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5월호

“차기대통령 적임자 공개 지지하겠다”

YS의 차기대권 구상

  • 대담: 김종심 동아일보 출판국장, 황의봉 신동아 편집장 정리: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입력2006-10-16 14: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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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동아'는 4월12일 김영삼전대통령을 상도동 자택에서 인터뷰했다. 대외적으로는 남북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남북정상회담이 합의되고, 내부적으로는 국내정치 질서를 재편하게 될 4·13총선을 바라보는 전임 대통령의 시각과 경험담을 듣기 위해서였다. 김전대통령은 저녁식사를 포함해 5시간여 동안 진행된 특별인터뷰에서 94년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 처음 공개되는 몇 가지 중요한 얘기들을 털어놓았다. 또한 김대중 정부 후반기, 특히 차기정권 창출과 관련해 적절한 시기에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밝힐 것임을 시사했다.<편집자> 》
    김영삼 전대통령의 정치적 견해는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뿌리깊은 경쟁의식과 불신을 최대의 분석틀로 삼아 생산되는 것일까. 김 전대통령은 인터뷰 내내,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미움과 라이벌 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는 속마음을 거의 본능적으로 드러냈다. 그 어떤 논리나 명분 이전에 감정부터가 용납하지 못하는 저 두터운 앙금은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김대중 대통령은 거짓말쟁이’라는 말을 자주 하시고 ‘독재자’라는 말도 하셨는데, 앞으로 두 분이 화해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겁니까?

    “나는 야당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건전한 야당이 있어야 그 나라가 잘된다고 생각해요. 인생의 가치 중에서 민주주의가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사실 우리가 대통령 중심제니까 나라가 어려울 때는 국회가 (대통령을)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렇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한나라당 국회의원을 36명이나 빼앗아갔어요. 천하에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야당을 파괴한 거예요. 내가 만나본 한나라당 사람들 가운데는 그때 흔들려서 여당으로 갈 것을 약속한 사람도 많았어요. 그런데 내가 불러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했어요. 만약에 그때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한나라당은 깨졌어요.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서 깨졌다고 봐요. 나는 그래도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한나라당) 지도부에서는 그걸 알면서도 말을 안해요.

    “김대중씨 최대 잘못은 야당 파괴한 것”

    나는 김대중씨가 제일 잘못한 문제 중 하나가 야당을 파괴한 거라고 생각해요. 야당 책임자들이 여기 오면 내가 말하는 게 있어요. 민주주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선거다, 선거를 위해서 야당, 여당, 대통령도 있는데 선거를 부정한 사람은 용서하면 안 된다, 우리가 이승만 박사를 봤고 박정희, 전두환, 다 봤잖느냐, 그러니까 절대 용서하면 안된다, 라고요.



    지난번 광명 보궐선거에서 전재희씨가 떨어지고 조세형 씨가 됐는데 몇십억원을 쓰고 관권선거를 해서 겨우 당선이 됐어요. 거기만 그런 것이 아니고 전부 다 그래요. 그때도 내가 얘기한 게 이것 가지고 싸워야 된다, 이렇게 선거하면 안된다고 했거든요. 선거가 최고의 가치이고 이것 때문에 야당이 존재하는 것 아닙니까?

    내가 야당 시절에 7개월간 국회에 등원 거부한 적이 있어요. 그때 부정선거에 대해서 재선거를 하자고 요구했는데 여당이 안해서 7개월 동안 등원을 하지 않았더니무효라고 해서 반쯤 재선거를 했습니다. 내가 그 얘기를 상기시켰어요. 지금 국회에 들어가고 싶어 죽겠으니까 7개월 (등원 거부) 하라고 하면 너희들은 못할 거다, 하지만 한달만 해보면 김대중이 항복한다,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안 듣더라고. 소리 한번 지르고 또 그냥 지나가는 거예요. 등원거부를 하면 김대중씨가 아무리 독한 생각을 해도 못 싸웁니다.

    얼마 전에 누가 병역비리 관계 조사를 받으러 나간다고 해서 내가 정신이 있냐 없냐고 했어요. 당에 책임있는 사람인데, 내가 못나가게 한 일이 있어요. 이것 때문에 한나라당이 태도를 바꾸고 내 얘기를 하고 나선 것 아닙니까.

    하여튼 김대중씨 졸개가 나더러 외국에 가서 살라고 요구했고, 나도 그럴 바에는 김대중은 하야해라, 그런 거예요.”

    ―일각에서는 김대중대통령에게 정쟁에서 한발 떨어져 국정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당적을 이탈하라는 얘기가 있는데요.

    “나는 근본적으로 대통령이 당적을 이탈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미국 영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 그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씩 배워야 합니다. 내가 대통령 후보가 됐을 때 노태우씨가 탈당을 했거든요. 그때 내가 말리느라고 애먹었어요. 그런데 끝내 내 말을 안 듣고 탈당했거든요.

    이회창씨가 선거 때 기자회견에서 나보고 탈당하라고 했잖아요. 나는 안 할 생각이었어요. 누가 탈당하라면 탈당하고 말라면 말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 안 하겠다고 독하게 마음먹었지요. 그런데 구미에서 전당대회를 하면서 내 허수아비를 만들어 놓고 욕을 보였다는 거예요. 그랬다는 보고를 받고서 ‘에이 더럽다, 내가 탈당하고 말지’ 싶어서 내 스스로 탈당한 거예요.

