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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과 자장율사의 합작품 황룡사 구층탑의 비밀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선덕여왕과 자장율사의 합작품 황룡사 구층탑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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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반왕, 즉 석가세존의 부왕 이름을 가진 진평왕이 돌아가자 당연히 그 다음 대는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의 화신이 등장해야 한다. 그래서 미륵의 화신인 원화로 군림하면서 많은 화랑도를 거느리며 그 구심점 구실을 하던 맏공주 덕만(德曼)이 즉위하여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된다. 진흥왕이 꿈꿔 온 미륵세계가 신라에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반(反)진골계 보수귀족 집단의 불만이 꽤 있었던 듯 하나,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와 백제·고구려의 연합 공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위기 상황에서 선택할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민심을 결속시키는 최후 수단으로 선덕여왕 체제를 마지못해 받아들인 듯하다.

더구나 선덕여왕을 원화로 모시며 성장한 화랑 1세대라 할 수 있는 김유신(金庾信, 595∼673년) 세대가 이미 30대 후반이 돼 사실상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실력으로도 이에 맞설 수 있는 세력은 없었다.

또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 선덕여왕이 등극하는 데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했겠지만, 진지왕자이자 진평왕의 사촌아우이며 둘째 공주의 부마인 용수(龍樹)가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미륵세계 구현을 위해 선덕여왕의 등극을 적극 지지한 것이 여왕이 출현하는 데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즉 자신의 부왕인 진지왕이 반진골 세력들에게 밀려나 시해되던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던 용수의 현명한 판단에 의해 진흥왕의 혈족인 진골 귀족이 미륵세계를 신라에 현실적으로 구현해낼 수 있었다는 얘기다. 용수의 이런 심모원려는 결국 진골 귀족의 기반을 안정시켜 장차 자신의 아들인 춘추가 삼국통일의 영웅으로 왕위에 오르고 자신은 통일신라의 시조격으로 추앙받는 결과를 가져온다.

아무튼 선덕여왕이 미륵의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자 백제 무왕은 이에 맞대응이라도 하려는 듯 자신과 선덕여왕의 막내아우인 선화공주 사이에 출생한 의자(義慈, 600∼661년경)를 태자로 책봉하여 백제 미륵의 법통을 확고하게 다져 놓는다.



이에 신라에서는 이미 30여 년 전에 선덕여왕을 초상으로 한 (제10회 도판 1)과 같은 최고 걸작의 미륵보살상을 만들어내 미륵이 신라에 출현한 것을 실물로 증명했다. 하지만 국제적인 공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덕여왕 3년(634) 1월에 인평(仁平)이라 연호를 바꾼 다음 당나라에 여왕의 책봉을 청하여 다음해(인평 2년)에 상주국낙랑군공신라왕이란 책봉을 받아낸다.

그리고 인평 3년(636)에는 진골 출신 승려인 자장(慈藏, 590∼658 년, 도판 3)을 당나라로 보내 신라에서 미륵이 출현한 것에 대해 교단적 차원의 공식 인정을 받아오게 한다.

사실 김씨 왕족이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앞장서 오긴 했지만 진흥왕과 그 왕비가 말년에 출가하여 승려가 된 것말고는 진골 출신이 승려가 된 예는 아직 없었다. 오히려 불교 수용을 앞장서 반대해온 박씨 집안 쪽에서 이차돈이나 원광(圓光) 법사와 같은 큰 인물이 나와 김씨 왕들이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가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마 이들은 김씨 왕족의 내·외척에 해당하는 집안 출신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진골 핵심 가문에서 승려가 출현하여 선덕여왕 등극의 필연성을 교단 차원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는 일에 앞장선 것이다. 자장의 속명이 선종랑(善宗郞)인 것으로 보아 그 역시 덕만공주, 즉 선덕여왕을 원화로 모시던 화랑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종이란 이름 밑에 랑(郞)자가 붙은 것인데, 뒷사람들이 그대로 선종랑이라 잘못 기록해 놓은 듯하다.

자장의 아버지가 선덕과 진덕여왕대에 화백회의를 주도한 6인의 국가 원로 중 네번째 순위에 해당하는 소판(蘇判) 무림(武林)공이었다고 하니 그의 가문과 혈통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래서 선덕여왕은 그가 출가했을 때 이를 허락지 않고 왕명으로 환속하여 재상 직위를 맡으라고 강요했던 모양이다. 이때 자장은 “나는 차라리 하루 동안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백년을 파계하여 살기를 원치 않는다(吾寧一日持戒而死, 不願百年破戒而生)”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목숨을 내놓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자장은 자신이 물려받은 집과 전원을 모두 내놓아 원녕사(元寧寺)라는 절을 만들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홀로 살면서 고골관(枯骨觀, 사람의 몸은 결국 마른 뼈로 이루어진 것일 뿐이라고 보는 생각. 육신의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행 방법)을 닦는데, 가시방을 지어 놓고 알몸으로 그곳에 앉은 채 머리는 들보에 묶고 수행했다 한다. 조금만 움직이거나 졸면 가시가 몸을 찌르고 들보가 머리를 잡아다니게 하는 극한의 고행 수단을 택한 것이었다.

