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위원측은 YS의 비토에 관해서도 역시 ‘이인제가 막상 대권후보가 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YS는 철저히 당선될 사람 쪽에 캐스팅보트를 행사할 것이고 이 경우 현재의 막무가내식 비토와 달리 이회창과 이인제를 놓고 현실적인 득실을 여러모로 따진 끝에 결국 이인제를 선택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위원측에서는 이를 위한 정지작업으로 자연스럽게 YS와 관계를 복원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이위원은 추석연휴기간인 9월11일 은밀히 상도동을 방문, 장시간 밀담을 나눴다. YS가 최근 고건 정몽준 이홍구 등 잠재적 대권주자로 불리는 이들과 이런저런 명분으로 상도동 면담을 가져온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위원과의 전격면담은, 그간 이위원에 대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면박을 줘온 YS와의 관계에 비춰볼 때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대목.
상도동 대변인 격인 박종웅의원(朴鍾雄·한나라당)은 “이인제가 완전히 민주당을 장악, DJ당 내지 호남당이 아닌 전혀 새로운 당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느냐에 따라 YS의 향후 태도가 달라지지 않겠느냐”면서 “그렇지만 저 당과 DJ의 체질상 이인제가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설사 된다 해도 호남과 DJ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아직 전제조건이 달려 있기는 하나 상도동과의 관계개선은 이인제의 콤플렉스라 할 수 있는 ‘경선불복’ ‘탈당’전력에 대한 도덕적 비난의 강도를 완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게 이위원측의 기대다.
하지만 이위원측의 바람처럼 ‘이인제 불가론’은 때가 되면 자연히 꺼질 거품에 불과한 것일까? 이위원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 시각을 가진 인사들은 이위원이 ‘이인제 불가론’을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간은 내편’이라는 식의 태도에서 벗어나 비토그룹에 파고들어 전국적 차원의 정치력과 비전을 보여주는 적극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부산에서 만난 김동호씨(47·북구 구포동)의 말. “지난 총선 때 이인제선대위원장이 부산에 안 온 것은 잘못이라고 봐요.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와서 사람들을 설득했어야죠. 이곳에서부터 발판을 구축하는 노력을 해야죠. 자기가 뛰어서 뚫어야지 누가 대신 뛰어주겠습니까?”
김영환의원(金榮煥·민주당)도 그동안 이최고위원이 영남의 벽을 뚫으려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한다.
“지난 전당대회에서 이위원은 1등 여부가 아니라 영남대의원들을 설득해서 ‘이인제로 대권을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데 주력했어야 한다. 그런데 ‘영남공략방안’에 대한 설득없이 대권론만 제기, 공허한 주장이 돼버렸다. 지난 총선 때도 영남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어야 한다. 충청에서 몇석을 가져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렵더라도 ‘적지’를 뚫었어야 한다. 지금 우리 당이 무력감에 빠진 이유는 영남의 결집, 영남의 응고성 때문이다. 최고위원의 등수는 그리 큰 의미가 없다. 앞으로 시간이 갈수록 당내 영향력은 대선승리 가능성이 있는 후보에게 쏠릴 것이기 때문이다.”
당내정치의 중요성과 호남불가론
이위원캠프는 지난 경선을 자체 평가하면서 ‘일단 당내정치에 역량을 집중하는 일이 불가피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이위원측은 이를 위해 경선 당시 주력군 구실을 했던 충청권 및 국민신당 출신 의원 말고도 현역의원 다수를 ‘포섭’하는 일에 정성을 들이기로 했다.
외부에서 각계 전문가를 영입하는 일에도 적극 나선다는 방침이다. 이위원측은 또한 지역구도를 뛰어넘는 선거전략 구사를 위해 통일, 정보화혁명 등 범국민적 이슈를 선점하는 한편 ‘가볍다’는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게 ‘덕치(德治)’ 이미지 구축에도 역점을 둔다는 계획이다.
이위원측은 이와 함께 ‘호남불가론’의 확산에도 기대를 걸고 있다. 당내 최대 세력기반은 호남일지 몰라도 호남출신을 내세워서 대선에서 이길 수 있느냐는 게 호남불가론의 요지다. 호남출신인 권노갑최고위원도 이와 관련, 이위원측과 같은 견해다. 한위원이 동교동계 대표로 최고위원에 나간 것까지는 인정하더라도 대권은 안된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궁극적으로 국민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하므로 호남이라는 소수지역에 기반을 둔 후보로는 현실의 지역구도상 누굴 내세워도 승산이 없다는 얘기다. 지난 대선 때와 같은 완벽한 DJP구도에다가 김대중대통령과 같은 카리스마를 가질 수 있는 호남인물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만에 하나 한최고위원이 당세만 믿고 ‘오버’하거나 호남출신의 다른 인물이 욕심을 낸다면 당의 분열만 초래되고 정권재창출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지난 경선에서 한최고위원을 지지한 김홍일(金弘一)의원도 ‘호남후보로는 다시 정권을 잡을 수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고 알려졌다.
