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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로 본 중국 | 대만

변화의 태풍, 중국 ‘돈맛’ 이겨낼까

수난의 ‘반쪽 국가’

  • 글 · 사진 김용한 | yonghankim789@gmail.com

변화의 태풍, 중국 ‘돈맛’ 이겨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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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廟에서 코스프레

변화의 태풍, 중국 ‘돈맛’ 이겨낼까

가오슝 시립문화센터에서 춤 연습 중인 청소년들.

변화의 태풍, 중국 ‘돈맛’ 이겨낼까

중화민국 초대 총통 장제스의 기념관인 타이베이의 중정기념당.

2014년 대만 에바(EVA)항공의 타이베이행 비행기에 올랐다. 항공권에 헬로키티가 그려져 있어 깜찍했다. 그뿐 아니라 기체 전체에 헬로키티를 그려 넣었고, 기내 좌석에도 헬로키티 쿠션이 놓여 있었다. 기내식의 티슈, 아이스크림, 심지어 샐러드 안의 어묵도 헬로키티 상품이었다.
대만 지하철의 마스코트는 일본 만화풍의 귀여운 여자 캐릭터였다. 일본 걸그룹 AKB-48 상점 광고도 자주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가오슝의 공묘(孔廟) 안에 ‘코스프레’ 하는 여성이 많았다는 거다. 공묘가 뭔가? 중국의 영원한 스승 공자의 사당, 즉 중화 문명의 자존심이라 할 만한 곳이다. 그런 곳에서 대표적 일본 문화 활동인 코스프레를 하다니! 대만인들의 일본 문화 사랑은 곳곳에서 눈에 들어왔다.
같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겪었으면서도 한국과 대만의 대일(對日) 감정은 사뭇 다르다. 한국이 일본에 여전히 적개심을 품고 있다면 대만은 일본에 친근감을 갖고 있다고 할까. 일본은 대만에서 문관(文官) 위주의 문화통치를 했고, 수탈을 비교적 적게 하고 근대화의 혜택을 많이 줘서 일본의 과(過)보다 공(功)이 크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식민통치는 식민통치다. 철도와 항만을 건설한 것은 대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 군대를 대만에 신속히 전개하고 대만 물자를 일본으로 더 많이 수탈해가기 위해서였다.
일제가 대만을 할양받기는 했지만, 점령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일본군이 타이베이에서 타이난까지 진군하는 데 4개월이 걸렸을 만큼 대만의 저항은 격렬했다. 점령 후에도 소요가 빈발해 일본은 1억 원을 받고 대만을 프랑스에 팔 것을 검토하기도 했다. 일본 부역자에 대한 시선도 곱지 않았다. 대만 소설가 정칭원은 ‘흰 코 너구리’에서 그 시절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당시 대만 사람들은 일본인을 다리 넷 달린 개라고 그랬는데, 일본인을 위해 일하는 주구(走狗)는 그만도 못하다는 의미에서 다리 셋 달린 놈이라고 했지.”
대만의 대일 이미지가 좋아진 것은 일본 자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국민당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일본인이 비우고 간 고급관료, 사업가 자리를 죄다 국민당이 채웠다. 대만인은 여전히 ‘2등 국민’일 뿐이었다. 일제가 이른바 ‘대동아전쟁’ 때문에 대만의 물자를 수탈한 것처럼, 국민당은 대륙의 국공내전 때문에 대만의 물자를 착취했다.
그러나 양자의 역량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일본은 행정·경영력을 발휘해 대만 내부의 혼란을 수습해가며 수탈했다. 그러나 국민당은 수도꼭지를 아무 데나 달면 바로 수돗물이 콸콸 나온다고 생각할 만큼 근대화에 어두웠으니 행정·경영 역량은 기대할 게 없었다. 국민당은 기업 경영을 제대로 못해 자금이 모자라자 은행에서 거액을 대출해 자금을 메웠다. 대출 때문에 통화량이 부족해지자 통화 발행량을 늘렸고 이에 물가가 폭등했다. 1947년 쌀·밀·면포 가격은 전년 대비 4~5배, 설탕 가격은 21배로 폭등했다.