신체적 고통의 한계를 실험하는 가혹한 난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자장은 선덕여왕의 정통성을 국제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인평 3년(636), 즉 선덕여왕 5년에 문인 승실(僧實) 등 10여인을 데리고 당나라로 건너간다. 이때가 당 태종 정관 10년이었다.

신라에서는 선덕여왕이 등극한 이래 벌써 분황사(芬皇寺, 634년 완공)와 영묘사(靈廟寺, 635년 완공) 두 절을 지어 진평왕의 추복사찰로 삼았고 636년 3월에는 황룡사에서 백고좌(百高座, 100인의 고승을 초빙하여 설법하게 하는 불교의식)를 베풀고 승려 100인의 출가를 허락했다. 신라를 명실상부한 미륵불국토로 만들어 민심을 합일시키려는 통치수단이었다. 북쪽의 고구려와 서쪽의 백제로부터 끊임없이 침략당해 빼앗아온 땅을 되돌려주어야 할 형편에 이런 희망조차 없다면 국가의 지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선덕여왕은 동생의 남편이자 당숙인 이찬 용수로 하여금 주군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어루만지게 하는 한편으로 자장을 당으로 보내 자신이 미륵임을 확인시켜 돌아오게 한 것이다.

자장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 권4 자장정율(慈藏定律)을 비롯하여 권3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 등에 두루 언급돼 있다. 당나라 도선(道宣)율사가 지은 ‘속고승전(續高僧傳)’ 권24에도 석자장전(釋慈藏傳)이 실려 있다. 그중에 가장 내용이 풍부한 황룡사구층탑과 자장정율을 기준으로 하여 당나라에서 자장의 행적을 살펴보자.

선덕여왕은 문수보살이 수기한 성골

자장은 당나라에 도착하자마자 제자를 거느리고 문수보살의 상주처라는 청량산(淸凉山), 즉 오대산을 찾아간다. 여기서 자장은 제석천이 천공(天工)들을 거느리고 내려와 만들어놓고 갔다는 문수보살의 소상(塑像) 앞에서 기도하고 감응을 얻는데, 꿈 속에서 문수보살의 마정수기(摩頂授記, 이마를 쓰다듬으며 앞날의 일을 말해주는 것)를 받고 석가세존의 금란가사와 사리 등을 전해받는다. 이 내용은 당나라측 기록인 ‘속고승전’ 석자장전에는 실려 있지 않은데, ‘삼국유사’를 펴낸 일연은 자장이 당나라 사람들에게는 이를 숨겼기 때문이라고 주를 달아 설명하고 있다.

이때 문수보살의 수기한 내용은 ‘삼국유사’ 황룡사구층탑조에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특이한 승려의 모습으로 나타난 문수가 또 이렇게 말했다. ‘너의 국왕은 천축의 찰리(刹利, 크샤트리아) 종성(種姓)에 속하는 왕으로 미리 부처님의 수기(授記)를 받았다. 그러니 특별한 인연이 있으므로 동이(東夷)와 업을 같이하는 족속들과 같지 않다. 그러나 너희 나라는 산천이 높고 험해서 사람의 성품이 거칠고 삐뚤어져 있으므로 사견(邪見)을 많이 믿어서 때로 천신(天神)이 재앙을 내리기도 한다. 그런데 좋은 법문을 많이 들은 비구가 나라 안에 있다면 이로써 군신이 편안하고 만백성이 평화로우리라.’

그 승려는 말을 마치자 사라졌다. 자장이 문수대성의 변화인 줄 알고 피눈물을 흘리며 물러나와서 북대(北臺)를 내려와 태화지(太和池) 못가에 당도하니 홀연히 신인이 나타나 어째서 여기에 왔느냐고 묻는다. 자장이 보리(菩提, 깨달음)를 얻으려 왔다 하니 신인이 예배를 드리고 나서 또 묻기를 당신네 나라에 무슨 어려움이 있느냐고 한다. 자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말갈과 이어져 있고 남으로는 왜인과 맞닿아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는 번갈아 국경을 침범한다. 이웃한 도적들이 날뛰니 이것이 백성들의 근심이다.’

