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들어서 ‘파묘’ ‘범죄도시 4’가 새롭게 1000만 관객몰이에 성공한 영화로 등재됐다. 이로써 우리 영화계는 방화(邦畫) 기준 총 24편의 ‘천만 영화’를 보유하게 됐다. 영화가 동원한 ‘1000만’이라는 관객 수는 국민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한다. 이는 외국에서도 보기 드문 사례에 속한다. 어쩌면 한국 영화계는 ‘천만 신화’에 사로잡혀 스스로 생태계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범죄도시’가 독과점 논란에 휩싸였다. 사진은 서울시내 영화관에 보이는 ‘범죄도시’ 홍보물. [뉴시스]
박스오피스의 함정
21세기 들어 박스오피스는 거의 대부분 전산화됐으며 실시간으로 정보를 집계해 공개한다. BoxOffice, Box Office Mojo, The Numbers, ShowBIZ 등은 북미 대륙을 중심으로 티켓 판매량을 제공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영화진흥위원회가 매일 영화별 성적을 업데이트한다. 영화관의 티켓 값은 위치, 시설, 영화의 종류, 프로모션 여부에 따라 천차만별이기에 인원수로 흥행 척도를 계산하는 우리의 박스오피스 집계 방식은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다. 이런 특이한 개념의 박스오피스는 영화진흥위원회가 2003년부터 ‘영화관 입장권 통합 전산망(KOBIS)’을 갖추면서 정확한 흥행 정보를 제공하지만, 여전히 관행적으로 통용되고 있다.2001년 4월 영화 ‘친구’를 보기 위해 서울극장에 모여든 관객들. [동아DB]
두 번째는 숫자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2004년 2월 19일 강우석 감독의 ‘실미도’(2003)가 한국 영화 사상 처음으로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이후, 2024년 전반기까지 총 33편의 1000만 영화가 등장했다. 이 가운데 우리 영화는 24편에 달한다. 우리나라 인구를 5000만 명으로 계산했을 때 1000만 관객은 국민의 20%가 극장에서 영화를 봐야만 달성할 수 있는, 그야말로 꿈의 숫자다. 이제 1000만 관객 달성 여부는 모든 제작자가 바라는 고지일 뿐만 아니라, 언론과 국민까지 관심을 갖는 뉴스의 척도가 됐다.
‘검사외전’과 ‘엑시트’ ‘설국열차’ ‘관상’까지 네 작품은 아쉽게도(?) 1000만 고지에 도달하지 못한 영화다. 출연 배우와 언론, 관객까지 합심해 1000만 달성을 기원했으나 고지 점령에 실패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세간에서는 세상에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연예인 걱정이라고 말한다. 유사한 맥락에서 1000만 관객을 달성하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은 건강한 영화계 발전과는 크게 상관이 없어 보인다. 외려 1000만 영화 중심주의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큰 문제를 양산한다.
국민 20%가 관람해야 하는 ‘천만 영화’의 신화
스티븐 스필버그의 ‘죠스’(1975)는 여러모로 기념비적 작품이다. 29세의 막 떠오른 할리우드의 신예가 만든 이 영화에 유니버설은 막대한 예산을 들였고, 회사 역사상 최고의 마케팅 비용을 책정했다. ‘죠스’는 그 덕에 최초로 TV에 광고를 내보낸 작품으로 기록됐다. 오늘날까지도 ‘죠스’가 회자되는 가장 큰 이유는 ‘블록버스터’의 신기원을 열어젖혔다는 데 있다. 블록버스터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실제로 사용된 폭탄으로, 말 그대로 여러 채의 건물로 이뤄진 구역(block)에 ‘파괴자’라는 뜻을 가진 접미사(buster)가 붙어 명명됐다. ‘죠스’ 이후 블록버스터는 엄청난 물량을 투입한 액션 대작을 지칭하는 일반명사가 됐다. 게다가 ‘죠스’는 그전까지 절대 깨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지던 2억 달러의 흥행 벽(block)을 무너뜨린 최초의 작품으로 영화사에 기록됐다. 그러므로 ‘죠스’는 장르적으로는 블록버스터의 시초라는 의미와 함께 난공불락의 흥행 마지노선을 돌파했다는 의의를 동시에 지닌다. 오늘날은 2억 달러의 제작비가 예사로 투입되는 작품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이 정도의 수익으로 흥행을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21세기 들어서는 빌리언 클럽 영화(The Billion-Dollar Film Club)라고 불리는 작품이 블록버스터의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고 있다.현재까지 빌리언 클럽 영화 1위는 2009년 개봉한 ‘아바타’다. [IMDB]
