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호

한진그룹 ‘수송보국’의 꿈, 아시아나 합병으로 재건할까

[In-Depth Story] 아시아나 합병해 ‘메가 캐리어’ 선언

  •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

    입력2024-09-11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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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승인만 남은 합병, 10월 중 마무리 전망

    • 중복 노선 42%, 아시아나 화물기사업부 매각 출혈도

    • 트럭 1대로 시작한 조중훈 “수송으로 조국에 보답하리”

    • 베트남전쟁 군수물자 수송하며 급성장

    • 육·해·공 아우르며 정점… 조중훈 타계 후 사분오열

    • 추락하는 ‘수송보국’ 조중훈의 꿈

    대한항공 보유기 보잉 B777-9(아래)와 B787-10. [대한항공]

    대한항공 보유기 보잉 B777-9(아래)와 B787-10. [대한항공]

    7월 22일 대한항공은 영국 햄프셔주 판버러 공항에서 열린 ‘판버러 국제 에어쇼’에서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과 스테파니 포프 보잉 상용기 부문 사장이 B777-9 20대, B787-10 30대(예비 발주 10대 포함) 도입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조 회장이 보잉의 최첨단 중대형 항공기 50대에 대한 계약을 직접 체결한 것이다. 계약 규모만 30조 원으로 추정된다. 1969년 대한항공 창사 이래 역대 최대 규모다.

    이번 계약에 대해 조 회장은 “보잉 777-9 및 787-10 도입은 대한항공의 기단 확대와 업그레이드라는 전략적 목표에 있어서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면서 “항공기 구매 계약을 통해 승객의 편안함과 운항 효율성을 높이는 동시에 탄소 배출량을 크게 줄여 지속가능경영을 위한 장기적 노력을 뒷받침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업계에선 이번 계약을 아시아나항공 합병을 위한 마지막 과정인 미국 당국의 승인을 얻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보고 있다. 2021년 대한항공은 아시아나항공과 기업결합을 위해 승인을 받아야 하는 14개국에 신고를 마쳤다. 이제 마지막 고비인 미국의 승인만 남은 상황이다. 대한항공은 미국 법무부(DOJ)를 상대로 합병 절차를 밟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가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기업결합에 대한 최종 승인 결론을 내린 뒤, 2~3개월 안에 DOJ가 기업결합 제한 소송을 제기하지 않으면 승인이 완료된다. 이 절차는 올해 10월 중 마무리될 것으로 전망된다. 대한항공이 보잉과 맺은 계약은 미국 기업과 협력 관계에 있다는 메시지로 작용할 수 있어 DOJ의 판단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7월 22일 영국 햄프셔주 판버러 공항에서 열린 ‘판버러 국제 에어쇼’에서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오른쪽)이 스테파니 포프 보잉 상용기 부문 사장과 B777-9 등 도입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있다. [대한항공]

    7월 22일 영국 햄프셔주 판버러 공항에서 열린 ‘판버러 국제 에어쇼’에서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오른쪽)이 스테파니 포프 보잉 상용기 부문 사장과 B777-9 등 도입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있다. [대한항공]

    합병에 몰두해 초심 ‘흔들’

    2022년 1월 조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2022년을 ‘메가 캐리어(초대형 항공사) 원년’으로 선포했다. 대한항공은 아시아나항공 인수 후 2년간 아시아나항공을 자회사로 두고 통합 작업을 거치면서 메가 캐리어 구상을 완성할 계획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대형항공사(FSC)의 합병이 성사되면 ‘대형 단일 국적항공사’가 탄생한다.

    통합 후 규모 및 실적 수준을 구체적으로 예상하긴 이르지만, 지난해 기준 대한항공의 매출액 (14조5751억 원)과 아시아나항공의 매출액(6조5321억 원)이 합쳐질 경우 매출은 약 21조 원, 자산은 40조 원에 이른다. 특히 여객 및 화물 운송량을 기준으로 하면 합병 시 세계 7위권 항공사가 된다.

