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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떠나살기|허병섭목사의 무주생태마을

“오늘 못한 일은 내일 하면 되지”

“오늘 못한 일은 내일 하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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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겪는 육체노동은 대개 이런 것들이다. 지게질을 하고 삽으로 땅을 파거나 퇴비를 뒤집는다. 괭이로 굳은 밭흙을 뒤집고 고랑을 만든다. 호미를 들고 밭고랑을 다니면서 풀을 뽑고 돌을 골라내는 일도 한다. 20~40kg인 사료 포대나 퇴비포대를 등이나 어깨에 메고 옮겨 논밭에 뿌린다. 묏자리를 하고 허리를 구부려 모를 심고 논에서 자란 피를 뽑아준다. 들이나 논두렁에 자란 풀을 낫으로 베어주기도 한다. 그밖에 팔과 다리 근육에 힘을 싣고 온 몸에 무게를 가하는 각종 노동을 한다. 집 짓고 수리하고 축사도 지으며 길도 다듬고 상수도와 하수도 공사도 한다. 장독대도 만들고 정원도 꾸미며 나무도 심는다.

노동을 하는 내내, 눈에는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자연이 들어온다. 향기로운 꽃냄새가 항상 주변에 있다. 나비와 벌 곤충과 갖가지 새들을 바라보고 그들이 내는 음악 같은 소리를 들으면서 일한다. 덥고 힘들면 바로 옆에 있는 개울을 찾아 발을 담그고 주변의 열매를 따먹으며 쉬기도 한다. 맑고 상쾌한 공기가 코와 폐부 깊숙이 들고난다. 땅위와 땅속의 벌레들과 미생물을 만나 대화하고 교감하며 생명의 신비를 느낀다.

돈이나 명예나 인기, 지배와 쾌락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생명과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먹을 것이 생기고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육체노동을 하면서 풍요로운 정신과 감성의 세계에 젖어들 수 있고, 이러는 동안 근육의 피로와 몸의 고달픔이 사라진다. 한 가지 일만 단순반복하지 않으므로 우리 육체노동은 아기자기하다. 무릇 육체노동은 팔과 몸의 근육을 쓰고 땀을 흘리고 피를 흘리는 단순 노동이 아니다. 육체노동을 하는 동안 정신과 의식과 이성이 더 깊어지고 넓어질 뿐만 아니라 맑아지고 고요해진다. 때로는 마음이 비어 있어서 세상의 온갖 것을 품을 수도 있다. 이런 일들은 도시에서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뿐인가? 이런 경험을 통해 친구들을 생각하고 옛날 도시에서 아옹거리며 다툰 사람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큰 꿈을 품은 일, 의식과 사명감으로 치열하게 살던 일, 수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대화하고 일하고 고민하며 울고웃던 생활을 떠올리기도 한다. 도시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들으면서 마음을 연대하기도 한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때로는 옳은 일을 위해 힘들게 도시에서 사는 마음의 친구들에게 미안한 생각도 든다. 그러나 자연의 바다에 그들의 얼굴과 몸부림을 투영해보면 그 속에서 함께 허우적댈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또 다른 눈을 뜬 것이다. 여기서는 인간과 사회, 역사와 세계에 대해 명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래서 육체노동은 정신세계로 연결되며 세계관과 역사관이 새롭게 자리잡도록 우리를 안내한다.

나는 누구이며 인생이란 무엇인지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정치와 경제는 어떻게 되어야 하고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보게 된다. 이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 위해 쫓아다닐 필요도 없다. 우리가 사는 집에는 1년에 1000여 명이 방문한다. 우리는 이들과 삶과 경험을 나눈다.

육체노동은 몸으로 사는 형식이다. 나는 서울에서 머리로 사는 것보다 몸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자부심이 있었다. 성서와 신학도 몸으로 사는 가치에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런데 서울에서 몸으로 산다는 것을 단지 ‘아는대로 실천하는 것’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몸으로 산다는 것은 육체노동과 맞물리면서 내용이 풍부해진다. 자연의 수많은 생명체를 보며 이들이 온몸을 움직이고 노동을 통해 생명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육체노동은 생명을 일으키는 노동인 것이다.

‘식물의 정신세계’라는 책을 접하면 식물은 인간이라는 생명과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식물들과 함께 육체노동을 하는 동안 그들은 노동 대상이 아니라 이 땅에 생명을 일으키는 동지임을 알게 된다. 곧 그 경험은 느낌을 뛰어넘어 의식과 가치관으로 자리잡는다.

농작물을 심기 위해 밭에 퇴비를 주면서 생각한다. 퇴비는 땅 속에 미생물들을 발생하게 한다. 수억 종류의 미생물들이 상부상조하고 어울려 때로는 치열하게 살아가는 동안 그들이 흘리는 피땀이 있고 열정과 의지가 있다. 미생물들도 생명체이기 때문에 생명을 위한 노동을 하는 것이다.