오히려 자국 내 10억 달러 흥행은 막강한 할리우드의 자본력으로 무장한 미국이 아닌 중국에서 먼저 달성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장이머우 감독의 ‘만강홍: 사라진 밀서’(2023)는 월드 와이드 기준으로 6억7355만6758달러, 자국 기준으로 45억3000만 위안(8270억8740만 원)을 벌어들였다. 그런데 ‘만강홍: 사라진 밀서’의 경우, 흥행 성적의 99% 가량이 중국 본토 수입이기 때문에 ‘바비’의 북미 수익을 상회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영화 관람료는 평균 42위안이니 ‘만강홍: 사리진 밀서’는 대략 1억1000만 명이 관람한 셈이다. 이는 중국 인구 14억 명의 7.8%가 관람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 ‘춤추는 대수사선’(1998)을 제외하고 실사 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으로 흥행 10위를 채우는 특이한 산업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 가운데 ‘귀멸의 칼날’(2020)이 오랫동안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하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을 제치고 순위에 올랐다. 이 작품의 일본 내 최종 성적은 400억 엔, 극장에 동원한 관객은 약 2900만 명이다. ‘귀멸의 칼날’은 일본 인구 1억2500만 명의 23.2%가 관람한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 영화계 사정은 어떨까. 김한민 감독의 ‘명량’(2014)은 관객 1760만 명을 동원했다. 이는 국민의 35%가 관람한 수치다. 이러한 신드롬은 전 세계 어느 국가에서도 보기 드문 현상이다.
천만 영화와 쿠팡 PB 상품의 공통점
우리는 어느새 쿠팡의 로켓배송에 길들어 있다. 고객이 “쿠팡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How did I ever live without Coupang?)”라고 질문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쿠팡의 목표가 점차 현실이 돼가고 있다. 그런 와중에 공정거래위원회는 쿠팡과 쿠팡의 PB 자회사인 씨피엘비(CPLB)에 1400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는 유통업체에 부과한 역대 과징금 중 가장 큰 액수라고 한다. 그런데 쿠팡은 이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공정위 제재가 그대로 실행되면 로켓배송이 중단될 수도 있다”며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로켓배송 상품을 자유롭게 추천하고 판매할 수 없다면 모든 재고를 부담하는 쿠팡으로서는 더는 지금과 같은 로켓배송 서비스를 유지하기 어렵고 결국 소비자들의 막대한 불편과 피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쿠팡의 논리는 자체 PB 상품 노출 빈도를 높여 선택을 유도하는 것이 소비자에게 이익이 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공정위는 쿠팡이 여론을 오도하며 본질을 감춘다고 대응했다. 사태의 본질은 임직원들이 PB 상품에 대한 구매 후기를 대량으로 작성하고 알고리즘을 조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쿠팡은 공정위가 제재하지 않은 로켓배송이나 일반 상품에 대한 추천까지 금지하는 것으로 여론을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쿠팡의 로켓배송 중단 엄포를 영화계에 대입해 보자.
올해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서울의 봄’(위) ‘파묘’ 포스터.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쇼박스]
메이저 투자사이며 배급 유통을 수직적으로 계열화하는 CJ, 롯데, 메가박스가 자사 제작 영화를 관람이 용이한 시간대에 90%에 육박하는 스크린 점유율로 극장에 배치하는 것과 쿠팡의 행태는 대동소이하다. 미국은 1948년 연방정부가 제기한 할리우드 다섯 메이저 스튜디오(파라마운트, MGM, RKO, 이십세기 폭스, 워너브라더스)와 3대 마이너 스튜디오(컬럼비아 픽처스, 유니버설 픽처스,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 대한 수직 계열화 금지 소송에서 연방정부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할리우드 영화제작자들이 영화의 제작과 배급은 물론 극장까지 소유함으로써 발생하는 사실상의 독과점이 영화산업의 진입장벽을 강화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듯 강력한 힘이 해체됐기 때문에 우수한 신진 작가, 감독들이 등장하며 뉴할리우드시네마라는 ‘새로운 영화’가 나올 수 있었다.
