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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은 것은 이빨 아홉개 얻은 것은 개혁 프로그램”

김성훈 전농림장관의 ‘농정개혁 29개월 비망록’

  • 육성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잃은 것은 이빨 아홉개 얻은 것은 개혁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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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기의 순간, 그는 시민단체와 농민단체를 원군으로 ‘농정개혁’에 초석을 다졌다. ‘개혁장관’ 김성훈. 98년 3월 그가 김대중 정부의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취임했을 때, 우리 농촌은 파탄 직전이었다. 김전장관이 추진하는 개혁은 곳곳에서 암초를 만났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취임 당시 약속했던 개혁을 완수했다.
김성훈 전농림부 장관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 98년 3월3일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됐을 때 그가 재직하고 있던 중앙대학교 교정엔 축하 대자보가 나붙었다. 그로부터 2년6개월 여. 장관직에서 물러나 중앙대 교수로 복직했을 때는 그를 환영하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농림부 장관으로도 그는 합격점을 받았다. 지금껏 누구도 해내지 못한 수세를 폐지하고 농축협 통합을 이루어냈다. 그는 ‘개혁의 대명사’였다.

김성훈 전 농림부 장관은 참 불운한 사람이다. 장관으로 취임한 직후부터 모진 풍파에 시달렸다. 소값 폭락, 김강용 사건, 구제역 파동, 산불 등이 연이어 터졌다. 김포매립지를 놓고 동아건설과 맞붙었을 때는 둘째 아들의 병역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또한 농축협 통합 과정에는 가족들이 위협에 시달렸고 김전장관 자신은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해야 했다. 그는 재임중 두 번이나 의식을 잃었고 이가 9개나 빠졌다.

“개혁을 멈추면 반동이 시작됩니다”

8월7일 오전 청와대의 개각 발표가 나온 직후였다. 김성훈 농림부 장관은 불과 1시간 만에 이임식을 치르고 과천 청사를 떠났다.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그는 ‘홍시론’을 폈다. “홍시는 때가 되면 떨어지는 겁니다. 나무가 붙잡을 수도 없고, 나무에 붙어 있을 수도 없는 겁니다.” 마치 오래 전부터 경질을 예상한 듯한 대답이다. 이틀 뒤 김전장관은 캐나다의 한 대학에서 남북한과 캐나다의 교류협력을 연구하기 위해 출국했다. 아내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막내 아들까지 데리고 비행기에 올랐던 것이다.

8월23일 오후 김성훈 전농림부 장관의 청담동 집을 찾았다. 이른바 ‘김강용 그림 도둑 사건’이 터졌을 때 세간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곳이다. 현관에 놓여 있는 죽도를 보고 “검도를 배우시나요” 라고 묻자 수행비서가 “김강용이 잡으려고 갖다 놓았습니다” 라고 농담을 건넸다. 그러자 이번엔 김전장관이 놀라면서 “김강용이는 우리 집에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선물로 받은 물건입니다” 라고 말했다.

김전장관에게 ‘신동아’ 9월호를 건넸다. 표지 제목을 훑어보던 김전장관은 “개혁을 멈추면 반동이 시작됩니다” 라고 말했다. ‘신동아’ 9월호 머리기사였던 ‘보수는 반격을 노린다’에 대한 촌평이었다. 장관직에서 물러나면서 ‘6개월 동안은 어떤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김전장관. 하지만 장관 시절 자신을 괴롭힌 루머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이날 저녁 김전장관은 일본에 있는 박태준 전국무총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김전장관이 구제역과 산불 때문에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시절 박전총리는 내각을 책임지고 있었다. 당시 박전총리는 김전장관을 간접 지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으로 날아간 김전장관은 박전총리와 꼬박 24시간을 함께 지냈다고 한다.

“둘이서 시공을 초월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화우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우리 농산물 얘기를 했고, 다이옥신 처리시설을 보면서 우리의 열악한 환경문제를 논했습니다. 새삼 박전총리가 일찍 물러난 것이 아쉽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8월29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잠사회관을 찾았다. 이곳은 김전장관이 국회에 출석하는 날이면 베이스캠프처럼 이용하던 곳이다. 좀처럼 약속 시간을 어기지 않는 김전장관이 이날은 4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김전장관은 “그만두고 나니까 위로한다며 밥을 먹자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중절모를 벗고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은 교수 시절 그대로였다. 하지만 질문에 답하는 자세는 달랐다. 재야 시절 그는 원칙을 강조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젠 현실적인 이야기를 많이 곁들였다. 아마도 2년5개월 동안의 공직자 생활이 가져다 준 변화일 것이다.