    다만 보잉과 ‘빅딜’을 이뤄내긴 했지만 DOJ의 승인도 아직 확신할 순 없는 상황이다. 만약 DOJ가 반독점 소송이라도 제기하면 EU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난관을 만날 수 있다. 실제 DOJ는 자국 LCC인 제트블루와 경쟁사 스피릿항공의 인수·합병을 불허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해 승소하며 기업결합을 무산시킨 전례가 있다. 경쟁이 줄고, 항공료 인상으로 소비자가 피해를 본다는 이유에서다.

    두 회사가 합쳐져 덩치가 커지는 것은 맞다. 그러나 메가 캐리어 효과가 기대만큼 나타날지는 지켜봐야 한다. 두 항공사의 중복 노선이 양 사 전체 노선 가운데 42%를 차지한다. 중국과 일본 등 중·단거리 노선은 절반이 겹친다. 이미 포화인 중·단거리 노선은 줄이되 미국과 대양주 등 장거리 노선을 늘려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방침이지만 실현 시기는 언제가 될지 모른다.

    실제 올해 2월 대한항공은 유럽연합(EU)의 승인을 받는 조건으로 인천~파리, 인천~프랑크푸르트, 인천~로마, 인천~바르셀로나 노선 등 보유한 14개 유럽 노선 가운데 4개 노선을 국내 저비용항공사(LCC)인 티웨이 측에 넘기고, 아시아나항공 화물기사업부도 매각하기로 했다. 이에 대한항공은 아시아나항공의 화물기사업부문 분리매각을 위한 입찰 및 매수자 선정 등의 이행 조치를 마쳐야 한다.

    이에 대한항공의 ‘메가 캐리어’의 꿈은 반쪽이 될 수 있다. 대한항공은 코로나 팬데믹 기간 여행 제한으로 항공산업이 침체기를 맞이했을 때 항공화물 사업으로 흑자를 유지할 수 있었다. 대한항공의 국제항공 화물수송 실적은 2021년 기준 104억2900만t으로 세계 5위 수준이다. 아시아나항공도 35억t으로 19위를 유지하고 있기에 합병 후 화물 사업을 매각하지 않는다면 대한항공은 세계 3위권 규모를 달성할 수 있었다.

    합병에 몰두해 그룹이 창업 때의 초심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대한항공은 2004년부터 2009년까지 6년 연속 국제 항공화물 수송 부문에서 세계 1위 자릴 지켰는데, 이후 지속적으로 순위가 떨어졌다. 여기에 근래 조 회장이 메가 캐리어를 내세우며 아시아나항공과의 합병에만 집중하느라 이러한 현상을 가속화하고 있다. ‘수송보국(輸送報國·수송으로 조국에 보답한다)’이라는 기치 아래 그룹을 일궈낸 한진그룹 창업주 고(故) 조중훈(1920~2002) 회장의 뜻이 희석되고 있는 것이다.

    올해 여행객들이 선정한 ‘2024 세계 톱 20 항공사’ 순위. [스카이트랙스]

    올해 여행객들이 선정한 ‘2024 세계 톱 20 항공사’ 순위. [스카이트랙스]

    조중훈이 올린 기치, ‘수송보국’

    조중훈 회장이 세운 한진그룹은 한때 대한민국의 하늘과 땅, 바다의 물류를 책임지던 국내 최대 물류운송 기업이었다. 하지만 2002년 조 회장이 타계한 후 급격하게 분열됐다. 2세 승계 과정에서 부친이 남겨둔 유산을 둘러싸고 한진가(家) 형제들은 다툼을 벌였다. ‘육·해·공’에서 긴밀하게 협력하던 한진그룹의 가치는 흔들렸고, 조 회장이 만든 ‘수송보국’의 경영이념은 아들인 고(故) 조양호(1949~2019) 회장을 거치면서 옅어졌다.

    조중훈 회장은 서울에서 지주이자 직물 도매상을 하던 가정에서 4남 4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평범한 가정의 딸과 결혼해 슬하에 4남 1녀를 뒀고, 이 가운데 장남이 조양호 회장이다. 조중훈 회장은 비교적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부친이 운영하던 직물 가게가 부도를 맞아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때 조 회장은 사업에 함부로 뛰어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통감한다. 향후 그는 이런 철칙에 따라 무리한 사업 확장을 경계하고, “모르면서 남들이 한다고 따라 하는 것은 사업이 아니”라며 ‘수송의 길’을 고집했다.

