옥조였죠.”

    실제로 그가 전한 회장의 말은 가슴에 와닿는 말이 많다. 그의 육성을 통해 당시 회장의 어록을 복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 강한 척하는 팀들도 실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허점투성이가 많다. 중국 입장에서는 이겨야 본전이기 때문에 쫓기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쪽이다.

    - 내가 어려울 땐 상대도 똑같이 어렵다. 상대의 강약에 휘둘리지 말고 평상시 하던 대로 준비한 대로 게임을 풀어나가라.

    - 메달을 따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나라. 자기와의 싸움에서 먼저 이겨야 한다. 종교적 명상도 도움이 될 것이다.

    - 오늘을 위해 지난 10년 동안 동료들, 지도자들과 흘린 피와 땀을 회상해보라, 절로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욕심과 잡념을 조절하라.

    - 20대 19, 한 포인트 위기 상황이 닥치면 비장의 무기를 과감하게 써서 평생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명승부를 펼쳐라.


    다시 박 전 회장의 말이다.

    “사실 양 선수는 회장님 지시로 삼성에서 스카우트한 겁니다. 저한테 탁구를 맡기시면서 ‘지금 선수들 갖고는 안 된다. 전국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면서 재능 있는 아이들을 찾아서 발굴하라’고 하셨어요. 그 과정에서 양 선수를 전북 이리에 있는 부모님까지 만나서 데리고 오게 된 겁니다.

    양 선수가 1981년 도쿄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했을 때는 회장님이 직접 매일 경기장에 와서 보셨어요. 그때도 중국하고 붙었는데 졌죠. 회장님이 ‘지금 서브로는 안 되겠다. 새로운 방식을 고민해야겠다’고 하셔서 그 말씀을 화두 삼아 열심히 신기술을 개발하고 연습했습니다.”

    박 전 회장은 “회장님은 평소 ‘기업 경영이나 스포츠, 정치에 이르기까지 세상만사 본질은 똑같다’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꿰뚫는 말을 하시는지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와닿을 때가 많았습니다”라고 했다.

    그가 들은 회장의 어록은 1993년 발간된 삼성 신경영 책자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 1978년 탁구단 창단 이후 88년 서울올림픽으로 세계 정상에 오를 때까지 회장이 탁구에 대해 언급한 이야기가 정리돼 있다. 박 전 회장의 말대로 탁구라는 스포츠 영역을 넘어 모든 일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본질을 담고 있어 소개해 본다.

    자만과 타성에서 깨어나라

    “세상에 독불장군이란 없다. 치밀한 계획과 조직적 준비 없이 정상을 넘본다는 것은 세상 이치에 맞지 않는다. 구태의연한 자기 아집에서 벗어나 10년을 목표로 세계 정상에 도전하라.”

    자기를 먼저 알고 상대를 분석하라

    “열심히만 해서는 10년이 아니라 100년이 지나도 상대를 이기지 못한다. 새로운 발상에서 출발하고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자기 위치를 냉정하게 찾아라. 상대의 조직력, 신기술 개발 방법 등을 심도 있게 파고들어야 한다. 그들도 사람이고 사람이 하는 일엔 반드시 허점이 있게 마련이다.'’

    과학적으로 훈련하라

    “똑같은 실점이 연속해서 발생하는 경우가 있는데, 야단치거나 말로 고치려 하지 말고 근본적인 해결 방법을 찾아라. 비디오카메라를 보낼 테니, 경기 장면을 촬영해서 수십 번씩 봐라.”

    세계로 눈을 돌려라

    “세계 정상에 서려면 새로운 기술이 필요하다. 탁구 기술의 큰 흐름이 수비형, 드라이브형, 전진 속공형, 이질 변칙형 4가지 전형이라면, 평면 라버와 돌출 라버를 양면에 같이 붙여 드라이브와 전진 속공을 같이 구사하게 하면 어떤가? 제5의 전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선수들 체격이나 특성에 맞고 기존의 기술을 이길 수 있는 새로운 전형을 개발하라.”

    결정적인 승부수를 개발하라

    “20대 15를 20대 19로 끌어올리는 일은 쉽지만, 20대 19 위기 상황에서 승부수인 한 포인트를 내는 건 아무나 못 한다. 절박한 위기감을 갖고 비장의 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지 않으면 한 점 패배가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른다.”

    탁구라켓의 변화를 통해 보는 경영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선수촌을 직접 방문해 선수들을 격려하는 이건희 회장. 맨 왼쪽이 박성인 단장이다. [동아DB]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선수촌을 직접 방문해 선수들을 격려하는 이건희 회장. 맨 왼쪽이 박성인 단장이다. [동아DB]

    실제로 이건희 회장은 책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도 탁구를 통한 경영 철학을 설파한 바가 있다. 그는 생전에 럭비, 야구, 승마 등 다양한 스포츠에 비유해 경영 메시지를 내놓은 것이 많은데 탁구도 그중 하나다. 책에 실린 ‘셰이크핸드형 공격 탁구’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라켓의 변화’를 화두로 한 경영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전문을 인용한다.