    이회창씨가 내 욕만 안 했으면 쉽게 당선됐죠. 김대중씨하고 겨우 15만 표 차이로 졌잖아요(당시 김대중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실제 표차는 30만 표였는데, 이후보가 15만 표를 더 받았으면 김후보의 표 15만 표를 끌어오게 돼 당락이 뒤바뀌었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92년 대선에서 내가 김대중씨보다 200만 표를 더 받았으니까, 내 욕 안 했으면 이회창씨는 100% 당선됐죠. 결국 자기가 지는 방법을 강구한 거예요.”

    김태정 총장에게 수사 유보 지시

    ―이총재와 단단히 틀어지게 된 게 DJ비자금 수사 유보조치 때문이었죠?

    “이회창씨가 김대중씨 비자금 문제를 조사하라고 했을 때 한나라당 의석이 과반수였잖아요. 진짜 큰 사건이었으니 한나라당이 국회에서 계속 수사를 요구했죠. 그런데 대통령 선거가 바로 눈 앞에 있지 않았습니까. 김대중씨가 비자금 갖고 있는 걸 내가 다 알았지만 이걸 조사하라고 했으면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거예요. 대통령 선거도 없는 거죠. 나도 대통령 임기 못 마쳤을 겁니다. 내가 그때 참 심각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가 사실상 수사 중단시킨 것 아닙니까. 내가 중단시키지 않으면 누가 중단시키겠어요? 검찰총장? 웃기는 얘기지…. 그런 걸 검찰총장이 제 맘대로 할 수 있어요?”

    ―혹시 퇴임 후에 김대중 대통령한테 섭섭함을 느낄 때면 그때 비자금 수사 유보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까? 지난 일이지만 ‘확 터뜨려 버려야겠다’고 생각하신 적은 없었나요?

    “그런 생각은 안 해요. 그때 내가 수사 유보시킨 건 옳았다고 생각해요. 과거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내가 김대중씨를 좋아하진 않지만, 그때 내 결정은 옳았다고 생각해요.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됐을지 생각해 보세요. 김대중씨가 대통령 안 되는 것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김태정 당시 검찰총장한테 한 마디 했어요. 김태정씨는 내 지시 받고 수사 유보한 겁니다.

    내게 나쁜 생각이 있었으면 김대중씨 계좌를 조사할 수도 있었겠죠. 이런 저런 보고를 받아 김대중씨한테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런 걸 일절 안 했습니다. 김대중씨가 북한 갔다온 서경원 의원한테 1만달러 받았다가 문제가 됐죠? 켕기는 게 있으니 도둑 제 발 저린 격이었죠. 김대중씨가 겁이 나서 나한테 전화해 ‘정치 안 하겠다’고 하고는 은퇴성명 내고 영국으로 가버린 거예요. 그리고는 숨어서 엎드리고 있으니까 내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같거든. 자기가 여기서 돈 갖고 장난친 게 있는데도 내가 아무 것도 안 하거든. 내가 김대중씨 조사하라고 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김대중씨가 ‘아, 이제 돌아가도 되겠다’ 싶어서 복귀하게 된 거예요. 나는 그 사람을 너무 잘 알아요. 내가 몇번 속기도 했지만….”(참고로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이 터진 때는 89년이고 김대중 총재가 정계은퇴하고 영국에 간 대는 93년이다.)

    ―김종필씨는 재임 초까지만 해도 여권과 내각제를 같이 해보려고 기다린 듯한 인상을 받았는데, 그 쪽에서 한 번도 요청한 적이 없었습니까?

    “그런 요청은 받은 적 없어요. 나는 김종필씨 하고는 인연을 갖고 있어요. 나는 개인적으로 김종필씨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 딱히 그럴 만한 이유도 없고. 하지만 김종필씨가 중앙정보부장 할 때 내가 만일 그 사람의 회유에 넘어갔으면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거예요. 나는 평생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97년 대선 때 권영해 안기부장이 북한하고 공작을 했다느니 안 했다느니 시비가 일었습니다. 그걸 막기 위해서 국민회의가 역으로 북한과 내통을 했다는 얘기도 있었고. 당시 실제로 그런 시비가 생길 만한 일이 있었습니까.

    “나는 근본적으로 대통령은 절대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청와대 수석들에게도 ‘절대 중립 지켜라,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저쪽에서 지레 내 마음을 읽으려 했던 것 같아요. 물론 안기부에서도 사안에 따라 달랐겠지만. 권영해 부장이 직접 뭘 했느냐와 상관없이 안기부는 늘 그럴 수 있는 집단이거든요. 그래서 나는 권부장에게 늘 ‘기합’을 주고 있었어요. 절대로 (선거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했던 겁니다. 나는 꿈에도 그것(안기부의 북풍공작)을 상상하지 못했어요. 아마 밑에 있던 사람들이 공연한 짓을 했던 것 같아요. 한심한 사람들이지.”

    “이회창이 내 덕을 얼마나 봤는데…”

    ―좀 다른 사안입니다만, 국세청이 동원된 모금사건도 자주 언급됐습니다. 그 사건 역시 일부에서 개인적으로 사고를 저질러 일어난 일입니까?

    “그래요. 그런 부분들이 있었다고 봐요. 그런 나쁜 놈들이 있었을 겁니다. 정말 나쁜 놈들이지…. 어떻게 국민들이 나라에 낸 세금을 선거자금으로 내놓느냔 말이야.”