    가세가 기울자 조 회장은 고등학교를 관두고, 국비 교육기관인 경남 진해의 해원양성소로 진학했고, 이곳을 졸업한 후 17세 때인 1937년 잠수함·구축함을 만들던 일본 고베의 후지무라 조선회사에 취직했다. 그는 성실히 근무해 3년 만에 일본 운수성의 2등기관사 자격을 획득했고, 이후 화물선 기관사가 돼 톈진·상하이·홍콩·마카오·필리핀 등을 두루 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하지만 직장생활과는 맞지 않는다는 판단에 1942년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 보링 기계 1대를 설치하고 자동차 엔진 수리업체인 이연공업사를 차렸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들어서며 일본이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던 때였다. 석유류는 군사용으로만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당시 운행하던 자동차들은 숯이나 카바이드 등을 태워 발생하는 가스를 이용한 목탄차로, 엔진 고장이 잦았다. 이연공업사엔 일이 밀려들기 시작했지만 조선총독부가 태평양전쟁에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기 위해서 중소기업들을 관련 대기업에 강제 편입시키는 ‘기업정비령’을 발동하면서 1943년 일본 방산업체인 마루베니사에 강제 흡수되고 말았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광복을 맞이한 1945년 조 회장은 이연공업사를 정리해서 만든 돈과 저축한 돈을 더해 다시 한번 기지개를 켰다. 1945년 11월 1일 인천시 해안동(항동)에 합자회사를 세운 것. 회사 이름은 ‘한민족의 전진’이라는 뜻을 담아 한진상사(韓進商事)로 정했다.

    가진 것이라곤 사무실과 트럭 1대가 전부, 조 회장은 이를 활용해 수송 사업을 하기로 결정한다. 광복 이후 인천항에는 갈수록 화물량이 늘어났지만 수송 수단이 절대 부족한 데서 착안한 결정이었다. 그는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2006)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기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기초 지식이 있었던 데다가, 인천항을 드나드는 화물선을 통해 움직이는 많은 화물들이 소비자의 손에 전달되기 위해선 반드시 또 하나의 수송 과정이 필요하리라고 판단했다. 일제의 통제 경제가 광복 후 점차 자유경제로 전환되면서 많은 화물들이 움직이고 있었으나 수송 수단의 절대부족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던 것이 당시 상황이다. 광복 당시 남북한 전국을 합쳐 자동차는 8000대가 안 됐을 정도다.”

    조 회장은 수송 사업과 함께 무역업·유통업도 시작했다. 당시 전력이 부족해 카바이드를 많이 썼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이다. 그는 강원 삼척에서 카바이드를 사다 도매상에 넘긴 뒤, 그 돈으로 인천에 들어오는 수입 인견사를 구입했다. 그리고 이를 가내수공업 형태의 방직공장이 많이 있던 인천 강화에 유통하면서 계절에 따라 자금을 원활하게 회전시킬 수 있었다.

    1950년대 인천 소재 한진상사 창고 모습. [한진그룹]

    1950년대 인천 소재 한진상사 창고 모습. [한진그룹]

    ‌한진상사는 꾸준히 성장해 창립 2년 만에 보유 차량이 10여 대로 늘었다. 아울러 경기도 일대 화물차 운송사업 면허를 정식으로 취득해 본격적 수송 사업의 기틀을 다졌다. 한진상사는 연평균 300%의 급성장을 거듭했다. 창업 5년이 되는 해인 1950년에는 종업원 40여 명, 트럭 30대를 보유한 중견 화물운송업체로 성장했다.

    그러나 6·25 전쟁이 조 회장의 사업을 원점으로 돌려놓았다. 6·25전쟁 와중에 한진상사의 차량과 장비들이 군용으로 징발된 것이다. 1955년이 돼서야 한진상사는 6·25전쟁 이전의 규모로 사업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때 조 회장은 인천항에 하역되는 막대한 분량의 주한미군 군수물자 수송에 주목했다.

