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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김대통령 잘하고 있지만, 너무 격해”

북방교류 물꼬튼 노태우 전대통령의 남북관계 평가

  • 육성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김대통령 잘하고 있지만, 너무 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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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전대통령은 특유의 느릿느릿한 말투로 88서울올림픽의 성과를 설명했다. 올림픽을 통해서 한국이 세계에 알려졌고, 그 힘으로 경제도 발전시켰다는 주장이었다. 노전대통령이 올림픽 얘기를 할 때마다 빠트리지 않는 말이 있다. 바로 ‘화합’과 ‘번영’이다. 이것은 서울올림픽의 모토다. 그는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대통령’이라는 점을 은근히 강조하기도 했다.

테니스 라켓을 만지며 김옥숙씨의 스트로크를 주시하고 있는 노전대통령에게 본격적인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이 순간 김옥숙씨가 날카로운 패싱을 성공시켰다. 노전대통령의 입에서 ‘그렇지’라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2년 전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을 무렵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의 만델라’가 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년 반이 지난 지금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다른 얘기는 하지 말자고…. 테니스 치는 데 와서 무슨 정치 얘기야.”

―당시 김대통령에게 상당한 기대를 거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요.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어. 우리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야. 화합 아닙니까. 이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 그래서 김대통령이 무엇보다 먼저 화합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했던 거지. 그 동안 적대시했던 사람들이 신뢰를 쌓아서 함께 나가야 통일이 되는 거 아니야. 화합은 국가간에만 하는 게 아니고 개인과 단체도 다 화합해야 돼.”

―김대중 정부는 남북 화해 시대를 열었습니다.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화합이라는 차원에서 좋은 일 아닙니까. 정상회담이 열리고 이산가족이 만나는 것도 크게 볼 때 우리 민족이 화합하는 하나의 ‘시범’이라고 봅니다.”

―이산가족 상봉을 지켜보면서 너무 늦었다고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측면도 있지. 남북 이산가족을 전부 합하면 1000만쯤 될 겁니다. 생사도 모르고 반세기를 살았으니 얼마나 뼈아픈 일입니까. 이번에 100명이 만났는데, 더 늘려서 이산가족이 모두 만날 수 있도록 해줘야지요. 김대통령이 잘하고 있으니까 국민 모두가 화합한다면 머지 않아 큰 것을 성취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남북관계를 매우 긍정적으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한 가지 걱정스러운 점도 있어. 남북관계를 머리로만 풀어서도 안 되지만, 가슴으로만 느껴서도 곤란해. 가슴과 머리가 균형을 이뤄야만 현명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남북교류는 너무 격해. 지성과 감성이 잘 조화돼야 하는데 감성이 너무 앞서고 있어. 그게 좀 아쉬워.”

―구체적으로 어떤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까.

“너무 급히 문제를 풀려고 하면 일이 안 돼. 자칫 구멍이 뚫릴까 걱정돼. 가슴도 중요하지만 지성도 중요해. 지금은 너무 빠르고 격해서 지나치는 것이 많은 것 같아. 시간이 지나면 그게 문제가 될 수도 있어. 지성과 감성을 조화시키고, 머리와 가슴으로 문제를 풀어야 돼. 양보할 때는 양보하되 좀더 실리를 챙겼으면 하는 바람이야.”

― 꽁꽁 얼어붙었던 남북관계가 물꼬를 튼 계기는 1988년 7·7선언이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 상황을 지켜보면서 감회가 새로울 것 같습니다.

“이번에 6·15 선언은 아주 중요한 역사적 계기야. 91년 12월13일 발표된 남북기본합의서에 다 나와 있는 걸 지금 실천하고 있는 거야. 거기에 남북이 어떻게 하기로 다 명시돼 있어. 지금 남북정상이 합의하지 못한 내용도 거기에는 다 들어 있어. 남과 북이 기본합의서를 잘 활용하지 못하고 소홀히 해서 지금껏 늦춰진 거야. 그 당시 합의할 때 남북은 이의가 없었어. 여론도 충분히 수렴했어. 이제라도 기본합의서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면 남북관계는 잘 풀어지게 돼 있어. 지난번 청와대에서 김대중대통령을 만났을 때 그 얘기를 했더니 김대통령도 기본합의서의 내용 그대로 해나갈 생각이라고 말했어.”

첫번째 게임이 끝났다. 노전대통령은 라켓을 몇 번 휘둘러보고 코트로 나섰다. 김옥숙씨와는 서로 편이 갈렸다. 6게임을 먼저 따는 1세트 복식경기였다. 김옥숙씨는 두 번째 게임인데도 힘이 넘쳤다. 반면 노전대통령의 스트로크는 자주 네트에 걸렸다. 0 대 4. 노전대통령팀이 몰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노전대통령의 플레이가 살아났다. 4 대 4까지 따라붙으며 접전을 펼친 것. 결국 승부는 4 대 6. 김옥숙씨 팀이 이겼다. 노전대통령은 땀을 닦으며 벤치로 돌아왔고, 김옥숙씨는 숨을 고른 뒤 세 번째 게임을 준비하고 있었다.

감격스러웠던 정상회담

―젊은 시절부터 승부욕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오늘도 0 대 4로 뒤지다가 동점까지 따라붙으셨습니다.

“당당하게 시합을 벌이되 지는 것보다는 이기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스포츠에서 패하는 것은 전쟁에서 패하는 것과 비슷해. 그런 기질을 젊었을 때 경험하다 보면 소위 불굴의 투지가 양성되는 거지.”