    ―당시 고건 총리의 주례보고에서 맨 먼저 하신 주문이 중립을 지키라는 것이었죠?

    “내가 고건씨를 총리에 임명한 것은 그 사람이 행정능력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도 호남 출신이었기 때문이에요. ‘밑에 있는 사람들이 잘못하면 선거가 또 지역적으로 흐를테니 가장 중요한 것은 공명정대한 선거로 치르는 것이다, 그게 당신의 임무다’ 하고 고건 총리한테 지시한 거예요. 고건씨가 지금도 우리집에 찾아와요. 내가 고건씨에게 총리를 시킨 것만 봐도 참으로 중립의지가 강했던 거예요.”

    ―대선에서 중립을 안 지키셨으면 DJ가 당선됐을까요.

    “절대로 안 됐죠. 중립을 지켰으니 이회창씨가 내 욕만 안 했어도 이회창씨가 당선됐을 거예요. 나는 그래서 늘 기회라는 건 언제나 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기회는 일단 놓치면 다시 잡을 수 없어요. 바로 그때가 최상의 기회였어요. 100% 당선되는 거예요. 내 얘기를 뭣하러 합니까? 영남표가 왜 달아났겠어요? 나를 욕한 것 때문이잖아요. 나더러 탈당하라면서 선거 2∼3일 전부터 ‘YS와 DJ가 똑같다’느니 하면서 신문 1면 광고를 내니 영남 유권자들이 ‘어, 이것 봐라?’ 한 것 아닙니까.

    ―이회창씨가 당선되지 않겠다고 느끼신 게 그때부터였습니까?

    “그래요. 내 혜택을 제일 많이 본 사람이 이회창씨 아니요? 감사원장, 국무총리, 당 대표, 대통령 후보… 이런 자리를 다 내가 시켰잖소. 그런 나를 그렇게 대했으니…. 그 사람더러 ‘배은망덕하다’고 한 사람은 박종웅 의원이었지만, 다른 사람들도 다 이회창씨더러 배은망덕하다고 하잖아요”

    ―지난번에 이회창씨가 상도동을 찾아뵌 것으로 서운한 감정을 씻으셨습니까?

    “아침 일찍 와 가지고 다 자기가 저지른 일인데 ‘국난’이라고 그러데. ‘국난을 당했으니 이걸 수습해 주실 분은 김대통령뿐입니다’ 이러더라고.”

    ―정치 선배로 모시겠다는 뜻이었나요?

    “정치 선배가 아니지. 내가 기른 사람인데…”

    ―아까 비자금 얘기를 하셨는데, 정치자금 수사 문제에는 늘 공정성 시비가 생기는 것 아닙니까.

    “솔직히 얘기해서 5년 동안 돈을 안 받는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1000만원만 받았어도 지금 김대중씨가 나를 그냥 두지 않았을 겁니다. 나는 재벌들을 만나서도 공언했던 것처럼 재임 5년간 한 푼도 받지 않았습니다. 받았더라면 내가 퇴임하고 나서 김대중씨가 내 뒷조사했을 때 어딘가에서 튀어나왔을 겁니다. 어떤 놈이 나한테 돈 갖다줬다고.

    그것 때문에 우리 동창이며 후배들이 이리저리 불려다녔어요. 붙들려 갔다온 사람들 얘기를 들어 보니까 검사가 심할 정도로 잠을 안 재우고 몰아치더래요. 그렇게 당하니까 거짓말이라도 하겠더라는 거예요. 줬다고 거짓말이라도 할 정도까지 갔다는 거예요. 내가 돈 받으려고 했으면 대통령 하기 전에도 받았는데 왜 안 받았겠어요. 그 사람들한테 제일 먼저 돈을 받았겠죠. 친하니까. (대통령이 나처럼)돈 안 받는 건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있기 어려울 거라고 봐요. 선거가 여러 번 있었지만 나한테 직접 돈 받은 사람도 없어요. 과거에 내가 야당 총재 할 때는 당에서도 돈을 쓰고, 개인적으로도 돈을 주고 선거하니까 얼마씩 쓰라고 주기도 했지만….

    그런데 요즘은 ‘정당귀족’이더군요.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돈이 나오도록 만들어주고, 몇백억원을 쓰고…. 과거에 이런 걸 상상할 수 있었어요? 내가 대통령 때 법을 고친 것 아닙니까. 야당한테 돈이 안 가고 너무 불공정했기 때문에 일본처럼 여당 야당 할 것 없이 나눠주는 게 좋겠다 싶어서. 내가 야당 할 때는 사실상 공적자금으로 썼지. 내가 조달해 와서 출장 가는 사람 있으면 쓰라고 주기도 하고… 이런 식이었어요. 박정희, 전두환 시절에 야당은 참 어려웠어요. 내가 아까 살아있는 게 용하다고 했잖아요.”

    ―김대중 정부 출범 2년이 지났습니다만, 그 동안 야당은 야당의 몫을 제대로 했다고 보십니까?

