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5월호

일본무대에 뿌리내린 한국춤 전수자

  • 소설가 이상락

    입력2006-10-25 13: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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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춤은 정신과 정신을 잇는 대화입니다. 말은 전달이 빠르지만 생명력이 짧아요. 춤이라는 몸짓 언어는 어렵게 전해지지만 깊이 스며듭니다.” 정명자가 춤을 추는 이유다.
    ‘힘차다’라는 말은 정중동(靜中動)을 기본 미학으로 삼는 한국 전통무용을 수식하는 말로는 아무래도 제 짝이 아닐 성싶다. ‘드라마틱하다’는 수사 역시 (60년대 이후 민속무용의 무대화가 활발하게 진행돼 왔다지만) 우리 무용을 감상하고 나서 피력할 만한 소감으로는 덜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그럼에도 정명자(鄭明子·44)라는 무용가의 창작 춤사위 두어 판을 주마간산 격으로 구경하고 나서 거칠지만 우선 그렇게 정리하기로 했다. 전통춤에 대한 이해의 폭이 워낙 협소하다 보니 저지를 수 있는 ‘용감한 실수’로 봐 준다면 좋겠다.

    우선 내가 ‘힘차다’는 느낌을 받은 공연은 지난 4월6일 서울 대학로의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이생강 대금산조 발표회’에서 본 정명자의 춤이었다. 물론 그날 무대의 주인공은 우리 나라 대금산조의 상징적 존재인 이생강이었다. 말하자면 정명자는 그의 무대를 빛내주기 위해 찬조 출연한 셈이었다.

    그 공연에는 중국 조선족 음악가인 김동설이 북한식(서양 악기 플루트처럼 나무 밸브가 달린) 대금을 들고 나와서, 북한 음악가들이 집체 작곡한 두 곡을 연주하는 이색 무대가 마련되었다. 남쪽의 그것과는 소리의 빛깔이나 모양새나 맛이 많이 다른 북한 대금이나 곡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처음 소개되는 북방음악에 맞춰 춤사위를 선보인 정명자의 몸짓 얘기다. 그녀는 김동설의 대금 연주 중간에 등장하여 곡조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춤으로 풀어 보이고는 바람처럼 무대에서 사라져버렸는데, 내가 보기에는 북한 창작곡에 춤을 맞춰 만든 게 아니라, 정명자의 춤사위를 보고 북한 음악가들이 대금연주용 곡을 만들지 않았을까 의심이 갈 정도로 그의 몸짓은 음악의 강약, 고저 장단과 기막히게 맞아떨어졌다. 우리 춤이 저렇게 역동적일 수도 있구나, 아마추어 관객인 내 느낌이 그랬다.

    대표작은 창작무 ‘귀천지’

    영화판에서 쓰는 속어로 ‘똑 따먹는 배역’이라는 말이 있다. 단역으로 출연했으되 짧은 시간 동안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는 역할을 일컫는 말이다. 이 날 정명자가 그랬다.



    그러나 내가 그녀의 몸짓을 ‘힘차다’고 한 것은 단순히 템포가 빠르고 박진감 넘친다는 의미는 아니다. 최근 들어 한국무용을 서구식 현대무용 방식으로 재편집하여 전통의 향기를 걷어내 버린 채 ‘반(半) 발레’처럼 만들어 버리는 일부 경향에 대해 비판이 만만치 않으나, 정명자는 전통무용의 정서에 충실하다는 평을 듣는다. 정서에 충실하나 답습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결코 변할 수 없는 한국 전통춤의 정서를 기반으로 하여, 늘 새로운 형식의 춤판을 선보인다. 그녀에게 ‘예부터 이렇게 추라 했다’ 혹은 ‘이런 것을 추어야 한다’는 교본을 들이대는 것은 어리석다.

    그는 늘상 새로운 몸짓을 꿈꾼다. 따라서 늘 새로운 사위를 만들어 내보이는 그녀의 춤은 너울져도 ‘힘차고’ 멈춰 있어도 자신감에 넘친다.

