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호

1966년 ‘월드컵 8강 신화’의 북한 축구팀 44년 만의 기적 가능할까

  • 주성하│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zsh75@donga.com│

    입력2010-01-07 14:1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는 사상 처음 남북한이 동반 진출했다. 최근 조 추첨에서 북한은 ‘죽음의 조’로 꼽히는 G조에서 브라질-코트디부아르-포르투갈과 맞붙게 됐다. 축구는 북한에서 최고 인기 스포츠다. 1966년 런던월드컵 당시 강팀과 맞붙어 ‘8강 신화’를 쓰면서 전세계 축구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북한 축구팀. 44년 만에 또다시 기적을 이뤄낼 수 있을까.
    1966년 ‘월드컵 8강 신화’의 북한 축구팀 44년 만의 기적 가능할까

    제8회 런던월드컵(1966) 북한-이탈리아전. 이탈리아의 `빗자루 수비`를 뚫고 들어간 북한의 `사다리 공격`. 김봉환 박승진 박두익 한봉진 임승휘가 사다리를 이루면서 파게티를 따돌리고 있다.

    지난 6월18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의 킹파드 스타디움.

    사우디와의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 B조 8차전이 끝나자마자 북한 축구 선수들은 서로 붙안고 눈물을 흘렸다. 44년 만에 월드컵 진출을 이뤄낸 것이다. 이는 사상 첫 남북한 월드컵 동반진출이기도 했다. 이들은 평양에서 대대적인 연도환영을 받았다.

    북한 당국도 최상급 포상을 해줬다. 16명이 ‘인민체육인’ 칭호를, 3명은 ‘공훈체육인’ 칭호를 받았다. 북한에서 인민체육인은 스포츠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다. 북한은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선수에게만 인민체육인 칭호를 주고, 아시아권 대회에서 우승하면 공훈체육인 칭호를 준다. 사상 처음으로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인민체육인 칭호를 받은 것은 북한이 월드컵 본선 진출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인민체육인 가족들은 평양의 가장 좋은 체육인아파트로 이사했다고 한다. 특히 지방에 살던 가족들은 아들 덕분에 졸지에 하늘의 별따기만큼 받기 어렵다는 평양시민증을 얻었다. 북한에서 축구가 최고의 인기 스포츠 종목이자 국가가 가장 큰 힘을 쏟고 있는 분야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북한 축구는 왜 40년 넘게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 축구가 최고의 영광을 누렸던 44년 전, 즉 1966년 런던월드컵 8강 신화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1966년 6월30일 북한 대표팀과 스태프 66명이 런던 공항에 내렸을 때 많은 현지인이 구경 나왔다. 당시 유럽인에게 아시아 축구선수는 생소했다. 그들은 북한팀의 평균 신장이 165㎝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북한팀도 문화적 이질감을 느끼긴 마찬가지였다. 공항에 내려 화장실로 간 선수들은 분명 남자 화장실인 곳에서 ‘여성’이 나오자 기겁했다. 통역이 와서야 이들은 남성도 장발을 하고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북한 팀이 도착한 날, 날씨가 좋지 않기로 유명한 런던이 활짝 갰다. 현지 신문들은 “맑은 아침의 나라 선수들이 해를 몰고 왔다”고 보도했다.

    조별 예선이 열리는 영국 북동부 미들즈브러로 이동한 북한팀은 주최 측이 정해주는 호텔을 네 번이나 거절하고, 시 근교의 미완성호텔 세인트조지 호텔에 투숙했다. 사실은 외화를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현지 신문의 관심사가 됐다. 북한 대표팀이 매일 고추 1㎏ 이상을 소비한다면서 “우리 영국인이 고추를 이렇게 먹었으면 아마 폭발했을 것”이라는 호텔 주방장의 이야기도 전했다. 아무튼 미들즈브러 사람들의 눈에 처음 비친 북한 대표팀은 ‘수수께끼 팀’이었다.