물론 수직 계열화의 이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관련 영역이 서로 결합하면, 거래비용과 사업 리스크가 줄어든다는 장점이 있다. 이와 반대로 수직 계열화가 해체되면 사업자가 산업에 진입하기 쉽고 서로 간의 이윤 추구가 극대화되므로 거래비용이 상승한다. 이러한 장단점이 존재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영화산업 수직 계열화의 폐해 문제는 그다지 고려되지 않는다. 이는 영화산업의 영향력이 쿠팡이 일상에 끼치는 그것보다 미미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문화산업의 건강한 생태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그만큼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사 제품을 전면에 내세우는 쿠팡, 이를 불허할 시에 로켓배송이 중단될 수 있다는 위협은 자사에서 제작한 작품으로 거의 모든 스크린을 채우고 이를 불허할 시에는 영화산업의 존폐를 거론하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다. 교차상영, 취약시간대 상영과 같은 기업의 전략은 자사 PB 상품의 경쟁력을 제고하려고 더 자주 노출하고 더 좋은 위치에 편성하는 쿠팡의 전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물론 이 전략은 쿠팡이 아니라, 영화산업의 타이쿤(tycoon)들이 먼저 시작한 것이다. 스크린 독과점, 종의 다양성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먼저 논의해야 할 것이 바로 수직 계열화 문제다. 끊임없이 제기돼온 이 문제를 뒤로하고 영화계에 산적한 난관을 논의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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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 실패 영화의 경제학
천만 영화의 신화는 유명 배우와 감독에게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크기’에 집착하게 만든다. 천만 영화의 대부분이 ‘한국형 블록버스터’이기 때문에 영화의 제작 규모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무한정 영화를 제작할 수 없기에 몇몇 영화에 자금을 ‘올인’해 큰 수익을 노리는 지금의 구조하에서 중간급 혹은 소규모 영화는 현저하게 설자리가 줄어들었다. 영화산업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은 열 편 중 한 편도 흑자를 내기 힘든 상황에서 여전히 영화가 제작되는 이유에 대해 궁금하게 여긴다.
문화산업, 그중에서도 영화산업은 그 구조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영화 한 편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작일 경우 100명 가까운 인원이 촬영마다 투입되며, 이때 이들의 먹을거리를 책임질 케이터링 업체는 필수적으로 동원된다. 각종 매니지먼트 사업은 물론이거니와 장비 렌털 업체, 영화 홍보 업체, 후반작업 업체 등 한 작품 제작에 연동되는 수많은 하부구조가 존재한다. 영화 몇 편이 흥행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제작 편수가 줄어들지 않는 한,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수많은 사람은 일거리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천만 영화를 기대하면서 규모의 경제를 도모하는 사이 영화는 점점 사이즈가 커졌지만, 다양하고 새로운 중소 영화가 세상에 나와 빛을 볼 기회는 사라진다.
이런 의미에서 제작사 외 모든 영화산업 종사자는 어떤 측면에서 ‘망할 운명’의 대다수 영화를 반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90% 이상을 차지하는 이들 적자 영화로 인해 영화산업의 생태계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현재 영화계는 카오스 그 자체다. 어느 때보다 흥행 예측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투자 자체가 되지 않고 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 예를 들면 2023년에 선보인 ‘노량: 죽음의 바다’ ‘외계+인’ ‘비상선언’ ‘콘크리트 유토피아’ ‘1947 보스톤’ ‘더 문’ ‘영웅’ 같은 대작은 간신히 손익분기점(BP)을 맞췄거나 대부분 흥행에 참패했다. 볼거리+신파+애국심+액션+호화 캐스팅이라는 흥행 요소 중 몇 가지를 조합해 만든 천만 영화의 공식이 더는 통용되지 않으며, 예전처럼 관객의 호응도 높지 않다. 이런 현실에서 여전히 1000만 관객 돌파에 몰두하는 일은 변화하는 생태계 흐름에 스스로 역행하는 것이다. 영화산업에 산적한 문제를 풀 실마리는 ‘천만 영화 신화의 해체’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김채희
● 1990년 출생
●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졸업
● 부산대 대학원 박사
●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등단
● 現 부산대 영화연구소 연구원 및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