    이제 정명자의 춤을 ‘드라마틱하다’고 토로한 배경을 얘기해야겠는데,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창작무 ‘귀천지’를 구경한 사람이라면 한 사람의 몸짓만으로도 관객에게 많은 얘기를 들려주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작품 ‘귀천지’는 그녀의 선친과, 그녀가 일본에 생활 근거를 두고 살아가는 사연, 그리고 남들이 사탕값이나 조를 어린 나이부터 40 중반에 이른 지금까지 춤에 미쳐 살아온 내력 등과 떼어서 얘기할 수 없다.

    정명자는 한국의 춤꾼이되 일본에서 산다. 그녀의 남편 또한 일본 사람이고 그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 역시 일본식 교육을 받으면서 일본에서 자라고 있다. 이것은 그녀의 춤 인생을 얘기하는 데 부수적이기도 하고 중요한 사항이기도 하다.

    “종로2가 고려당에서 만납시다.”

    전화로 약속 시간을 정한 뒤에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지 못해 더듬거리는 나에게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고려당? 이십 몇 년 전, 꽤나 발도장을 찍으며 돌아다닌 거리가 바로 종로통이었지만, 나는 고려당이라는 고색 창연한 이름의 제과점이 지금까지 제자리에 붙박혀 있을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가 하도 자신 있게 말하는 바람에 그럼 거기서 만나자고 대꾸해버린 터였다.

    아닌 게 아니라 태극당이니 고려당이니 하는 예전의 빵집이며 과자집들의 문패는 종로2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그것들이 있던 자리에는 ‘버거킹’이니 뭐니 하는 서양식 패스트푸드 가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뽕짝’풍의 대중가요에 섞여 민요가락이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던(예전에 그 근처에 ‘종로福떡집’이 있었는데 거기서는 제법 ‘닐니리야’ 가락이 새어나왔다) 거리는 록이니 테크노니 하는 소리물결로 귀청이 얼얼했다. 노래보다 더 유행을 타는 게 몸짓일진대 이 시대에 한국무용을 찾는 일도 그만큼 희귀한 노릇일 터.

    자신의 ‘작품’을 갖고 있는 춤꾼

    약속 장소도 어긋나버렸겠다, 피차 인상이나 착의의 특징도 얘기하지 않았으니 어느 여자가 무용가 정명자인 줄 알아서 접근한단 말인가. 더구나 나는 유달리 사람 못 알아보기로 정평이 나 있는데다, 멀찌감치에서 그녀의 춤추는 모습을 구경한 적은 있어도 ‘이 사람이 그 사람이다’ 하고 얼굴을 외울 만큼 가까이 마주한 적이 없었으니….

    그러나 대견스럽게도 나는 온갖 사람이 득시글거리는 종로통에서 그녀를 정확히 찾아냈다. 양장차림이었음에도, 단아한 체구에다 얼핏 봐도 ‘한국무용하는 사람은 아마 저렇게 생겼을 것’이라는 느낌을 풍기는 사람이 있어 ‘실례합니다만…’ 따위의 머뭇거리는 절차를 무시하고 “안녕하십니까”라고 해버렸다. 예감은 적중했다. 이만하면 나도 한국의 전통춤에 아주 안목이 없는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정명자씨는 춤추는 사람임에도 자신의 ‘작품’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귀천지’와 최근에 정동극장에서 공연한 바 있는 ‘창(窓)’이 바로 그녀가 기획하고 구성한 춤 작품이다. 특히 97년에 일본 도쿄에서 초연한 이래 한국에서도 네 차례나 무대에 올랐고 다시 금년 2월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공연한 바 있는 ‘귀천지’는 씻김굿과 춤, 그리고 퍼포먼스를 조합한 잘 짜인 한 편의 춤극이다. 그녀는 이 작품을 ‘죽을 때까지’ 공연할 것이라고 했다. 그에 관한 얘기부터 들어보기로 하자.

    ─귀천지(歸天地)라… 하늘로 돌아가는 겁니까, 땅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하늘로 가고 땅으로 가는 거지요.”