    당시 경인지역엔 한진상사와 엇비슷한 규모의 운수업체가 50여 곳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들은 인천항의 전쟁 복구 물자 하역으로 호황을 누렸다. 조 회장은 주한 미8군과 군수물자 수송 계약을 맺으면서 회사 재건의 기틀을 마련했는데, 특히 미군이 직접 수송하던 캔맥주를 대리 수송할 기회를 얻으며 미군과 신뢰를 쌓았다.

    미군과 용역계약을 맺으면서 기틀을 다진 한진상사는 1957년 1월 주식회사로 재발족하고, 인천 시대를 마감하며 본사를 서울 을지로의 반도호텔로 이전한다. 당시 반도호텔은 주한미국대사관과 지척에 있었다. 1959년 미국에 유학하던 조 회장의 동생 조중건(현 대한항공 고문)이 경영에 참여했고, 그의 뛰어난 영어 실력과 유연한 대인관계로 미군 사업 수주액은 1960년 220만 달러로 늘어난다. 이는 1960년 한국 총수주액인 3280만 달러의 6.7%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때 한진상사의 가용 차량은 500대에 이르며 가히 눈부신 성장세를 나타냈다. 조 회장은 같은 해 8월 15일 수송보국의 꿈을 키우기 위한 보폭을 넓혔다. 항공운송을 위한 첫 시작으로서 4인승 세스나 비행기 한 대로 에어택시 사업을 시작했고, 이듬해엔 주한미군 통근버스 20대를 매입해 한국 최초로 서울~인천 간 좌석버스 사업도 시작했다. 특히 좌석버스 사업은 큰 인기를 끌었고, 이후 전국으로 뻗어나간 한진고속의 맹아(萌芽)가 됐다.

    위기를 기회로… 전쟁 딛고 이뤄낸 한진그룹 전성시대

    한진그룹의 발전은 미국과 맺은 밀접한 인적·물적 관계를 기반으로 했다. 그리고 이는 한진그룹이 베트남전 관련 용역사업에 참여할 기회로 이어졌다. 1965년 베트남전이 확대되자 미국은 막대한 전비(戰費)를 투입했다.

    같은 해 우리나라에서도 베트남 파병 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당시 한국용역군납조합 이사장을 맡고 있던 조 회장은 정부에서 구성한 경제시찰단의 일원으로 동남아 방문길에 올랐다. 마지막 방문지는 베트남 퀴논항.

    이때 장기영 당시 경제기획원 부총리는 조 회장에게 파월(派越) 미군 및 한국군의 군수물자 수송을 제의했다. 이에 1965년 8월 15일 조 회장은 동생 조 고문과 함께 미국에서 미 국방부와 파월 한국군의 군수물자 수송계약 교섭에 착수했다. 조 회장은 미군 측에 “한진그룹에 수의계약으로 하역 작업을 맡겨주면 100일 이내에 작업을 시작해 3일에 한 척씩 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기간 내 작업을 시작하지 못하면 하루에 1만 달러의 벌금을 내겠다”고 제안하는 강수를 뒀다. 대신 하역비로 국제 기준 가격의 3배를 요구했다.

    같은 해 12월 조 회장은 파월 한국군 맹호부대 주둔지 인근 항구인 퀴논항을 사업장으로 정했고, 1966년 3월 10일엔 미국과 군수품 수송 용역계약을 체결했다. 기간은 1966년 5월 25일부터 1년으로 했다. 용역 대금은 790만 달러. 당시 한국 기업이 베트남에서 수주한 금액 가운데 최고액이다.

    한진그룹이 담당한 업무는 베트남 중부 지역에 산재한 한국군 맹호사단과 2개 미군 사단 등 병력 5만 명이 필요한 전략물자와 식료품을 퀴논항에서 하역, 각 부대로 운송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론 항만 하역, 항만 터미널 운영, 육상운송, 내륙장치장 운영, 장비 정비 및 도선 업무다.