    ‘수수께끼 팀’의 기적

    북한팀의 8강 진출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같은 조에 소련, 칠레, 이탈리아라는 당대의 강호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 이 중 전설의 골키퍼 야신이 버티고 있던 소련이 최대 강호였다. 소련은 예상대로 이 조에서 북한과 이탈리아를 제압하고 조 1위로 올라갔다. 소련은 이후 준결승에서 서독에 패배했는데, 소련이 서독에 패배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 있는 이변이었다. 서독은 소련 선수 2명이 퇴장당한 뒤 당대의 축구영웅 베켄바워를 앞세워 가까스로 2-1로 이겼다.

    소련은 첫 경기에서 북한을 3-0으로 이겼다. 스코어만 보면 북한의 완패였지만, 실제론 북한 수비수들이 엄청난 신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공격을 매우 인상적으로 막아냈다. 영국의 ‘더 타임스’는 ‘마지막 골만이 소련이 북한 수비를 완벽하게 뚫은 최초이자 최후의 골’이라고 평가했다. 미들즈브러 사람들은 북한의 실력에 깜짝 놀랐다. 다음 경기인 칠레 전에는 더 많은 팬이 축구장을 찾아 북한을 응원했다.

    칠레도 1962년 월드컵 3위에 오른 강팀이었다. 최종 스코어는 1-1이었지만 슈팅수를 보면 16대 9로 북한이 우세한 경기였다.

    이탈리아와의 경기는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였다. 북한은 소련과 칠레전에서 주전 공격수들이 부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박두익의 골로 1-0으로 이겼다. 예선 탈락한 이탈리아 대표팀은 귀국해서 썩은 달걀 세례를 받아야 했다.

    첫 월드컵 출전에서 북한은 조 2위로 8강에 진출했다. 당시엔 월드컵 본선에 16개국이 올라왔다. 8강전을 위해 리버풀로 이동하는 북한팀의 뒤를 3000여 명의 미들즈브러 팬이 따라왔다. 북한팀의 경기에 매료된 이들이 원정응원에 나선 것이다.

    포르투갈은 1962년 우승팀인 브라질을 3-1로 제압하고 올라온 팀이었다. 북한은 처음 3-0으로 밀어붙이다가 결국 5-3으로 패했다. 당대 최고의 스트라이커 에우세비오가 혼자서 4골을 몰아넣었다.

    북한 주민들은 시차 때문에 새벽 1시에 라디오로 이 경기 생중계 방송을 들었다. 중계는 북한 아나운서계의 전설 이상벽(1997년 작고)이 맡았다. 세 골을 먼저 넣었을 때 이상벽의 목소리는 활기에 넘쳤다. 하지만 한 골 한 골 먹힐수록 그의 목소리는 힘이 빠졌다. “아, 또 유세피오였습니다” 하는 중계방송을 4번이나 들으면서 북한 주민들은 그의 이름을 똑똑히 기억했다. 북한에선 에우세비오를 유세피오라고 부른다. 네 골째를 허용했을 때부터 이상벽은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한 전역이 새벽에 눈물바다가 됐다. 이탈리아가 아직도 박두익을 잊지 못하듯이, 북한 사람들은 지금도 유세피오를 잊지 못한다.

    ‘토털 사커’의 원조

    하지만 북한은 첫 출전한 월드컵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들이 선전한 비결은 뭘까. 사람들은 대개 ‘토털 사커’의 원조를 네덜란드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보다 10여 년 전에 북한팀은 이미 ‘전원수비 전원공격’에 가까운 전술을 펼쳤다. 신장의 열세를 오직 죽어라 달리는 것으로 극복했던 것이다.

    런던월드컵이 열리기 전 “이번 대회에 출전한 북한팀은 어떤 팀이냐”고 묻기도 했던 스탠리 라우스 당시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은 북한과 칠레 경기를 참관한 뒤 주장 신영규를 지목하면서 세계적 선수라고 평가했다. 월드컵이 끝난 뒤 라우스 회장이 “공격에 에우세비오, 수비에 신영규, 골키퍼에 야신이 있다면 세계 최강팀이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북한에 돌아온 축구선수들은 함북 주을 온천 요양소에서 몇 달간 머무르며 최상의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이때 김정일의 정권 장악에 분기점이 된 갑산파 숙청사건이 벌어졌다. 갑산파란 일제 식민지 시절 함경남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공산주의자 계열을 지칭하는 말이다. 김일성은 1968년 3월 비밀리에 열린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유일체제 수립에 방해가 되는 갑산파 숙청을 결정했다.

