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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그리움으로 달려온다

  • | 강맑실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사계절출판사 대표 mskang@sakyejul.com

산은 그리움으로 달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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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삶, 숨, 시, 술, 새 그리고 산. 시옷의 세계에서 튀어나온 한 글자의 말들. 읊조리고 있노라면 숲 향기가 스며들며 숨이 트인다. 그중에서도 나의 정신적 자화상이라 할 수 있는 풍경은 단연 산이다. 산은 유년의 뜰이기도 하다. 무등산 호랑이라 불릴 만큼 기운차게 무등산을 오르내렸던 아버지. 아버지는 막내인 나를 세 살 적부터 산에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아주 어릴 적에는 온 가족이 소풍 삼아 바람재까지만 오르곤 했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버지와 오르는 무등산의 높이와 코스는 다양해졌다. 높이를 뽐내지 않으면서도, 어디로 오르든 다양한 얼굴로 반기며 너른 품에 안아주는 산이 무등산 말고 또 있을까.


산에서 마신 신비한 약

아버지의 산행은 주로 퇴근 후인 토요일 오후와 예배가 끝난 일요일 오후에 이루어졌다. 7형제 중 몇몇 언니 오빠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바로 위 오빠와 언니는 광주에서 중·고교를 다닐 때, 난 초등학생이었다. 언니와 오빠는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가 되면 아버지가 산에 가잘까 봐 집을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아버지의 박봉으로 7형제를 공부시키느라 분주했던 엄마의 삶에는 산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주말에 주로 집에 남은 건 나뿐이었던가. 혼자서 산행할 아버지가 왠지 쓸쓸해 보여 나는 아버지를 따라 주말마다 무등산을 올랐다. 

아버지의 산행 준비는 “약 챙기거라”는 한 마디로 시작했다. 이 말은 곧 나에게 산에 갈 준비를 하라는 신호였다. 교회 장로이던 아버지를 위해 엄마는 성경에 나오는 포도주를 해마다 담가 항아리에 넣고 지하실에서 숙성시켰다. 포도와 설탕만 섞었기에 절대 술이 아니다, 그래서 음주가 금지된 교회에서 포도주로 성찬식을 하는 거 아니냐며, 엄마는 성스러운 음료 다루듯 그렇게 포도주를 만들곤 했다. 

숙성된 포도를 삼베 천에 담아 손으로 일일이 짤 때는 일손이 부족하다며, 어린 나에게도 삼베 천을 쥐여줬다. 마루에 앉아 짜고 남은 포도 찌꺼기가 아까워 짜는 내내 오물거리며 씨를 퉤퉤 뱉다 보면, 파란 가을 하늘이 고추잠자리처럼 뱅뱅 돌며 붉어지다 급기야 캄캄해지곤 했다. 우리 집에서 포도주는 절대 술이 아니었던 거다. 신령한 약이었다. 아버지와 등산할 때마다 나는 그런 약을 수통에 담아 배낭에 챙겼다. 포도주가 떨어졌을 땐 때론 그 약은 인삼주가 되고 때론 엄마가 만들어놓은 또 다른 알 수 없는 신비한 음료가 되기도 했다. 중요한 건 아버지와 등산할 때면 늘 약을 준비했다는 거다. 산에 올라 아버지와 어린 딸은 그 약을 즐거이 마셨다. 추울 때일수록 효과는 컸다. 그래서일까, 시옷의 세계에서 튀어나온 말 중 두 번째로 좋아하는 단어가 술이 되어버린 건. 나에게 술은 여전히 신성한 음료일 뿐이다. 

교사였던 아버지는 방학만 하면 무슨 거사를 준비하듯 긴 산행을 계획했다. 아버지의 보물 상자는 다름 아닌 다락방. 다락방은 흡사 등산용품점을 방불케 할 만큼 등산 도구로 꽉 찼다. 나침반만 해도 기기묘묘한 모양의 것이 수도 없이 많았고, 크기와 기능이 다른 코펠과 버너도 여럿 있었다. 그 당시 서울 을지로에 있던 K2 수제 등산화점에서 주문 제작한 가죽 등산화도 철 따라 몇 켤레씩 얌전히 놓여 있었다. 나와 바로 위 오빠, 언니 등산화까지 합하면 내 눈엔 등산화 가게가 따로 없었다. 

아버지는 다른 곳에는 돈을 쓰지 않았지만 등산용품에 대해서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 당시 언니 오빠와 나는 겨울 등반 때면 겨울용 두툼한 반(半) 스타킹을 두 벌 정도 껴 신고 달타냥이 칼싸움할 때나 입었을 법한 단추 달린 두꺼운 칠부 바지를 입고 등산하곤 했다. 지금도 구하기 어려운 그런 등산복들을 그 옛날 아버지가 어디서 구입했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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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맑실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사계절출판사 대표 mskang@sakyej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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