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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이란, 결박 풀고 패권국으로?

경제개방, 정치력 확대 ‘양수겸장’

  • 인남식 | 국립외교원 교수(중동정치) in@mofa.go.kr

‘걸리버’ 이란, 결박 풀고 패권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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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역적 경제개방

다수 유럽 국가가 새로운 시장 이란의 등장에 열광하며 ‘물실호기(勿失好機)’를 외치며 진입하려 할 때 이란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유럽과의 협력을 통한 경제개방과 더불어 정치적 영향력의 공간 확대라는 ‘양수겸장(兩手兼將)’의 그림이다. 1979년 이후 미국에 따돌림당했고, 주류 이슬람권과 아랍권에서 적대시돼온 이란의 이미지가 갑자기 변한 것이다. IS와 싸우는 최전선의 전사 국가, 페르시아 문명의 후예,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중세적 절대왕정보다는 선거를 통해 중도파 로하니 대통령 같은 이들이 선출되는 이란이 그래도 나은 게 아니냐는 선진 정치 이미지 등이 유럽에 퍼지고 있다.
이란은 단순히 역내에서 경제 강국으로 자리매김하려는 게 아니다. 중동 내에서 필적할 만한 다른 국가가 없는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해 독자적 패권을 구축하려는 정서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 3년 전의 대통령선거 결과 하나가 이렇게 극적으로 상황을 바꿨다.
먼저 이란은 유럽과의 협력 구도를 한층 강화할 것이다. 향후 독일과의 에너지 및 인프라 협력, 영국과의 금융협력 등을 통해 세밀하게 특화된 협력 발전 전략을 추구할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유럽의 관심은 이란의 정상화를 통한 경제 회복에 방점이 찍혀 있다. 따라서 이란이 지난해 합의한 핵협상안에 커다란 흠집을 내지 않고 이행한다면 유럽 처지에선 가능한 한 이란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본이 한번 흘러들어가 시장에 뿌리내리고 이윤을 창출하기 시작하면 정치적 동기로 이를 되돌리기란 매우 어렵다. 이런 맥락에서 이란은 불가역적인 경제개방과 투자 유치 전략에 매진할 것으로 전망된다.
로하니 정부로선 역내에서의 안정적 역학관계 설정이 관건이다. 무엇보다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긴장관계가 지속되고는 있지만 이란 처지에선 사우디 왕실의 붕괴나 급작스러운 변동은 바라는 바가 아니다. 자국의 영향력 확산엔 관심이 있지만, 사우디 왕실이 붕괴돼 혼돈이 가중되고 반도가 극단주의화하는 수순으로 전개되면 내실을 다져야 하는 이란에도 위기다.



사우디 둘러싼 역학관계

‘걸리버’ 이란, 결박 풀고 패권국으로?

경제제재가 풀린 이란 수도 테헤란의 가전제품 매장. 한국 LG의 가전 제품도 보인다. 동아일보

따라서 이란으로선 차라리 사우디 왕실의 ‘전근대적’ 전통 행태가 유지되면서 점차 노쇠 국가 비슷하게 약화되는 상황이 유리하다고 판단할 것이다. 이 경우 걸프 연안의 왕국들도 술렁일 가능성이 있고, 역내 패권을 추구하는 이란의 영향력이 침투할 공간은 확장된다. 특히 카타르, 오만 등은 사우디아라비아와 구원(舊怨)이 있으므로 언제든 역학관계의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 이란은 지금 내실을 다지면서 막대한 자금력과 투자 기회를 유인으로 삼아 유럽 및 걸프 지역의 우군들을 찾아 미래의 정무적 협력관계를 다지려 하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란은 올해 초 시아파 성직자 알니므르 처형과 관련한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 방화사건의 파장이 어느 정도 잦아들면 사우디아라비아에 유화적 제스처를 보일 것이다. 과거 하타미 이란 대통령과 파드 사우디 국왕 시절 평화협정 직전까지 간 상황을 되새기며, 안보 협력까지는 아니어도 결코 위협이 되지 않는 수준의 외교 행보를 밟으려 할 것이다. 이 경우 적어도 예멘의 후티 반군 문제만큼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면을 세워주는 선에서 이란이 양보해야 할지도 모른다. 결국 사우디 왕실의 판단이 관건이다. 물론 2월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는 자존심의 각을 한껏 세워 예멘뿐 아니라 시리아에도 자국 병력을 파병하려 하고 있다.
미국 처지에선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이란이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개방을 추진하며 치고나가기 때문이다. 유럽과 달리 미국은 공화당의 초지일관 반(反)이란 기조, 그리고 이스라엘과의 관계로 인해 이란과의 정무적 협력은 물론 대규모 경제협력도 현재로선 언감생심이다. 일부 미국 기업은 유럽이 선점해 들어가는 현 상황이 불편할 것이다. 오바마 정부는 이란 핵협상의 의미를 정치적 동기에 둔다. 따라서 비록 제재는 풀어줬지만 이란의 전광석화 같은 개방 행보엔 다소 당황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대이란 행보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제동 걸 의지 없는 미국