노전대통령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기자가 “남북관계와 관련해 몇 가지 추가 질문을 드리겠다”고 하자 노전대통령은 “별로 할 얘기가 없다”고 말했다. 시큰둥한 반응이었지만, 그냥 강행하기로 했다.

―최근 남북관계가 감성에 치우치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을 지적하신 건지요.

“한쪽으로 치우칠 수가 있다는 얘기지. 지도급에 있는 사람들, 특히 언론이 국민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거든. 언론이 자꾸 감성적으로 보도하면 국민이 감정에 치우칠 수 있다는 거야. 그러면 일이 잘되기 힘들어. 국민들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는 것이 중요해.”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순안비행장에서 만나는 장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 동안 몇십 차례에 걸쳐 정상회담을 희망해왔지만, 실제로 이루어진 건 처음이잖아. 그 동안의 모든 노력이 이룩되는 순간이었지. 정말 감격스러운 장면이었어. 한반도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남북기본합의서가 잘 지켜졌으면 정상회담이 훨씬 일찍 열릴 수도 있었다는 것이 남북문제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인 것 같습니다.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이 더 빨리 열렸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지. 하지만 정상회담이라는 것이 갑작스럽게 일석일조에 이루어지는 건 아니야. 남북간에 꾸준한 노력이 만들어낸 산물이지. 내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 총리회담을 여덟 번 했고,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들고 해서 정상회담도 금방 성사될 것 같았어. 그렇지만 여러 일들이 생겨서 못 했어. 김영삼 대통령 때 못한 아쉬움은 있어. 조금 늦었다고 보지만 지금이라도 만났다는 게 중요해. 그런 점에 보람도 느껴.”

노전대통령은 또다시 재임 시절을 떠올렸다. 88년 7·7선언과 91년 남북기본합의서의 의미를 강조했다. 노전대통령은 특히 이산가족의 상봉에 상당한 비중을 두었다. 노전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이 잘하고 있으니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도 했다.

―최근 남북관계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상호주의입니다. 남쪽이 비전향 장기수를 보내는데 북쪽은 납북자와 국군포로 문제에 소극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보십니까.

“함께 노력해야죠. 일방적으로 하는 것은 국민이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남북관계에는 양보가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계속 일방적으로 양보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젠 정상회담을 열었고 신뢰의 물꼬가 터졌으니까 북쪽에서도 뭔가 응분의 조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현재 북측은 내부에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 반면, 남측에서는 국가보안법 개폐논쟁, 주한미군 철수논쟁 등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나 주고 하나 받는 게 원칙입니다. 하지만 이북이 아직 그 단계에 못 들어가고 있어요. 같은 수준에 올라왔을 때는 하나 주고 하나 받는 상호주의 원칙이 바람직해. 하지만 북쪽은 아직 그런 수준이 못 되는 것 같아. 북쪽이 남쪽 수준으로 올라올 때까지는 둘 주고 하나 받거나, 셋 주고 하나 받아야지 어떻게 하겠어? 국민들이 그런 것도 이해해야 합니다.”

노전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김정일 위원장은 얼마 전 방북한 남측 언론사 사장단 앞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은 나라를 망친 사람”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견해를 밝혀주십시오.

“김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기 전에 전직 대통령들을 청와대로 초청했습니다. 김대통령이 그 동안의 경과를 설명하고 자문을 구하는 자리였습니다. 나는 과거에 남북관계를 다루면서 김정일이라는 인물을 나름대로 정리해두고 있었는데, 현재의 상황을 김정일이 어떻게 보고 있을 것인가에 대해 김대통령에게 얘기했습니다. ‘첫째, 김정일은 북한을 자기 체제로 완전히 구축했다.’ ‘둘째, 김정일은 어떠한 외부의 영향도 수용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셋째, 김정일은 실용주의 노선을 택했다.’ 그때 김대통령 옆에는 북한문제를 다루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는데 나는 그 사람들 앞에서 ‘김정일은 자기 체제를 확고히 하고 외부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실용주의적 인물’이라고 말했어. 그랬더니 그 사람들도 나하고 비슷한 말을 하더라구.”

“김정일은 실용주의적 인물”

―이번에 TV를 통해 김위원장을 직접 보신 소감은 어떻습니까.

“예전에는 김정일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잖아. 성격이 포악하다, 사생활이 문란하다…. 그것이 전혀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지만, 실제와 다르게 알려진 부분도 있었거든. 이번에 정상회담을 지켜보고 김대통령이 나중에 설명한 것을 참고하면 결과적으로 내가 판단한 것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어.”

―김정일 위원장은 최근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은 나라를 망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는데….

(이 대목에서 노대통령은 기자의 질문을 잘못 이해한 듯 놀라는 모습이었다.)

“김대통령이 뭐라 했다고?”

―김정일 위원장이 노태우, 김영삼 두 전직 대통령을 ‘나라를 망친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몰라. 그런 얘기는 처음 들었어.”

노전대통령의 얼굴색이 바뀌었다. 의식적으로 기자의 시선을 피해 테니스 경기에 집중했다. 옆에 앉아 있던 테니스 코치와 US오픈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노전대통령은 데이븐 포트와 윌리엄스 자매의 스타일을 비교하기도 했다. 더 이상 정치적인 질문을 던지기는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래서 잠시 샛길로 돌아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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