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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의 ‘해적 이야기’

기독교 세력의 대반격 해상십자군의 해적 토벌

사라센 해적(下)

  • 김석균 해양경찰청장 | sukkyoon2004@hanmail.net

기독교 세력의 대반격 해상십자군의 해적 토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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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침내 기독교 세력이 해적 토벌에 나섰다. 교황 빅토르 3세는 1087년 해적에게 납치된 기독교인들을 구출하기 위한 ‘해상십자군 전쟁’을 제창하고 유럽 각국의 자발적인 동참을 호소했다.
  • 본격적인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기 10년 전이었다.
기독교 세력의 대반격 해상십자군의 해적 토벌

카스바라 불리는 미로 구조로 설계된 도시.

사라센 해적들은 위장전술로 다른 기독교 국가의 깃발을 내걸거나 약탈하려는 지역과 동맹관계에 있는 도시의 깃발을 내걸고 침입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깃발만 보고는 해적선인지 무역을 위해 드나드는 상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작용한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오늘날 ‘바다의 헌법’으로 불리는 ‘유엔해양법협약’에서는 외국 선박이 국기를 달지 않거나 허위로 달고 항행(航行)하면 해양 질서를 위협하는 중요한 위반사항으로 규정하고 정선해 조사할 수 있도록 한다.

사라센 해적의 침입과 관련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바다에서 오는 적은 바다에서 막으라.’ 이탈리아 남부 연안 주민들은 사라센 해적선이 항구 가까이 들어와서야 그 사실을 알고 혼비백산 달아났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연안은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에 해적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해안에 상륙할 수 있었다.

사라센의 위장 깃발과 약탈

육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외침에 시달리던 비잔틴 제국은 해적으로부터 이탈리아 남부 해안을 방어할 군사력도 없었다. 주민들로서는 해적선이 침입하면 빨리 달아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망루는 이렇게 달아날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어주었다. 망루에서 먼바다에서 들어오는 배를 감시하는 자가 해적선의 출현을 알리면 주민은 귀중품을 챙겨 내륙으로 깊숙이 도망거가나 해적의 손길이 미치지 못할 곳에 재빨리 숨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아라비아산(産) 말을 타고 마을을 파괴하고 불을 지르며 무자비한 살상을 자행하는 해적에게 재산을 강탈당하고 아까운 목숨을 바쳐야 했다. 용케 죽지 않고 살아나더라도 강제로 납치돼 북아프리카의 해안도시로 끌려가 평생을 노잡이나 강제노역을 하면서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해안의 주민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망루를 하나만 세우지 않았다. 해변의 망루에서 연기를 피우면 두 번째 망루에서 이것을 보고 내륙 쪽으로 소식을 전하며 연쇄적으로 침략자의 소식을 전했다. 해적의 습격이 심했던 시기에는 네 번째나 다섯 번째 망루가 세워진 곳에서 사람들이 숨어들어 살았다. 우리나라의 고려나 조선 시대에 변방으로부터 적이 침입하면 산봉우리에 설치된 봉수대에서 연기를 피워 수도에까지 긴급사항을 알리던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그런데 해적의 습격이 줄어든 시기에는 해적의 침입으로부터 도망하기 위한 목적뿐 아니라 언제 다시 바다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기 위해서도 이 방식을 사용했다.

사라센 해적의 집중 표적이 된 곳은 수도원과 교회였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1492년까지를 중세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이 시기는 ‘암흑의 시대’ ‘종교의 시대’라 불린다. 중세는 기독교의 가치가 모든 가치에 우선되고 종교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정당화되던 시기였다.

보르고와 카스바

기독교 세력의 대반격 해상십자군의 해적 토벌

샤를마뉴 대제.

수도원은 교황의 사제들이 모여 집단적인 생활을 하는 곳으로 대부분 마을의 외곽에 자리 잡고 풍부한 재물과 영토를 소유해 해적의 표적이 됐다. 또한 교회는 달아난 주민의 피신처로 이용됐기 때문에 그곳을 습격하면 많은 주민을 한꺼번에 납치하고 재물을 약탈할 수 있었다. 돈이 많은 영주나 부잣집도 좋은 표적이 됐다.

사라센 해적은 해안지방에서 점차 내륙 깊숙이 침입해 마을을 약탈하고 주민을 납치해 갔다. 해적선이 나타났을 때 달아나거나 피신하는 것은 일시적인 방책이었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아예 해적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이었다.

그것은 필사적인 삶의 방책이자 저항이었다. 주민들은 산간벽지로 숨어들어 그곳에서도 가장 험준한 벼랑 위에 마을을 세우고 살았다. 중세에 들어와 지중해 연안 지방의 사람들이 해적으로부터 도망쳐 깊은 산속에 형성한 마을을 ‘보르고(Borgo)’라 불렀다.

해안가 주민은 해적이 항해하기에 풍향이 적합한 여름철에는 산중으로 들어가 ‘보르고’에서 살고 계절이 바뀌면 산에서 나와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해안 지방에 사는 방식을 되풀이했다. 바다 사람들이 산중 생활을 하는 것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나 위험이 덜한 시기에 자신들의 생업 터전인 바다로 돌아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은 또한 선택의 여지가 없는 본의 아닌 이중생활이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해안지역의 마을 단위에서는 일시적으로 가능한 일이었지만 도시라면 사정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수천 명이 사는 도시 전체를 그대로 옮겨갈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현재 살고 있는 도시의 지형지물을 이용하거나 외부의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구조물을 만들어 해적을 방어하거나 피할 방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 방어수단의 하나로 고안된 것이 바로 ‘카스바’라 불리는 대단히 복잡한 미로(迷路) 구조를 가진 도시를 만드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말피 등 이탈리아 북부도시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도시를 건설하면서 편리성과 쾌적성 등의 기능적 이점을 강조하기보다는 오로지 생존을 위한 방편에만 주안점을 두었다. 방어와 생존이라는 처절한 목표가 최우선이었다. 구불구불한 형태의 교묘한 골목길로 형성된 구조에서는 해적이 침입하더라도 쉽게 목표물을 발견할 수 없음은 물론 길을 잃고 지체하는 해적에게 얼마간 저항도 하게 시간을 벌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여러 갈래의 길은 또한 해적의 시선을 분산시켜 도망자로 하여금 안전하게 피신할 시간과 공간을 제공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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