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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東亞日報 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작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

  • 글: 김언수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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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
시월 이일 아침. 그는 프라이데이와 결별했다.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그는 책상 서랍을 열어 이제는 시일이 지나 업무상 아무런 가치가 없는 서류 파일들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업무상 다소 가치가 있어 보이는 서류 파일들도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주 많은 것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책상 서랍 속에는 여전히 파일철, 모나미 볼펜, 호치키스, 클립 같은 잡다한 사무 용품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모두 꺼내서 자신의 책상 위에 펼쳐놓고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그에게는 이제 소용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옆자리에 있는 미스 김에게 혹시 이 중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가져도 좋다고 말했다. 미스 김은 그의 책상 위를 힐끔 보고 약간 자존심이 상한다는 표정을 짓더니 고맙지만 자신에게도 그 정도의 사무 용품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책상 위에 펼쳐져 있는 잡다한 사무 용품들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느닷없는 그의 대청소를 보고 사무실 동료들이 다가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프라이데이와 결별을 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동료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동료들이 던진 질문은 그의 난데없는 행동에 대한 형식적인 관심에 불과했으므로 그가 말한 프라이데이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 더 옳다. 동료들은 프라이데이는 또 뭐야? 하고 중얼거리며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동료들이 돌아가자 그는 다시 오른쪽 상단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그 서랍 속에는 업무용 일기장과 명함첩 그리고 가족 사진이 끼워진 액자가 들어 있었다. 그는 우선 명함첩을 꺼내서 그 중 몇 장을 뒤적거렸다. 대부분의 명함들은 이름을 읽어도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 참 웃기는 일이군,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 명함첩은 사진 앨범처럼 얇은 비닐로 덮여 있어 칸마다 명함을 끼워 넣을 수 있게 만든 것이었는데, 그것은 그가 텔레비전에서 무려 7만장이나 되는 명함을 모은 일본의 전설적인 자동차 영업사원을 다룬 휴먼 다큐멘터리를 보고 감동 받아 산 것이었다. 그 전설적인 자동차 영업사원은 수백 권의 명함첩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며 자신은 명함 속의 사람들(7만여 명의 사람들)과 지난 40년간 지속적인 신뢰와 우정을 쌓아왔으며 그 두터운 신뢰와 우정은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이자 성공의 발판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의 전설적인 자동차 영업사원의 말에 지나치게 감동을 받았다. 7만여 명의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우정과 신뢰를 나눌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근사한 것인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 후로 그는 일본의 전설적인 자동차 영업사원이 들고 있던 것과 비슷한 명함첩을 사서 정성 들여 명함을 모으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그도 7만 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몇천 명 정도와는 지속적인 우정과 신뢰를 나누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고작 몇백 명도 안 되는 명함을 가지고 있을 뿐인데도 지속적인 우정과 신뢰는커녕 얼굴도 제대로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프라이데이가 누구지?”

그러나 그는 이제 프라이데이와 결별했으므로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명함첩에서 일일이 명함을 꺼내 쓰레기통에 버리기 시작했다. ‘한진 유통 영업부 과장 김말두’, ‘찌라시, 홍보물, 스티커 전문. 완당 마스터. 대표 구준엽’, ‘신속 배달. 현진 택배. 한기동’ 같은 명함들을 그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는 문득 명함첩에서 일일이 명함을 꺼내는 것이 무척 귀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명함이 필요 없다면 명함첩은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자 그는 명함첩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업무용 일기장 속에는 아직 깨끗한 속지가 많이 남아 있었으므로 그는 그것을 가방 속에 넣었다. 그리고 액자 속에 들어 있는 가족 사진도 가방 속에 넣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가족 사진을 꺼냈다. 가족 사진이 왜 서랍 속에 들어 있었는지 의아했다. 그는 아주 오랜만에 가족의 얼굴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사진 속에는 나이가 들면서 지방과 외국으로 흩어지거나 급환과 교통사고로 죽은 그의 가족들이 아무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다는 듯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언제 우리가 이렇게 손을 꼭 붙잡고 있었을까?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때 그의 입사 동기지만 직급은 한 끗발 높은 K가 다가와서 열시 반에 상무님이 참석하는 ‘공격적 마케팅에 관한 전략회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알았다고 말했다. K가 난데없이 책상 정리는 왜 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웃으면서 프라이데이와 결별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K는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프라이데이? 프라이데이가 누구지? 하고 물었다. 그는 K에게 프라이데이가 누군지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머리 속에서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그는 이리저리 머리 속을 굴려보다가 문득 프라이데이는 내 친구라고 말했다. 잠시 후 그는, 하지만 어쩌면 프라이데이는 내 친구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다시 말했다. K가 뭐야 지금 장난하는 거야? 하고 물었다. 그는 장난하는 것은 아닌데 프라이데이에 대해 잘 설명을 못하겠노라고 말했다. 사실 그는 프라이데이가 누군지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을 더구나 불충분한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아주 곤혹스러운 일이었으므로 그는 딴청 피듯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약간 머쓱해진 K는 덩달아 창 밖을 바라보았다.

창 밖에는 한 사내가 앞 건물의 유리창을 닦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사무실은 17층에 있었으므로 사내도 17층이나 16층쯤에서 유리창을 닦고 있었을 것이다. 사내는 손으로 조절하는 밧줄에 매달려 있었는데 그가 보기에 사내의 장비는 다소 위험하고 원시적으로 보였다. 더구나 밖에는 바람이 심하게 부는지 사내는 모자가 날아가지 않도록 손으로 꼭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앞 건물에 매달려 있는 유리창 청소부는 그와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사내는 이 근처의 빌딩 유리창 청소를 전문적으로 하는 용역업체 직원으로 예전에 그의 회사에 유리창을 닦으러 왔을 때 그와 몇 마디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높은 빌딩에 매달려 유리창 청소를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늙은 사내였다. 그 늙은 사내는 빌딩 창문에 매달린 채로 유리창에 노크를 해서, 죄송하지만 물 한 컵만 얻어 마실 수 있겠느냐고 그에게 매우 공손하게 물었었다. 그는 흔쾌하게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환풍창을 통해 건네주었다. 그때는 여름이었다.

늙은 사내는 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다. 그가 가져다준 컵은 아주 작은 것이었으므로 늙은 사내는 물을 마시고는 조금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그가 컵을 받으면서 물을 더 드릴까요? 하고 묻자 늙은 사내는 그렇지만 너무 염치가 없는 것 같아서, 하고 머뭇거렸다. 그는 정수기에는 물이 많이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하면서 두 번이나 더 물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늙은 사내에게 컵을 건네면서 자신은 높은 곳을 무서워해서 빌딩 유리창 닦는 일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연이어 그는 나이도 많으신 분이 이렇게 높은 곳에 매달려 일을 하시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늙은 사내가 손사래를 치면서 익숙해지면 무섭지도 않고 그리 힘들지도 않으니 대단할 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 일을 오래 했냐고 물었다. 늙은 사내는 한 30년 정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늙은 사내는 그에게 컵을 건네주고 몇 번씩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에 줄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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