    1967년 5월 한진그룹은 미군과 2차 계약을 맺는데, 규모가 1차 계약의 5배에 달하는 3400만 달러로 늘어났다. 한진그룹이 1966년부터 1971년까지 5년 동안 미군 용역사업을 통해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외화는 총 1억5000만 달러다. 국세청이 첫 종합소득세 과세 대상자 명단을 만든 1969년, 종합소득 1위가 조 회장이었을 만큼 호황을 누렸다.

    이때 조 회장의 한 해 소득은 3억2246만 원. 라면 한 봉지에 20원인 시절이다. 그 외에도 당시 소득 순위 2위, 5위, 11위를 한진상사 중역들이 차지했다. 가히 한진그룹의 전성시대라 할 만한다.



    한진그룹의 ‘하늘’, 대한항공의 시작

    1960년 4인승 세스나 비행기 한 대로 시작한 주식회사 한국항공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항공운송에 대한 조 회장의 꿈은 계속됐다. 그는 1969년 국영 항공회사인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서 소형 항공기 10여 대로 대한항공을 출범했다. 이는 사실 박정희 정권의 부탁으로 시작한 사업이다. 부실 재무로 골칫거리이던 회사를 당시 베트남에서 군수물자 수송으로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던 조 회장에게 넘긴 것이다.

    대한항공공사는 1962년 4월 30일 공칭 자본 5억 원(불입 자본과 불입하지 않은 자본을 합한 금액), 불입 자본 2억5000만 원의 국영기업으로 설립됐지만 항공수송 수요 부진과 자본 불입 지연 등의 이유로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1968년 6월 민영화에 착수했다. 1968년 12월 기준 대한항공공사의 부채는 총 23억4000만 원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한진그룹은 대한항공공사를 14억5300만 원에 인수했는데, 여기에 부채 전액을 부담하는 조건까지 들어줘야 했다. 1969년 2월 28일 주주총회에서 조 회장은 대한항공공사(이하 대한항공) 사장에 선임됨과 동시에 서울~사이공 노선에 B720 여객기를 취항시켰다. 베트남 정부와 항공 협정을 맺으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 급한 대로 ‘착륙 허가’만 받아 운항을 시작한 것이다.

    다행히 한진그룹은 베트남전에서 전쟁물자 수송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 정부는 한국의 병력과 근로자 수송을 위해 취항이 필요하다는 상황을 이해하고 대한항공의 운항을 제지하지 않았다. 같은 해 10월엔 서울~오사카~타이베이~홍콩~사이공~방콕을 연결하는 동남아 최장노선을 개설했다.

    조금씩 취항지를 늘려가면서 대한항공은 서서히 국적항공사로서의 면모를 갖춰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주(美洲) 노선이 문제였다. 미주 노선에 취항하기 위해선 불평등한 한미 항공협정부터 개정해야 했지만 미국 측은 협상 테이블에조차 나오려 하지 않았다.

    조 회장은 미국 정부와 끈질기게 줄다리기를 벌임과 동시에 1970년 11월 로스앤젤레스 지점을 설치하고 이어 뉴욕, 시카고, 휴스턴에 영업소를 열었다. 만반의 준비를 한 후 미국 정부를 집요하게 설득, 1971년 1월 결국 미주 노선 취항을 허락받았다. 서울~도쿄~로스앤젤레스를 잇는 노선으로 대한항공 출범 2년 만에 태평양 상공의 하늘길이 뚫린 것이다.

    어려움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조 회장은 첫 미주 노선에 화물기 취항을 결정했는데, 화물기를 이용할 화주를 구하는 것이 어려웠던 데다가 항공화물 운송은 처음인지라 숙련된 경험자가 없었다. 이에 조 회장은 당시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품인 가발을 만들던 가발업체들을 개별적으로 찾아다니며 설득, 1971년 4월 26일 미주 노선에 첫 화물기를 취항했다.

    이토록 어렵게 취항한 대한항공의 국제화물운송 분야는 2004년부터 2009년까지 6년 연속 세계 1위를 차지했고, 코로나 팬데믹 때엔 대한항공의 적자를 흑자로 만드는 원동력이 됐으며, 현재도 세계 10위권을 유지하는 ‘효자’가 됐다.

