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영처럼 젊고 매력적인 여배우가 황신혜만큼의 나이가 되어 인터뷰를 할 때 흔히 하는 얘기가 있다. 젊은 시절에는 드라마 속의 역할과는 관계없이 자기가 어떻게 하면 더 예쁘게 나올 것인가에만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어느 정도 나이가 드니까 그제야 상대 배우와의 호흡도 생각하면서 자신의 배역에 몰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젊은 시절에는 ‘나 자신’을 제외하곤 모든 게 소품이었다는 고백인데 소위 말하는 ‘공주병적 기질’이다.
공주병 혹은 왕자병을 정신의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가치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이며, 한마디로 ‘우주의 중심이 나’라는 전제가 깔린 사고방식이다. 본능에 가까운 성향이긴 하지만 대체로 인격적으로 미성숙한 경우에 자주 발생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인이 되어서도, 아니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자기 중심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데 있다. 자기중심적 사고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의 부재’와 짝을 이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을 각기 다른 방법으로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김영삼과 김어준’이라는 인물 조합 자체를 음모론(?)의 시각에서 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전직 대통령을 감히 어디다가 비교하는가. 사람에게도 급이 있는데 여기에는 어떤 음모가 있을 것이다. TV 토론 프로그램 PD들이 가장 어려울 때가 출연자들이 ‘나는 누가 나오면 안 나간다’거나 ‘누구 이상은 나와야 나도 나간다’는 등으로 등급을 따질 때라고 한다. 그런 우리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필자의 피해의식도 나름대로 타당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이나 죽음 같은 자연의 현상이나 자기인식, 생(生)의 의미 같은 철학적 명제 앞에서 ‘사람의 급’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YS 독설, 병적인 자기 중심주의
김영삼과 김어준을 ‘자기인식’이라는 정신의학적 코드로 해석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생물학적 나이나 사회적 위치를 고려하지 않고 김영삼과 김어준이라는 남자를 ‘자기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은 급을 따지기 이전에 충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김영삼은 1993년 2월25일부터 1998년 2월24일까지 만 5년 동안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이었다. 법률적으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헌법기관이었고 현실적으로는 그동안 알게 모르게 우리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타인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온 YS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취임 첫해 90%대까지 치솟았던 YS의 인기는 임기 말에는 10% 이하로 떨어졌고, 퇴임 후 2년 6개월이 지난 현 시점에는 아예 바닥을 치고 있다. 근자에 YS를 담당하는 기자들이 사석에서 털어놓는 고민을 들어보면 그의 인기가 바닥이라는 게 더 실감이 난다. YS에 관한 기사를 쓰면 “제발 YS를 그만 봤으면 좋겠다”는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친다는 것이다. 심지어 “YS와 붙어먹는 기자 너도 돌대가리”라는 폭언도 퍼붓는단다. YS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그의 대변인 노릇을 하는 박종웅 의원의 육성으로도 어김없이 증명된다.
“내 홈페이지에 글이 많이 올라온다. 그런데 10건 중 9건은 욕이다. 심지어 YS를 왜 자꾸 따라다니느냐며 ‘둘이 호모냐’라는 욕까지 올라온다. 사람들이 YS를 ‘또라이’라고 하고 나를 ‘꼴통’이라고 하는 것 다 안다. 또 나를 대학도 안 나온 놈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도 다 안다.”
박의원은 YS에 대한 욕은 이제 정점을 지났으므로 앞으로는 좋아질 것이라고 전망한다. 누가 맞는지도 시간이 지나보면 알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한 네티즌은 YS의 막가파식 독설을 비난하며 “이젠 손명순여사가 나서야 한다”며 비아냥거린다. 레이건 대통령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미국 국민에게 공개한 낸시여사처럼 손여사가 YS에 대해 솔직히 국민에게 고백하고 모종의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다. 대단한 독설이지만 그게 YS에 대한 요즘 일반 시민들의 솔직하고 감정적인 반응인 듯하다.
어쩌면 뒷골목 술집에서 안주삼아 화제에 올릴 만한 얘기까지를 모두 거론하는 것은 ‘YS를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필자 나름의 고민 때문이다. 요즘은 YS에 대한 비난과 폄훼의 발언이 차고 넘친다. 자칫 YS를 향한 ‘입 뭇매’ 하나를 더 보태는데 그치지 않으려면 인식의 제로베이스가 필요하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바닥까지 내려가 YS를 지배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살펴보자는 말이다.
YS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자기중심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문제는 그 정도가 거의 병적이라는 데 있다. 그는 전형적으로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스캔들’식 사고를 한다. 내가 침묵하는 건 생각이 많아서 그런 거고, 네가 말이 없는 건 생각이 없어서 그렇다는 식이다.
