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차다’라는 말은 정중동(靜中動)을 기본 미학으로 삼는 한국 전통무용을 수식하는 말로는 아무래도 제 짝이 아닐 성싶다. ‘드라마틱하다’는 수사 역시 (60년대 이후 민속무용의 무대화가 활발하게 진행돼 왔다지만) 우리 무용을 감상하고 나서 피력할 만한 소감으로는 덜 어울리는 표현일 것이다. 그럼에도 정명자(鄭明子·44)라는 무용가의 창작 춤사위 두어 판을 주마간산 격으로 구경하고 나서 거칠지만 우선 그렇게 정리하기로 했다. 전통춤에 대한 이해의 폭이 워낙 협소하다 보니 저지를 수 있는 ‘용감한 실수’로 봐 준다면 좋겠다.
우선 내가 ‘힘차다’는 느낌을 받은 공연은 지난 4월6일 서울 대학로의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이생강 대금산조 발표회’에서 본 정명자의 춤이었다. 물론 그날 무대의 주인공은 우리 나라 대금산조의 상징적 존재인 이생강이었다. 말하자면 정명자는 그의 무대를 빛내주기 위해 찬조 출연한 셈이었다.
그 공연에는 중국 조선족 음악가인 김동설이 북한식(서양 악기 플루트처럼 나무 밸브가 달린) 대금을 들고 나와서, 북한 음악가들이 집체 작곡한 두 곡을 연주하는 이색 무대가 마련되었다. 남쪽의 그것과는 소리의 빛깔이나 모양새나 맛이 많이 다른 북한 대금이나 곡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처음 소개되는 북방음악에 맞춰 춤사위를 선보인 정명자의 몸짓 얘기다. 그녀는 김동설의 대금 연주 중간에 등장하여 곡조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춤으로 풀어 보이고는 바람처럼 무대에서 사라져버렸는데, 내가 보기에는 북한 창작곡에 춤을 맞춰 만든 게 아니라, 정명자의 춤사위를 보고 북한 음악가들이 대금연주용 곡을 만들지 않았을까 의심이 갈 정도로 그의 몸짓은 음악의 강약, 고저 장단과 기막히게 맞아떨어졌다. 우리 춤이 저렇게 역동적일 수도 있구나, 아마추어 관객인 내 느낌이 그랬다.
대표작은 창작무 ‘귀천지’
영화판에서 쓰는 속어로 ‘똑 따먹는 배역’이라는 말이 있다. 단역으로 출연했으되 짧은 시간 동안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는 역할을 일컫는 말이다. 이 날 정명자가 그랬다.
그러나 내가 그녀의 몸짓을 ‘힘차다’고 한 것은 단순히 템포가 빠르고 박진감 넘친다는 의미는 아니다. 최근 들어 한국무용을 서구식 현대무용 방식으로 재편집하여 전통의 향기를 걷어내 버린 채 ‘반(半) 발레’처럼 만들어 버리는 일부 경향에 대해 비판이 만만치 않으나, 정명자는 전통무용의 정서에 충실하다는 평을 듣는다. 정서에 충실하나 답습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결코 변할 수 없는 한국 전통춤의 정서를 기반으로 하여, 늘 새로운 형식의 춤판을 선보인다. 그녀에게 ‘예부터 이렇게 추라 했다’ 혹은 ‘이런 것을 추어야 한다’는 교본을 들이대는 것은 어리석다.
그는 늘상 새로운 몸짓을 꿈꾼다. 따라서 늘 새로운 사위를 만들어 내보이는 그녀의 춤은 너울져도 ‘힘차고’ 멈춰 있어도 자신감에 넘친다.
이제 정명자의 춤을 ‘드라마틱하다’고 토로한 배경을 얘기해야겠는데,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창작무 ‘귀천지’를 구경한 사람이라면 한 사람의 몸짓만으로도 관객에게 많은 얘기를 들려주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작품 ‘귀천지’는 그녀의 선친과, 그녀가 일본에 생활 근거를 두고 살아가는 사연, 그리고 남들이 사탕값이나 조를 어린 나이부터 40 중반에 이른 지금까지 춤에 미쳐 살아온 내력 등과 떼어서 얘기할 수 없다.