    돌아가는 주체는 97년에 작고한 그녀의 아버지(정홍근)다. 육신은 땅으로 돌아가고 혼백은 하늘로 돌아간다. 망자의 영육이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길을 틔우는 이가 바로 딸 정명자다. 그러니까 ‘귀천지’는 망부(亡父)에 대한 자식의 넋씻김 의식을 춤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자식의 애틋한 마음이야 누구라 덜하겠습니까. 그래도 춤이라는 타고난 재주가 있어서 수많은 관객 앞에서, 그것도 한·일 양국을 넘나들면서 선친의 넋을 추모할 수 있다는 건 남들보다 행복한 경우 아닌가요?

    “저에게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가 아닙니다. 제가 삼십칠팔년을 춤으로 살아왔지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신 분이 아버지였어요. 어린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열릴 예정이던 제 개인발표회의 인쇄물을 가지고 한일 양국을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시다가 끝내 공연을 못 보고 눈을 감으셨어요.”

    ─그러니까 ‘귀천지’는 무용가 정명자가 선친의 넋을 추모하는 지극히 개인사적인 동기에서 만들어진 작품인데….

    “동기가 사적이라는 얘기에는 동의하지만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무대에 서는 순간 나는 무용가가 아니라 아버지의 딸이었으니까요. 내가 추모하고 있는 대상도 작품 속의 그 누구가 아니라 바로 제 선친이었고요.”

    망부(亡父)에 대한 넋 씻김 춤

    그런 처지이다 보니 그녀의 몸짓은 진실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저쪽으로 가는’ 아버지와 ‘이쪽에 남는’ 딸의 지극히 개인적인 별리 장면을 표현한 이 작품이 공연 때마다 폭발적인 호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것이 ‘우리’ 얘기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망자의 관이 놓여 있는 무대는 달리 말하면 빈소다. 딸 정명자가 객석의 중앙통로에서 천천히 무대를 향해 나아간다. 소복을 한 네 명의 여자가 기다란 흰 천을 붙잡고 있다. 잠시 슬픔의 몸짓을 해보이던 그녀가 천의 한가운데를 가르고 길을 내 무대에 오른다. 진도 씻김굿에 등장하는 ‘베 가르기’ 의식을 차용한 것이다. 창호지를 찢어 양손에 모아 쥐고 추는 지전(紙錢)춤 역시 씻김굿에서 따온 것이다.

    이어서 그녀는 아버지의 삼베 수의를 새끼줄에 걸치는데, 임종하지 못한 그녀가 아버지 육신에 수의를 입혀드리는 의식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그녀의 춤은 춤이라기보다는 격정적인 한바탕 몸부림에 가깝다. 광녀처럼 산발을 한 채 슬픔을 주체 못해 머리를 짓뜯다가 온몸을 비틀며 바닥을 뒹군다.

    이제 아버지의 육성을 찾아 나설 차례다. 바닥 여기저기를 두드리던 그녀가 북채를 들어 북을 친다. 거기서 울려나오는 소리는 선친의 육성이다. 부녀간의 소통이 이루어진 것이다.

    망연히 앉아 자신의 무용생활을 되돌아본(그녀의 설명) 뒤에 좋은 춤꾼이 되겠다는 다짐으로 자신의 무용도구를 소쿠리에 담아 부친의 영전에 바친다. 그러고는 등장한 객석의 통로로 요령을 흔들며 퇴장한다. ‘귀천지’는 대개 이런 구성이다.

    이 공연은 ‘춤꾼이 무대에 오르면 시종일관 춤만 추어야 되는 것’이라는 일반의 상식을 여지없이 무색하게 만든다. 두 다리를 뻗고 망연히 앉아 있는 것도 그녀의 춤이요, 방정치 못하게 바닥을 뒹구는 행위도 춤이다. 장중하고 애잔한 국악 연주나 구음(口吟)에 맞춰 많은 얘기를 내쏟고 있는 실험적인 무언극이다. 그녀는 옷을 입고 벗고, 버선을 신고 벗고, 얼굴에 땀을 닦는 행위들을 암전(暗電)이 아닌 상황에서 관객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지만, 그 행위가 진지하고 엄숙하여 자연스럽게 작품의 일부가 된다.