‘이인제 불가론’의 논리적 연장선상에는 ‘영남후보론’이 있다. 영남출신 후보만이 민주당의 정권재창출을 이룰 수 있다는 논리다. ‘영남정서’에 어필할 수 있는 인물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내세우면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꺾을 수 있다는 가설이다.
노무현(盧武鉉) 캠프에서 부산지역 상주비서로 일하는 최인호씨는 현재의 부산정서를 ‘무대표 정서’라고 요약한다. 부산 경남은 차기와 관련, 선호하는 후보가 없다는 얘기다. 다만 지난 총선에서 열악한 환경 속에도 37%를 얻는 등 나름대로 선전한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예를 보건대 다음 대선에서 부산경남의 정서를 대변할 후보를 민주당이 내놓는다면 이회창에게 갈 표를 상당수 끌어올 수 있다는 논리다.
“부산·경남·울산의 인구는 800만이고 유권자는 550만이다. 투표율을 75%로 가정할 경우 400만명이 투표하고 이인제가 이 가운데 10%를 득표하면 40만표다. 반면 민주당에서 이 지역에 어필할 후보를 내놔서 35%를 얻는다면 140만표다. 100만표 차이다. 이는 그냥 두면 그대로 이회창에게 갈 표다. 게다가 수도권의 영남출신표도 같은 흐름을 탈 것이다. 따라서 다음 대선후보는 누가 영남표를 잡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된다.”
영남후보론
최고위원경선에서 2위인 이인제후보를 턱밑까지 추격한 김중권(金重權)최고위원측도 “아직은 얘기를 꺼낼 때가 아니다”고 하면서도 영남주자론에 공감을 표시한다.
반면 영남의 한나라당 관계자들은 다른 시각을 보인다. 이석희 한나라당 부산시지부사무처장은 “부산에서 노무현씨가 올렸다는 37%의 득표율은 실체가 없는 허구”라고 반박했다. 지난 총선에서는 노무현후보가 여당후보에 대한 기대가 있는 북·강서을의 낙후된 농촌인접지역에서 선거를 치렀기 때문에 그런 득표율이 나온 것일 뿐 그게 부산 일반의 정서는 아니라는 얘기다. 이에 대해 노장관의 한 측근은 “노무현은 부산의 어떤 선거에서도, DJ가 총재로 있는 당으로 나오면서도, 항상 36%이상 얻었다”고 반박했다. 더욱이 다음 대선은 DJ의 울타리를 벗어나 후보자신이 주체요, 변수가 되는 선거이기 때문에 ‘DJ당’ 소속이라서 받는 불이익은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다.
민주당 경북도지부의 한 관계자는 “민주당이 노무현이든 김중권이든 영남후보를 내면 분명 해당지역에서 득표율은 올라갈 것”이라면서도 “그러나 그 후보가 과연 전국적 설득력을 가진 인물이냐가 고려돼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여당의 대권후보는 무엇보다 김대중대통령의 의중이 큰 변수로 작용하는 게 현실이다. 김대통령은 차기후보와 관련, 당 저변에 흐르고 있는 백가쟁명식 정권창출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김대통령은 먼저 정권 자체가 국정운영에 성공해 확고한 국민적 지지기반을 확보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것이 김대통령이 차기와 관련하여 고려하는 첫째 요소라고 청와대 관계자들은 전하고 있다.
김대통령은 이를 위해 레임덕을 최대한 억제하고 남북문제 진전을 지렛대 삼아 금년 말까지 금융 기업 공공 노사 등 4대 부문 개혁을 마무리한 뒤 서서히 차기후계군의 경쟁과 검증을 유도할 것으로 보인다. “대권논의는 2002년 1월 전당대회 한두 달 전부터 하면 된다”는 김대통령의 언급은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김대통령이 이토록 느긋한 자세를 보이는 데에는 청와대측이 파악하고 있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여당의 잠재적 주자군에 대한 이총재의 비교우위가 그리 확고하지 못하다는 판단도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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