올해 초 모든 역사를 자신 중심으로 재구성한 책이라고 평가받는 그의 회고록이 출간되었을 때 한 잡지에 실린 만평이 걸작이다. 비서관이 그에게 자서전에 대한 시중 여론이 ‘저질스럽기까지 하다’는 쪽이라고 전한다. 그랬더니 YS는 “그러게 내가 종이도 최고급으로 쓰고 표지에도 금박을 넣자고 했잖아”라며 흥분하고 있다. 이보다 더 절묘하고 적확하게 YS의 ‘내 멋대로’식 사고를 표현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YS의 엉뚱한 해석과 당당하고 진지한 발언은 만평가의 기발한 상상력을 뛰어 넘는다.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걸핏하면 그에게 전화를 걸어 “YS의 목소리를 듣는 게 내 인생의 낙”이라고 했단다. 물론 그의 말이다. 지난 5월 ‘신동아’인터뷰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비난하면서 “지금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대중이 독재자다 하는 내 말이 옳다고 생각할 거예요”라고 확신한다. 강력한 야당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그의 말도 예사롭지 않다.
“내가 야당 때는 참 무섭게 싸웠어요. 그래서 결국 박정희가 죽은 거예요. 나를 국회의원 제명 안했으면 박정희는 안 죽었죠.”
그러나 ‘내 멋대로’식 사고의 금메달감은 단연 김일성 사망원인에 관한 그의 진단이다. 김일성이 정상회담을 앞두고 갑자기 죽은 건 (자기처럼 기가 센) 사람과 회담할 준비에 과도하게 신경을 쏟다가 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한 까닭이라는 것이다.
이 정도면 듣고 있던 사람은 할 말을 완전히 잃게 된다. 그럴 때 기가 막힌 표정으로 YS를 쳐다보고 있으면 아마도 그는 ‘내 기에 질려 상대방의 얼굴이 파랗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라서가 아니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다.
통제력의 착각
심리학 용어 중에 ‘통제력의 착각’이라는 게 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세상에 대한 통제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만 착각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현상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은 과대 평가하고, 우연이나 통제 불가능한 요인으로 인한 것은 과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 현상은 때로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게 해서 자신의 정신건강을 지키는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지나치면 자기중심적 세상보기에 빠지게도 한다.
‘얼마전 한일전 축구 경기 때 내가 직접 잠실 운동장에 가서 관람을 했더니 우리나라가 1대 0으로 이겼다’ 라거나 ‘내가 아침에 아내와 심하게 말다툼을 하다가 지각을 했더니 오늘 우리 회사 주가가 곤두박질쳤다’ 따위의 생각들이 바로 그것이다. 특정한 상황이나 다른 사람의 말에 대해서 엉뚱한 해석을 일삼는 YS의 성향은 일차적으론 그러한 심리적 메커니즘에서 기인한다.
그를 보고 있노라면 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인물이나 특정 상황들이 아무런 개연성도 없이 주인공 중심으로 전개되는, 3류 작가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그렇다면 ‘감(感)의 정치인’이라거나 ‘정치 9단’이라는 수사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실상 YS가 자랑하는 ‘감의 정치’라는 건 다분히 ‘모 아니면 도’식의 의사결정 방식이다. 나름대로는 근거가 있겠지만 만능이 될 수는 없다. 야구 경기에서 감독이 히트앤드런 작전을 걸어서 적중하면 그 효과는 폭발적이다.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주자만 나가면 히트앤드런 작전을 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황산벌 싸움을 앞둔 계백 장군이 가족의 훗날을 걱정해 혈육의 목을 베는 역사적 장면의 한 귀퉁이에서 ‘혹시라도 이기면 어떻게 하려고 저러지?’라는 의문을 가져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YS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YS의 돌파력이나 파괴력이 남달라 보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는 자신이 설정한 목표에 대해서는 놀랄 정도의 집념과 확신을 가지고 밀어붙인다. 그러한 스타일은 그와 측근들이 즐겨 사용하는 ‘음모론’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이런 식이다. 오후에 비가 올 거라는 확실한 ‘감’을 가지고 우산을 준비해서 나갔는데 햇볕만 쨍쨍하다. 이런 때 YS의 정치적 감각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우산을 활짝 펴들면서 ‘나를 망신시키고 나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기 위해서 비가 올 것 같은 왜곡된 정보를 내게만 주었다’는 음모론을 외치는 것이다.
작년 5월 페인트계란 사건 때 보인 그의 순발력이 바로 그 예가 된다. 개인적인 망신으로 끝날 뻔(?)했던 일이었는데, 옷을 갈아입으러 자택으로 돌아가는 차안에서 측근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을 죽이려는 김대중 정권의 음모론을 제기한 것이다. 훗날 YS는 그 사건을 회고하면서 야당에도 문제가 있다고 진단한다. 민주주의에 의해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그 꼴을 당했는데도 야당이 한마디도 안 했다는 것이다.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던 시절 불퇴전의 민주투사로서 YS가 보여주었던 엄청난 파괴력은 다분히 그의 이런 특성에서 비롯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근자에 날개도 없이 추락하는 그의 행보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이 많다. YS 특유의 정치적 감각이 실종된 듯한 느낌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그것이 ‘거울보기(Mirroring)’에만 고착된 그의 심각한 정신상태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