    ─첫 공연 때 아버님의 넋을 한바탕 추모하고 나니 홀가분했겠습니다.

    “아닙니다. 아버님께 훌륭한 춤꾼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고 나니 책임감이 천근만근이던데요.”

    효성스런 딸이다.

    서울 영등포가 고향이다. 그녀는 이미 다섯 살 때부터 춤꾼의 기질을 드러내 보였다. 아무 노래나 나오면 몸을 흔들어대기 일쑤였다는데, 그런 딸을 야단치기는커녕 오히려 무용학원에 가도록 권장하는 등 적극적으로 부추겨온 사람이 그의 아버지다.

    사업하는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로 건너가 여섯 살 때부터 무용학원에 발을 들여놓았다. 주문진여중에 진학하면서는 조금 더 좋은 선생을 찾아 버스로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강릉까지 춤을 배우러 나다녔다. 정씨는 춤에 관한 한 부녀간 궁합이 딱 맞아떨어졌다고 말한다. 부모가 시키려 해도 자식이 거부하면 불가능하고, 자식이 하고 싶어도 부모가 반대하면 어려운 법인데 정씨의 아버지는 절대적인 예찬자요 후원자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최승희의 무용을 구경했던 때의 감동을 어린 딸에게 들려주며 “너는 재주가 있으니 절대로 시집가지 말고 최승희 같은 무용가가 돼라”고 했다. 그 시절(아니 지금도) 여느 부모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사고를 가진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 ‘춤바람’이 불러온 정명자의 돌발행동은 알아줄 만하다. 여덟 살 무렵 정명자는 동네에 들어온 서커스 구경을 하다가 막간에 선보인 무희들의 춤에 반한 나머지 서커스단이 타 지역으로 옮겨갈 때 자기도 춤을 추겠다며 ‘아주 당연히’ 그들을 따라가 버렸다. 부모가 찾아나서는 등 한바탕 난리를 치른 뒤 이틀 만에 간신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전국 어린이무용발표회에 출전할 작품을 연습했는데, 키가 크다는 이유로 ‘나무꾼과 선녀’의 주인공을 맡겨주지 않자 하루 종일 울기도 했다. 무용하려면 키가 너무 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데, 지금 그녀의 키가 작은 편에 드는 것은 아마 그때 이후 훌륭한 무용가가 되기 위해서 오기로 ‘안 커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서울예고 한국무용과에 진학하려던 그녀는 학교측에서 실수로 원서접수 시한을 넘겨버리는 바람에 한바탕 자살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하는 수 없이 춘천여고에 진학한 그녀는 1학년 때 자퇴원을 내고 국립국악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그러나 고등학교로 출발한 지 고작 2년밖에 안된 국악고에는 무용과가 없었다. 물론 그녀는 개인적으로 무용공부를 계속했지만, 무용하는 사람한테 필수적인 국악 공부를 했던 그 기간을 정명자는 소중하게 생각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진도북춤의 박병천, 살풀이춤의 김숙자, 승무의 이매방, 장고의 전사습 등 쟁쟁한 명인들로부터 차례로 사사하면서 실력을 쌓아 갔다. 그녀는 어떤 상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그걸 어떻게 일일이 다 대느냐”고 했다. 전국단위의 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두 차례나 받은 것을 비롯해 그녀의 입상경력은 화려하다. 그런데 한국의 전통무용을 연마하던 그녀가 왜 하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을까.

    일본땅에서 한국춤 전파

    “첫째는 서울대에 응시했다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실망한 나머지 유학을 결심했지요. 두 번째로는 춤 다음으로 좋아하던 사진공부를 제대로 해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끔 춤추는 모습을 찍은 사진들을 대할 때면 ‘춤꾼이 액자를 박차고 뛰어나올 듯이 생동감 넘치는 사진을 찍을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어요. 마침 고종사촌이 도쿄에 살고 있어서 훌쩍 건너갔지요. 일종의 도피심리가 작용한 거지요.”