―장관직에서 물러나자 마자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떠나셨습니다.

“내가 교수로 재직했던 브리티시콜럼비아 대학에서 초청을 받았습니다. 남북한과 캐나다가 친환경적 농업을 추진하자는 연구인데 이번에 가서 마무리해놓고 왔습니다. 그동안 가족한테 너무 봉사를 못해서 아내와 초등학교 6학년짜리 꼬마를 데리고 갔습니다. 2년6개월 동안 사적인 생활이 전혀 없었거든요. 낚시도 하고 캐나다의 농촌을 돌아다니면서 오랜만에 푹 쉬고 왔습니다.”

―장관을 그만두신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책임에서 벗어나니까 훨훨 날아갈 것 같아요. 그렇지만 저녁에 비가 막 쏟아지면 아직도 장관인 양 착각이 들어요. 걱정이 돼서 잠이 오지 않는 거예요. 장관할 때는 빗소리가 들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거든요. 그러다 ‘아, 나는 장관이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들면 비로소 잠자리에 들게 돼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98년 2월이었다. 기자는 당시 중앙대학교 제2부총장으로 농림부 장관 후보에 거론되고 있던 그를 만난 일이 있다. 평소 농민 위주의 농정개혁을 줄기차게 주장해온 그였지만 장관직에 대해서는 그다지 욕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농림부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솔직히 하고 싶지 않습니다”는 말도 했었다. 그만큼 그 무렵의 우리 농촌은 파탄 직전까지 몰려 있었다.

IMF 직후였다. 기름값을 감당하지 못한 온실 농가에서는 농작물이 얼어죽었다. 젖소 송아지 가격이 개값만도 못한 3만원까지 떨어지자 급기야 젖소를 서울 도심에 내버리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분유 재고도 1만6000톤을 넘어 전국적으로 우유 소비 캠페인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관을 맡고 싶지 않다는 말씀을 하시고 며칠 뒤 조각 명단에 포함됐습니다.

“내가 연구는 많이 했지만 행정 경험은 별로 없었잖아요. 그래서 행정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만약 나에게 의견을 물어온다면 정중히 사양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98년 3월3일 아침 10시10분이었어요. 경기도 안성에서 화상으로 교무위원회의를 하고 있는데 11시에 뉴스 발표하니까 빨리 올라오라고 비서실장에게서 통보가 왔어요. 그러니 사양하고 말고 할 겨를이 없었던 거지요.”

―장관으로 재직한 2년5개월에 대해 만족하십니까.

“국가와 농민을 위해 내 정성과 힘을 다 썼습니다. 재야 때 농촌을 이렇게 바꾸겠다고 연구했던 것 중에서 중요한 건 거의 했습니다. 그렇다고 앞으로 농림부가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겁니다.

―장관으로 취임하던 시절 우리 농촌 사정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나름대로 무슨 복안이라도 있었습니까.

“솔직히 암담했습니다. ‘과연 우리 농촌에 희망이 있는가’하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정부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취임하자마자 소비자 대표, 농민 대표, 시민 대표를 불러서 ‘농소정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장관이 직접 현장을 찾아가서 그 자리에서 결정하는 ‘이동장관실’도 열었습니다.”

―서울 도심에 버려진 젖소들은 농림부에서 키웠다면서요?

“과천 청사에 젖소가 돌아다니는데 송아지 목에 ‘장관님, 기르면 기를수록 빚만 늘어나니 맡아서 길러 주십시오’ 라는 글이 있었어요. 얼마나 가슴이 아프던지…. 여의도 국회의사당, 전경련 회관 앞에 있는 것까지 모으니까 그럭저럭 50 마리나 됐어요. 두 마리는 죽고 마흔여덟 마리는 수원 축산기술연구소와 축협 목장에 보내서 농림부 돈으로 키웠어요. 8개월쯤 지나니까 소값이 회복됐고 그 소들도 중소가 됐어요. 소 주인에게 연락해서 가져가라고 하니까 미안하다며 못 가져가는 거예요. 알고 보니까 그 사람들이 옛날에 나하고 같이 데모하던 농민들이었어요. 그래서 사료값으로 45만원씩 받고 130만원짜리 소를 줬어요.”