    “내가 그래서 야당은 야당다워야 된다고 하잖아요. 싸워야 된다는 거죠. 내가 야당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작년 5월 일본 가는 길에 김포공항에서 테러사건이 났을 때였어요. 민주주의에 의해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지낸 내가 그 꼴을 당했는데도 야당이 한 마디도 안 하는 걸 보고 저건 야당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김대중씨도 전직 대통령이 그런 일을 당했으면 문제를 삼았어야죠. 자기도 얼마 안 있어 그만둘 사람이니까. 철저히 조사해라고 해야 되지. 그런데 김대중씨는 그럴 사람이 못되니까 제쳐놓더라도, 야당은 당연히 그랬어야지. 일반 국민이 국제공항에서 그런 일을 당했다고 해도 중대한 문제죠. 하물며 전직 대통령이 공항에서 그런 일을 당했는데 아무 말도 안 한다는 건 야당이 아니라는 얘기죠. 내가 그때 한나라당은 2중대라고 했어요. 야당은 야당다워야죠. 내가 야당 총무, 총재를 15년 했는데, 그때는 단일 야당 아니요? 자민련 같은 당은 없을 땐데 참 무섭게 싸웠어요. 그래서 결국 박정희가 죽은 거예요. 나를 국회의원 제명 안 했으면 박정희는 안 죽었죠.”

    “DJ 레임덕 심해질 것”

    ―이번 총선을 앞두고 민국당 사람들이 도와달라고 그렇게 요청했는데도 확실하게 도와주지 않은 것은 그 당도 야당다운 야당이 못되기 때문이었습니까?

    “나는 민국당과 한나라당 모두 초연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선거 때 지방에 내려갈 생각도 있었는데 돌아가는 걸 가만히 보니까 내가 어디로 가면 그쪽 도와주러 가는 거라는 인상을 줄 것 같아 안 가기로 한 거예요. 한나라당에도 나하고 가까운 사람이 많이 있고, 민국당에도 민주주의를 위해 오랫동안 같이 일했던 사람이 많이 있어서 내가 어느 당은 돕고 어느 당은 안 되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거죠.”

    ―민국당 후보들이 처음엔 제법 많이 당선될 것처럼 봤는데, 실제로 득표전에서 힘을 못 쓰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보십니까?

    “내가 아, 이건(민국당은) 안 되겠다 싶었던 이유가 있어요. 조순, 장기표, 김상현… 이런 사람들이 싸워야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장수가 싸워야 된다는 겁니다. 장수는 싸우지 않고 졸병들더러 ‘너희는 나가서 죽어라’ 이래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서울에 나왔으면 관심이 확 쏠린다고. 조순 총재가 종로에 나왔으면 당선됐을 거요. 그렇게 되면 장기표씨도 되고. 내가 그때 가만히 보니 안 되겠다 싶더라고. 민국당 여익구씨가 우리집에 왔을 때 내가 (민국당은) ‘희망이 없다’고 했어요.”

    ―16대 총선이 끝나면 정치권이 뭔가 개편 바람을 탈 것으로 보십니까?

    “상당히 급박하게 전개된다고 봐야죠. 우선 김대중씨만 해도 그래요. 이젠 민주당 사람들이 김대중씨와의 관계를 그렇게 죽기 아니면 살기로 유지할 필요가 없거든요. 김대중씨가 이제는 공천을 할 것도 아니고 2년 좀 더 지나면 대통령도 그만둘 건데, 자기(민주당 의원)들 임기는 4년이거든. 선거 끝나면 레임덕이 크게 옵니다. 과반수 의석을 유지해도 그럴진대 과반수도 안 되는 상황이라면…”

    ―JP와 DJ의 공조는 가능하겠습니까?

    “그것도 어렵다고 봐요.”

    ―차기 대권 얘기도 슬슬 나오는데, 다음 대통령 주자는 누가 될 것으로 보십니까? 정권이 바뀔까요?

    “당연히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남 출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젠 우리가 바꿔보자’는 생각을 강하게 할 거고, 그렇게 되면 그것은 어느 정도 먹혀들 거고 국민의 지지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바꿔보자는 말씀은, 호남에 한 번 정권이 갔으니까 이번엔 다시…

    “지역적인 얘기가 아니고, 정권을 바꿔보자는 얘기가 강력하게 나올 거라는 거지.”

    ―현실적으로 이회창씨나 이인제씨가 가장 앞서 나가고 있는 것 아니냐는 게 일반적인 얘기 같은데요.

    “꼭 그렇게 생각할 건 없고, 상당히 많은 변화가 올 수 있어요. 시간이 있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가 1년 후에 있다든가 6개월 후에 있다든가 하면 모르지만, 아직 2년 반 이상 남았잖아요. 솔직한 얘기로 내가 대통령이 되기까지는 싸우고 또 싸워서 우리 민주주의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돼 있었잖아요. 그때 어떤 사람은 피해 다니기만 했죠. 일본 가서 1년 있고 미국 가서 3년 있고….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예요. 내가 김대중씨한테 200만표를 이겼어요.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사람을 선택하겠다고 생각한 거죠. 내가 그렇게 오래 싸워서 됐는데,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잖아요. 김대중씨가 다시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민주연합론’은 야당 빼가기용 유혹

    ―김대중 정부 초기에 이른바 민주대연합론이 여권에서 거론됐습니다. 김대중 정부의 주체세력과 문민정부 주도세력의 연대가 실제로 안 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내가 그걸 느꼈는데, 그 쪽에서 민주계 사람들한테 그렇게 유혹했습니다. 와서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전부 데리고 가려고 했어요. 그때 내가 정신 차리라고 안 했으면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다니까. 난 그 얘기 듣고 이 사람이 또 속인다고 생각했어요. 민주당에서는 그럴싸하게 민주계 사람들을 설득했어요. ‘그래도 우리는 과거에 민주화 운동도 같이 한 동지 아니냐, 그러니 같이 하자’고. 그럴 듯한 얘기거든요. 그렇게 해서 데리고 간 사람이 많았고, 나중에 가려고 한 사람도 많았다니까요.”