    도쿄 공예대학 사진기술학과에 입학했다. 일본에는 무용과를 둔 대학이 거의 없다. 일본대학에 일본무용을 가르치는 곳이 한 군데 있는 정도다. 서양무용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면 한국은 무용천국인 셈이다.

    졸업 후 그녀는 무용 불모지나 다름없는 척박한 일본땅에 한국무용을 전파하겠다고 결심하고 도쿄에 한국민속예술연구원을 차려 본격적인 보급에 나선다. 처음엔 재일 한국인을 주로 가르쳤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인들도 한국무용을 배우겠다고 찾아왔다. 그로부터 20여년 간 그녀는 일본에 한국 전통무용을 전파하는 ‘한국 문화대사’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예술인 노릇을 제대로 하자면 가르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춤에 대한 욕심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일본에서 한국무용을 가르치는 사람이 또 있습니까?

    “제가 처음 갔을 때만 해도 저하고 교포 한 사람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근래 3, 4년 사이에 한국무용을 가르치겠다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물론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가르쳐온 저하고는 좀 다르긴 하죠.”

    ─어떤 점에서 다르지요?

    “우선 스튜디오를 정식으로 갖추고 있는 사람이 저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성격상 내 문하에 들어온 사람들이 배우는 듯 마는 듯 대강대강 하는 꼴을 보지 못합니다. 가르칠 때에도 거의 진을 다 빼가면서 연습시키거든요.”

    ─평생을 걸고 춤을 배워 보겠다는 자세로 달려드는 사람들이 없습니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찾아온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요.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는데, 성심을 다해서 가르쳤던 사람이 실망시킬 때 참 가슴이 아프지요. 그리고 저는 기본적으로 교육자와 플레이어는 구분돼야 한다고 봅니다. 가르치면서 춘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나라 전통춤꾼 가운데 1년이나 2년 단위로 성실히 준비해서 꾸준히 새로운 모습의 춤을 개인발표회를 통해 보여주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그럼 지금은 가르치는 일에는 손을 떼신 건가요?

    “조교들이 주로 담당하고, 저는 일정한 수준에 있는 소수만 담당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정통 한국춤을 제대로 가르치자는 게 제 생각이고, 제 자신이 내 춤의 터전인 한국에 가급적이면 자주 드나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정명자는 일본과 한국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공연해 왔다. 1988년에 바탕골소극장에서 ‘정명자 춤의 세계’를 발표한 이래 지금까지 단 한 해도 개인발표회를 거른 적이 없다. 그녀가 한국에 나와 있을 경우 서울의 부모는 그녀의 외동아들 히도시(11세)를 돌보기 위해 도쿄로 건너가고, 그녀가 일본으로 돌아가면 거꾸로 부모는 서울로 오는 식이다.

    남편 우치노씨는 든든한 후원자

    춤꾼으로서의 정명자에게 아버지 다음으로 든든한 후원자 구실을 해온 사람이 남편 우치노 시게루씨(변호사·52)다. 84년 어떤 모임에 갔다가 첫눈에 ‘이 사람이다’는 생각이 들어 ‘춤과 결혼해 살겠다’던 생각을 바꿨다. 결혼하더라도 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얘기에 남편도 흔쾌히 동의했다. 결혼 이후 지금까지 남편은 그저 마음으로만 아내의 무용활동을 인정해 주는 정도의 소극적인 후원이 아니라, 공연에 필요한 음악을 편집하고 비디오를 촬영하는 일부터 홍보물을 만들고 공연장과 스폰서를 물색하는 일까지 도맡아 뛰어다닌다.

    “남편이 기계 만지는 일을 아주 좋아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이 찍은 비디오는 거의가 맘에 안 들어요. 남편이 찍어야 만족할 만한 모습이 나옵니다.”

    ─공연 뒤에 무용에 대한 평가도 하십니까?