    나는 이따금 아이들과 탁구를 친다. 탁구는 누구에게나 무난한 스포츠여서 나도 부담 없이 즐기는 편이다. 하루는 아들(이재용)이 평소 사용하던 펜홀더형 탁구채를 셰이크핸드형으로 바꿨다. ‘웬일이지’ 하면서 게임을 했는데 평소 점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점수 차로 지고 말았다. 게임을 끝낸 후 아들과 얘기를 하며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탁구채를 잡는 데는 펜홀더형과 셰이크핸드형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펜홀더형은 펜을 잡는 것처럼 잡는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고, 셰이크핸드형은 잡는 방법이 꼭 악수하는 것 같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였다. 보통 셰이크핸드형 탁구채는 공의 접촉면이 넓은 반면 힘이 분산되는 약점이 있어 수비형 선수에게 적합한 것으로 통하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힘이 좋은 유럽의 남자 선수들 중 공격형 선수들이 셰이크핸드형 탁구채를 사용해 스매싱의 파괴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80년대 후반 마침내 유럽의 신형 공격수들이 세계 최강인 중국 선수들을 누르고 정상에 올라섰다. 그 후로 셰이크핸드형 러버를 수비수를 위한 러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이 펜홀더형은 공격형, 셰이크핸드형은 수비형이라는 고정관념을 뒤집어 상대 전략의 허를 찌르는, 다시 말해 공격과 수비의 구별 없이 공격 위주로 게임을 펼치는 쪽이 승리할 기회를 많이 잡을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모든 스포츠에서 수비는 기본에 해당하지만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공격이다. 세계 축구의 최강은 의심할 여지없이 공격 축구의 대명사 브라질이다. 메이저리그 야구의 연봉 순위를 보아도 상위권은 모두 강타자들이 차지하고 있다. 투수 비중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타자라는 얘기다.

    나는 아들의 얘기를 듣고 개인의 생활이나 기업 경영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개인이나 기업이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수비적으로 웅크리고 있으면 결코 성장할 수 없다. 결국에는 있는 것을 유지하기도 어려워진다. 선취 골을 따냈다고 수비에만 치중하다가 상대 팀의 줄기찬 공격에 무너지고 마는 경우를 우리는 축구 경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지금 저성장 시대에 들어서면서 고전하고 있는 우리 기업들은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본받고자 하는 초일류 기업들의 성장 과정을 보더라도 숱한 난관을 공격적으로 이겨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처럼 어려울 때일수록 실패를 무릅쓰고 공격적으로 변신하는 기회 선점 경영이 요구된다.


    다시 박 전 회장과의 대화로 돌아온다.

    이건희 회장이 내린 지침은 양영자 선수에게 그대로 전해졌겠네요.

    “다음 날 아침 일찍 양 선수를 찾으니 선수촌 안에 있는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있더라고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거든요(양 선수는 현재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회장님 말씀을 전했더니 정말 가슴 깊이 자기 것으로 만들겠다는 표정이었어요. 당연히 힘을 얻을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잊혔던 탁구 여제 양영자는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전지희·신유빈과 함께 동메달을 딴 이은혜 선수 덕분에 다시 소환됐다. 내몽골 지역에서 탁구 선수로 뛴 이 선수는 선교사 양 감독을 만나 2011년 한국으로 귀화했다. 이 선수는 인터뷰에서 “양 감독님은 엄마 같은 분”이라며 “정말 어려웠던 시기에 큰 힘이 돼 주셨는데, 메달로 보답할 수 있게 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박 전 회장은 이건희 회장을 통해 지도자의 자질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다고 했다.

    “승부라는 게 시합 때 나는 게 아니에요. 훈련 과정에서 이미 다 나는 거예요. 결과는 과정에 비례하는 거죠. 과정에서 못하면 이길 방법이 없어요. 이건 당사자가 제일 잘 압니다. 자기가 열심히 노력하면 스스로에게 떳떳해집니다. 그럴 땐 경기에서 지더라도 기분이 나쁘지 않죠.

    그러니 선수가 졌다고 결과만 보고 왜 그랬느냐고 비난하면 곤란해요. 과정을 잘 살펴야 해요. 그 과정에서 선수가 제대로 된 방향을 갈 수 있도록 지도해 줘야 하고 최선을 다했다면 결과에 대해서는 함께 책임을 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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