    이런 숙청 분위기에 대표팀도 말려들었다. 대표팀이 갑산파의 지도자이자 북한 2인자였던 박금철 당 중앙위원회 조직담당부위원장과 김도만 선전담당부위원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이유였다. 실제 박금철과 김도만은 자신들의 업적을 내세우기 위해 축구를 크게 활용하기도 했다.

    분위기가 바뀌면서 선수들은 끝없는 사상투쟁회의를 벌이고 자아반성을 해야 했다. 이 과정에 신영규는 지주 아들이라는 점이 문제가 됐다. 대표팀은 결국 숙청돼 지방에 흩어졌다. 이때의 숙청바람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1968년 중순 지방 중견 간부직의 3분의 2가 공석이었다고 한다.

    당시 북한에는 대표팀이 8강전을 앞두고 제국주의자들의 ‘기생 작전’에 말려들었기 때문에 숙청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포르투갈전을 앞두고 숙소에 침입한 외국여자들과 잠자리를 같이해 다리에 맥이 빠져 5골이나 허용했다는 것이다. 소문의 진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천리마축구단을 자부하던 북한팀이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그렇게 정신자세가 풀어졌다는 점은 믿기 힘들다.

    숙청된 선수들이 가장 많이 배치된 곳은 함경북도 경성군의 생기령요업공장. 노동자가 됐지만 축구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당시 요업공장의 출퇴근길에서 공을 발로 툭툭 튕기며 가는 전직 대표팀 선수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보석은 진흙탕에 묻어도 보석이다. 몇 년 뒤부터 요업공장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 축구단이 전국대회에서 늘 1등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8강 주역 대다수가 함북에서 추방생활을 해서인지 지금도 함북 축구팀은 각 도 축구팀 가운데서 최강이다.

    10년간의 ‘혁명화 기간’이 지난 뒤 북한 당국은 일부 선수들을 복귀시켰다. 이미 현역 나이를 훌쩍 넘긴 까닭에 대개 감독이 됐다. 그러나 일부는 영원히 묻혔다. FIFA 회장이 극찬했던 신영규가 대표적이다. 북한 당국은 그가 1996년에 사망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런던월드컵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월드컵 본선 아시아 선수 최초 골 기록을 가지고 있는 박승진은 1980년대 중반 요덕정치범수용소에 있었다고 한다. 그가 “먹어본 벌레 중에 바퀴벌레가 가장 맛있었다”고 말했다 해서 수용소에서 그의 별명은 ‘바퀴벌레’였다고 한다.

    숙청 대상이 된 축구영웅

    1966년 ‘월드컵 8강 신화’의 북한 축구팀 44년 만의 기적 가능할까

    북한팀의 월드컵 8강신화를 소재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천리마 축구단’.

    2002년 영국인 다큐멘터리 제작자 대니얼 고든 감독이 북한에 들어가 런던월드컵 8강 진출기와 이후 이야기를 담은 ‘천리마축구단’이라는 다큐를 찍었다. 36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8강 주역 중 그때까지 생존자는 박두익 박승진 림중선 임승휘 양성국 리찬명 한봉진 7명에 불과했다. 박승진은 수용소에서 사면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축구팀 감독을 하고 있었다.

    고든 감독은 “북한 선수들은 서양 사람들이 자신들의 스토리를 다큐로 만든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말했다. 자신들이 잊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뻐한 것이다. 이들은 이 다큐를 계기로 그해 미들즈브러를 방문해 환대를 받기도 했다.

    8강 대표팀이 숙청된 뒤 북한에선 “저렇게 세대를 끊어놓았으니 우리 축구가 앞으로 30년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 실제로 북한 축구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스포츠를 정치의 희생양으로 삼은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1960년대 남한은 아시아 최강인 북한과의 대결을 일부러 피했다. 1966년 런던월드컵 예선 때는 북한과의 대결에 부담을 느껴 일부러 출전을 포기하기도 했다.

    북한의 8강 진출에 자극받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1967년 1월 김호, 김정남, 이회택 등 스타들로 양지팀을 창단했지만 남북대결은 이뤄지지 못했고 팀은 3년 뒤 해산됐다.