    한진해운·한진중공업, 육·해·공 퍼즐 완성하다

    1969년 3월 베트남 퀴논항을 신상철 당시 주베트남대사와 시찰하고 있는 조중훈 회장(왼쪽). [한진그룹]

    1969년 3월 베트남 퀴논항을 신상철 당시 주베트남대사와 시찰하고 있는 조중훈 회장(왼쪽). [한진그룹]

    조 회장의 육·해·공을 통한 ‘수송보국’ 퍼즐 가운데 하나인 해상 운송은 가장 늦게 시작됐다. 조 회장의 장남 조양호 회장이 대한항공에 입사한 1974년 5월에야 한진해운을 설립한 것이다. 한진그룹 해운의 시작점은 베트남전 현장이다. 1966년 6월 조 회장은 퀴논항 부두에서 미국 ‘시랜드’ 소속 화물선이 100여 개의 컨테이너 하역 작업을 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노무자들이 직접 몇 시간 동안 화물을 옮기는 우리나라의 시스템 관점에서 그 광경은 해상운송의 ‘혁명’과도 같았던 것이다. 현재도 세계 최대 해운선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시랜드는 이미 1957년 10월 컨테이너 시대를 열고, 대형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선박에 무더기로 쌓여 있다가 인부들에 의해 옮겨지던 화물은 컨테이너를 통해 단위화·규격화되고 자동화 기계에 의해 옮겨졌다. 또한 배에서 곧바로 철도로 연결하는 내륙일관 수송 시스템도 가능해졌다.

    세계 최초로 컨테이너 시스템을 갖춘 시랜드는 하역비를 기존 대비 20분의 1로 줄이고, 항구에서의 정박 기간도 7일에서 15시간으로 단축했다. 이를 통해 해상수송의 미래를 내다본 조 회장은 베트남에서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해운사 설립에 착수했다. 그것이 1967년 설립된 대진해운이다.

    한진그룹은 1970년 1월 시랜드와 총대리점 계약을 체결했고, 3월 2일엔 시랜드의 피츠버그호가 부산항에 입항해 국내 최초로 컨테이너를 통한 하역 작업을 했다. 이어 1972년엔 부산~일본~고베 간 국내 첫 컨테이너 정기 항로를 개설했다.

    1973년 1차 오일쇼크로 회사 문을 닫았지만 1977년 다시 한진해운을 설립해 해상운송 사업을 이어갔다. 1978년 한국과 중동 간 풀컨테이너선을 취항했고, 1979년엔 4척의 풀컨테이너선으로 극동~북미 항로를 개설했다. 1987년 12월엔 국내 최고(最古) 해운사인 대한상선을 합병했다.

    대한상선은 1949년 12월에 반관반민(半官半民) 형태로 설립된 공기업이다. 1950년 2월 한일 항로 개설 등 원양 항로를 잇달아 개척하며 외항 화물 수송의 일익을 담당하던 곳이다. 합병 결과 한진해운은 풀컨테이너선 24척, 벌크선 14척을 운용해서 전 세계 5개 항로를 누비는, 국내 최대 컨테이너선 수송전문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창업주 타계 후 무너진 한진, 수송보국 어디로

    3월 4일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에서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대한항공 창립 55주년 기념사를 하고 있다. [한진그룹]

    3월 4일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에서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대한항공 창립 55주년 기념사를 하고 있다. [한진그룹]

    이렇듯 조 회장이 이룬, 육·해·공 모든 면의 수송을 담당하던 한진그룹은 2002년 그가 타계한 후 급격하게 분열되기 시작했다. 2세 승계 과정에서 부친이 남겨둔 유산을 둘러싸고 한진가 형제들은 각자의 몫을 주장하며 다툼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수송보국이라는 기치 아래 육·해·공이 긴밀하게 협력해 시너지 효과를 내던 한진그룹의 최대 장점은 사라져갔다.