신인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당신네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아서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다. 그러므로 이웃나라가 침략을 꾀하는 것이니 속히 본국으로 귀국하라.’ 자장이 묻기를 ‘귀향한다면 장차 어떻게 해야 이익이 되겠는가’ 하니 신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 불법을 보호하는 용)은 내 맏아들이다. 범천왕의 명령을 받고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서 절 안에 구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9한(韓)이 조공을 바치러 와서 왕국이 영원히 평안하리라. 탑을 세운 뒤에는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사면하면 외적이 해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나를 위해서 경기의 남쪽 언덕에 절 한 채를 짓고 내 복을 함께 빌어주면 나 역시 덕으로 이를 갚겠다.’ 신인은 말을 마치고 옥을 받들어 주고는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때 문수보살로부터 받은 사리와 가사의 내용은 ‘삼국유사’ 권3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조에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자장법사가 가지고 돌아온 것은 부처님의 머리뼈, 어금니, 사리 100톨, 부처님이 입으시던 붉은 비단에 금점 박은 가사 한 벌이었다. 그 사리를 셋으로 나누었는데 한 등분은 황룡사에 있고 한 등분은 태화사탑에 있으며 한 등분은 가사와 더불어 통도사 계단에 있다.”

어떻든 자장은 이렇게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선덕여왕이 석가모니불로부터 이미 미륵보살이 되리라는 수기를 받은 특수한 신분, 즉 성골(聖骨)이라는 사실을 확인받고 이 사실을 증명해주는 신표로 부처님께서 입으시던 붉은 비단에 금점 박은 가사와 부처님의 정골과 치아 및 사리 100톨을 받아 가지고 장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당 태종의 보호를 받으며 장안성 내의 승광별원(勝光別院)과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除寺)에 머무른다.

이로 보면 성골이라는 것은 진골 중에 선덕여왕이나 진덕여왕처럼 미륵의 화신으로서 여왕이 될 자격을 부여받은 특수한 뼈대라는 의미인 듯하다. 따라서 성골 남자는 있을 수 없고 성골이 진골과 구별되는 혈연집단일 수도 없다.

뒷날 김부식이나 일연이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에게만 부여된 성골의 의미를 고려적인 사고로 합리화하느라 진덕왕 이전을 성골이라 했다거나, 성골 남자가 끊어져 여왕이 섰다는 등의 주석을 달아 사고의 한계를 노출한 것이 아닌가 한다. 최치원이 에서 ‘성(聖)이라고도 하나 진골을 일컫는다(曰聖而曰眞骨)’고 달아놓은 비문의 주석(도판 4)도 이런 맥락에서 위와 같이 평이하게 해석해야 할 듯하다.

궁지에 몰린 신라

한편 당시 국제 정세를 보면 당의 천하제패가 순조롭게 진행된다. 정관 14년(640) 8월에 이미 서쪽의 고창(高昌) 왕국을 멸망시키고, 정관 15년(641) 정월에는 종실녀 문성(文成)공주를 토번(티베트)왕에게 시집 보내 서쪽의 평정을 끝낸다.

이에 고구려는 바짝 긴장하여 정관 14년 12월에 왕태자 환권(桓權)을 사신으로 보내 당의 정세를 염탐하게 한다. 백제 태자 의자가 정관 11년(637) 12월에 당에 사신으로 간 전례가 있으므로 고구려에서도 태자를 보냈을 것이다.

이에 당에서도 그 답례를 빙자하여 직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陳大德)을 보내 고구려의 허실을 염탐해 돌아오도록 한다. 이때 진대덕은 고구려 사정을 탐지한 뒤 당 태종에게 “그 나라가 고창이 망한 것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대접이 보통보다 훨씬 융숭했습니다”고 보고했다. 그 말을 들은 당 태종은 이런 말로 고구려 침공 계획을 발설했다.

“고구려는 본래 한사군의 땅일 뿐이다. 내가 병졸 수만 명을 일으켜 요동을 공격하면 저들은 반드시 나라를 기울여 구하려 할 것이다. 따로 수군을 동래에서 출발시켜 바닷길로 평양으로 쳐들어간다면 수륙합세로 빼앗기는 어렵지 않다. 다만 산동 주현(州縣)의 피폐함이 아직 회복되지 않아 내가 백성을 괴롭히지 않으려 할 뿐이다.