    남북 축구가 처음 국제무대에서 만난 것은 1976년 방콕 아시아청소년대회 준결승. 이때 한국이 1-0으로 패배했다. 대표팀 간의 첫 경기는 1978년 12월 방콕 아시안게임 결승으로 연장 혈투 끝에 0-0으로 비겨 남북이 공동우승을 차지했다.

    1980년대부터 북한 축구는 확연한 열세를 보였다. 한국은 1980년 9월 쿠웨이트에서 열린 아시안컵 준결승(2-1)과 1989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이탈리아월드컵 예선(1-0), 1990년 중국 베이징에서 치른 다이너스티컵(1-0 )에서 모두 북한을 눌렀다.

    1980년대 북한 축구계에서 주목할 점은 여자축구팀의 창설이다. 여자축구가 1986년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자 북한은 1986년 5월 여자축구팀을 창설하고 이를 전략종목으로 육성했다. 불과 3~4년 전만 해도 공식 출판물에서 “썩고 병든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여자까지 공을 차게 만든다”고 비웃던 것에서 태도가 싹 바뀌었다. 여자축구뿐 아니라 여자유도, 여자역기 등 비난의 대상이었던 종목들이 지금은 북한 스포츠의 효자 종목이 됐다. 초기에는 여자 축구선수를 육상선수 중에서 선발했다.

    남자축구에서 남한에 계속 패하던 북한은 여자축구에서 드디어 반전을 이뤄냈다. 남북 여자축구대표팀 간의 첫 경기는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성사됐다. 북한의 7-0 대승. 당시 첫 골을 넣은 이홍실 선수는 현장에서 노동당원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 북한에서 현장 노동당 입당은 특별한 공을 세웠을 경우에 허용된다. 이홍실 선수는 이후 국제여성축구 심판원이 됐다.

    승승장구한 여자축구와는 달리 남자축구는 세계와의 격차가 계속 벌어지기만 했다. 충격을 받은 북한은 결국 1990년대 초반 파격적인 조치를 내놓았다.

    우선 1990년 북한이 주최하는 첫 국제축구대회인 ‘평양컵 국제축구대회’가 시작됐다. 우승팀 2만달러, 준우승팀 1만달러, 3위팀 5000달러라는 너무나 ‘짠’ 상금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대회는 1992년 3회까지만 열리고 중단됐다. 참가 희망국도 없었을뿐더러 북한의 성적도 시원찮았던 것이다.

    또 다른 대책은 외국인 감독의 영입이다. 헝가리 출신으로 독일 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팔 체르나이 감독이 영입됐다. 분데스리가의 전성기였던 1978~83년 사이 5년간 바이에른 뮌헨FC 감독을 맡았고 두 차례의 리그 우승을 이뤄냈던 이 명장은 1990년대엔 헝가리 한 프로팀 감독으로 추락해 있었다.

    북한 축구의 추락

    체르나이는 1991년 6월부터 1993년 10월까지 북한 대표팀 고문을 지냈다. 대표팀 감독은 북한인이었다. 초기 성과는 괜찮은 듯했다. 부임 4개월 만에 미국에서 미국 대표팀을 2-1로 이겼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체르나이의 북한행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아무리 명장이라고 해도 전권 위임을 받지 않은 한 북한 시스템에서 능력을 발휘할 공간은 크지 않았던 것이다.

    1993년 10월 북한 대표팀은 미국월드컵 조별 예선 경기를 치르기 위해 카타르로 떠났다. 이때 북한은 단 1경기만 이기고 모두 패했다. 특히 한국팀에는 3-0으로 완패하면서 한국에 ‘도하의 기적’을 선물했다.

    당시 체르나이는 카타르에서 곧바로 헝가리로 돌아갔다. 북한 대표팀 단장이던 체육위원회 김모 부위원장은 평양객화차대 노동자로 강직됐다. 당시 북한 대표팀 감독이던 윤명찬 역시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윤 감독은 1999년 한국으로 망명한다. 외국인 고문을 도입했던 개방파들이 된서리를 맞은 뒤 북한 축구는 12년 동안 와신상담에 들어갔다.