    ―결국은 현 정부의 액션이 진심이 아니었다고 받아들이신 겁니까?

    “그 당시 한화갑씨가 전두환을 목포로 데리고 가지 않았습니까. 그런 걸 갖고 ‘동서화합’이라고 하나요? 그런데 나한테는 작년 3월까지 청문회에 나오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무슨… 그게 다 김대중씨가 지시한 것 아닙니까. 김대중씨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어요.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지. 내 말은 김대중씨한테 50%의 책임이 있다 이거에요.

    지금 와서 IMF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고 있지만, 기아자동차 문제만 해도 그래요. 이인제씨, 이회창씨 다들 가서 국민기업이니 살려야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때 제일 선두에 섰던 사람이 김대중씨예요. 기아 문제가 우리의 대외 신인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니까요. 기아 문제만 그렇게 안 됐어도 내 임기 중에 그런 일(환란)은 없었다니까요. 그게 IMF로 가는 결정적 요인이 돼버렸어요. 그래놓고도 몇 달이 지나니 그건 안중에도 없더군요. 김대중씨, 이회창씨, 이인제씨는 나라가 망하고 흥하고는 안중에 없고 그저 선거에서 한 표 더 오느냐 덜 오느냐 오직 이것 때문에 행동을 하는 거예요. 나쁜 사람들이더라고. 그때 이 사람들 정말 미쳤다 싶더군.”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2등을 하셨는데 그 다음 선거에서 대통령이 되셨고, 또 그때 2등이었던 김대중 후보가 그 다음 대선에서 당선됐습니다. 이걸 보면 2등 신드롬이란 게 있나 보죠?

    “김대중씨는 내 다음에만 했죠.” ―이회창씨가 지난 번에 2등 했으니까 다음번엔 가능성 1위인가요?

    “기회가 언제나 기다리는 건 아니거든요. 다음 선거에 지금은 흔적도 없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여러 가지 변수가 있다고 봐요.”

    “지역주의는 DJ가 조장”

    ―이번 총선을 보면서 새삼 실감한 것이 지역주의인데, 이것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김대중씨가 철저하게 지역주의를 했잖아요. 인사에서 (호남이) 싹쓸이를 했지 않습니까? 나는 나름대로 지역주의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국무총리에 고건씨나 황인성씨를 임명한 것도 그런 차원이었고. 인사는 큰 테두리에서 했거든요. 경남고등학교는 명문고잖아요. 그곳 동창생들이 참 실감나는 얘기를 합디다. 전에는 정부종합청사나 부산시청에 가면 어디에서든 경남고 졸업생들이 뭔가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우연히 지나가다가도 아무개는 잘 있나 궁금해서 들어가 차 한 잔 마시곤 했는데, 지금은 (경남고 졸업생이) 한 사람도 없어서 가볼 데가 없다는 거예요. 그게 인생 아니겠어요. 여기 저기 친구도 있고 그래야 되는데…. (호남이) 싹쓸이를 한 거예요. 지역주의는 철저하게 김대중씨가 만든 거예요. 그에게 반사적인 표가 100% 나와요. 누가 안 시켜도 나와요. 이번에 영남 쪽에서는 김대중씨 욕을 제일 잘 하는 사람이 당선되게 돼 있었던 겁니다.”

    ―지역주의의 책임을 따지자면 복잡해지겠지요. 어쨌거나 지역주의는 참으로 불행한 일인데, 이 문제를 제도적으로 푸는 방법은 없을까요? 어떤 사람은 내각제를 하나의 해결수단으로 제시하기도 하는데….

    “제도 가지고는 절대로 안 됩니다. 15대 국회에서 무려 36명이 국민회의로 갔잖아요. 2공화국이 왜 망했는가를 생각해보면 내각제로는 절대 안되겠습디다. (내각제에서는) 국회의원들이 하루 아침에 오락가락 하는 겁니다. 조금 전에 신파를 했다가 금세 구파로 가고, 구파를 했다가 신파로 가고. 다 돈하고 관계있는 일인데, 아이고, 나라가 이래 가지고 되겠어요? 요즘 일어나는 일을 보면 그때하고 차이가 없는 것 같아요. 신념에 따라서 어디로 가고 이러는 게 아니더라고.”―김대중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면 이른바 ‘3김시대’가 자연스럽게 종료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정치권에 ‘바꿔‘ 분위기가 보다 확산되고 세대교체 얘기도 더 많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나는 정치를 하면서 제일 먼저 세대교체와 40대 기수론을 주장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노인’들한테 욕도 들어먹고 ‘구상유취(口尙乳臭)’라는 말도 들었지만, 세대교체 바람은 제일 강한 바람이라고 생각해요. 요 다음에는 세대교체 바람이 더 세게 불 거예요. 그건 누가 말리지도 못해요.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도 40대 초반에 대통령이 됐고, 고어나 부시도 이제 50대 초반이거든요. 영국의 블레어 수상도 그렇고, 러시아의 푸틴도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영향을 받습니다. 세계의 큰 흐름이 있기 때문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대세가 이렇게 확 몰려오면 아무도 못 막아요.”