정명자는 한국의 춤꾼이되 일본에서 산다. 그녀의 남편 또한 일본 사람이고 그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 역시 일본식 교육을 받으면서 일본에서 자라고 있다. 이것은 그녀의 춤 인생을 얘기하는 데 부수적이기도 하고 중요한 사항이기도 하다.
“종로2가 고려당에서 만납시다.”
전화로 약속 시간을 정한 뒤에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지 못해 더듬거리는 나에게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고려당? 이십 몇 년 전, 꽤나 발도장을 찍으며 돌아다닌 거리가 바로 종로통이었지만, 나는 고려당이라는 고색 창연한 이름의 제과점이 지금까지 제자리에 붙박혀 있을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가 하도 자신 있게 말하는 바람에 그럼 거기서 만나자고 대꾸해버린 터였다.
아닌 게 아니라 태극당이니 고려당이니 하는 예전의 빵집이며 과자집들의 문패는 종로2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그것들이 있던 자리에는 ‘버거킹’이니 뭐니 하는 서양식 패스트푸드 가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뽕짝’풍의 대중가요에 섞여 민요가락이 간헐적으로 흘러나오던(예전에 그 근처에 ‘종로福떡집’이 있었는데 거기서는 제법 ‘닐니리야’ 가락이 새어나왔다) 거리는 록이니 테크노니 하는 소리물결로 귀청이 얼얼했다. 노래보다 더 유행을 타는 게 몸짓일진대 이 시대에 한국무용을 찾는 일도 그만큼 희귀한 노릇일 터.
자신의 ‘작품’을 갖고 있는 춤꾼
약속 장소도 어긋나버렸겠다, 피차 인상이나 착의의 특징도 얘기하지 않았으니 어느 여자가 무용가 정명자인 줄 알아서 접근한단 말인가. 더구나 나는 유달리 사람 못 알아보기로 정평이 나 있는데다, 멀찌감치에서 그녀의 춤추는 모습을 구경한 적은 있어도 ‘이 사람이 그 사람이다’ 하고 얼굴을 외울 만큼 가까이 마주한 적이 없었으니….
그러나 대견스럽게도 나는 온갖 사람이 득시글거리는 종로통에서 그녀를 정확히 찾아냈다. 양장차림이었음에도, 단아한 체구에다 얼핏 봐도 ‘한국무용하는 사람은 아마 저렇게 생겼을 것’이라는 느낌을 풍기는 사람이 있어 ‘실례합니다만…’ 따위의 머뭇거리는 절차를 무시하고 “안녕하십니까”라고 해버렸다. 예감은 적중했다. 이만하면 나도 한국의 전통춤에 아주 안목이 없는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정명자씨는 춤추는 사람임에도 자신의 ‘작품’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귀천지’와 최근에 정동극장에서 공연한 바 있는 ‘창(窓)’이 바로 그녀가 기획하고 구성한 춤 작품이다. 특히 97년에 일본 도쿄에서 초연한 이래 한국에서도 네 차례나 무대에 올랐고 다시 금년 2월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공연한 바 있는 ‘귀천지’는 씻김굿과 춤, 그리고 퍼포먼스를 조합한 잘 짜인 한 편의 춤극이다. 그녀는 이 작품을 ‘죽을 때까지’ 공연할 것이라고 했다. 그에 관한 얘기부터 들어보기로 하자.
─귀천지(歸天地)라… 하늘로 돌아가는 겁니까, 땅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하늘로 가고 땅으로 가는 거지요.”
돌아가는 주체는 97년에 작고한 그녀의 아버지(정홍근)다. 육신은 땅으로 돌아가고 혼백은 하늘로 돌아간다. 망자의 영육이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길을 틔우는 이가 바로 딸 정명자다. 그러니까 ‘귀천지’는 망부(亡父)에 대한 자식의 넋씻김 의식을 춤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자식의 애틋한 마음이야 누구라 덜하겠습니까. 그래도 춤이라는 타고난 재주가 있어서 수많은 관객 앞에서, 그것도 한·일 양국을 넘나들면서 선친의 넋을 추모할 수 있다는 건 남들보다 행복한 경우 아닌가요?
“저에게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가 아닙니다. 제가 삼십칠팔년을 춤으로 살아왔지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신 분이 아버지였어요. 어린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열릴 예정이던 제 개인발표회의 인쇄물을 가지고 한일 양국을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시다가 끝내 공연을 못 보고 눈을 감으셨어요.”