미국은 핵 관련 제재만 해제했지 여타 테러 지원 의혹, 재래식 무기 개발과 관련한 대이란 제재는 유지하고 있다. 국무부는 상대적으로 전향적인 대이란 관계를 상정하지만, 지역구 여론에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의회는 여전히 이란에 대해 보수적이다. 이런 와중에 지난해 말 이란 방문 인사에 대한 비자면제 프로그램 대상 제외 법안이 통과되면서 미국의 기본적인 대이란 견제 원칙이 재확인됐다.
다소 불편하고 당황스럽지만 오바마 정부는 최근 이란의 행보에 대해 딱히 제동을 걸 의지는 없는 것 같다. 차제에 이란의 부상에 두려움을 갖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안심시키고, 나아가 이란의 운신에도 어느 정도 속도 조절을 할 수 있는 거중 조정 역할을 하려 들 것이다. 가장 큰 변수는 올해 11월의 미국 대선이다. 선거 결과에 따라 이란 핵협상 자체가 흔들릴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물론 최근 이란의 적극적인 개방 행보엔 미국 대선 변수조차 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려는 의지가 숨어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외교 전략을 펼쳐야 할까. 답은 명확하다. 더욱 적극적으로 협력관계를 다져나가야 한다. 이란의 경제성장 잠재력뿐 아니라 곧 부상할 정치적 입지도 염두에 둬야 한다. 출발은 경제협력으로 시작된다. 2월 말 한-이란 장관급 경제공동위원회가 열린다. 이를 계기로 양국 간 구체적인 협력사업이 제시될 것이다. 석유화학제품군, 자동차 부품, 정보통신기술(ICT), 백색가전 소비재 및 철강 등은 한국의 유력한 수출 품목이다. 정유시설 및 사회 인프라, 플랜트 프로젝트 등은 중동에서 한국 기업의 역량이 비교적 높게 평가돼 진출이 유리한 부문이다. 이란 교역 물동량의 대폭적 증가가 예상되기에 신규 선박 발주 물량도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보건의료 시장 진출 가능성도 높다.
위험 요인도 상존한다. 급속한 개방에도 불구하고 저유가 기조가 이어져 재정 압박이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오랜 제재 국면에서 물류 시스템 자체가 낙후돼 원활한 교역을 기대하기 어렵고, 노동시장 위험지수도 높은 편이다. 여기에 이란 경제를 지배해온 기득권 세력의 조직적 반발, 낙후된 법제, 부패 문제 등이 연관된 운용 위험도도 높아 주의가 필요하다. 제재로 고립돼온 이란 경제 시스템이 국제사회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고, 시행착오도 겪을 것이다. 동시에 한국으로선 기존의 걸프 아랍 우호 국가와의 관계도 섬세하게 유지 발전시켜야 하는 숙제도 안고 있다. 따라서 적극적인 협력 기조를 구축하되 ‘속도 경쟁’을 자제하고 신중한 전략을 짜 진출하는 게 바람직하다.
한국과 이란의 협력 토대는 비교적 튼튼하다. 이란은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해가 깊고, 특히 삼성, LG 등의 백색가전과 휴대전화 등 한국산 제품에 대한 호감도도 높다. 서로를 동아시아의 협력 파트너로 인식하고 있다. 차분하게 오래가는 친구관계를 만들어야 할 시점이다. 올해 상반기로 예정된 양국 정상 방문을 통해 서울의 ‘테헤란로’와 테헤란의 ‘서울로’가 새로운 비전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그 길 위로 고대, 중세의 옛 물목이 아닌 현대의 문화, 역사, 사람, 자원과 첨단기술이 오가는 21세기 실크로드가 재현되기를 기대한다. 






신동아 201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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