    ‘깜짝 놀랄 만한 후보’라고 안 했다 ―대통령 재임시절 차기 대권후보와 관련, ‘깜짝 놀랄 만한 젊은 후보’라고 언급하신 뒤에 공식적으로 그게 누구인지는 한 번도 확인을 안 해주셨는데….

    “일본의 ‘주니치신문’에서 그렇게 썼는데, 사실은 그렇게 표현을 했던 게 아니에요. 그렇게 직설적으로 얘기한 게 아닙니다.”

    ―그 발언이 보도되고 나서 ‘놀랄 만한 후보’는 이인제씨인 것으로 회자됐고, 이인제씨가 그런 분위기에서 힘을 받은 것도 사실 아닙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이인제씨가 국민의 지지를 받으면 당도 지지를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등 ‘제2의 깜짝 놀랄 후보’ 바람을 피워 올리는 것 같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에이, 그거는 말 안할래요. 할 말이 없어요.”

    ―대통령에 취임하시고 한 2, 3년 지나니까 레임덕이 오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대통령 5년 단임제에서 실제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은 얼마나 되던가요?

    “나는 현행 헌법이 그렇게 잘된 제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헌법을 바꿔서 (더) 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더 안 했고, 또 내가 재임 중에 직접 개헌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 안 했는데, 미국같은 4년 중임제가 옳다고 생각해요. 5년 단임제는 사실 내가 전두환 정권 때 헌법을 다루는 야당 사람들을 불러다가 채택하자고 해서 마련된 제도예요. 이승만은 독재하다가 망했고, 박정희도 선거다운 선거 없이 18년 독재를 했어요. 이러니 우리나라에서는 장기집권은 안되겠다 해서 결국 5년 단임으로 하자, 그건 사실 내가 지독하게 주장한 거예요. 그때 상황으로는 장기집권이라는 말이 최고의 악이었거든. 하여튼 역시 대통령 중임제가 옳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스스로 법 개정할 생煞

    ―요즘 재임 시절과 관련한 회고록을 쓰고 있으시죠?

    “그렇지. 금년에 새로 나와요. 이번에 회고록에도 쓰지만 강택민 주석을 나는 인간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대단히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해요. 지금 정상 중에서도 연하장을 나한테 제일 일찍 보내요.

    내가 이 양반한테 제일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 황장엽서기 사건이 났을 때예요. 지금도 그렇지만 분단 50년 동안 북한의 서기가 우리나라에 망명한 일이 없어요. 지위가 그렇게 높은 사람이 온 일이 없다구요. 그때 상황이 참 복잡하게 돼버렸어요. 북한에서 중요한 사람들이 북경에 가서 협박 비슷하게 하고, 또 하나의 당면 문제가 북한은 기차타고 북경까지 갈 수 있으니까 그쪽 청년들이 가서 우리 대사관을 포위한 겁니다. 황장엽을 내놓아라, 죽인다 살린다 이래 가지고 강택민이 장갑차까지 동원해서 우리 대사관에 경비를 섰습니다.

    그때 북한에서 그렇게 했다고 하니까 정부에서는 고민을 하는 겁니다. 외교 채널을 통해서 내놔라, 우리한테 보내라, 이럴 때인데, 이게 얼마나 큰 사건이에요.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안되겠더라고요. 그래서 강택민 주석한테 편지를 썼어요. 정상끼리는 친서를 늘 보내는 게 아닙니다. 대사를 통하거나 그러는데 나는 편지를 띄웠습니다.

    내가 강주석을 8번이나 만났습니다. 당신이 나보고 형제간처럼 친하다고 그러는데, 황장엽을 보낸다면 황장엽은 이북에서 총살당하는 거다, 당신이 세계가 보는 가운데 그런 짓을 하면 황장엽이를 죽인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나하고의 관계에 있어서도 형제간처럼 지내자고 해놓고 이렇게 하면 개인적인 관계도 끊어지는 거다, 개인적인 관계가 끊어지면 우리 한국하고 중국하고의 관계도 심각하게 될 것이다,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소식이 없어요.

    그래서 장정연 주한 중국대사를 불렀어요. 장대사를 만나가지고 강주석이 나하고 이런 관계인지 당신이 알지 않느냐, 그런데 편지를 했는데 답이 안온다, 내용은 이런 거다, 이럴 수가 있느냐 했더니 장대사가 그날 중에 편지를 하겠다고 해요. 그래서 얼마 지나고 나서 강주석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한국에 직접 보내면 상당히 민감한 문제가 되니까 제3국에 보내면 어떻겠느냐 해요. 미국도 생각해보고, 일본도 생각했는데 일본은 가깝고 좋은데 이북으로 안 보낸다는 보장이 없거든요. 그래서 그때 필리핀으로 제의를 했어요. 지금 외무차관인 반기문이 그 때 안보수석이었는데 내가 그를 내용적으로 대통령 특사로 보냈습니다.