─그러니까 ‘귀천지’는 무용가 정명자가 선친의 넋을 추모하는 지극히 개인사적인 동기에서 만들어진 작품인데….
“동기가 사적이라는 얘기에는 동의하지만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무대에 서는 순간 나는 무용가가 아니라 아버지의 딸이었으니까요. 내가 추모하고 있는 대상도 작품 속의 그 누구가 아니라 바로 제 선친이었고요.”
망부(亡父)에 대한 넋 씻김 춤
그런 처지이다 보니 그녀의 몸짓은 진실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저쪽으로 가는’ 아버지와 ‘이쪽에 남는’ 딸의 지극히 개인적인 별리 장면을 표현한 이 작품이 공연 때마다 폭발적인 호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것이 ‘우리’ 얘기이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망자의 관이 놓여 있는 무대는 달리 말하면 빈소다. 딸 정명자가 객석의 중앙통로에서 천천히 무대를 향해 나아간다. 소복을 한 네 명의 여자가 기다란 흰 천을 붙잡고 있다. 잠시 슬픔의 몸짓을 해보이던 그녀가 천의 한가운데를 가르고 길을 내 무대에 오른다. 진도 씻김굿에 등장하는 ‘베 가르기’ 의식을 차용한 것이다. 창호지를 찢어 양손에 모아 쥐고 추는 지전(紙錢)춤 역시 씻김굿에서 따온 것이다.
이어서 그녀는 아버지의 삼베 수의를 새끼줄에 걸치는데, 임종하지 못한 그녀가 아버지 육신에 수의를 입혀드리는 의식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그녀의 춤은 춤이라기보다는 격정적인 한바탕 몸부림에 가깝다. 광녀처럼 산발을 한 채 슬픔을 주체 못해 머리를 짓뜯다가 온몸을 비틀며 바닥을 뒹군다.
이제 아버지의 육성을 찾아 나설 차례다. 바닥 여기저기를 두드리던 그녀가 북채를 들어 북을 친다. 거기서 울려나오는 소리는 선친의 육성이다. 부녀간의 소통이 이루어진 것이다.
망연히 앉아 자신의 무용생활을 되돌아본(그녀의 설명) 뒤에 좋은 춤꾼이 되겠다는 다짐으로 자신의 무용도구를 소쿠리에 담아 부친의 영전에 바친다. 그러고는 등장한 객석의 통로로 요령을 흔들며 퇴장한다. ‘귀천지’는 대개 이런 구성이다.
이 공연은 ‘춤꾼이 무대에 오르면 시종일관 춤만 추어야 되는 것’이라는 일반의 상식을 여지없이 무색하게 만든다. 두 다리를 뻗고 망연히 앉아 있는 것도 그녀의 춤이요, 방정치 못하게 바닥을 뒹구는 행위도 춤이다. 장중하고 애잔한 국악 연주나 구음(口吟)에 맞춰 많은 얘기를 내쏟고 있는 실험적인 무언극이다. 그녀는 옷을 입고 벗고, 버선을 신고 벗고, 얼굴에 땀을 닦는 행위들을 암전(暗電)이 아닌 상황에서 관객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지만, 그 행위가 진지하고 엄숙하여 자연스럽게 작품의 일부가 된다.
─첫 공연 때 아버님의 넋을 한바탕 추모하고 나니 홀가분했겠습니다.
“아닙니다. 아버님께 훌륭한 춤꾼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고 나니 책임감이 천근만근이던데요.”
효성스런 딸이다.
서울 영등포가 고향이다. 그녀는 이미 다섯 살 때부터 춤꾼의 기질을 드러내 보였다. 아무 노래나 나오면 몸을 흔들어대기 일쑤였다는데, 그런 딸을 야단치기는커녕 오히려 무용학원에 가도록 권장하는 등 적극적으로 부추겨온 사람이 그의 아버지다.
사업하는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로 건너가 여섯 살 때부터 무용학원에 발을 들여놓았다. 주문진여중에 진학하면서는 조금 더 좋은 선생을 찾아 버스로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강릉까지 춤을 배우러 나다녔다. 정씨는 춤에 관한 한 부녀간 궁합이 딱 맞아떨어졌다고 말한다. 부모가 시키려 해도 자식이 거부하면 불가능하고, 자식이 하고 싶어도 부모가 반대하면 어려운 법인데 정씨의 아버지는 절대적인 예찬자요 후원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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