    1995년부터 경제난이 본격화하면서 북한 체육계도 어려워졌다. 공이나 축구화가 제대로 공급되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다른 종목에 비하면 축구는 그나마 나았다.

    2004년에 문기남 전 북한 축구대표팀 감독 가족은 한국으로 망명했는데, 문 감독의 아들 문경민씨는 당시 북한 축구선수들은 그래도 육류를 먹었다고 증언했다. 문경민씨는 1990년대 기관차체육단 축구선수로 있으면서 국가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그는 독일에서 광우병이 발생해 수십만 마리의 소를 도살했을 때 북한은 이 쇠고기를 들여왔고, 이 고기가 축구선수들에게 우선적으로 공급됐다고 증언했다.

    경제가 어려운 와중에도 축구 리그는 명맥을 유지했다. 북한에도 리그제도가 있다. 교통사정 때문에 홈경기와 원정경기 형식은 아니지만 1년에 3단계로 나눠 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경기를 치른다. 2월에 시작되는 만경대상대회는 4월에 우승자를 배출한다. 이어 7월에 토너먼트로 진행되는 기술혁신대회가 열리며, 9월에 리그전으로 치르는 공화국선수권대회가 있다.

    3개 대회의 우승팀이 또 경기를 벌여 11월까지 최강자를 가리는데, 우승자가 겹치면 준우승자가 출전한다. 최종 우승자에게는 축구협회장컵과 함께 태국에서 열리는 킹스컵대회 출전권이 주어진다. 꼴찌팀 중 한 팀은 2부 리그로 강등된다.

    1부 리그는 ‘최강팀경기’ 또는 ‘명수급리그’라고 한다. 시기마다 약간 달라지지만 1부 리그에는 보통 12개 팀이 소속돼 있다. 4·25, 평양시, 기관차, 압록강, 월미도, 리명수, 용남산, 경공업성, 대동강, 소백수 등의 체육단이 1부 리그의 고정 멤버다. 이 중 앞의 4개 체육단은 모든 스포츠 종목을 다 갖고 있는 특급 체육단이다.

    또 각 도 축구단 사이의 경기에서 1위를 한 팀이 매년 1부 리그에 올라온다. 도 축구단에서는 함북이 강팀이다. 국가대표팀과 청소년대표팀이 1부 리그에 참여해 경기를 하기도 한다. 경기 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2부 리그는 각 체육단의 2진과 도급 체육단이 소속돼 있다. 이런 식으로 북한에는 5부 리그까지 모두 130개의 전문 축구팀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많은 축구팀을 갖고 있으면서도 얼마 전까지 북한의 FIFA 랭킹은 100위권 밖에서 맴돌았다.

    가장 큰 문제는 선수자원의 부족이다. 북한 전역을 열심히 돌아다녀도 신체적 조건을 갖춘 유망주를 발굴하기 어렵다. 20세 전후의 신체적 조건은 5세 미만 어린 시절의 영양공급에 크게 좌우된다. 하지만 축구선수 재목을 알아보고 유아 때부터 잘 먹일 방법은 없다. 경제난으로 어려서부터 기초체력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선수로 뽑은 뒤 그때부터 아무리 잘 먹여봐야 한계가 있다는 것이 북한 축구관계자들의 고충이다. 재능이 있는 선수를 뽑아도 키와 체격이 따라주지 않아 외국팀에는 고전할 수밖에 없다.

    이런 한계를 의식했기 때문인지 최근 선수 발굴 연령대가 점점 어려지고 있다. 20세 이하, 17세 이하, 15세 이하 팀에 이어 최근에는 12세 이하 팀들도 생겨났다. 여기서는 8~9세 어린이도 뛰는데 이런 팀은 4·25체육단에도 여러 개 있다. 이는 축구 유망주들을 최대한 어린 시절부터 잘 먹여 평균 신장을 키우는 효과를 내기 위해서다.

    하지만 아무리 잘 먹인다고 해도 북한 안에서는 한계가 있다. 최근에는 남측이 중국 쿤밍에서 훈련을 하는 북한 축구팀을 지원하고 있다. 모든 팀이 다 나올 수는 없기 때문에 매 연령대 팀에서 한 개 조씩 나오는 식이다. 한창 자랄 나이인지라 반년 동안만 중국에서 잘 먹다가 북한에 들어가면 북한에 남아 있던 같은 연령대 축구팀과는 키가 벌써 확연하게 차이 난다고 한다.

