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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의 비밀 간직한 명품의 쌍둥이 ‘로스’의 세계

구호·오브제·타임 등 국내 명품 브랜드 백화점가 40~60%로 유혹하는 전문점 늘어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출생의 비밀 간직한 명품의 쌍둥이 ‘로스’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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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로스 전문점’을 자임하는 편집매장이 하나 둘 문을 열고 있다. 패션 의류업계에서 ‘로스(loss)’는 ‘손실’되거나 ‘상실’된 물건을 뜻하는 말. 정확히는 대형 브랜드 제품의 생산 하도급 공장에서 정품 원단으로 제작했으나 정식 유통망을 통해 유통되지는 않는 물건을 가리킨다. 이들은 짝퉁이나 이미테이션과는 또 다른 형태의 ‘저렴이’ 명품으로 인기를 끈다. 태어나자마자 사라진 신상 ‘정품 로스’는 정품의 일란성 쌍둥이일까? 아니면 그럴듯한 사기꾼일 뿐인가?
출생의 비밀 간직한 명품의 쌍둥이 ‘로스’의 세계
부촌으로 알려진 서울 강북 S동의 한 상가. 고풍스럽게 인테리어를 한 패션부티크가 새로 문을 열었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비추는 쇼윈도에는 한눈에도 명품으로 보이는 가방들이 전시돼 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고가의 국내(내셔널) 브랜드로 인기 있는 타임, 데무, 르베이지 등의 2012년 봄 신상(신제품) 가방들과 발렌시아가, 이브생로랑 등의 해외 브랜드 가방들이 ‘백홀릭’들을 기다리고 있다.

패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강남의 편집매장이라고 생각할 만큼 매장 분위기도 독특하다. 보통 편집매장이라 하면 다양한 유통망을 통해 여러 브랜드 제품을 사서 판매하는 곳을 의미한다. 옛날 양품점이 압구정동과 청담동에서 럭셔리하게 진화한 형태라고 할까. 샤넬, 루이비통, 버버리 같은 해외 브랜드에서 국내외의 신진 디자이너까지, 옷에서 구두 서적 음반까지 편집매장의 콘셉트에 맞는 물건을 모아 놓고 판다. 공식 수입처가 아니기 때문에 유통 물량은 많지 않지만 국내외 트렌드를 빨리 보여주고 무명 디자이너를 스타로 키워내는 테스트 매장 구실도 한다.

그런데 편집매장에서는 국내 브랜드의 제품을 팔지 않는다. 해당 기업에서 유통과 브랜드 이미지를 직접 관리하기 때문이다. 타임을 내놓고 있는 ㈜한섬이나 구호, 르베이지를 가진 ㈜제일모직 등도 편집매장을 운영하지만, 그곳에서 자사가 생산하는 내셔널 브랜드 제품을 팔진 않는다.

그렇다면 이 우아한 가게는 최근 프랜차이즈화한 ‘중고명품’ 매장일까? 그러나 중고명품점에서는 아무리 너덜거리는 중고라도 해외 명품만 다루는 것을 나름의 자부심으로 삼고 있기에 ‘국내 명품’은 취급하지 않는다. 30대 꽃미남 사장님에게 물어보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는 로스 전문점입니다.”

“이미테이션이 아니라 ‘로스’”

로스? 삼겹살 로스나 등심 로스에만 익숙한 사람에게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단어다. 패션 의류업계에서 ‘로스(loss)’란 ‘손실’되거나, ‘상실’된 물건을 의미한다.

“대부분 대형 브랜드에선 생산공장을 거느리고 옷이나 가방을 생산해요. 하도급 공장이라고도 하고, 협력사라고도 하지요. 공장에 발주 물량만큼 원단을 주는데, 원단이 불량할까봐, 또는 원단 끝에 재단선이 걸릴까봐 등등의 이유로 좀 여유 있게 줍니다. 게다가 옷은 방향에 맞춰 제 결대로 재단하지 않고 살짝 틀기만 해도 50벌 만들 때 한 벌 정도씩은 더 만들 수가 있어요. 공장에서 원단을 알뜰하게 써서 정품을 더 생산해 납품해주면 고마운 일이죠. 문제는 간혹 나쁜 마음을 먹는 공장 사장님들이 있어서 이걸 뒤로 빼돌린다는 거죠. 그렇게 해서 유통되는 걸 ‘정품 로스’라고 해요.”

패션 디자이너 윤한희 씨의 말이다. 그는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시작한 패션 브랜드 ‘오브제’를 최고의 내셔널 브랜드로 성장시키고, 뉴욕에 진출한 뒤 대기업인 SK네트웍스와 합병했다. 드물게 한국의 패션 산업을 하도급 업체 사정부터 세계화 전망까지 꿰고 있는 디자이너 겸 경영인이다. 그가 “속이 상하지만 정품 로스 유통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로스 전문점의 젊은 사장 설명도 비슷했다.

사실 패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두 번씩은 로스를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무심코 들어간 옷가게에서 직원이 “이 제품은 이미테이션(가짜)이 아니라 로스”라며 은근히 귀띔해주곤 하기 때문이다. 정품 로스를 주장하는 옷에는 해당 브랜드의 라벨이 붙어 있지 않거나 끝이 잘려나간 라벨이 붙어 있다. 백화점 해당 브랜드 매장에 가서 교환이나 환불은 물론이고, 문의조차 하지 말라는 뜻이다.

서울 동대문시장은 물론이고 이태원동, 삼성동이나 강남역 근처 지하상가, 잠실, 이촌동 등 양품점으로 보이는 의류상가에서 이 로스들을 만나게 된다. 의류 로스 중에는 돌체앤가바나, 3·1필립림 등 아시아 하도급 공장에서 나왔다는 해외 브랜드가 많다. 국내 브랜드 로스라는 옷들은 대개 조악한 가짜들이어서 로스의 존재 자체를 믿기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혹시 로스가 있다 해도, 극히 소량일 수밖에 없고, 이것이 우리 동네 양품점까지 들어오기는 어렵다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내셔널 브랜드들이 중국을 중심으로 해외 수출량을 크게 늘리고, 해외에서도 생산을 할 만큼 하도급 공장 수가 늘어나자 정품 로스 물량도 많아졌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말이다. 로스 마켓에서 인기 있는 브랜드인 구호, 르베이지, 빈폴 등을 생산하는 제일모직 관계자는 “여성복 하도급 업체만 1000개가 넘는다. 서울 경기도 지방에 영세한 규모로 산재해 있다. 하도급 업체를 아무리 엄격히 관리해도 일부 유통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고민을 털어놓는다. 제일모직은 현지 법인의 감독 하에 중국 공장에서도 의류를 생산한다.

생산 하도급 공장은 원래 각 브랜드에서 보낸 디자인과 브랜드가 공급한 원단을 갖고 브랜드에서 요청한 수량만큼 납품하지만, 대형 하도급 업체의 경우 자체 디자이너가 있어서 디자인을 역으로 제안하는 일도 많다. 하도급 업체 디자인이 브랜드의 콘셉트와 맞으면 생산을 의뢰한다. 기업은 디자인 비용을 낮추고, 하도급 업체는 디자인료를 받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하도급 공장에서 원단도 알아서 조달하므로 정품 로스의 유혹은 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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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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