    내가 필리핀으로 보낸 건 라모스 대통령이 나하고 아주 친분이 두텁기 때문이에요. 친분이 두텁지 않으면 불가능해요. 그때만 하더라도 전부 비밀로 했는데, 기자회견하고 그만둔 이장춘 대사 있잖아요? 그 사람이 야무진 사람입니다. 그때 필리핀대사를 하고 있었는데 이장춘씨한테 연락해 가지고 차 번호까지 가렸습니다. 이장춘의 차를 타고 반기문이 라모스를 밤에 만나잖았습니까? 그렇게 내 편지를 전하고, 라모스는 나하고 친구니까 ‘김대통령이 고민하는데 해주겠다’고 하고 받은 겁니다. 반기문이 특사로 갔다는 건 지금까지도 비밀입니다.

    중국에는 필리핀으로 하는 게 좋다고 해서, 중국에서 중국 비행기를 타고 필리핀으로 갔습니다. 라모스는 깊은 생각을 안하고 단순히 받아들였지요. 그때부터 필리핀이 난리가 난 거예요. 라모스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죽겠다고 빨리 데려가라는 거예요. 황장엽이 어디 있느냐고 필리핀 야당이 떠들어댄 거지요. 필리핀에는 공산당이 있잖아요, 이북에 동조하는 공산당 세력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이 어째서 필리핀에서 이 사람을 맞느냐 이렇게 된 거예요. 그때 하루에도 몇번씩 그 사태에 대해서 보고를 받는데 죽겠더라고요. 중국은 계속 필리핀에 한달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 이북에 대해서 체면이 선다는 거죠. 그래가지고 KAL기를 보내 싣고 왔는데 황장엽이를 데려오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다음 대통령 선거 때 내 입장 밝힐 것”

    ―황장엽씨가 귀국하면서 정치적으로 많이 시끄러웠던 게 이른바 황장엽 리스트가 존재하느냐, 거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포함되느냐 하는 거였습니다. 실제로 소문이 돌 만큼 그렇게….

    “그 이야기는 안 할래요. 지금도 우리가 황장엽을 이용한다는 건 우습지만 여러가지로 그 사람이 한국에 온 의미를 활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김대중씨는 황장엽을 완전히 가둬놓고 있잖아요. 왜 망명하게 됐느냐, 이북의 실정은 어떠냐고 조사를 하면서 우리가 많은 것을 알았어요. 황장엽은 김일성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어요. 김일성대학 총장도 했고, 주체사상의 창시자니까. 황장엽이 올 때 미국이 관심이 많았어요. 북한의 제일 중요한 정보통이 온다고 관심이 굉장했어요. 아마 앞으로도 이북의 서기급이 남한에 오는 일은 어려울 거예요.

    ―이번 총선에서는 초기에는 어느 쪽으로든 의중 표현을 하지 않겠는가 생각했지만 결국은 중립을 지키셨습니다. 선거 후에도 중립을 지키시겠습니까, 아니면 필요한 역할이 있으면 하시겠습니까?

    “국회의원 선거는 작은 문제이고 대통령 선거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 선출과 관련해서는 내가 분명한 입장을 표명할 거예요. 시기가 언제가 좋을지 선택해서 나는 누구 지지라고 얘기할 겁니다. 여당 야당을 떠나서 한국의 대통령은 이 사람이 되는 게 제일 좋다고 지지할 겁니다. 그 시기는 너무 빨라서도 안되고 너무 늦어도 안되고, 정치가 돌아가는 현실과 관계없이 얘기할 거예요.”

    ―그와 관련해 그동안 영남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얘기를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꼭 그렇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는데 그걸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죠. 영남이 크니까 언제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죠. 김대중씨가 싹쓸이하니까 영남 사람들이 이제는 안 되겠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거든요. 그건 내 얘기가 아니고 영남 사람들이 그렇다고 봐야 돼요. 그런데 이번 선거가 끝나고 나서는 분위기가 굉장히 달라질 거요. 민주당도 제 멋대로 떠드는 놈이 생길 거고 야당은 엉망일 거고. 기회란 놈은 이마에 꼬리가 달려 있기 때문에 그때 꽉 잡아야 된다니까요. 놓치고 나면 뒤에 꼬리가 없기 때문에 절대 못잡아요.”

    ―단순히 누가 한국의 대통령으로 바람직하다고 밝히는 부분 뿐만 아니라 정계가 정돈되고 야당이 통합되거나 하는 개편도 대선 과정이라고 보면, 의견을 표명하거나 역할을 하시겠습니까?

    “내 입장은 우물우물하거나 그러지 않을 거예요. 언론이 자꾸 날보고 정치를 할 거라고 쓰는데, 내가 회고록을 쓰는 건 인생을 정리한다는 의미로 쓰고 있거든요. 내가, 특히 대통령을 한 사람 아니요. 지금 내가 뭘 또 할 게 있어요. 다만 내가 식물인간이 아닌 다음에야 정치가 뭐가 옳고 김대중씨는 나쁜 사람이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어야 되고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또 내가 전직 대통령으로서 쿠데타를 한 사람도 아니고 당당히 200만표 차이로 김대중씨를 이겼던 사람으로서 기회에 따라서 이게 나쁘다, 이게 옳다, 이게 정의다, 하고 말할 수는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가령 아까 카터 얘기가 나왔지만 카터가 이북에 가서 정상회담을 주선하는 건 전직 대통령이 하는 것 아니요? 요전에 NHK에서 보니까 카터가 파나마 운하를 방문했더라고요. 얼마 전에 미국에서 전부 철수할 때. 그때 카터가 완전히 미국을 대표하는 연설을 하더라고요.”