    세계 놀라게 한 북한 여자축구

    식량난과 신장의 열세는 여자축구도 피해가진 못했지만 그래도 북한 여자축구는 세계 축구계가 깜짝 놀랄 정도로 출범 20여 년 만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현재 FIFA 랭킹 5위로 아시아 최강팀이다. 아직 대표팀 경기 성적은 좋지 못하지만 200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20세 이하 세계청소년월드컵에서 FIFA 랭킹 1위인 독일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FIFA 주관 대회에서 우승은 남북한 남녀 대표팀을 통틀어 처음이다. 2008년 뉴질랜드에서 열린 17세 이하 세계청소년월드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해 명불허전(名不虛傳)의 실력을 드러냈다.

    북한 여자축구의 성공 원인으로는 헝그리 정신이 결부된 강인한 정신력, 강도 높은 훈련, 높은 포상, 우수한 지도자들을 들 수 있다. 여자축구 선수들은 남자 선수들과 훈련한다. 매주 금요일에 진행되는 12㎞ 달리기는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세계대회에서 우승하면 인민체육인과 같은 명예는 물론 온 가족이 꿈에도 바라마지 않던 평양시민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여자축구의 성적이 좋다보니 우수한 지도자들이 남자보다는 여자축구 감독을 선호한다.

    왜 여자만 두각을 나타낼까. 개인적으로는 북한 여성의 기질적 억척스러움이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남남북녀라는 말도 있듯이 북한에서도 최북단인 함북 여성들이 특히 악착스럽고 끈질기다. 아시아최우수선수상을 받았고 북한 여학생의 우상이기도 한 길선희 선수가 함북 길주 출신인 것을 포함해 모스크바에서 우승했던 20세 이하 선수의 절반이 함북 출신이다.

    누가 뭐래도 북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다. 야구나 골프처럼 남한에서 인기 있는 종목은 자본주의 경기라고 배제해왔다.

    축구의 인기가 높다보니 월드컵이 열리면 북한팀이 참가하지 않아도 주요경기는 40분 정도 녹화 방영한다. 여기서 볼 때는 당연한 것 같지만 북한에서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다. 전국을 상대로 하는 TV 채널이 1개뿐이고 그나마 오후 5시부터 11시까지밖에 방영되지 않기 때문에 40분은 매우 귀중한 시간이다.

    하지만 모든 경기가 방영되는 것은 아니다. 그나마 며칠 뒤에야 방영되기 때문에 월드컵이 진행될 때 외교관들이 일부러 호텔에 가서 축구경기를 보기도 한다. 외국인이 숙박하는 호텔에서는 위성안테나로 생방송 경기를 볼 수 있다. 유럽에서 열리는 경기는 보통 새벽 1시에 시작한다.

    북한의 축구사랑

    이때면 자지 않고 아버지의 전화를 기다리는 외교관 자식도 많다. 아버지가 경기를 보고 최종 스코어를 말해주면 아들은 아침에 학교에 나와서 경기 결과를 친구들에게 전해준다. 모두에게 관심이 있는 소식이기 때문이다.

    한 외교관은 새벽에 아들에게 경기 스코어를 불러주다가 “아들아, 인민들은 이렇게 축구에 열정적인데 우린 왜 한 번도 월드컵에 못 나가니”하면서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이번 월드컵 진출로 그 외교관은 드디어 소원을 풀게 된 셈이다.

    축구는 북한에서 가장 개방된 분야다. 홍영조(러시아)와 김영준(중국)처럼 해외에 진출한 북한 선수도 있다. 이번 월드컵에 일본에서 뛰는 정대세는 물론 한국에서 뛰는 안영학까지 북한대표팀에 포함시킬 정도로 문호는 넓게 열려있다.

    해외파가 많은데다 워낙 여러 나라를 다니다보니 북한 선수들은 자국과 세계의 격차를 훤히 안다. 남한의 생활수준도 마찬가지로 잘 알고 있다. 북한에서 이만큼 국제화된 집단은 찾기 쉽지 않다.