이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뿌린 씨앗도 생명유전자를 지니고 생명을 일군다. 씨앗이라는 생명은 미생물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자신을 분해하고 해체하면서 스스로를 부식시킨다. 주변 미생물들과 치고받고 먹고 먹히면서 생명을 만들어낸다. 이들의 노동을 몸의 노동이라 할 만하다.

나는 이를 ‘밀알 노동’이라 말하고 싶다. 씨앗 하나가 얼마나 작은가? 그런데 거기에서 수백 수천 개의 열매가 맺힌다. 땅속 미생물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다. 그러나 이들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일으키고 있는가? 작은 자의 노동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노동은 밀알 노동이고 자신을 분해하고 희생한다는 뜻에서 밀알 노동이다.

성서의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구절에서 밀알 노동을 생각하게 된다(이 점은 한신대 이준모 교수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육체노동, 몸의 노동, 밀알 노동으로 시골의 일상을 수놓고 있는 것이다.

생태계 최대 교란자는 인간

자연 속에는 살벌한 생존경쟁이 있다.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동안 인간과 자연의 생명체 간에 모두 따뜻하고 포용적이지도 않다. 예를 들어 가시나무는 주변 다른 식물에게는 아픔이 되어 다른 생명을 억제하기도 한다. 멧돼지가 사라져 자유분방하게 자라는 칡넝쿨은 온갖 나무를 휘어감아 그 생명력을 억제한다. 쇄뜨기 풀도 각종 넝쿨 식물도 땅과 식물을 지배하고 억압한다.

본래 자연 생태계는 절대적인 지배자도 없고 제왕 같은 폭군도 없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면서 평화와 공존과 공생의 자연생태계를 교란한 것이다. 산림정책을 다루는 사람들도 생태적 원리보다는 사람의 경제적 이익을 중심으로 육림사업을 했기 때문에 우리나라 산림은 자연생태계에 걸맞지 않게 되었다. 토종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은 토종 생태계가 외래종에 밀려 말살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얘기다.

인간들이 무제한 개발로 여러 동식물의 씨를 말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이 모든 일에 맞서 싸우는 일도 밀알 노동으로 드러내야 할 것이다. 물론 인간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만 그것이 생태계의 엄연한 질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니면 인간이 파괴하고 훼손한 생태계가 인간에게 반란을 일으킨다고 볼 수도 있다.

자연을 살리고 생태계 원리가 회복되도록 인간이 희생하고 자기를 해체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럴 때 자연과 인간은 공존할 수 있으며 우리 후손이 이 땅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며 영원토록 인간의 역사와 세계가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노동이 자연 생태계를 훼손한 어리석음과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귀농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인간적 삶의 모범을 만들어보겠다고 ‘생태마을’을 세우기 위해 산을 ‘개간’하여 집을 짓고 밭을 만들기도 했다. ‘개간’이란 노동이 기계를 사용하는 것이고 포크레인이 나무를 무지막지하게 쓰러뜨리고 풀을 뒤집어놓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이 생명들이 울고 고통스럽다고 불평하거나 비명을 지르며 못된 인간에 대해 분노하고 한을 품었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아파하고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던 아내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생태마을을 조성한답시고 자연의 생명체를 괴롭힌 죄를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우리는 다른 나무를 심고 채소와 꽃을 심으면서 더 다양한 생태질서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일말의 보상을 시도하고 있다. 아니 자연의 생명체만으로 이루어진 생태계가 아니라 이들 속에 인간도 끼여들어 가족이 되고 함께 생태계의 생명력을 복원하는 친구가 되고 싶은 것이다. 이들이 먹고 먹히는 동안 절대 지배자도 없고 폭군도 없이 스스로 평등과 평화를 일궈가는 것처럼 우리도 이 생태적 원리에 합류하는 마음을 가지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이 그들에게 속죄가 될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오늘 못한 일은 내일 하면 되는 것

도시에서, 노동은 대체로 통제당하고 규격화되어 있으며 요구에 따라 이뤄진다. 이는 사회 질서와 규율에 짜 맞춘 노동일 뿐이다. 이런 노동은 사회체제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보조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골에서 이뤄지는 가족농의 육체노동은 사회 구조와 체제에서 자유롭다. 노동량이 적으면 적게 먹으면 된다. 적게 먹는다고 해서 일찍 죽는 것도 아니다. 더 오래 살 수도 있다. 오늘 못한 일은 내일 하면 되고 누구의 지시를 받을 일도 없다. 자율성과 독창성이 있을 뿐이다.

이런 노동을 통해 끊임없이 사고하고 탐구하며 명상하고 상상한다. 기존 지식과 경험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노동을 통해 새로운 사고를 하고자 한다. 그런 경지에 들어설 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때는 우리 영성이 더욱 풍부해져 있을 것이다.

노동의 결과는 우리가 생산한 농산물을 이웃과 나눠먹고 깨끗하고 건강한 먹을거리를 보급하는 일과 연관되어 있다. 땅을 살리고 환경을 살리는 삶이 21세기에 필요한 삶의 모범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의 모범을 세우려면 자연에서 자연의 생명체들과 함께 노동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세상을 향해 속삭이고 싶다.冬

신동아 200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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