    “그럼요. 가장 날카로운 비평가가 남편과 제 아들입니다. 아들 녀석도 춤에 대한 안목이 있어요. 내가 학원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쪽지 하나를 건네고 나갑니다. 쪽지를 펴보면 ‘이 누나는 너무 웃는다’ ‘저 누나는 손동작이 너무 빠르다’ 같은 지적 한 두 마디가 적혀 있어요. 핏덩이 무렵부터 제 엄마가 춤추는 모습을 보고 자라왔기 때문에, 자기도 나름대로 한 마디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내가 춤 연습을 하고 있으면 부자(父子)가 간섭하느라고 아주 시끄러워요.”

    ─무슨 민족감정까지는 아닐지라도 가령 일본에서 한·일간 축구경기 같은 국가대항전이 벌어진다면….

    “저는 물론 열렬한 한국 편이고 남편은 일본 편이지요. 아이는 부모 눈치 살펴 가며 때때로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하고…. 제가 요란스럽게 응원하고 때로는 도발적으로 싸움을 걸어도 남편은 그저 잔잔하게 웃어 넘기기 때문에 싸움이 일어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저도 남편에게는 좋은 아내입니다. 이건 자화자찬이 아니라 남편의 얘기예요.”

    ─남편이 한국말을 할 줄 아십니까.

    “듣기는 조금씩 듣는데 서툴러요. 그런데 아들은 한국어를 잘하는 편입니다.”

    97년 1월, 정명자는 연례행사로 해오던 개인발표회를 일본에서 갖게 되었다. 준비 과정에서 발표회의 홍보물을 한국에서 제작하느라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아버지가 뇌종양으로 입원했다. 그녀는 3개월여 동안 일본과 한국을 왕래하며 문병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그 만큼의 입원 기간을 가졌던 것에 감사한다. 그 시간이 어렸을 때부터 그녀의 영원한 후원자였던 아버지와 이승에서의 이별 절차를 넉넉하게 가지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예정된 상황에서, 저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손도 만져보고 피부도 맞대고 한참 동안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도 했어요. 너무 갑자기 돌아가셨다면 그런 시간이 없었을 것 아닙니까. 입원하고 처음 며칠 동안은 의식이 있었는데, 나중에는 저 혼자 일방적으로 떠들었어요. 살아 계실 때 아버지와 추억을 하나라도 더 만들자는 생각으로….”

    손수 홍보전단을 만들어 나르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공연은 구경하고 죽어야겠다”던 아버지는 하필 정명자가 잠시 일본으로 건너간 사이에 눈을 감았다.

    새벽 비행기를 타고 부랴부랴 달려와 보니 이미 입관 절차를 마친 상황이었다. 관 뚜껑을 열고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임종을 못했다는 자책감, 이것이 그녀로 하여금 ‘귀천지’라는 이름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게 만든 배경이다.

    그녀가 아버지 문병 중에 병원 창밖으로 내린 눈발을 바라보며 읊조렸다는 헌시(獻詩)는 ‘귀천지’ 살풀이 과정에서 녹음물로 삽입돼 흐른다.

    …이유 없으시, 나의 길을 열어주시고자 항상 애쓰셨으매

    한없으시, 조용한 애정으로 늘 포용해 주셨나이다

    끝없으시, 나의 밝은 꿈이 되시고자 언제나 빛을 주셨으매

    말없으시, 따스한 사람들을 온통 나의 전신에 수놓아 주셨나이다

    그리곤 소리 없으시, 모습 없으시, 모든 걸 내게 남기시고

    영원한 하늘과 땅으로 돌아가셨나이다…

    읊는 이의 간절함이나 진실성만을 문학의 으뜸 요소라 친다면 ‘…으시’라는 독특한 조사를 붙여 읊은 이 망부가(亡父歌)야말로 가장 훌륭한 시 작품일 것이다.

    ‘귀천지’는 일본에서 초연된 이래 서울 정동극장의 ‘오늘의 무용가 시리즈’로 발표되었고, 이어서 광주 목포 진도 등지의 무대로 이어졌다. 이 새로운 형식의 춤 작품에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관객의 호응은 뜨거웠다. 유례없이 한국의 전통무용가에게 일반인의 갈채가 쏟아진 것은 정명자가 드물게 자기 춤을 내보인 까닭이다.