―우유 소비를 권장하기 위해 과천 청사에서 우유밥을 즐기셨지요.

“사실은 1966년 하와이에 갔을 때부터 즐겼어요. 지금도 아침에 급하면 우유에 말아먹어요. 그것을 그때 보편화시킨 건데 반응이 아주 좋았어요. 또 한가지 ‘우유폭탄주’도 제가 개발했어요. 기자들이 술 마실 때 맥주에다 위스키를 타서 마시는데 그렇게 하면 위가 다 상해요. 농림부에서는 우유에다 위스키를 타서 마시는 ‘우유폭탄주’를 즐겼어요. 술도 안 취하고 몸도 안 상하고 아주 좋아요.”

아들 결혼식에 몰래 참석

김전장관은 재임시절 두 가지 루머에 시달렸다. 둘째 아들의 병역문제와 ‘김강용 사건’이 그것이다. 김전장관이 수차례 해명했는데도 아직까지 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 많다. 병역문제는 김전장관이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 단골로 등장했다. 김전장관은 아들의 병역문제가 나오면 말을 아끼는 편이다. 불행한 가족사를 떠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아드님 병역문제가 중요한 순간마다 불거져나왔습니다. 처음 그 얘기가 나왔을 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 가정의 비극입니다. 두 아이가 미국에서 태어나서 시민권을 갖고 있었어요. 중학교 다닐 때 미국에서 아이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홀아비가 객지에서 아이들 셋을 기를 수가 없어서 LA에 사는 고모에게 둘째 아이를 ‘양자’로 맡겼습니다. 미국에서 대학까지 마치고 중국을 보내주는 바람에 거기서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그 사이 저는 재혼해서 막내를 낳았습니다. 둘째 아이에게는 내가 참 부끄러운 아버지입니다. 또 장관 재임중에 결혼을 하게 돼 결혼식 때 아무한테도 알리지 못했습니다. 내 수행비서와 운전기사도 따돌렸습니다. 혼자서 전철 타고 가서 밖에서 담배 피우고 있다가 신랑 입장할 때 슬쩍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그 아이는 항상 아버지가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 아이는 오래 전에 국적이탈신청서를 내놓아서 6개월 만 더 있으면 자동적으로 한국 국적이 상실되는 상태였어요. 그런데 장관인 아버지가 자기 때문에 자꾸 비판을 받으니까 미국 국적을 포기하고 귀국해서 한국 군대에 갔습니다. 아버지에게 짐이 되면 안된다고 갓 결혼한 아내까지 외국에 두고 들어온 겁니다. 나는 아버지로서 피눈물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 일로 잃어버렸던 ‘내 아들’을 되찾았습니다. 군대에 가더니 전보다 훨씬 씩씩하고 남자다워졌습니다. 요즘엔 둘째가 누구보다도 저를 많이 걱정해주고 있습니다.”

―장관을 그만두셨으니 막내 아들과도 친해지셨겠네요.

“이번에 캐나다에 같이 가서 보름 동안 참 많은 얘기를 했어요. 아내나 주변 사람도 막내가 캐나다에 다녀와서 얼굴이 환해졌다고 그래요. 학교에 가기 싫다던 녀석이 이젠 자기 친구들도 집으로 불러들여요. 내가 장관에서 물러난 게 그렇게 좋은가봐요.”

―장관 시절엔 친척들과의 관계도 많이 신경쓰였을텐데….

“장관 되고 나서 친척을 일절 만나지 않았습니다. 누님이 두 분, 형님이 한 분 계신데 우리 집에 못 오시게 했습니다. 우리 집을 출입하기 시작하면 주변 사람들이 청탁하게 되고 그러면 제가 난처하잖아요. 내가 장관 그만둔다고 전화하니까, 큰 누님이 ‘이젠 너희집 가도 되겠구나’하고 좋아하시더라구요. 작은 누님도 ‘이젠 비가 내려도 걱정 안해도 되겠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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