    “김대중씨는 희망 없다”

    ―김대중 대통령도 임기가 반을 넘어가는 시점에 접어들었는데요. 전직 대통령이 되는 과정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전직 대통령으로서 김대중 대통령이 남은 임기를 어떻게 마무리하고 퇴임을 준비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나는 김대중씨는 희망이 없다고 봐요. 이제 무슨 짓을 해도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넜다고 봐요. 절대 수습이 안 되고 불가능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나는 김대중씨가 잘 되기를 바란 사람이에요. 그런데 내가 퇴임하고 나자 김태정을 통해서 문서로 (환란책임과 관련한) 조사하는 걸 나한테 보냈거든요. 검찰총장이 무슨 권한으로, 대통령이 아무 말 안하는데 조사를 합니까? 내가 5년 동안 검찰총장을 데리고 있어 봤기 때문에 어떻게 하는 건지 김대중씨보다 더 잘 알죠. 김대중씨가 시켰다는 걸 다 알지요. 내가 그때부터 어떻게 나를 조사하느냐, 이런 나쁜 사람이 어디 있느냐, 모든 사람이 올 때마다 김대중은 독재자라고 한 거예요. 야당 파괴하는 자이고 나쁜 사람이다 이거예요. 작년 8월3일에 독재자라는 말을 처음 했는데, 그때 김영삼을, YS를 욕하는 사설을 (신문에서) 계속 썼어요. 지금 내가 말하는 게 틀렸나? 김대중이 독재자지. 지금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대중이 독재자다, 하는 내 말이 옳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때 신문에서는 야당 파괴하는 것, 내 주변을 조사하는 것을 얘기해도 그건 일체 안 쓰고 밑도 끝도 없이 독재자라고 했다고 하니까, 난데없이 자다 일어나서 누구 욕한 것처럼 되는 거예요.”

    ―퇴임하기 전에 김대중 당선자와 청와대에서 1주일에 한번씩 만나셨는데 DJ가 약속한 것은 없었습니까?

    “약속하고 그런 게 아니라, 내가 그 사람한테 강요한 것도 없어요. 김대중씨가 당선자 입장에서 두달 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화요일 아침 9시에 만났는데,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더니 달라졌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 사람이 와 가지고는 이렇게 말해요. ‘보스워즈 대사를 만났더니 앞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제일 중요한 과제는 김영삼 대통령하고 협력하는 겁니다. 이게 제일 중요한 겁니다, 이러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김대중씨도 ‘미국 대사가 얘기하는 대로 그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나한테 얘기하는 거예요. 참, 그래서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좀 변했나, 하고 생각했었어요.

    그런 일이 있고 난 후에 내가 퇴임하기 직전에 관저에서 저녁을 먹자고 해서 부부간 저녁을 함께 했어요. 이희호씨하고 우리집 사람하고 저녁을 먹는데, 김대중씨가 또 우리 집사람한테 나한테 했던 얘기를 하더란 말입니다. 자기하고 나하고, 두 사람이 협력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나라를 위해서 제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겁니다. 우리 집사람도 그 이야기를 안 잊어버려요, 자기가 강조해서 이야기를 했으니까.

    그런데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나한테 얘기해놓고 내 뒷조사나 하고, 국회청문회 나오라고 하고…. 이걸 김대중씨가 결정했지 누가 결정했겠어요. 나보고 청문회에 나오라고, 국회의원 중에 그렇게 말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내가 나갈 사람도 아니지만. 내가 과거에 박정희, 전두환 하고 어떻게 싸워 왔는데. 자기는 피해다니고 숨어다니고 그랬지만.”

    “전두환·노태우와는 평생 안만나”

    ―앞으로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과는 평생 어떤 일이 있어도 안 보실 생각이십니까?

    “만날 생각이 전혀 없어요.”

    ―DJ 하고는…

    “그것도 말 안 해. 지금 전혀 그런 생각은 가지고 있지 않아요.”

    ―최근에 즐겨 읽으신 책이나 좋아하게 된 구절이 있으십니까?

    “내가 사실은 붓글씨를 잘 못쓰지만 이태백의 시가 참 유명해서 병풍을 하나 쓰려고 합니다. 큰 글씨가 아니고 중간 글씨쯤으로 해서 10폭짜리 병풍에 이태백의 시구를 쓰려고 해요. 그래서 이태백에 관한 책을 보고 있는데 요새 사람 만나랴, 이태백 시집 보랴, 산에 가랴, 회고록 쓰랴, 바빠요.

    그 시를 보면 달 이야기, 여자 이야기, 술 이야기, 원숭이 이야기가 나오고, 제일 많이 나오는 게 산과 강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태백이는 중국의 그 넓은 땅에 이 산을 알고 저 산을 다 아는 거예요. 나는 놀랐어요. 내가 산에 다니지만, 산이 얼마나 멋있는가 아는 거예요. 진짜 오묘해요. 풍류가 있는 거예요. 시국에 대한 얘기도 있어요. 시인이면서 2천년 전 당시 중국의 정치에도 굉장히 관심이 있었다고 봐요. 중국의 시인들 중에 두보도 유명하지만 이태백을 능가하는 시인은 중국에도 없고 다른 나라에도 없다고 봐요. 물론 소련의 푸쉬킨도 대단히 유명한 사람이지만.”

    ―오늘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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