    지난 2월3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글자 그대로 고금동서를 한 데 버무린 이색공연이 펼쳐졌다. 서양오케스트라와 국악오케스트라가 한 무대에서 섞이고, 안숙선 이생강 정명자 등의 한국 전통예술인이 등장하는가 하면, 장사익 안치환 유진박 등이 등장하고 어린이합창단까지 어우러진 대형공연을 펼쳤다. ‘퓨전’이나 ‘크로스오버’도 이쯤 되면 대책없는 ‘비빔밥’이었을 것 같은데, 정명자는 그 무대에서 서양오케스트라의 헝가리 음악에 맞춰 ‘가무보살’을 엮어냈다.

    “일본의 전통 북소리에 맞춰 우리 살풀이를 춘 적이 있고, 재즈음악과도 궁합을 맞춰 본 적이 있습니다. 정신이 맞으면 음악과 춤이 어울려 돌아가게 돼 있어요.”

    그녀가 얘기하는 ‘정신’이란 어떤 것일까. 음악의 메시지를 춤꾼이 읽어내는 능력이 아닐까.

    ─창작춤을 죽 발표해 왔는데 ‘정명자 춤’은 한국 전통무용의 틀을 깨는 것입니까, 새로 쓰는 것입니까.

    “나는 전통무용에서 출발한 사람입니다. 일본에서도 공연 때마다 제1부는 반드시 살풀이나 북춤, 승무, 검무 등 우리 전통춤을 보여줍니다. 일본 사람들에게 한국무용의 원형을 내보이는 거지요. 제2부에서 보여주는 춤이 ‘정명자의 춤’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한국 전통무용의 맥을 잇는 기반 위에서 창작하는 것입니다. 전통춤을 고스란히 그대로 추어서는 전통춤의 ‘재현자’는 존재하지만 ‘나’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원형을 원형대로 이어가려는 노력 또한 중요하지 않습니까.

    “물론이지요. 우리나라는 전통무용의 원형을 유지해 나가려는 층이 아주 두텁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럴 필요는 없어요. 능력이나 환경이 허락되는 사람은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 나가야 돼요. 빠르게 변화하는 새로운 세대에게 가까이 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이것도 춤꾼의 의무 중 하나입니다.”

    “최승희는 시대를 앞서간 무용가”

    ─한국의 여류 무용가로서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활동한다는 점, 한국의 전통정서를 바탕에 깔고 끊임없이 새로운 춤을 만들어 실험한다는 점 등으로 볼 때 전설적인 무용가였던 최승희와 궤적이 엇비슷한 것 같은데, 모르는 사이에 어린시절 아버지가 들려 주었던 최승희를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것 아닙니까?

    “최승희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천재적인 무용가였지요. 지금이야 그런 시도를 하는 게 파격적일 수 없겠지만, 여인네들이 얼굴도 제대로 못 내놓고 다니던 시절에 ‘보살춤’ 같은 걸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 아닙니까.”

    그녀는 실제로 일본에서 최승희의 영상자료를 찾아내어 한국에 소개했다고 얘기한다.

    지난 3월28일부터 이틀간 정동극장 초청공연으로 무대에 올려진 ‘정명자 창작춤 창(窓)’은, 지칠 줄 모르고 새로움을 추구하려는 그녀의 면모와 춤세계가 어느 만큼 확장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제1부에 승무와 한량무, 입춤 등을 배치한 것은 앞서 그녀가 말한 대로 한국 전통무용의 본모습을 보여주려는 배려다. 이어질 그녀의 창작무가 기본적으로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를 미리 알리는 셈이다.