개가 가니 돼지가 왔다

국민당이 온 후 민생이 도탄에 빠지자 대만에는 “개가 가니 돼지가 왔다(狗去豬來)”는 말이 돌았다. 개는 사납기는 해도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고 절도가 있다. 돼지는 더럽고 먹는 것만 밝힐 뿐 일은 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돼지는 개보다 더 사납고 흉악한 멧돼지였다.
1947년 2월 27일 전매국 직원이 밀수담배 판매 단속이라는 명분하에 담배를 팔던 노점상 할머니를 총으로 구타했다. 보다 못한 시민들이 말리는 과정에서 충돌이 벌어졌고, 급기야 시민 한 명이 사망한다. 그간 쌓여온 대만의 울분이 이를 계기로 폭발했다. 다음날 1만 시민이 경비대와 격렬하게 충돌했다. 시위는 대만 전역으로 확대됐고, 지역 자치와 개인의 자유 보장, 민생 안정, 사법제도 개혁 등 전방위적 사회개혁을 요구했다.
국민당은 협상으로 시간을 끄는 한편 대만에 추가 병력을 파견해 가혹하게 시위를 진압한다. 훗날 대만 정부 공식 발표로만 2만8000여 명이 사망했고, 1960년 호적조사 때는 실종자가 12만 명이 넘은 대참사였다. 대만의 현대사는 이처럼 피로 얼룩진 ‘2·28 사건’으로 출발했다. 정칭원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전후 초기 대만인들은 중국을 ‘조국’이라 불렀어요. 중국인은 대만인을 ‘동포’라고 했지요. 그런데 ‘조국’의 사람이 ‘동포’를 잔인하게 살해한 2·28 사건이 벌어지고 ‘백색공포’의 통치시대가 전개된 겁니다.”
1989년 베네치아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허우샤오셴(侯孝賢) 감독의 ‘비정성시(悲情城市)’는 이 시대의 아픔을 다룬다. 주인공인 문청은 귀머거리에 벙어리다.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고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시대라는 은유일까. 문청은 감옥에서 만난 친구의 유언 쪽지를 유가족에게 전한다. ‘태어나며 조국을 이별했고, 죽어서 조국에 갑니다(生離祖國, 死歸祖國).’ 조국이란 뭔가. 정 붙이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닌가. 대만인들은 그런 조국을 태어나자마자 박탈당했고, 죽어서야 안식을 찾을 수 있었다.
문청의 아내는 시조카에게 편지를 쓴다. ‘우리는 도망가려 했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어.’ 그리고 곧 엔딩 자막이 뜬다. ‘1949년 12월, 대륙은 공산화하고 국민당은 대만으로 철수해 타이베이를 임시수도로 정했다.’ 외지인인 국민당은 대만으로 도망쳐왔지만, 원래의 주인인 대만인은 정작 도망갈 곳이 없었다.


변화의 태풍, 중국 ‘돈맛’ 이겨낼까

가오슝 보얼 예술특구에서 만난 ‘오토바이를 탄 관우’. 전통과 현대를 유머러스하게 조화시킨 대만의 오늘을 보여준다.

덩리쥔, 장후이메이의 수난

대만에서 장제스(蔣介石)는 황제와도 같았다. 87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계엄령을 유지하며 종신 총통의 권좌를 지켰다. 1975년 4월 5일 장제스가 사망하자 대만 정부는 제왕이 승하했을 때나 쓰는 말인 ‘붕조(崩殂)’란 표현으로 서거 성명을 발표했다. 38년간 계엄령(1949~1987)이 유지됐고, 타이베이 천도(遷都) 37년 만에 비로소 야당이 생긴 대만을 당시 한국은 ‘자유중국(自由中國)’이라고 불렀다. 한데 자유중국은 전혀 자유롭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후계자인 장징궈(蔣經國, 장제스의 장남)와 리덩후이(李登輝)는 시대의 요구를 아는 지도자들이었다. 대만은 비교적 순탄하게 민주화의 길을 걸었다. ‘대만의 아들’을 자처한 민주진보당 천수이볜(陳水扁)은 2000년 대만인 스스로 뽑은 최초의 대만 지도자가 된다.
영화 ‘쉬즈더원’에서 베이징 남자 진분은 대만 여자와 맞선을 본다. 여자가 말한다. “우리 가족도 원래 베이징에 살았어요. 그런데 공산당이 베이징을 점령할 때, 할아버지가 대만으로 도망치셨죠.” 진분은 재빨리 끼어든다. “잠깐만요. 우리는 그걸 ‘점령’이 아니라 ‘해방’이라 부릅니다.”
양자의 관점이 이처럼 다르니 말썽이 안 생길 수 없다. 농담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예능을 다큐로 받는다’고들 하는데, 한없이 가벼운 예능도 양안 사이에서는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덩리쥔(鄧麗君)은 대만이 배출한 세기의 가수다. 세계 어디에서든 차이나타운이 있고 중국인이 있는 곳이라면 덩리쥔의 노래를 한 번쯤은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중국에서는 그의 노래가 오랫동안 금지됐다. 중국은 그의 노래를 ‘대중을 현혹시켜 나라를 망치는 노래(靡靡之音)’로 간주했다.
덩리쥔은 국민당 군인이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군 위문공연을 열심히 다녀 ‘군인들의 연인’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공공연히 국민당의 처지에 섰다. “제가 중국 대륙에서 노래하는 날은 (대만의 국가이념인) 우리의 삼민주의가 중국 대륙에서 실행되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배경이야 어쨌건 중국인들은 덩리쥔의 노래에 사로잡혀, 낮에는 덩샤오핑의 교시를 듣더라도 밤에는 덩리쥔의 노래를 듣는다(白天聽老鄧, 晚上聽小鄧).
장후이메이(張惠妹)는 ‘아시아의 여신(亞洲天后)’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걸출한 가수다. 그러나 그녀는 천수이볜 총통 취임식 때 대만 국가를 불렀다가 중국 활동을 금지당했고, 코카콜라와의 광고 계약도 취소됐다. 2004년에야 다시 중국 무대에 설 수 있었다. 중국은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에, 국제무대나 공식석상에서 대만 국기나 국가를 사용하는 것을 반국가활동으로 간주한다.


변화의 태풍, 중국 ‘돈맛’ 이겨낼까

금이 고갈된 후 금광시대를 보여주는 관광마을로 변한 진과스(金瓜石)

변화의 태풍, 중국 ‘돈맛’ 이겨낼까

강남 스타일’을 표방한 타이베이의 옷가게, 타이베이 명물 야시장에서 만난 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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