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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향한 열정과 도전 - 송상현 회고록

어린 시절 이야기 1941~1963

염천에 악취 풍기던 시체… 전쟁이 나를 法으로 이끌어

  • | 송상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장·제2대 국제형사재판소장

어린 시절 이야기 1941~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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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으로 이주한 志士들

나는 경기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왼쪽은 돌 사진, 오른쪽은 창동초교 1학년 때 어머니와 집에서 찍은 사진이다.

나는 경기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왼쪽은 돌 사진, 오른쪽은 창동초교 1학년 때 어머니와 집에서 찍은 사진이다.

내가 태어날 무렵의 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어서 모든 사람이 물질적, 정신적으로 몹시 어렵고 힘든 시기였다. 된장에 찍은 풋고추 반찬 한 가지에 깡보리밥으로 끼니를 해결하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일본의 단말마적 항전으로 인해 영미 연합군이 서울을 폭격할지도 모른다는 판단하에 서울 교외인 창동 마을로 옮겨 자리 잡은 명사가 많았다. 위당 정인보(초대 감찰위원장), 가인 김병로(초대 대법원장), 지헌 장현중, 호암 문일평, 일사 방종현, 소설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와 그의 아들인 홍기문, 홍기무 등이 2차대전 말기의 어려운 삶을 창동에서 근근이 이어나갔다. 서울 사대문 안 원서동에 살던 고하 할아버지도 자주 창동으로 나와 우리 집에서 여러 날씩 기거하면서 이곳의 어른들과 조심스럽지만 허물없이 어울리셨다고 한다. 특히 위당과 가인 선생을 끔찍하게 모시고 가까이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모두들 영양실조로 얼굴이 창백하고 일제의 발악으로 기가 죽어 있었으나 유독 고하만은 일본의 패망이 머지않았음을 유난히도 강조하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건국에 대비해야 한다는 뜻을 열정적으로 강조하곤 했다는 것이 집안 내의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후사가 없던 고하 할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를 일찍이 내심 양자로 정해놓고 온갖 비밀스러운 임무를 다 시키고는 언제 투옥되거나 고통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사실상 우리 전 가족의 유일한 생활 책임자로 만들고 싶어 하셨다. 고하는 인문 고등학교를 거쳐 반듯한 대학에 가고 싶어 하는 나의 아버지의 욕망을 포기하게 한 다음 남대문상업학교(현 동성고)에 들어가게 해 주판과 부기 등을 배우게 했다. 만일의 경우에 점원이나 서기로 취업해서라도 집안을 부양할 준비와 각오를 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후일 아버지는 이 대목을 한탄조로 회고하신 일이 있다. 아버지는 고교 시절 주경야독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성적이 우수한 데다가 박준호 교장선생님(박병래 전 성모병원장 부친) 및 담임인 장면 선생(제2공화국 국무총리)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후일 장면 총리가 집권하자 정부의 고위직을 제의받았으나 완강하게 사양했다. 이것은 정치인인 할아버지의 암살 비극을 거울삼아 절대로 정치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그분 나름대로의 의지 표현이었다.


독립운동 구심점, 古下

아버지는 보성전문(고려대 전신) 상과에 진학한 후 머리를 빡빡 깎고 학교를 다녀 각황사 주지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보성전문 상학부를 어렵사리 졸업하자마자 암울한 현실에서도 당시 선망의 직장인 식산은행(현 산업은행) 입사 시험에 대뜸 합격해 한 달에 90원이라는 거액의 월급을 받을 꿈에 부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국내 항일 독립운동의 구심점인 대표적 지도자의 자손이 일제가 세운 금융기관에 근무할 수가 있는가 하는 시비가 고하 주변에서 일어나 결국 출근 하루 전날 이 황금 직장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 대신 당시 유일한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경성방직(현 경방)에 부랴부랴 취직하고 보니 월급이 40원이었다고 한다. 경성방직의 오사카 지점에 수년간 근무하다가 귀국해 창동 집에 정착한 뒤로 아버지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창동역에서 기차로 청량리역에 도착한 다음 전차로 갈아타고 노량진역을 지나 비가 오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영등포 소재 경방의 공장까지 힘든 출퇴근을 여러 해 동안 계속했다. 

어머니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나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신교육을 받은 신여성이다. 결혼 후 복잡한 집안 사정상 생가 시모, 양가 시모 및 서시모 등 사실상 세 분의 시어머니를 모시는 어려움, 나를 낳으신 뒤 약과 음식이 부족하고 요양할 형편이 못 돼 수년간 괴롭혀온 병마, 거의 날마다 창동에서 원서동으로 출근해 고하 할아버지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엄청난 가사업무량, 독립운동 지도자 집안에 가해지는 각종 위협과 공포 등을 감당하면서 한순간도 편하게 젊은 시절을 보내신 적이 없다. 더군다나 광복의 기쁨도 잠깐이고, 1945년 12월 30일 새벽 원서동 고하 댁의 사랑채에서 한현우 등 무뢰배가 시아버지를 암살하는 것을 목격했다. 어머니는 90세를 사시고 2009년 여름에 별세하셨다. 아프리카 밀림 속을 출장 중이어서 임종을 못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아 있으나 내가 국제형사재판소장이 되어 활발한 활동을 하는 것을 본 후 운명하셨다.
 
집안 어느 누가 암살과 같은 엄청나고도 비극적인 사유로 집안 어른이 갑자기 생을 마감하실지 미리 알았겠는가. 아무 준비 없이 황망 중에 유언집행인인 본부인 유차(柳次·본관 고흥) 할머니의 변호인 가인 김병로 선생의 총지휘하에 결국 송씨 문중이 민법상의 정식 친족회의를 열어 나의 부친을 고하의 사후 양자로 입적해 정식으로 법적 가통을 잇게 하는 결의를 했다. 당시 민법에 규정된 대로 사후입양(死後入養) 조치로 인해 그동안 사실상 아들과 며느리 노릇을 한 나의 부모님이 고하의 사후에야 비로소 법적으로 그분의 호적상 정식 입양된 후계자가 됐다. 지금은 가계를 꼭 이어야 한다는 관념이 많이 희석돼 사후양자라는 제도가 민법 개정 시에 폐지됐지만 그 당시에는 중요한 가계 계승 방법의 하나였다. 나는 이처럼 고하의 피를 직접 받은 손자는 아니나 고하의 4남 4녀 형제분 중 손위 큰형님의 3남인 내 아버지가 아들로서 사후입양을 하셨으니 나는 법적으로 고하의 뒤를 잇는 유일한 장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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