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글로벌현장

샌프란시스코 최초 아시아계 시장 에드윈 리의 유산

‘스타트업 도시’ 만든 혁신적 마인드

  • 황장석 ‘실리콘밸리 스토리’ 작가·전 동아일보 기자 surono@naver.com

샌프란시스코 최초 아시아계 시장 에드윈 리의 유산

2/6

이민자 가정의 공부 잘하는 아들

1977년 8월 4일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인터내셔널호텔 앞에서 이 호텔에 세 들어 살아온 노동자들을 강제퇴거하려는 경찰들과 그에 맞서는 학생과 인권단체 활동가, 세입자 등이 대치하고 있다. 당시 UC 버클리 법학대학원 학생이던 에드 리도 투쟁 대열에 참여했다. [사진 Nancy Wong
]

1977년 8월 4일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인터내셔널호텔 앞에서 이 호텔에 세 들어 살아온 노동자들을 강제퇴거하려는 경찰들과 그에 맞서는 학생과 인권단체 활동가, 세입자 등이 대치하고 있다. 당시 UC 버클리 법학대학원 학생이던 에드 리도 투쟁 대열에 참여했다. [사진 Nancy Wong ]

에드 리는 1952년 5월 5일 워싱턴주 시애틀 남부 지역 비컨힐(Beacon Hill)에서 태어났다. 언덕이란 명칭이 붙은 데서 알 수 있듯 가파른 언덕에 있는 가난한 마을이다. 당시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모여든 곳이었는데, 지금도 아시아계가 전체 주민의 40%를 넘을 만큼 많이 사는 지역이라고 한다. 2011년 12월 15일 에드 리 시장은 시애틀의 아시아계 매체 ‘Northwest Asian Weekly’와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내용을 보면 여러 가지가 확인된다. 그는 중국 광둥 지방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이민 온 가정의 여섯 자녀 중 다섯째다. 아버지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며 주방에서 요리를 했고, 어머니는 닥치는 대로 허드렛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49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마비로 숨졌는데 그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다. 그와 형제들은 홀로 생계를 책임지게 된 어머니를 도우며 힘겹게 공부했다. 가난했던 에드 리와 그의 형제들은 당연히 등록금이 없는 공립학교를 다녔다. 그는 공부를 무척 잘했던 모양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동부 메인주에 있는 명문 사립대인 보든칼리지(Bowdoin College)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으니 말이다. 이 학교는 리버럴 아츠 칼리지(순수학문, 풍부한 교양, 학습능력 등에 주안점을 두는 대학) 중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학이다. 미국에서는 통상 돈이 많고 학생 수는 적은 대학의 교육 프로그램이 훌륭하다고들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 학교는 최상위권 대학이다. 학교 웹사이트를 보면 대학원이 없는 이 학교의 학생 수는 1800명가량인데 2017학년(2016년 7월~2017년 6월) 이 학교의 대학기금은 14억6000만 달러였다. 물론 사립대학이면서 종합대학인 스탠퍼드대는 같은 시기 대학기금이 248억 달러로 훨씬 많았다. 다만 학생 수도 1만6000명(학부생은 7000명가량)이란 점을 고려하면 기금 차이가 그렇게 큰 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공립대인 UC버클리의 경우 2016학년 대학기금이 15억9000만 달러로 보든칼리지보다 조금 많았지만, 학생 수는 4만여 명(학부생은 3만여 명)이나 된다(UC버클리는 1월 4일 현재 2017학년 대학기금 통계가 공개되지 않았다). 하여튼 에드 리는 1974년 대학을 졸업한 뒤 변호사가 되고자 UC버클리 로스쿨에 진학한다. 대서양과 맞닿은 동부의 저 끝에서 다시 태평양 연안의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Bay Area)으로 돌아온 것이다. 

에드 리와 샌프란시스코의 인연이 시작된 건 이때부터였다고 해야겠다. 그는 1978년 로스쿨을 졸업하고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러고는 1979~89년 아시아계 저소득층 주민을 위한 법률지원단체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언제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찾지 못했지만 1978년이나 1979년 어느 시점인 듯하다). 에드 리를 인권변호사로 이끈 사건은 1977년 인터내셔널호텔 철거 반대 시위였다. 당시 가난한 필리핀계, 중국계 노동자들이 싼값에 세 들어 살던 인터내셔널호텔이 부동산개발업자에게 팔리면서 이들이 길거리에 나앉을 처지가 되자 이들의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됐다. 투쟁에는 쫓겨날 처지에 있던 노동자와 UC버클리 및 샌프란시스코주립대 아시아계 학생들, 지역 활동가들이 결합했다. 이때 에드 리도 투쟁 대열에 있었다. 육체노동으로 겨우 먹고사는 가난한 이민자들의 주거권을 지키는 건 같은 처지에서 살아온 그에게 남의 일 같지 않았을 것이다.


인권변호사 출신 샌프란시스코 시장

공식 철거를 앞두고 경찰과 시위대가 맞섰을 때 그도 시위대에 있었다. 결국 경찰의 완력에 시위대는 두들겨 맞으며 해산됐고 세 들어 살던 노동자들은 쫓겨났다. 하지만 그 후로도 투쟁이 이어지면서 결국 철거된 호텔 자리엔 원래 부동산개발업자가 원했던 상업용 건물이 아니라 쫓겨났던 필리핀계, 중국계 노동자들을 위한 저렴한 주거시설이 들어섰다. 에드 리는 앞서 언급한 Northwest Asian Weekly와의 인터뷰에서 이 사건을 계기로 가난한 주민들의 주거권과 이민자 권익 보장 같은 사회운동에 적극 나서게 됐다고 밝혔다. 

에드 리는 이후 샌프란시스코 최초의 중국계 시장이자 아시아계 시장으로 선출됐다. 원래부터 정치적 야심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가 시장이 된 과정을 살펴보면 어쩌다 보니 운 좋게 그 자리에 오르게 된 측면이 있다. 샌프란시스코는 2010년 11월 선거에서 당시 시장이던 개빈 뉴섬(Gavin Newsom)이 캘리포니아주 부지사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시장직 공백이 생겼다. 시장직 공백이 생기면 시의회에서 공식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 임시 시장을 임명해야 하는데, 시장직을 노리던 시의원(및 파벌)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임시 시장직을 차지하고자 전면전을 벌이는 대신 2011년 1월 시의회는 가장 정치적 야심이 없어 보이던 에드 리를 그 자리에 앉히기로 결정했다. 그는 당시 시장이 임명하는 5년 임기의 고위 공무원 직책을 맡고 있었다. 가난한 주민을 돕는 법률지원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샌프란시스코시 인권위원회 일을 하게 됐고, 그러다가 다른 공무원 직책을 맡으면서 ‘어쩌다 공무원’ 생활이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2/6
황장석 ‘실리콘밸리 스토리’ 작가·전 동아일보 기자 surono@naver.com
목록 닫기

샌프란시스코 최초 아시아계 시장 에드윈 리의 유산

댓글 창 닫기

2018/06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