    이렇게 개방된 북한 축구 선수들이 탈북한 선배를 남한에서 만나면 어떤 태도를 보일까.

    북한에서 아이스하키 선수로 뛰다가 1999년 탈북한 황보영씨는 한국 아이스하키 대표팀에 소속돼 국제경기에 나가 북한 선수들과 마주친 적이 있다. 황씨에 따르면 북한 선수들은 그에게 “원수”라고 하거나 “나라를 배신한 자는 인간도 아니다”고 하면서 매우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축구에 비하면 아이스하키 선수들은 해외에 나올 기회가 훨씬 적다.

    북한 축구선수였고 현재 탈북해 서울에 사는 문경민씨는 지난 4월 서울 메이필드 호텔에 머무르던 북한 대표팀 선수들을 찾아갔다. 많은 선수가 그의 후배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를 알아본 선수들은 어색한 듯 모두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주전공격수인 홍영조는 그를 계속 바라봤다. 둘은 북에서 같은 아파트 아래위층에서 살면서 형 동생 하며 지냈다고 한다. 홍영조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해외물도 먹었고 아버지인 홍현철은 4·25체육단 축구단장이다. 든든한 배경도 있으니 바라볼 만한 심적 여유와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다.

    문씨는 2005년 7월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렸던 동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북한과 일본의 경기도 찾아가 응원했다. 이때도 북한 선수들은 어색해서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북한에 돌아가서는 “그래도 경민 형이 멀리 찾아와서 우리를 응원해주었다”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평양서 살다가 뒤늦게 탈북해 온 문씨의 할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2002년 북한은 한국의 월드컵 4강 진출 소식을 보도하면서 한국팀의 경기를 녹화중계하기도 했다. 불과 몇 년 전과 비교하면 상당히 유화적인 모습이었다.

    1990년대 북한 체육단 건물 앞에는 월드컵 대전표가 벽보판에 붙어 있곤 했다. 하지만 매 조에 4개 나라씩 적혀 있는 데 비해 한 개 조만 3개 나라가 적혀 있곤 했다. 미국, 일본도 다 올라 있으니 그 공란은 틀림없는 한국인 것이다. 눈가리고 아웅할지라도 북한은 ‘남조선’이란 단어는 절대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주민은 동족인 남한의 16강 진출 여부에 늘 관심을 기울였다. 2002년 한국의 4강 신화는 북한 주민들에게도 기쁜 소식이었을 게 틀림없다.

    북한 축구의 문호는 남쪽을 향해서도 열려있다. 북한 축구팀이 남쪽의 지원으로 중국 쿤밍에서 훈련을 하며, 남측은 체육기자재도 많이 지원했다. 그러나 아직 북한 축구 인프라는 매우 열악하다. 일례로 쿤밍에 훈련 나온 12세 이하 축구선수들은 축구화가 없어 운동화를 신고 나왔다고 한다. 특별히 선발해 내보낸 팀이 이 정도다.

    최근 경직된 남북관계는 스포츠 교류에도 찬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정부의 승인 없이 대북지원을 함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운동화를 신고 중국에 온 북한의 12세 이하 소녀 선수들에게 남측에서 축구화를 공급해주었다가 한국 관계당국의 최종승인이 떨어지지 않는 바람에 다시 회수한 사실도 있다고 한다. 결국 나중에 주긴 했지만 난생 자기 축구화를 처음 갖게 됐다며 즐거워하던 애들에게서 축구화를 회수해 갔을 때 어린 북한 아이들이 느꼈을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앞으로 한 10년 뒤 그 소녀들이 성장해 성인 대표팀 선수가 될 즈음이면 남과 북은 축구 단일팀을 운영할지도 모른다. 축구단일팀은 남북 화해와 상생을 보여주기 위한 이벤트로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그만큼 남북 당국이 결심만 하면 바로 구성할 수 있으며 효과도 만점이란 뜻이다.

    단일팀 구성에서는 남과 북의 실력 격차가 문제가 되지만 남쪽은 남자가, 북쪽은 여자가 강하기 때문에 서로가 남녀 분야에서 똑같이 양보하면 각자 명분도 설 수 있을 것이다.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한반도를 대표하는 축구팀이 월드컵에 나가는 그날은 멀지 않아 보인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