” 이는 고구려 정벌이 가까워졌음을 시사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다음해인 영류왕 25년(642) 10월에 당나라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장성 축조를 감독하며 세력을 키운 서부대인(西部大人) 연개소문(淵蓋蘇文, ?∼665년)이 영류왕을 무참히 살해하고 그 형의 아들인 보장왕을 세우는 정변을 일으켜 대권을 장악한다.

또 이해에 백제 의자왕은 즉위 2년으로 무왕의 상기(喪期)가 지나자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7월에 군대를 일으켜 친히 신라의 대당(對唐) 창구인 남양만 일대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함락한다. 또 8월에는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신라의 서쪽 요새인 대야성(大耶城, 합천)을 빼앗고 성주 품석(品釋)과 그 처자를 살해한다. 그런데 품석의 처고타소랑(古陀炤娘)은 김춘추의 장녀였다.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종일 기둥에 기대서서 눈 한번 깜짝하지않고 사람이 지나가도 모르고 있다가 깨어나서는 “아, 대장부라면 어찌 백제를 삼키지 않겠는가”고 부르짖었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의자왕은 그의 이종사촌형이었다. 비록 국가간 이해 관계로 싸움은 피할 수 없다하나, 믿고 항복하는 5촌 조카딸 일족을 잡아죽여 목만 백제 수도인 사비로 보내고 시신은 옥중에 묻었다 하니 그 배신감에 어찌 분노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김춘추는 급하고 분한 김에 앞뒤 생각없이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다가 오히려 새 왕인 보장왕으로부터 수나라 침공 때 신라가 빼앗아간 죽령 서북땅 500여 리를 돌려준다면 응하겠다는 냉담한 반응을 얻고 억류당했다가 겨우 목숨을 건져 돌아온다.

그런데 이에 앞서 8월에는 백제가 다시 고구려군과 협공으로 대당 창구인 당항성(黨項城, 남양)을 공격해 옴으로써 신라에서는 위급을 알리는 사신을 이미 당나라에 보내 놓았다. 마침 당 태종은 이해 10월에 서북의 강자인 설연타(薛延陀) 칸에게 종실녀인 신흥(新興)공주를 시집 보내 회유를 끝마쳤다. 이에 고구려 침공의 기회가 무르익어 감을 기뻐한 당 태종은 정관 17년(643) 3월16일에 자장을 환국시켜 고구려 침략에 대응하게 한다.

황룡사 구층탑

자장의 귀국은 선덕여왕이 표문을 올려 자장을 돌려보내 달라고 하므로 당 태종이 허락했다 하는데, 실제로 당 태종도 자장을 신라로 돌려보낼 필요성이 큰 모양이었다. 당 태종은 자장을 궁으로 불러 비단가사 한 벌과 각색 비단 500필을 내려주고 태자인 고종도 비단 200필을 따로 내려주며 많은 예물을 선사했다. 자장은 본국의 경전과 불상이 미비하다는 핑계로 대장경 한 질과 번당(幡幢) 화개(花蓋) 등 각종 불구와 불상을 얻어 귀국한다.

온 나라 사람들에게 환영받으며 귀국한 자장은 선덕여왕의 명으로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황룡사 9층탑(도판 5)을 건립할 것을 선덕여왕에게 아뢴다. 선덕여왕이 뭇신하를 불러 의논하니 모두가 이르기를 백제에서 장인을 청해 와야 지을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보배와 비단으로 백제의 장인을 청해 오니 이름이 아비지(阿非知; 아비는 결혼한 성인 남자의 일반 호칭이고 知는 존칭이니 백제 아비님, 즉 백제의 남자란 의미로 고유명사가 아님)였다.

백제 아비가 명령을 받고 탑 짓는 일을 경영하는데 이간 용춘(용수라고도 한다)이 이 일을 총괄하였고 작은 장인 200여 명을 거느리게 했다. 처음 찰주(刹柱, 탑의 꼭대기에 세운 장대)를 세우는 날, 백제 아비가 꿈을 꾸니 본국인 백제가 멸망하는 모양이 보였다. 마음 속에 의심이 생겨 손을 놓았더니 홀연히 대지가 진동하며 날이 어두워지는 가운데 한 노승과 장사가 금전(金殿, 金堂)문에서 나온다.

겁에 질려 기둥을 세우자 노승과 장사가 모두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결국 백제 아비는 마음을 고쳐먹고 그 탑을 이루어 놓았다. 찰주기(刹柱記)에서 말하기를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가 42척, 이하의 높이가 183척이라 하고 있다. 자장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에게서 받아온 사리 100톨을 삼분하여 그 3분의 1을 기둥 속에 넣었다.

위 기록은 ‘삼국유사’ 권3 황룡사구층탑조의 내용을 옮긴 것이다.