    제2부가 본공연이자 진짜 정명자의 춤이다. 그런데 그녀의 살풀이춤 배경에 군인과 굶주린 아이의 모습이라니… 보는 이의 그릇에 따라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아마 그것들은 우리가 살아온 지난 한 세기의 자화상 아닐까. 그녀의 살풀이는 지난 시대의 액을 쫓는 의식일 것이다. 이어서 창에 투영되는 다분히 환유적이고 추상적인 풍경들을 통해 그녀가 얘기하려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글쎄요, 창이란 안과 밖을 가르는 장치 아닌가요. 안쪽이 나라면 바깥풍경이 타인일 수 있을 것이고, 이쪽이 현재라면 저쪽은 미래일 수도 있겠지요. 나를 타인과 연결해 주는 것도 창이고, 현재의 우리로 하여금 과거와 미래의 시간과 소통해 주는 게 또 창 아닌가요? 인간 개개인의 내면과 외면의 경계일 수도 있겠고요.”

    전쟁을 상징하는 군인과 문명 저 편의 굶주린 아이를 등장시켜 우리가 버리고 갈 시대를 나타내 보인 풍경이 사실화 쪽이라면, 다양한 상징들을 내보이는 제2장은 다분히 추상화라 할 만하다. 우리 춤사위로 이토록 간단치 않은 이미지를 나타내 보이려고 시도한 춤꾼이 그녀말고 또 있었을까.

    ─작품의 성격상 음악도 그렇고 춤을 추어내는 일도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나름으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한국적인 전통 음악으로는 그런 이미지를 풀어내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창’을 위해 음악을 별도로 작곡했습니다. 춤 역시 관객들은 기존의 전통무용과는 많이 다른 것으로 보았을 거예요. 그러나 우리의 정서가 내 몸에 너무나 강하게 박혀 있기에 우리 고유의 몸짓이 어디 가지 않습니다.”

    ─까다로운 시도였던 셈인데, 공연에 만족하십니까?

    “만족이라니요, 늘 부족하지요. 막을 내리고 보니까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보충할 부분은 보충해서 금년 내로 한 번 더 공연하고 싶습니다.”

    “춤은 정신과 정신을 잇는 대화”

    ─한국 전통문화를 일본에 보급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질문인데, 최근 들어 한·일간 문화교류의 물꼬가 트여 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문화정책이나 양국 국민이 상대의 문화를 수용하는 자세에 문제점은 없습니까?

    “문화란 흘러가고 흘러와야 합니다. 한국의 대중문화는 거의 프리패스로 일본에 진출한 반면 일본문화는 빗장에 걸려 이 쪽으로 흘러오지 못했습니다. 그 와중에 바람직하지 못한 저질문화만 음성적으로 유입되었고, 그것이 일본문화의 본모습인 양 취급되지 않았습니까. 제 경우 일본열도의 구석구석까지 다니면서 한국의 전통문화를 전파해 왔습니다. 정부가 정책적으로 어떤 분야의 문화를 개방한다고 할 수는 있지요. 그러나 문화란 장관의 한 마디로 교류되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일본문화의 좋은 측면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소화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제가 돌아다녀 보니까 우리가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 바람직한 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는 과정에 정선생의 역할이 또 있겠네요.

    “우리가 전해주는 것만큼 바람직한 일본문화가 한국으로 들어오도록 가교역할을 했으면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정명자는 한국의 전통문화에 관한 한 재일(在日) 한국 대표선수다. 일본에서 수시로 개최되는 크고 작은, 국내 혹은 국제행사에 한국의 문화사절로 참석하여 우리 전통춤을 자랑하고 가르친다. 그녀가 한국에서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간 것은 어찌 보면 다행인지 모른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만한 출중한 춤꾼이 또 누가 있어 일본의 한복판에서 우리 몸짓을 그토록 혼신을 다해 풀어놓았겠는가.

    “춤은 정신과 정신을 잇는 대화입니다. 말은 전달은 빠르지만 생명력이 짧아요. 춤이라는 몸짓 언어는 어렵게 전해지지만 깊이 스며듭니다.”

    정명자가 춤을 추는 이유다.

    그녀와의 얘기를 마치고 찻집을 나왔을 때 종로 거리엔 불빛이 휘황했다. 그녀가 아주 많은 한국사람들 사이로 종종걸음으로 멀어졌다. 한국에 사는 한국사람보다 훨씬 더 한국사람다운 마흔 중반의 한 여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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