    조 회장이 타계하고 3년이 지난 2005년 12월 차남인 조남호(현 한진중공업홀딩스 회장)와 4남인 조정호(현 메리츠금융지주 회장)는 맏형인 조양호 회장을 상대로 법정소송을 제기했다. 전대 회장은 장남(조양호 회장)에겐 항공과 육상운송을, 차남(조남호 회장)에겐 중공업과 건설, 3남(고 조수호 전 한진해운 회장)에게는 해운, 막내(조정호 회장)에게는 동양화재(현 메리츠화재) 등 금융계열사를 남겨줬다.

    겉으로는 문제가 없는 듯 보였지만 갈등의 싹이 존재했다. 유언장에는 적혀 있지 않은 현금 1000억 원과 한진그룹 계열사인 정석기업 주식 7만 주가 등장하면서 형제 간 갈등은 소송으로 격화됐다. 정석기업 주식과 관련한 손해배상 소송, 유언장 진위 소송, 면세품 납품업체 브릭트레이딩 관련 소송, 조중훈 회장 사가인 부암장 건립과 관련한 소송 등 네 차례에 걸친 소송을 주고받았다.

    소송 과정에서 대한항공은 2003년 말 동양화재와 체결한 운송보험 계약을 해지했고, 한진해운도 일부 보험을 국내 다른 보험사에 맡겼다. 이후 지루한 법정 싸움이 지속되다 2011년 법원의 화해 권고가 받아들여지며 유산 분쟁은 일단락됐지만 형제 관계는 남보다 더 못할 정도 수준으로 악화했다. 2019년 조양호 회장이 경영권 방어를 위한 자문사로 메리츠증권이 아닌 삼성증권을 선정한 것은 여전히 관계가 개선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유산 분쟁 이후 범(汎)한진 계열사들은 끊임없는 부침을 겪었다. 한진해운은 조수호 회장 별세 후 부인인 최은영 유수홀딩스 회장이 맡아 운영했지만 해운업황이 악화하면서 파산 위기에 몰렸다. 조양호 회장이 한진해운 대표를 맡으며 한진해운을 살리기 위해 그룹 차원의 지원을 했지만 결국 2017년 파산했다. 한진해운은 한국 해운업의 시초이자 국내 1위, 세계 7위 해운사로 성장했지만 설립 40년 만에 문을 닫은 것이다.

    한진그룹은 한진해운을 살리기 위해 2조 원이 넘는 자금을 지원했는데, 이는 지금껏 한진그룹에 부담으로 남아 있다. 조남호 회장이 맡은 한진중공업도 궁지에 몰려 있다. 2조 원을 들여 필리핀 수빅만에 지은 조선소가 조선업 불황과 맞물려 적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2019년 1월 현지 법원에 회생 절차를 신청했으며, 모회사인 한진중공업은 완전 자본잠식에 빠졌다. KDB산업은행은 한진중공업에 6874억 원에 달하는 출자전환을 확정하고 조남호 회장은 사내이사직 연임에 실패하며 경영에서 배제됐다. 이후 한진중공업은 채권단 자율협약에 들어간 후 2021년 동부건설 중심으로 한 컨소시엄으로 넘어갔다.

    결국 오늘날 한진그룹에 남은 것은 공, 대한항공뿐이다. 조중훈 회장의 수송보국 꿈은 절반의 성공으로 끝나고 있다. 올해 3월 4일 조원태 회장은 대한항공 창립 55주년 기념식에서 대한항공의 성장 과정을 돌아봤다. 조 회장은 “대한항공은 ‘수송보국’의 창립 이념으로 사람과 사람을 잇고 필요한 곳으로 물류를 보내왔다”며 “때로 힘들고 어려운 길이었지만 한마음 한뜻으로 우리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을 꾸준히 걸어왔다”고 평가하며 조부인 조중훈 회장의 꿈 ‘수송보국’을 꺼냈지만 울림은 크지 않았다.

    ‌조원태 회장이 창업주 조중훈 회장이 평생을 바쳐 만든 ‘수송보국’의 꿈을 살리고, 조중훈 회장이 갖췄던 한진그룹의 ‘경영 DNA’를 다시 깨울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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