그러나 1964년 12월 도굴단에 의해 황룡사구층탑지 심초석(心礎石) 안에서 도굴된 ‘신라황룡사찰주본기(新羅皇龍寺刹柱本記)’에는 ‘삼국유사’와 약간 다른 내용을 보인다.

우선 자장이 당나라에 간 해가 선덕여왕 7년(인평 5년), 즉 정관 12년(638) 무술이고, 자장이 선덕여왕 12년(643) 계묘에 본국으로 돌아올 때 남산 원향(圓香)선사에게 사직하는 인사를 하니 원향선사가 관심법(觀心法)으로 신라 형편을 살피고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해동 여러 나라가 모두 신라에 항복할 것이라고 하므로 자장이 이 말을 선덕여왕에게 아뢰어 탑을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내용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이에 비하면 ‘삼국유사’는 종교적인 윤색이 많이 보태진 것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이간 용수에게 감군(監君)의 책임을 맡겼다든지, 대장(大匠)이 백제 아비이고 소장 200인을 거느리고 탑을 지었다는 내용은 양 기록이 같다. 또 선덕여왕 14년(645) 을사에 처음 건축을 시작하여 그해 4월8일에 찰주를 세우고 이듬해인 여왕 15년(646)에 완공했다는 내용도 같다. 철반 이상 높이가 7보(步)라 했으니 1보를 6척으로 잡으면 42척이어서 이도 일치하고 그 이하 높이가 30보 3척이라 했으니 183척과 맞아떨어진다. 영조척으로 환산하면 대략 55.25m이니 탑의 규모가 굉장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으로 수십개 성이 함락당하는 등 국가의 존망을 위협받으면서도, 더구나 적국인 백제의 명장을 보배와 비단으로 사다가 이런 엄청난 규모의 탑을 지었다는 것은 보통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마 이는 전쟁을 치르는 위기 상황이 아니고서는 이룩해낼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오직 이 일을 해냄으로써 불보살의 가피력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적국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는 절박한 일념으로 전국민이 단합해 이루어낸 소산이라 하겠다.

이런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에 신라는 그 힘으로 장차 삼국을 통일해 나간다고 보아야 하겠다. 이는 바로 선덕여왕이 신라에 하강한 미륵보살의 화신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바탕이 돼 이루어진 일일 것이다.

사실 자장이 돌아온 해인 선덕여왕 12년 9월에 신라는 백제가 고구려와 연합해 대거 침공할 계획을 세운다는 소문을 듣고 당에 사신을 보내 군대를 보내 구원해달라고 애걸한다.

그러자 당태종은 “나도 실상 양국의 침략을 받는 너희 나라를 불쌍히 여겨 자주 사신을 보내 삼국이 화친하라고 권했지만, 고구려와 백제가 돌아서면 뉘우침을 뒤집어 너희 나라를 멸망시키고 너희 땅을 양분하려 하니 너희 나라는 무슨 기묘한 꾀를 베풀어 엎어지는 것을 막으려 하느냐”고 묻는다.

이에 신라 사신이 “우리 왕은 일이 궁색해지고 꾀가 다하여 오직 위급을 대국에 알릴 뿐이니 살려주기를 바란다”고 우는 소리로 대답한다. 그러자 당 태종은 제 나라도 지키지 못하는 한심한 꼴을 탓하며 이렇게 모욕적인 말을 한다.

“내가 적은 군사를 움직여 요동으로 들어간다면 너희 나라의 포위를 1년쯤 풀어줄 수 있는데 이후에 뒤를 잇는 군사가 없는 것을 알면 다시 침공할 터이니 공연히 4국이 시끄럽기만 할 뿐이겠지만 이것이 한 계책이다. 내가 또 너희에게 군복과 기치를 빌려주어 2국의 군사가 오면 세우고 벌려 놓음으로써 저들이 우리 군사인 줄 알고 달아나게 한다면 이것도 한 계책이다. 내가 수십 수백 척의 배에 군사를 태우고 곧장 백제를 정벌하고 나서, 너희 나라는 부인으로 주인을 삼아 이웃나라들이 얕보므로 내가 종실 한 사람을 보내 너희 왕으로 삼되 군사를 보내 호위하게 한다면 이 또한 한 계책일 것이다. 너는 어떤 것을 따르겠느냐?”

이에 사신은 대답을 못하고 어물거리기만 하였다 한다. 아무튼 이때 백제는 신라의 숨통을 죄기 위해 11월에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신라의 당항성을 빼앗으려 했는데, 신라는 절박한 그 시기에 황룡사탑을 세울 계획을 갖고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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